69화 나비(3)
“우습군.”
나는 신문을 내려놓았다.
“여론전이라.”
“신문사에 돈을 주고 원하는 기사를 쓰게 한 모양입니다. 대리인을 통해서요.”
“그래, 그렇겠지.”
청 고위 황족들이 프랑스를 방문한다고 적힌 그 신문에는 이번 조약의 결과로 오는 사죄사와 별개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인 프랑스를 보고 배우기 위해 황족을 포함한 유학생들이 프랑스로 온다고 적혀 있었다.
프랑스인들의 국뽕을 자극하기 딱 좋은 내용이었다. 대고포대의 대 자도 안 적힌 건 물론이고.
“기정사실로 만들어놓는 거군.”
“어쩌시겠습니까?”
“묵살하는 건...... 어렵겠지.”
하여튼 세상에서 좆같은 짓은 기레기들이 다 한다.
기사의 무지성 복사 붙여넣기. 베끼기. 베낀 기사를 더 자극적이게 만들기.
오늘날 전 세계 언론의 실태다.
삼인성호라 하였다. 세 사람이 호랑이라 외치면 없던 호랑이도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즉, 프랑스 정부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이미 기정사실이 되는 참으로 뭐시기한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
“...... 생각보다 제법이라고 할까, 가짜뉴스로 언론전을 벌일 생각을 하다니.”
“어쩌시겠습니까? 전권대사에게 지시해서 청국 정부를 더 압박하라고 할까요?”
“됐어, 괜히 우리만 체면 까이는 일이다. 대신 거기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지.”
“대가라면......”
“북양함대를 러시아가 노린다지?”
“러시아 제국에는 순양함 7척, 프로펠러 슬루프 2척이 있습니다. 본래 일본제국이 도입했다가 노획당한 프랑스제 4천톤급 순양함 4척, 신건조된 러시아제 방호순양함 노빅, 오로라 2척, 지난 대전에서 생존한 방호순양함 스베를리나 1척, 지난 전쟁에서 노획한 영국제 슬루프 2척.”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거 말고는 모조리 영국 해군과 독일 해군과의 전투 끝에 심해로 쳐박혔다.
“이 때문에 현재 러시아 해군의 주력이 무장상선이 되었을 지경입니다. 아시다시피 재정부족과 기술부족으로 인해 종전 직후 세워진 건함계획은 몇 년째 종이 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러시아 제국이 극동의 무적함대에게 군침을 흘리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해군장관의 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북양함대는 그 규모만큼은 어지간한 열강의 식민지함대를 능가하니까. 지금 유럽에서 쓸 군함도 없는 러시아 입장에서는 그대로 가져다가 발트함대로 재편해버려도 이상하진 않겠지, 오래 써먹을 물건은 못 되더라도.”
“저희 측에서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러시아 제국의 계획이 바로 그겁니다. 당장 발트함대부터 노획함선을 써서라도 복구하겠다는 거죠, 기존에 있던 함선 9척에 북양함대를 통째로 더해서 발트함대를 재건하려는 게 러시아의 목적입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발트함대는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위하는 함대라는 현실적인 필요성이 중대한 함대일 뿐 아니라 표트르 대제 이래 이어져 내려온 상징성 때문에라도 최우선으로 재건할 수밖에 없다.
“러시아에 한 번 힘을 실어준다. 대고포대와 북양함대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해,”
대고포대를 무장해제하느냐, 북양함대를 빼앗기느냐.
상식적으로는 대고포대를 포기하는 게 낫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아니다. 북양함대가 열강들이 작정하고 끌고오는 본토함대에 비해서 싸움이 안 된다는 게 이미 확실히 증명되었으니까.
하지만 열강의 함대도 신형 화포로 무장한 해안요새를 상대하려면 피똥을 싸야 한다는 것도 동시에 증명되었다.
게다가 중국이 겉멋만 든 게 아니라 진짜 근대화를 목표로 하고 있어서 실리적인 외교를 한다면, 이미 잔 다르크급이 등장한 이상 10년 내로 단체로 고철이 될 가능성이 높은 군함들로 배상금을 상계하는 건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거기에 하나를 더하자면 영국과 러시아를 이간질할 수 있다. 물론 영국과 러시아는 원래 견원지간이지만, 나폴레옹 시절처럼 우리 프랑스가 위협적이라고 가정하면 언제든 다시 손을 잡을 수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고 보니 나도 나폴레옹이긴 한데.
물론 이걸 선택하면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먼저 그들의 자존심과 중화사상을 포기해야 한다. 북양함대를 포기한다는 것은 타국에 대한 군사력 투사 능력을 포기한다는 것이고, 동시에 양무운동이라는 자존심을 바닥에 내던지는 것이니까.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청나라 조정이 알아야 한다. 즉 그만큼 세계에 대해 알려고 해야 한다.
과연 이홍장과 공친왕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에 따라 우리가 청에 대해 내릴 판단도 아마 달라질 것이다.
“다음 안건이나 논의하지, 그 일은 잘 되어 가나?”
“그 일이라면...”
“그...... 장군참모 과정 말이네.”
“육군 내에 장교들이 입학하는 교육과정을 세우자는 일 말씀이시군요.”
프로이센에서는 장군참모, 내가 살던 시대 21세기 한국에서는 육군대학, 미국에서는 레븐워스 같은 장교들이 추가 교육을 받는 커리큘럼이 있다. 보통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장성을 달 수 있는 경우가 많고.
“건물은 다 올렸고, 교육과정이나 교수진도 말씀하신 대로 다 뽑았습니다. 조만간 1기 입학생들이 나올 겁니다.”
“황족과.... 몇몇 귀빈들에 대해서 특별입학을 허가하는 규정을 만들어두게, 타국 왕족이나 황족처럼,”
일종의 시현효과다.
그리고 타국의 왕족-대부분 아시아나 아프리카권일 거고, 표트르 대제 시절도 아닌데 어디 유럽 왕족이 자기 나라 놔두고 타국 사관학교에 입학하는 걸 상상하기는 어렵지만-이 우리 프랑스의 학교에서 배운다는 걸 강조해놓으면 국뽕을 채우는 효과도 제법 있을 거다. 실질적인 도움도 제법 될 거고.
사실 청나라 황족들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부랴부랴 준비한 거긴 한데, 그래도 아직 개교하지는 않았으니.....
***
“헉, 헉, 야, 숨찬다, 뭐가 이렇게 빨라?”
“누나는 운동 부족이야. 나 귀찮게 굴 시간에 운동을 더 해.”
“젠장, 내가 뭐하러 운동을 해.”
“시집가서 애만 낳으려고 해도 운동을 적당히 해야 애도 잘 낳지.”
군복을 차려입은 소년은 콧방귀를 뀌었다.
“뭐야, 나 갈 사람이다 이거야?”
“정식 결혼하려면 아직 좀 남기는 했지만 뭐, 상대가 나쁜 것도 아니잖아, 왕세자고, 나중에 왕 될 사람이라고.”
시시덕거리는 두 사람은 당연히 남매였다.
“그나저나 좀 쉬었다 가자!”
“최대한 빨리 입학하려면 체력기준 맞춰야 해.”
“그 웃기지도 않는 콩 다미 아카데미(Grande Armée académie : 대육군학원)? 솔직히 아버지가 지은 이름이지만, 아버지는 진짜 작명솜씨가 형편없어,”
“직관적인 거지, 영국놈들 봐봐, 잔 다르크급을 그대로 부르기 불편하다고 세인트급으로 멋대로 바꿔 부른다면서?”
“그거야 자기들을 몇백 년 전에 코를 깨준 상대가 자기들 자랑인 왕립해군을 포세이돈 곁으로 보내줬다는 게 짜증나서 그렇겠지.”
“우리도 넬슨급이나 빅토리를 맘대로 이름을 바꿔버리지는 않았어, 아무튼 빨리 가자.”
“못 가! 갈 거면 업고 가!”
“푸.”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은 소년은 자리에 앉았다.
“아니, 솔직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고, 너. 니 나이가 몇인데?”
“콩다미 아카데미는 황족 기준으로는 입학연령에 제한이 없어, 그건 내가 불후의 기록을 세울 수 있다는 뜻이지.”
물론 추천입학으로 특별전형을 통해 입학하는 것이다, 콩다미 아카데미는 프랑스 제국의 현역 장교와 특별히 우수하다고 평가받은 사관생도들이 입학하는 곳이지만, 이 특별전형, 사실상 VVVVVIP들 전용으로 만들어진 특별전형은 문자 그대로 어떤 제한도 없다.
사실 명목상으로는 지나가던 거지 아이도, 아니면 프랑스 시골에서 포도농사를 짓는 장 노인도 프랑스 황제의 서명이 딸린 의회와 내각의 추천서만 받으면 입학이 가능하다. 그 추천서가 주로 프랑스 황태자를 비롯한 황족이나, 외국인들을 정치적 목적으로 입학시켜줄 때나 발급되는 물건이니 문제지.
“그리고 그게 뒷말이 안 나오려면 내가 프랑스 제국의 현역 장교가 아니라는 점 말고는 입학에 하등 하자가 없다는 걸 보여줘야지, 지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그럼, 시험 볼 거야?”
“추천서는 가져가겠지만 시험을 볼 거야, 아니, 그냥 보는 것도 아니지, 수석 입학해야지.”
“꿈도 크다, 야, 너보다 10년 20년 30년씩 더 산 사람들 사이에서 그게 쉬울 것 같아? 입학하는 아저씨들 평균 연령이 30대고 평균 계급이 소령이야.”
중령 대령도 들어가지만, 반대로 소위 중위 대위도 들어가고, 사관생도들 중에서도 극히 우수한 인물들도 같이 교육받는다.
“반대로 내 머리가 더 말랑말랑하지, 최근 들어 군사교리가 얼마나 급격하게 바뀌었는지 알잖아? 그리고 아버지가 이 시기에 괜히 아카데미를 만드셨겠어? 전쟁의 모양새가 변했으니 변한 전쟁에 적응 못하는 놈은 장성으로 안 올리겠다는 거 아냐, 있는 장성이야 싹 노친네니까 다음 전쟁 때쯤에는 죄다 옷 벗었을 거고. 근데 그게 쉽겠어? 입학 시험부터 자기가 배운 거랑 천지차이로 다른 걸 낼 텐데?”
“그래서 니가 더 유리하시다?”
“당연한 말씀.”
“거......”
근거 없는 자신감도 그 정도면 병이다, 그 소리를 해주려 했다.
물론 해내기만 하면 아마 젊은 장교들을 확실하게 휘어잡을 수 있을 거다, 그러나 누나 입장에서는 동생이 멋모르는 치기로 인해 개망신이나 당하는 게 아닌가 싶긴 했다.
황태자는 아직 어리니 극복 못 할 개망신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흑역사 하나는 거하게 찍어야 할 거다.
“누나도 한번 지원이나 해보지 그래? 어차피 생도 전부 개인실 쓰는데.”
“뭐?”
“그거 알아? 의외로 입학자격에 성별이랑 연령 제한 없다?”
“연령이야 들어가는 인간들이 워낙 다양한 인간군상이고 정치적 이유로 넣어줘야 할 인간 많으니 일부러 뺀 건데 성별 제한도 없다고?”
“뭐 일부러 뺀 건지 모르고 안 넣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이런 생각 해 봤어? 어느 지원자가 서류만 봤을 때는 몰랐는데 입학허가를 내주고 생도 명단에 올리고 나서 보니 여자였다더라.....”
“지랄을 한다, 입학을 하려면 아버지에게 추천장 받지 않는 이상 최소한 사관학교에 입학해야 하는데 그 전에 걸러지지.”
“킥, 나도 알아, 그냥 망상인 거, 그래도 이 꽃다운 청춘을 땀내나는 사내놈들과 아저씨들 사이에서 보내게 된다고 생각하니 아쉬워서.”
“듣자 듣자 하니 아주 지랄이 풍년이구나. 그래서 나더러 아빠 졸라서 추천서 받아내라고? 그냥 니가 안 가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고 생각 안 하니?”
“아니? 청춘을 그 땀내 사이에서 보내더라도 아버지가 정립한 새로운 시대의 전장이 어떤 모습인지는 궁금해 죽을 지경이거든, 그리고 아버지가 고안했다는 각종 신무기도 그렇고.”
“그래서 기어코 가시겠다?”
“전장 나가는 것보다는 훨씬 긍정적인 방향이지, 애초에 유럽 남자 왕족들 중에 사관학교 안 나온 사람이 몇이나 되냐?”
“딴에야 맞는 말이긴 하네.”
물론 사관학교와 아카데미는 존재 목적이 다르지만, 둘 다 군사학교라는 점에서는 얼핏 보면 비슷비슷해보일 터였다.
사실 지나가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그랑제꼴 산하 사관학교와 아카데미의 차이를 물으면 아마 대답 못 할 거다.
“그리고 솔직히 머리 자르고 그.... 지방덩어리만 어떻게 하면 남자라고 해도 믿을걸? 이름은 앨런 어때?”
“너 진짜 죽고 싶냐.”
뭐, 그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