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나비(2)
백악관, 미합중국.
먼 훗날에는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의 사령탑으로써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위치가 되고, 그 대가로 온갖 할리우드 영화에서 불타고 터져나가고 쓸려나가고 박살나는 운명을 맞이하는 순백의 건물, 백악관에서는 조용한 회의가 열렸다.
“국무장관.”
“예, 대통령 각하.”
미합중국의 대통령 스티븐 그로버 클리블랜드(Stephen Grover Cleveland)의 인상은 더 구겨질 수 없을 만큼 구겨져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당장 얼마 전, 연방정부 보유금이 바닥나 공무원 월급도 못 줄 판이 되자 JP모건에 연방정부가 돈을 구걸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참이다. 거기에 중간선거도 대패했고, 경제는 좋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얼굴이 펴질 날이 없는 건 당연한 이야기다.
“프랑스에서 뭐라고 했답니까?”
“프랑스 제국은 만일 스페인이 미합중국과 전쟁을 할 경우, 미합중국 정부가 괌과 하와이 등 태평양 도서지역을 프랑스가 영토에 편입하는 것을 인정하고 지원해준다면 프랑스 역시 미합중국이 쿠바와 필리핀을 합병하는 것을 적극 지지하고 지원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번에는 우리에게 영국이랑 전쟁하라고 부추기더니, 이번에는 스페인과 전쟁하게 되면 전리품을 나눠달라고 하다니, 허, 양심이 있는 건지.”
클리블랜드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저 망할 놈의 하와이 여왕이 미국의 신경을 슬슬 긁는데도 미국이 확 하와이를 속령으로 삼아버리지 못하고 있는 게 프랑스가 대놓고 하와이에 입맛을 다시고 있어서였다.
“전문에는 없지만, 저희 측 비공식 커넥션에 따르면..... 프랑스는 만일 미합중국이 부정적으로 답할 경우, 스페인에 접촉해 괌을 비롯한 태평양 내 스페인 식민지를 받아내는 조건으로 쿠바 반군 진압에 한 손을 보태는 것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빌어먹을 놈들이 미합중국을 뭘로 아는 거야!”
미국은 이미 외교노선을 명확히 했다.
먼로 독트린.
우리는 유럽 대륙에 신경 끌 테니 너희들도 신대륙에서 꺼지라는 정중한 요청.
거기에 미국의 역사가 무엇인가? 동쪽에서 서쪽으로의 진출, 프런티어 정신이었다.
대륙은 다 정복했으니 이제 태평양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 첫걸음이 되어줘야 할 하와이에서 손 떼라고?
“프랑스와 전쟁을 해서 이길 가능성은 얼마나 되오?”
“대통령 각하!”
“가능성만 묻는 거요, 가능성만.”
“.... 제로입니다.”
“........ 그 정도로 불리하오?”
“프랑스 제국의 신형 함종, 잔 다르크급이 문제입니다. 일단 프랑스 해군이 보유한 잔 다르크급의 수와 미합중국이 보유한 전함의 수는 동수인데, 성능 차이는 압도적입니다. 단 다섯이서 그 왕립해군의 숨통을 끊은 함선들입니다. 미합중국은 프랑스 제국의 본토에 군을 보낼 수 없고, 이는 프랑스 제국도 마찬가지인 바, 해군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할 게 뻔한데 해군력에서 일방적으로 밀리는 이상 필패입니다.”
“제기랄.”
미국이 그간 땅을 넓혀온 수작은 별거 아니었다.
유럽열강이 사정이 어려운 틈을 타서 돈 주고 산다.
안 팔면? 전쟁해서 뺏는다.
그러면 전쟁해서 못 이길 상대면?
지금까지 미국의 행보는 ‘그러면 싸움을 안 건다’였다.
13개 식민지가 독립한 뒤, 미국은 루이지애나를 사들였다.
나폴레옹 1세가 관리 못 해서 팔아먹은 루이지애나를 사들이고, 멕시코에서는 텍사스를 돈 주고 사려고 했는데 안 파니까 전쟁해서 뺏엇다.
알래스카는 다시 러시아에서 돈 주고 샀다. 러시아는 알래스카를 도저히 유지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할 만 했다.
그리고 캐나다.
캐나다는 못 건드렸다. 영국과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으니까.
물론 영국이 프랑스에게 박살난 뒤로 영국이 약화되자 해볼 만하지 않느냐는 여론이 조금씩 떠오르고 있었지만 주류는 아니었다.
아무튼 이건 절대 제국주의가 아니었다. 신대륙을 지배해야 하는 미합중국의 ‘자명한 운명’이었지.
그 둘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는 참으로 심오한 고찰이 필요한 일이지만, 요약하자면 행동의 주체가 미국이냐 아니냐라는 아주 중대하고 더 이상 명백할 수 없는 차이점이 있었다.
신대륙 바깥이면 자명한 운명은 적용되지 않지만, 자유와 민주주의를 바라는 현지인들의 자발적인 요청이 있다면 자유와 평등을 위해 미합중국은 그들의 국체를 떠맡는다는 무거운 백인의 짐을 질 수도 있었다.
미국은 절대 타국을 침략하지 않는다. 그런 야만적이고 비민주주의적인 행동은 저 구대륙의 열강들이나 하는 짓, 고결한 미합중국은 그저 현지인들의 민주적인 절차를 거친 자발적인 요청에 의해 백인의 짐을 지고 그들의 야만적인 습성을 버리게 하고 기독교와 문명의 이기로 그들을 교화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필요성에 따라 그들을 미합중국의 통치를 받는 속령으로 만들어줄 뿐이다.
그런데 그 프런티어 정신에 도전자가 나타났다.
문제는 도전자라기에는 좀..... 좀 많이 강하다. 유럽 최강의 열강으로 등극한 국가가 상대니까.
“프랑스 제국과 불필요한 마찰을 빚기보다는 일단 본국은 스페인과 전쟁을 할 의사가 없다는 걸 요지로 하고, 프랑스 제국과 하와이 왕국 간의 일은 미합중국과는 관계없는 일이라는 걸 요지로 한 답변을 돌려주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태평양 진출은 망한 거 같은데 필리핀이랑 쿠바라도 챙겨가자는 궁색한 제안이었다.
“필리핀은 동남아시아의 주요 거점입니다. 특히 태국과 네덜란드 식민지 등에도 접근이 가능하기에 무역하기 좋은 지점이기는 합니다.”
태평양 진출 막혔더라도 꿩 대신 닭으로 태국이라도 따먹으러 갈 수 있고 청에도 진출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소리였다.
결국,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깝게도 미합중국은 프랑스랑 전쟁을 할 능력은 없었다.... 적어도 전 세계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미국 국민들과 그 수뇌부도 딱히 예외는 아니었기에, 그들의 반응은 예견된 것이었다.
“미합중국은 스페인과 전쟁을 할 의사는 없지만, 프랑스 제국의 제안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 정도면 되겠지.”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적어도 프랑스가 단번에 적대화될 정도만 아니면 된다.
그리고 프랑스의 태평양 진출 야욕이 명백하다는 걸 확인했으니, 그거면 충분했다.
태평양 진출이 막힌 미국이 이제 어디로 진출할지는 자기 후임자들이 머리 깨지도록 고민할 일이었다. 당장 그의 남은 임기 중에는 쿠바 문제도 해결하기 벅차니까.
***
베이징에서의 협상은 예상보다 훨씬, 훨씬 오래 끌렸다.
이유는 청나라가 완강하게 저항해서가 아니라, 8개 열강들이 자기들끼리 이권을 나눠먹는 문제 때문에 한정된 이권을 놓고 씨름을 해서였다.
청나라가 반항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반항하려 해도 할 수단이 없었을 뿐.
보고 싶어도 눈이 없어 볼 수 없다.
걷고 싶어도 다리가 없어 걸을 수 없다.
지키고 싶지만 능력이 없어 지킬 수 없다.
그것은 청의 관료들에게 진한 좌절감을 안겨주기에는 충분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청의 로비가 웬만큼 먹혀들어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친왕과 함께 분골쇄신하는 인물이 하나 더 있었다.
***
“노서아인들이 북양함대를 넘기라 하고 있소.”
“하...... 하하하....”
그 말에 허탈한 웃음을 흘린 이홍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북양함대를 내놓으라고 말입니까.”
물론 러시아는 북양함대를 내놓으면 그만큼 배상금을 상계해주겠다 제안했다.
그러나 평생토록 북양함대를 양성한 당사자인 이홍장의 입장에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공친왕은 수심이 짙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대는 어찌 생각하오. 노서아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 주장하지 않았소.”
그 러시아가 뜬금없이 만주를 비롯한 청의 영토를 군사력으로 위협해 대거 뜯어가는 바람에 책임을 물어 실각당한 입장에서 악질적인 조롱으로 들릴 법도 했지만, 공친왕과 이홍장 모두 그런 조롱을 하거나 받아치기에는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 있었다.
그저 눈물만 흐를 뿐이었다.
“노서아는 함대를 넘기면 자신들이 받아야 할 배상금을 크게 줄여주겠노라 제안했소.”
물론 그렇다고 해도 청국 정부의 수 년치 총수입은 가뿐히 넘지만.
“이 모든 것이 저의 죄입니다......”
이홍장은 끝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서태후, 그 자가 그토록 어리석고 욕심이 많았을 줄은 나도 알지 못했으니, 그대가 죄가 있다면 나 역시 죄인이네.”
꺾이고 싶어도 그들은 꺾여서는 안 되었다.
공친왕과 이홍장, 그 둘은 대청을 지지하는 마지막 기둥이었다.
그들의 실패는 단지 그들만의 실패가 아닌, 청의 최후와 파멸을 의미했다.
“북양함대를 넘겨 대청을 구할 수 있다면 넘겨줘도 상관없습니다. 허나 북양함대를 가져간다면, 저들의 다음 요구를 해왔을 때 막을 방도가 없습니다.”
“.... 황상께서 은자 3천만 냥을 내탕금에서 내어주셨네.”
공친왕은 나직이 말했다.
“그 돈으로 저 양이들을 어떻게.. 매수라도 해볼 수는 없겠는가.”
“...... 현재 서역에서 제일로 꼽는 나라는 불란서로 알고 있습니다. 영길리와 보로서는 불란서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였다지요, 오지리와 노서아가 불란서의 우방이라 하나 불란서에 비해서는 크게 손색이 있으며, 미리견과 서반아는 그보다 못하니, 불란서의 비위를 맞춘다면...”
“불란서에 공작을 시도하기는 했네, 문제는 불란서의 대사도 그들의 황제가 명확히 답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잠시 이야기를 들은 이홍장은 한숨을 쉬었다.
“...... 그렇게만 하셨다면 불란서와 영길리의 국력 차가 생각한 것보다도 크거나, 다른 흉계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애초에 불란서가 실익도 없는 황족의 방문만으로 영길리와 분쟁을 일으켜줄 것이라는 것 자체가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입니다.”
청 내의 이권이라면 모를까, 황족의 방문 정도로 들어오는 실익 없이 괜히 분쟁거리를 늘릴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명확히 답을 주지 않았다면, 진짜 둘을 저울질할만할 정도로 영길리가 쇠하여 망하기 직전이거나, 아니면 이걸 이용해서 협상장에서 청나라의 뒤통수를 후리고 배상금을 대폭 늘려버리든 이권을 뜯어내든 할 궁리를 하고 있든가.
아니면 둘 다거나.
“..... 하지만 불란서인들이 위신과 체면을 중시하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니, 다른 방법을 쓰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더 내어줄 것도 없네, 정말 단 하나도 없어.”
이권이고 뭐고 이미 뼛속까지 털린 판이다. 내줄 곳이 어디가 있고, 팔아먹을 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이미 책정된 배상금만 해도 청의 국고는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니 내탕금과 서태후의 비자금을 다 털어내도 채울 수 있을까 우려될 지경이다. 물론 서태후가 가지고 있는 창고들이 하나하나가 최소 1억 냥은 들어있다는 정보가 사실이라면 다 찾아낸다는 전제하에 어떻게든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배상금 낸 뒤에도 청이란 나라가 돌아갈지가 의문이었다.
청을 ATM으로 보기 시작한 열강들은 앞으로도 더 많은 걸 요구할 게 뻔했으니까.
사실 지금 배상금에 혈안이 된 건 특히 영국과 프로이센이었다.
당연히 청을 쥐어짜서 모은 돈으로 프랑스에게 배상금을 낼 생각이었다. 영국이든 독일이든 돈 나올 구멍이 크게 줄어든 것도 문제였다.
영국은 인도의 알짜배기를 날려먹었고 북독일 연방은 루르를 잃었기에 무식한 수준의 배상금이 나올 구멍이 별로 없었고, 특히 영국은 지브롤터가 담보로 잡힌 탓에 더 필사적이었다.
게다가 영국은 전쟁 기간 중 프랑스의 초인플레이션 테러의 후유증으로 아직도 골골거리는 판국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물론 그런 속사정까지 이홍장과 공친왕이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는 둘 모두 이해했다.
청의 생명줄이라도 붙여두려면, 프랑스가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