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의화단 운동(6)
공친왕은 침울한 얼굴로 열강들의 요구사항을 들었다.
의화단이 서양 열강과 민간인에 끼친 재산상의 피해, 인명피해에 대한 배상. 러시아의 경우 배상금의 일부를 대신해 북양함대의 함선들을 압류할 수 있다.
의화단에 관련된 모든 관료의 ‘납득 가능한 수준의’ 처벌. 의화단의 주모자에 대한 처벌.
이게 뭘 뜻하는지는 자명했다. 솜방망이로 넘어가면 열강이 개입하겠다는 의미였다.
의화단의 즉각적인 진압 및 고위급 황족의 책임 있는 사죄.
“여기서 사죄라 함은....?”
“문자 그대로 사죄입니다. 빌헬름 2세 폐하께서는 진노하셨고, 계승권에서 가까운 고위급 황족이 직접 베를린을 방문하여 사죄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당연하지만 베를린만 방문하고 끝낼 수는 없다. 일단 한 번 간 황족은 8개국을 다 돌면서 사죄를 하고 다녀야 하리라. 안 그러면 체면이 깎인 다른 7개국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8개국 군대의 베이징 주둔 허용, 대고포대를 포함해 베이징까지 가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해안포대의 철거. 청 내의 철도가 의화단에 의해 파괴된 전적이 있는 만큼 베이징과 산해관에 걸친 철도연변 주요 지역 12곳에 8개국의 철도경비대 주둔 허용.”
“외무부를 설치해 총리아문 대신 6부의 위에 둘 것. 이것이 우리의 요구사항입니다,”
공친왕은 사람이 너무 허탈하고 기가 막혀도 웃음이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무력감을 뼈저리게 느낄 때에도.
“시간을 주시오.”
“시간이라, 뭐, 좋습니다. 넉넉히 드리지요.”
대표로 나선 영길리의 외교관이 밖을 슥 보았다.
고의적인 제스쳐였다.
시간이 끌릴수록 연합군의 약탈로 입을 피해는 더 심해질 거라는 걸 알라는.
공친왕은 눈을 질끈 감았다.
황제는 서태후를 찔러버린 뒤 다시 자금성에 돌아오기는 했지만 심병을 호소하며 자리에 누워버렸고 서태후, 그 빌어먹을 마녀는 죽어버렸다, 황실의 큰 어른으로써 졸지에 청이라는 크지만 침몰 직전인 폐선의 선장직을 떠안게 된 공친왕은 질식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서태후 그 년을 죽인 건..... 통쾌하지만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 년에게 이 사태의 모든 책임을 지게 만들어야 했다.
공친왕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서태후 그 년의 전 재산을 몰수하면 배상금이 제법 나올까, 아니, 그 전에 저들을 설득해야 한다.’
공친왕은 적어도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할 줄은 아는 인물이었다.
배상과 처벌은 아마 타협이 불가능하겠지, 사죄 역시 몇 번이고 할 수 있다. 체면이 깎이는 정도로 제국이 망하지는 않으니까. 의화단 진압은 당연히 해야 하는 거였고.
외무부를 신설하는 것. 못할 거 없었다. 어차피 개혁의 필요성은 공친왕도 뼈저리게 느낀 바였으니,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서양의 직제를 따르는 것도 못 할 건 없었다.
하지만 해안포대의 철거, 열강군의 베이징 주둔, 철도경비대의 상설배치, 이 세 가지는 어떻게든 막도록 시도라도 해 봐야 했다.
‘대고포대의 철거를 원하는 건 아마 영길리겠지.’
영국은 대고포대에서 아편전쟁 당시 고생을 한 적이 있어서 대고포대의 철거를 제일 바랄 것이다. 그리고 타국도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영국이 원한다면 굳이 막으려 들지는 않았을 거고.
그래, 평소였다면 그랬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1년전쟁에서 영길리가 불란서의 군대에 문자 그대로 처참하게 참패해 수도가 불타고 여왕이 도망쳐야 했다는 이야기는 프랑스의 프로파간다를 통해 아시아에도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단숨에 전 세계를 선도하던 열강에서 2류로 굴러떨어진 상태라는 것도. 하나를 더하자면, 영길리와 보로서는 청에 철도를 깐 당사자들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 영길리를 꺾고 영길리보다 강하다는 게 증명된 불란서를 어떻게든 설득한다면 길이 있지는 않겠는가?
그게 바로 통불봉영(通佛封英 : 불란서와 통해 영길리를 막는다),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묘리일 터이나, 문제가 있었다.
청이 어떻게 불란서를 설득해서 영길리를 막게 한단 말인가.
불란서와 통해야 영길리를 막는데 불란서가 대청과의 거래를 영길리보다 좋아할 거라는 정보는 전혀 없었다. 물론 얼마 전에 전쟁까지 치른 나라가 사이가 좋을 리가 없기는 하지만.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시지요.”
곁에서 뭐라뭐라 이야기가 나왔지만, 공친왕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무거운 어께로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내관 하나가 헉헉대며 달려왔다.
“공친왕 전하, 폐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
“협상은 어찌 되었나?”
“저들의 무도한 요구를 명백히 거절할 힘이 없다는 게 한스러울 따름이옵니다. 폐하.”
한숨을 쉰 광서제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 그날, 진비가 겁간당했소.”
광서제의 말에 공친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진비는 광서제가 특히 아끼는 후궁이었다.
“전부.... 전부 소신의 죄이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한때 공친왕은 서태후와 야합해 서태후의 섭정 기간을 늘려버린 장본인이었으니까. 정작 그 자신도 서태후에게 밀려나며 그녀의 본성을 깨달은 뒤 그 일을 죽도록 후회했지만, 그때 분쟁을 각오하고서라도 서태후를 쫓아냈으면 이런 일까지 일어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이미 늦은 뒤다.
“죄를 청하는 소리나 들으려고 말한 것이 아니오, 나는.... 황제가 되어서 내 여자 하나 지키지 못했소, 내가 몇 번이고 말했는데, 지켜주겠노라고.”
“그래서 찌르셨습니까.”
“그 아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오, 궁녀가 진비가 끌려갔다고만 말했으니까.”
“소신께 명하셨다면.....”
“의미 없소, 나도 그 아이를 살아서 다시 볼 낮이 없고, 살아있지도 않을 거라 생각하오, 그저... 도저히....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어서 찔렀소, 그 마녀를.”
“폐하. 아직 희망이 없지는 않사옵니다, 방법은 지난하겠으나 저들의 요구를 줄일 방도가 없지는 않사옵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광서제에게 본인의 생각을 설명한 공친왕은 광서제의 희미한 미소를 보았다.
“쉽지 않을 거요, 불란서의 마음에 들 만한 뇌물을 내놓아야 할 테니까, 금은 정도로는 안 되겠지.”
“소신 역시 그것이 고민이옵니다.”
그러자 광서제는 입을 열었다.
“게 있느냐?”
“예, 폐하.”
“그들에게 들라 이르라.”
“예, 폐하.”
잠시 뒤, 드르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제서야 고개를 돌린 공친왕은 깜짝 놀랐다.
“저 자들은......”
“소개하오, 내 지낭인 강유위(康有爲), 양계초(梁啓超), 담사동(譚嗣同)이오.”
후일 변법파라 불릴 이들의 등장에 공친왕은 눈을 크게 떴다.
“저들을 소신에게 소개하시는 연유를 모르겠사옵니다.”
“저들과 국사를 논의하시오, 짐은...... 짐은...... 쉽지 않을 것 같구려.”
“폐하?”
“지쳤소, 너무.... 짐이 오래 살 것 같지도 않지만, 오래 산다고 해서 뭔가를 더 할 수 있으리란 생각도 들지 않소.”
마음이 꺾인 황제는 나직이 말했다.
“대청을 부탁하겠소.”
“폐하! 거두어 주십시오!”
놀란 공친왕은 펄쩍 뛰었지만, 광서제는 눈을 감았다.
“제 여자 하나 지키지 못한 이가 어찌 황제겠소, 아니, 황제를 넘어서 어찌 남아라 부를 수 있겠소. 하초에 양물 하나 달고 태어난 이로써..... 제 여자 하나 지키지 못했는데. 죽어서 진비를 어찌 다시 보아야 할지 모르겠소.”
“폐하, 통촉하여......”
“대청이 살아남으려면, 개혁이 필요하오, 저들은 이제 그대의 지낭이오,”
“신 역시 늙고 쓸모없는 노인에 불과합니다, 폐하께서 쾌차하시어 대청을 이끄셔야 합니다. 게다가 신은 조만간에 구라파로 직접 거동할 생각이었나이다.”
“구라파라, 그 이야기가 정말이었구려? 황족 중 한 사람을 보내어 구라파 각국을 돌며 삼배구고두를 하라고.”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그러하옵니다.”
“하하하하......... 아니 되오, 그대는 대청에 머물러야 하오.”
“폐하, 외람된 말씀이오나 한 가지 말씀을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말하라.”
“불란서는 그 근본이 본디 뽐내기를 좋아하며, 제 잘난 맛에 살고 자존심이 강하고 칭송받기를 좋아하는 족속이옵니다.”
황제와 공친왕 앞에 엎드린 사내는 말을 이었다.
“그러하니 기왕 황족을 보내야만 한다면, 황족 한 사람을 더 보내어 불란서에 머무르게 하소서, 그로써 불란서의 체면은 높아질 것이며, 불란서의 특명전권대사에게 이를 제안한다면 이와 교환하여 대고포대 정도는 유지할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대고포대를 굳이 유지해야 하는가? 대고포대는 불란서군에 맞서 단 몇 시간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들었노라.”
“폐하, 외람된 말씀이오나 대고포대는 그 포대의 화포가 노후하였고 병사들이 정예하지 못할 뿐, 그 자체만으로도 천혜의 요새이옵니다. 대고포대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을지언정 완전히 철거하면 후일 대청이 저들에게서 무기를 들여와도 새로 설치할 수 없어 곤란에 빠질 것이옵니다.”
“알겠노라.”
공친왕은 황제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늙은 몸, 차라리 머리를 팍팍 숙이고 체면 따위 내던지고 오욕을 짊어지고 다니다가 객사하겠노라는 각오로 배에 탈 각오를 하였건만, 황제 폐하께서 여전히 그를 필요로 하신다 말씀하시니 어찌 떠날 수 있겠는가.
그저 죽기로 버텨볼 뿐.
“그렇다면 누구를 보내야 하나이까, 순친왕을 보내야 하나이까? 아니면 숙친왕?”
“백림(베를린)에는 순친왕을, 불란서에는 숙친왕을 보내게, 숙친왕은 오래 머물러야 할 터이니 가족들도 함께 보내주도록 배려하라.”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그러면 소신은 즉시 불란서의 대사와 접촉하여 보겠나이다.”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짓이겨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로써 대청이 하루라도 더 살아갈 수 있다면.
그렇다면 공친왕은 기꺼이 몸을 내던질 수 있었다.
***
-탕! 타앙! 타앙! 타앙! 타앙! 타앙! 타앙!
일곱 발의 탄환을 모조리 쏘아낸 나는 권총을 내렸다.
“좋군?”
“마음에 들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라우닝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탄 자체는 센데 설계가 잘 돼서 그런지........ 손 대포라고 불러도 되겠군.”
나는 권총을 내려놓았다.
그때, 다른 사람들이 나타났다.
“음?”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상대를 보았다.
“무슨 일인가? 외무장관.”
“두 가지 소식이 있습니다, 먼저 아시아에서 전문이 날아왔습니다. 전권대사가 본인 선에서 결정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라며 훈령을 요청했습니다.”
“훈령? 특명전권대사는 문자 그대로 전권을 가진 건데 뭔 놈의 훈령.... 이게 뭐야?”
나는 전보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사죄사와 별개로 고위 황족을 프랑스로 가족과 함께 보내어 유학 겸 장기체류를 시킬 의향이 있으며, 이들을 어떻게 활용하든 프랑스의 자유, 그 대신 대고포대 건을 재고해 달라? 대고포대 건이면......”
“영국이 강력하게 주장한 사안입니다. 대고포대를 철거하는 것. 그들 입장에서는 아편전쟁에서 제법 고생한 상대이니 말입니다.”
“2시간 40분만에 박살난 그거?”
“뭐.... 그건 그렇습니다만 확실히 거슬리는 위치에 있긴 합니다.”
나는 전보를 반으로 접어 내려놓았다.
“어쩌시겠습니까?”
“누굴 보낸다고 했나? 전보에는 안 나와 있던데.”
“일단 사죄사로는 황제의 동생인 순친왕 재풍이 유력하며, 프랑스에 올 황족으로는 아이신기오로 산치.....? 선기?”
“직위는?”
“숙친왕입니다. 격 자체는 충분히 높습니다.”
“숙친왕 선기라.”
모르는 이름인데. 사실 내가 아는 청나라 말기의 유명인 이름이래봤자 공친왕 혁흔이랑 서태후 말고는 별로 없지만.
“받아주시겠습니까?”
“..... 생각 좀 해 보고. 이건 의회와도 이야기를 해 봐야 할 사안이네, 다른 하나는 뭐지?”
“쿠바에서 일이 생겼습니다.”
“뭐?”
거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