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의화단 운동(4)
자금성, 베이징.
“폐하, 피하셔야 합니다!”
부복한 신하들을 본 광서제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서태후를 바라보았다.
태감들도, 궁녀들도. 모두가 상황을 알고 있었다.
“어디로 피한다는 말이냐, 차라리 남아서 협상하는 것이...”
“폐하, 서안으로 가십시다.”
황제의 말을 가로채는 불경을 저지른 것은 당연히 서태후였다.
“서안에 잠시 몸을 피해서 군대를 모아 저 오랑캐들을 밀어내면 만사형통이 될 거요. 그러니.....”
광서제는 허탈하게 웃었다.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시안으로 가면 저들이 도망가는 걸 그대로 놔두겠는가?
그리고, 베이징을 비우면 저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감이 안 잡히는가? 자기들이 당한 것의 천 배 만 배로 보복할 터인데, 그건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인가?
물론 광서제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서태후는 그럴 인간이 아니라는 걸.
베이징 시민들이 학살당하든 말든 관심이나 가질 리가 있겠는가.
모르지도 않을 거다, 실권 없는 그에게도 톈진에서 일어나고 있는 보복행위는 아주 잘 알려지고 있었다. 남자들은 머릿가죽이 벗겨지고 살해당하고, 여자들은 겁간당하며, 모든 재물을 약탈당하고 있다.
특히 독일군이 미쳐 날뛰고 있었다, 이는 빌헬름 2세의 포고에 따른 것이었다. 자국민 살해 소식에 뚜껑이 열린 빌헬름 2세가 옛 훈족의 아틸라를 본받아 약탈과 파괴를 최대한 많이 저지르고 오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뭐, 독일군‘만’ 그런 것도 아니고 8개국이 다 그러고 있었지만, 당장 변발된 머리가죽을 벗겨서 무두질하고 다니는 건 프랑스 제국의 외인부대였고, 러시아 제국의 코사크 연대들도 본성을 드러내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겁탈하고 있었다.
그나마 덜한 건 미군이었다. 물론 ‘그나마’ 정도가 덜하다는 거지 이들이 약탈이나 학살을 안 저지르는 건 절대 아니었지만. 저들은 최소한 단속하려는 시도는 했다.
다른 말로는 수적 주력인 나머지 7개국은 단속하려는 시도도 안 했다는 의미였다.
물론 애초에 미국 헌병이 단속하든 안 하든 톈진 주민들에게는 큰 차이가 없었다. 그래도 기독교도로써 조계지 주민이 신분을 보장해준다거나 하면 조계지 내로 피난해 연합군의 보복을 피할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나머지는 얄짤없었다.
의화단 소속이거나 소속이 아니라도 동조했으면 가족까지 몰살당했고, 어느쪽에도 가담하지 않았다고 해도 잘못 걸리면 죽거나 차라리 죽음을 애걸하게 되었다.
그리고 저들은 지금 진격해오면서 눈에 띄는 모든 자들에게 같은 운명을 선사해주고 있었다.
“양이와의 협상은 결코 있을 수 없고, 천도하여 항전하면 결국 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온갖 망언을 늘어놓는 서태후를 본 광서제는 이를 악물었다.
‘변법이 성공했더라면.’
캉유웨이가 이끌고 있는 변법자강운동은 아직 제대로 진행되지도 않았다.
광서제의 뇌리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청불전쟁으로 인해 공친왕이 실각하지 않았다면, 변법이 충분히 성장한 뒤였다면.
그러면 뭔가 달랐을까.
“불란서의 강철 마차들이 총포를 모조리 튕겨내어 도저히 막을 수 없다 합니다. 철갑 안에서 각종 포를 쏴대는데 도저히 당할 수 없다 합니다!”
“철갑 마차면 말을 노리면 되지 않는가?”
“말이 없다 합니다!”
“그럼 마차가 아니라 자전차 아닌가.”
한숨을 쉰 광서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튼 서안으로 가야 합니다! 북경을 지키기는 글렀으니 서안으로........”
그때, 저 멀리에서 포성이 울렸다.
-콰앙!
“무슨 일이냐!”
답이 없었다.
“무슨 일이냐는 말이다!”
그 순간, 태감이 어전에 나타났다.
“폐하! 속히 몸을 피하시옵소서! 북경성 남서쪽에서 불란서군이 나타나 포를 쏘고 있나이다!”
“무슨 말이냐? 남서쪽? 동남쪽이 아니라?”
“남서쪽이 맞사옵니다! 수비대장이 확인한 바.......”
“..... 길이 막혔군.”
***
북경성 밖, 남서쪽.
-퐁! 퐁!
박격포탄이 포신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고는, 곧장 격발침에 충돌해서 추진되었다.
그리고 그 포탄은 북경성의 성벽을 넘어가기에는 충분했다.
“웃기는군, 어떻게 성벽을 저렇게 안 지킬 수가 있지? 그것도 전시상황에. 어떻게 생각하나, 조프르 대위?”
“열등한 놈들이라 어쩔 수 없나 보지요.”
막심 베이강 소령은 쌍안경으로 북경성의 성벽을 바라보았다.
“제법 크기는 하군, 게다가 야포가 없으니...... 정석대로 공략하려다가는 제법 고생하겠어.”
밤을 새워 가면서 달려온 프랑스군 제17자전거보병연대는 최대 화력이 기관총에 박격포 정도였다.
물론 청군이나 의화단을 상대로 그 이상의 화력을 쓸 일도 없지만, 그래도 정면으로 공성하기에는 우려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받은 명령은 북경을 포위하고 청의 정부 요인들이 도망 못 가게 잡아두라는 것 뿐, 북경을 공성하라는 게 아니었지.”
솔직히 말하자면 북경성이 좀 더 만만했으면 그냥 입성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1년 전쟁을 겪어본 장교들 중 야포나 전차 중 최소한 하나 없이 요새화 비슷한 거라도 되어 있는 적진을 향해 돌격을 명령할 멍청이는 없었다.
저놈들에게 기관총 한 정이라도 있다가는 좆되기 딱 좋으니까.
“후방 부대가 오기 전까지 적 방어지구를 하나라도 더 파괴한다, 박격포 포탄의 잔량에 유의하면서 공격하도록.”
포를 쏴대는 박격포병을 보면서 베이강 소령은 수염을 비비 꼬았다.
“러시아 코사크 놈들, 약올라 미치려고 하겠는데?”
“하하! 당연히 그렇겠죠!”
당연하지만, 프랑스군은 절대 연합군과 합의하고 출전한 게 아니었다. 프랑스군 1개 연대가 전쟁을 단기간에 종결시키기 위해 적 수뇌부의 탈출을 막을 목적으로 합의 없이 야반도주했다는 걸 알면 다른 국가, 특히 영국과 러시아는 길길이 뛰겠지만.....
‘우리가 알 바냐.’
전쟁이 늦게 끝나면 유리한 건 영국과 러시아다. 보급 문제를 신경 안 쓸 수가 없으니까 결국 러시아는 전후 지분을 더 주장할 수 있고, 영국은 러시아를 지원하고 있다.
반대로 말하자면 영국을 엿먹이려면 적 수뇌부를 참수해서 전쟁을 단번에 끝내버리면 된다는 거다.
러시아 역시 같이 엿을 먹겠지만, 애초에 프랑스군 수뇌부는 러시아에 대한 감정이라고 좋은 건 아니었다. 1년 전쟁에서 동맹이었다지만 솔직히 동맹치고는 똥만 푸짐하게 싸질러대다가 자연환경 빨로 영토를 되려 뜯기는 것만 막은 멍청이들 아닌가? 도와달라고 할 때 도와주기를 했나, 그래놓고 영토는 제일 많이 넓혔다.
러시아어에 양심이란 단어가 있긴 한가 싶은 러시아의 행태에 러시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난 건 당연한 귀결이었고, 군부는 더했다.
다시 말해, 이 행동의 결과로 러시아가 빅엿을 먹는다는 것이 영국에게 소극적으로나마 엿을 먹이는 것과 동의어라면 주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니, 애초에 보급선 가지고 장난치는 게 신실한 동맹국이 할 태도가 아니니 양심에 거리낄 건 더더욱 없었다, 되먹지 못한 짓 한 건 저쪽이 먼저 아닌가?
따라서 프랑스군은 한밤중에 한 개 연대가 약탈하러 가는 척 하고 장비와 보급물자를 싹 챙겨나간 뒤, 밤새워 달려가며 북경을 포위해버렸다.
프랑스군이 시치미를 떼는 바람에 사태를 뒤늦게 파악한 러시아군이 코사크 부대를 내보냈고, 이들이 열심히 프랑스군을 지원한다는 명목, 실제로는 발목을 잡기 위해 뒤쫓아오고 있었지만 그들은 모르는 일이었고, 애초에 이미 북경 외곽에 버티고 앉아 있는 한 이제 와서 따라잡아봤자 의미도 없었다.
“저놈들이 며칠 내에 백기를 들까?”
“전 40일 내외로 봅니다.”
“그래? 내기할까?”
“좋습니다, 전 구체적으로 41일, 소령님은 어디 거시겠습니까?”
“55일 가지. 내기로는 뭐 걸 건가?”
“음..... 저번에 저놈들에게서 약탈한 금덩어리가 하나 있는데 그거 어떻습니까?”
“좋네, 나는 음...... 저 안에서 내가 약탈한 것 중 제일 좋은 거 하나 자네가 고르게 해주겠네, 어떤가?”
“좋습니다. 야, 들었지? 니들이 증인이다!”
풀어진 분위기의 프랑스 연대원들은 웃고 떠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청이든 의화단이든 간에 눈곱만큼도 걱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관총 진지를 구축하고 들어앉았는데 탄약이 떨어지는 것 말고는 전혀 걱정할 게 없었다.
탄약이 없어도 그들은 총검으로 싸울 수 있었고, 음식은 약탈하면 그만,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자전거 타고 본대와 합류하면 그만이었다.
“대대장님, 저기 마을 몇 개 있던데 수금 좀 하고 오면 안 되겠습니까?”
탐욕으로 눈이 번들거리는 병사들이 킬킬거리자, 대대장은 간단히 답했다.
“조 짜서 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를 일이니 연대에서 한 번에 한 개 중대 병력 이상 내보내지 않겠다는 연대장님 특명이다. 알았어?”
“알겠습니다앗!”
“그리고.... 어이! 부대대장!”
“소령 막심 베이강!”
“오늘 나갈 애들 좀 한 개 소대 내외로 뽑아놔, 사흘마다 교대하게 조 짜놓고, 다른 대대에서도 애들 내보낼 거니까.”
“알겠습니다.”
“한 개 소대 통째로 내보내지 말고 각 소대에서 분대 단위로 차출해서 소대급 만들어서 내보내, 장교들도 적당히 붙이고, 괜히 소대 단위로 통째로 나갔다가 그 소대 병력이 없어서 우발상황에 대처 못하면 그것도 곤란하다.”
이건 단순한 약탈이 아니었다.
저들이 먼저 저질렀으니 그대로 갚아주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식 처벌이고, 철저히 합법적이고 오히려 정의로운 행동이며, 저 이교도들이 당하는 건 모두 당해도 싼 자업자득이다. 기독교도라면 모를까 이교도에게 배풀어줄 자비는 없다.
원정군 전체가 그렇게 믿고 있었던 관계로, 이곳, 청은 그들에게 있어 어떤 욕망이든 분출해도 상관없는 장소가 되어 있었다. 물론 조계지 등에 있는 중국 기독교도들은 예외였지만.
“중포병대나 기갑부대 중 하나만 도착해도 즉시 공성을 개시할 테니 다들 긴장 늦추지 말고, 정찰은 계속 돌도록, 알겠나?”
“예!”
***
공친왕 혁흔은 성벽 위에서 허탈하게 북경성 주위를 돌아다니는 수천에 달하는 프랑스군을 바라보았다.
자전거를 타고 북경성 주위를 달리면서 초계를 도는 프랑스군이 있는 한 피란을 시도한들 발각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어차피 협상은 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다만, 단 한 사람이 협상을 이를 악물고 거부하고 있으며, 동태후가 죽은 뒤로 그 자가 전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게 문제일 뿐.
무술정변이 원 역사와 달리 아직 일어나지 않아 변법파들도 남아 있고 황제도 아직 어느 정도 힘이 있지만, 실질적인 힘은 서태후에게 모조리 가 있다는 건 다를 게 없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저 불란서에게 패한 책임을 물어 실각한 상태였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차라리 성벽 아래로 몸을 던져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으나, 누군가는 황실을 보위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질긴 목숨을 잇고 있었다.
‘서양에서는 과거 성문을 파성추가 한 대 때리면 그 이후로 항복을 받아주지 않는 관습이 있었다 한다. 저들이 지금 공성을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보고에 따르면 양이들의 수는 수만, 저들은 그것의 10분의 1도 되지 않으니...... 증원이 오는 대로 공성을 시작할 것이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공친왕은 1년 전쟁 당시 단 몇 개 중대가 수십만을 능히 학살했다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청에게까지 들어오는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었으니까. 대부분 양측 언론의 프로파간다였고, 그저 불란서의 황제가 자신의 종조부 못지않게 크게 선전해 전쟁에서 이겼다는 정도밖에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공친왕은 지금은 불란서가 구라파 최강대국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되, 저들이 탄약만 넉넉하다면 북경의 사람 중 단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다 죽일 능력이 있다는 건 알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