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겨울, 끝(4)
추위가 뼛속까지 파고든다.
특수개조되어서 안정화된 어뢰의 손잡이를 잡고, 몸을 고정시킨 채 북해의 추위를 견딘다.
건식 잠수복은 딱딱하고 불편하다. 부족한 기술로 만든 것인지라 어쩔 수 없다.
스노클로 숨을 쉬고, 호흡기는 아직 기술이 좀 불안해서 어디까지나 비상용으로만 쓴다. 어뢰의 심도는 추가 부품에 의해서 낮게 유지되므로 괜찮다. 달도 없는 야간인지라 어뢰 항적 정도는 잘 안 보일 거고.
그러나 건식 잠수복을 입었음에도 보온성능이 아직 부족한 탓에 북해의 바닷물은 빠르게 그들의 체온을 앗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으면서 얼마나 갔을까. 어뢰의 속도가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도착했다.’
거리가 딱 들어맞았다. 이미 수영을 배운 적 있는 일반인이라도 충분히 부두까지 갈 만한 거리까지 접근한 대원들은 서로를 보았다.
어뢰 한 발당 두 명. 함선 한 척당 네 명.
총 20명의 자칼 수중폭파팀은 방수 가방에 들어 있는 폭탄과 뇌관을 확인했다.
물론 물에 젖는다고 작동을 못 하는 물건은 아니다. 무슨 흑색화약 시대도 아니고, 엄연히 어뢰와 기뢰라는 무기체계가 실용화된 시대다.
‘뇌관 설치 완료.’
수신호가 들어오자, 다른 대원 하나는 곧장 폭탄을 조립했다.
‘이쪽도 설치 완료. 타이머는 얼마로 하지?’
‘8시간.’
‘8시간, 확인.’
지금 시간은 새벽 1시, 내일 오전 9시에 폭탄이 터지게 된다.
출항을 한다면 바다 한가운데에서 터지고, 출항을 안 한다면 최소 착저할 터. 어느 쪽이든 간에 터지기만 한다면 한동안 이곳에 있는 장갑순양함들은 없어지거나, 없는 거나 다름없는 신세가 된다.
빌헬름스하펜을 보호하는 해안포대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 상륙작전을 한다거나 하는 건 불가능해도, 7천 톤급 장갑순양함 다섯 척, 도합 3만 5천톤에 달하는 함선들을 날려먹으면 독일 해군은 고자까진 아니어도 짝불알 신세를 면치 못한다.
구닥다리나 연안경비나 할 만한 물건 빼고 현대 해전에서 유의미한 전력이라고 할 만한 독일 해군 전력은 대충 보조함 주력함 합쳐 40척 정도, 그마저도 보불전쟁 패배 이후 열심히 건함한 게 그 정도인데, 그 가운데 주력함 셋이 지난 전투에서 격침당했고, 다시 주력함 다섯이 또 날아가면 독일 해군은 발트해 밖에서 작전할 생각은 접어야 한다.
‘폭탄 설치 완료.’
이제 들키지만 않으면 독일 해군은 끝이다.
몇 시간 뒤, 한창 오전 일과를 소화중이던 빌헬름스하펜 기지는 연쇄폭발과 함께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
베를린, 프로이센, 북독일 연방군 사령부.
“작센급 5척이 모조리 날아갔다고? 모조리?”
“그, 그렇습니다.”
“어떻게!”
“공병대의 보고에 따르면 용골 쪽, 흘수선 아래에서 대량의 폭약이 터졌다고....”
“그 폭약이 어떻게 설치된 건데!”
“...... 물 속에서 설치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잠수부를 투입해 해저를 수색해보면....”
“그러니까 그 폭약이 어떻게 흘수선 아래까지 가서 들러붙었냐고!”
유구무언.
모든 정황은 스파이가 들어와서 폭탄을 심어놓고 나갔다는 걸로 압축되고 있었다.
“당장 보안 책임자 전원 문책해! 그리고 놈들이 대체 어떻게 빌헬름스하펜에 드나들었는지도 파악하고! 그리고 그놈들이 폭탄이랑 같이 날아간 거 아니면 어딘가에 있을 거 아냐! 찾아내! 스파이를 찾아내라고!”
참모본부는 곧장 발칵 뒤집혔다.
얼마 뒤, 참모본부 뒤뜰에서 몇몇 사람이 만났다.
“슐리펜 총장님.”
“됐네, 이제는 총장도 아니지.”
러시아 전선은 끝장이다.
현장 지휘관인 소 몰트케도 그렇지만, 참모총장인 슐리펜도 자리를 유지하기는 글러먹었으리라.
“마켄젠, 가기 전에 자네 진급은 확정지어주고 가겠네, 후.... 빌어먹을.”
프로이센 기병의 복장을 한 참모에게 불을 빌린 슐리펜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 어쩔 건가? 자네들 전부.”
“........”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내가 가장 신뢰하는 이들이네, 그러니 말 한 번 해보게나. 힌덴부르크 대령, 자네부터.”
“....외람되오나 여기는 장소가 좀 그렇지 않습니까?”
“작센급이 작살난 소식도 못 들었나? 빌헬름스하펜이 그렇게 경비가 약한 기지도 아닌데 뚫렸네, 프랑스 제국의 첩보전 능력이 예상보다 뛰어나다는 증거지.”
“상대는 프랑스 제국입니까?”
“그런 짓을 할 만한 능력을 가진 나라는 몇 안 되니까. 아무튼 간에 회의실도 안심할 수는 없네, 오히려 이런 탁 트인 곳이 누군가가 엿듣기 어려운 곳이지, 땅굴을 파놓은 게 아닌 이상.”
슐리펜의 말에 납득한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령은 입을 열었다.
“먼저 동부전선에 있는 병력을 퇴각시키는 게 중요합니다. 몰트케 장군이 해임되었으니 뷜로 장군 정도는 가야 하지 않을지.....”
“뷜로는 라인란트에서 프랑스군을 막기 바쁘지 않던가, 내 생각이지만 아마 린커 장군이 후임으로 가게 될 것 같더군. 아니면 클루크일지도, 내 후임은 팔켄하우젠(Ludwig von Falkenhausen) 장군일 가능성이 높네만.....”
슐리펜은 슬쩍 자신의 부관을 보았다.
“젝트, 자네는 어쩔 건가? 자네 평가면 충분히 팔켄하우젠 장군도 자네를 부관으로 쓰기를 주저하지 않을 걸세.”
“전......”
슐리펜은 곧장 말했다.
“딱히 압력주는 건 아니네, 그냥 물어보는 거지, 솔직히 이제 한직으로 쫓겨날 작자 따라오고 싶다는 게 미친놈이지! 하하하, 천천히 생각해보게나.”
“.... 알겠습니다.”
“보직 문제는 차치하고, 저희가 당면해 있는 문제는.......”
“방법이 있겠나?”
담배를 비벼 끈 슐리펜은 탁 내뱉었다.
“협상을 해야지.”
“협상입니까.”
“물론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이기는 하지만, 더 싸워서 얻을 이득이 없네.”
참호를 길게 파고 관료제를 총동원해 마지막 한 줌의 식량, 한 발의 탄환까지 알뜰하게 쓰면서 저항할 수는 있을 거다.
그렇게 저항해서 무엇이 남느냐가 문제지만.
가장 목소리가 클 수밖에 없는 프랑스 제국의 의지가 프로이센의 멸망에 있는 것만 아니라면, 협상을 하는 것이 옳다.
***
“폐하, 이미 한계입니다.”
모든 전선에서의 총체적 패배.
그나마 선전하던 동부전선에서조차 겨울이 닥치고, 너덜너덜해진 용맹한 제국의 군대는 패잔병 신세가 되었다.
서부전선에서는 감히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의 이름을 붙인 프랑스 제국의 신병기들이 꾸역꾸역 몰려오고 있었고, 모든 동맹국들은 패망했거나, 패망 직전에 놓여 있었다.
“.....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모두에게 연락을 넣게, 협상으로 전쟁을 끝내자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늦어버리기 전에.
***
스위스, 인터라켄.
“크, 여기가 진짜 최고란 말이지.”
나는 스위스의 공기를 마시면서 행복감에 젖었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마음만 같으면 별장 하나 지어놓고 싶다.”
“그 정도입니까?”
“공기는 맑고, 조용하고, 경치도 죽여주고, 문자 그대로 아무런 소음 없이 의자에 몸을 묻고 책이나 읽을 수 있는 곳 아닌가? 물론 파리의 시끌벅적한 소음도 좋지, 시끌벅적한 것도 나름의 정취가 있고, 그런데 늙어서 아무 간섭 안 받고 지내기에는 이런 동네가 딱 좋을 것 같다.”
진심이었다.
‘전생에도 딱 한 번 와 봤었는데 진짜.... 좋았지.’
경치야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도 좋은 곳 많지만, 이렇게 조용한 곳은 드물었으니까.
굳이 하고많은 장소 중에 그리 크지도 않은 마을인 이곳을 회담장으로 잡은 건 솔직히 말하자면 내 사심이 좀 많이 들어가 있었다.
아니, 뭐, 인상깊었던 여행지 다시 오고싶어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 딱히 하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시끄러운 것도 싫진 않았지만, 고요한 게 정말 좋지.’
속으로 생각하며, 나는 몇 가지를 확인했다.
“빌헬름 2세는?”
“나흘 전 도착했답니다.”
“루돌프는?”
“어제 왔습니다. 영국과 네덜란드 대표단도요.”
“니콜라이 2세는?”
“오늘 도착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됐군.”
아무튼 이번 협정의 주인공은 우리이니만큼 좀 유세를 부려도 된다. 느릿느릿 가는 것도 그 일환이라고 할 수 있지.
얼마 뒤, 나는 회담장으로 마련된 건물에 도달했다.
***
“프랑스 제국의 요구사항은 사전에 공지한 것에서 변하지 않았소.”
프로이센에서 자를란트 할양, 라인란트는 프랑스가 독립보장을 하는 공국으로 독립. 독일을 도와 참전했던 벨기에의 왈롱 지역은 프랑스로 편입.
북독일 연방은 프랑스 제국에 20년간 배상금 50억 프랑을 지급할 것.
이탈리아 왕국은 프랑스 제국에 사르데냐를 할양할 것.
그리고 식민지 조정.
프랑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면 프랑스의 식민지는 전부 태평양 방면에 집중될 터였다.
뉴질랜드, 사모아, 타히티, 케롤라인 제도, 사이판,
그리고 장기적으로 침발라놓고 있는 영토는 스페인령이라 이번 회담장에서 못 뜯어낸 괌과 아직은 독립국인 하와이 왕국, 타이완, 기타 태평양의 군소 제도들.
짧고 간단하게 말해서 큰 거 하나 대신 태평양의 수많은 섬들을 장악해서 완성될 태평양 패권이 프랑스가 요구하는 것이었다.
물론 영국 본토를 인질로 잡은 입장에서 인도라든가 하는 지역을 더 요구할 수는 있었다. 뒷감당이 안 된다는 판단 하에 포기했을 뿐.
프랑스의 해군력에는 사실 아직도 제법 거품이 끼어 있었다. 사실상 잔 다르크급 5척이 프랑스 해군력의 몇 할을 차지하는 기형적인 형태였기에, 이는 본토 방어와 영국 본토 공격에서는 맹활약했을지언정 머릿수가 필요한 식민지 유지에는 최악의 형태였다.
게다가 프랑스의 인구는 현재 극심한 정체기를 맞고 있었다.
원 역사에서 1870년부터 1910년까지 프랑스는 인구가 고작 26만 명밖에 늘지 않았다. 그리고 1910년과 1950년의 인구는 '같았다'.
물론 영국 본토의 인구가 프랑스의 인구보다 조금 적긴 하지만, 조만간 이마저도 추월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프랑스는 인구성장률이 하락하고 있었고 영국은 상승하고 있었으니까.
한 마디로 뒷감당 절대, 절대로 못 하기에 프랑스는 영토 요구 등은 단념해야 했다. 뒷감당 못 하는 영토를 먹으면 그건 프랑스가 아니라 프로이센 아닌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한 가지를 제외한 모든 환경을 이탈리아 통일이 제창되기 전으로 돌려놓고, 사보이의 피에몬테를 영토로 편입할 것입니다.”
가장 공업화가 잘 되어 있는 지역인 피에몬테, 그리고 이탈리아 통일이 제창되기 전이라 함은 베니스를 비롯한 북이탈리아 지역 상당수도 같이 영토로 흡수하고, 중부와 남부 이탈리아도 전부 괴뢰화하겠다는 소리다. 그게 한때 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였으니.
이탈리아 대표단이 여기 있었다면 길길이 뛰었겠지만 그들은 여기 없었다.
이탈리아는 이미 망한 거나 다름없었고, 사실상 오스트리아가 요구한 건 국제적 승인에 가까웠으니.
“러시아 제국은 발칸과 아나톨리아,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발루치스탄.......”
양심이 터지다 못해 니들 배때지가 안 터질까 진심으로 우려되는 지역들이 줄줄이 나열되었다.
“.......에 대한 특별한 지위를 공인받고자 하오.”
특별한 지위.
쉽게 말해 조만간 집어삼킬 동네라는 뜻.
“네덜란드 왕국은 왈롱을 제외한 벨기에의 나머지 지역에 대한 역사적 점유를 근거로 이들을 병합하고자 합니다.”
“바이에른 왕국은 바덴 대공국, 그리고 뷔르텐베르크 왕국과 함께 남독일 연방을 결성할 것입니다.”
남독일 연방.
북독일 연방에 대항하는 3개 국가의 연맹.
당연히 그 뒷배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일 수밖에 없었다.
목표야 당연히 프로이센의 독일 통일 견제고. 사실상 프랑스의 요구였다.
그리고, 영국과 독일은 이 조항들을 거부할 입장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