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겨울, 끝(1)
러시아 제국의 목표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다양한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첫째로 모든 슬라브인들의 통합, 발칸을 몽땅 먹어버리고 전슬라브의 황제라는 칭호를 차르의 정식 칭호에 추가하겠다는 것까지는 어떻게 가능할지 모른다.
물론 정치적 이유로 역시 슬라브인인 체코슬로바키아가 빠졌고, 이로 인해 이중제국과의 분쟁의 씨앗을 남겨두었다는 것도 있지만 그건 잠재적인 문제고,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발칸 하나만으로 러시아 제국의 행정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거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조선과 일본을 먹어치우려 한다. 물론 명목은 동군연합으로써 다스리겠다는 거지만, 조선과 일본에서 그걸 뭐라고 받아들일까를 생각하면 자살골이었다.
물론 그걸 신경썼다면 애초에 쿡 찌르면 뱃가죽이 터질 정도로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겠지만.
시베리아 횡단철도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마당에 조선의 인구만 해도 우크라이나인과 맞먹는, 제국 내 제2민족의 지위를 겨룰 만한 민족이었고, 일본은 더한 판국이다.
당연히 제국 군사력의 대부분이 극동에 묶일 수밖에 없는 판국에, 북독일 연방의 총력을 기울인 공세를 당해 죽 밀려버렸다.
“폴란드인들이 프로이센에 호응해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폐하.”
“병력의 소집과 편성은 어떻게 되고 있는가?”
“제국의 신민들이 소집에 응하고 있사오나, 그 속도가 과히 느립니다.”
철도.
철도망이 부실하다.
군을 소집하려고 해도 그 소집된 병력이 집결하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
“독일의 공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노리는 것이 분명하오나, 그 속도가 늦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규모 공세를 당할 경우 안전을 장담하기 어려우니 모스크바로 거동하시는 것이 어떠한지......”
“무슨 소리! 우리 군부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지키지 못할 거란 이야기요?”
“현실을 보자는 이야기입니다! 지난 발트 전선에서의 패배로 인해 저들이 에스토니아를 통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무너진다면, 아니, 무너지지 않더라도 위협이라도 당하면 최악의 경우 전쟁에서 다 이겨놓고 패전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조만간 겨울입니다. 겨울이 닥치면 저들도 나폴레옹 신세가 될 것입니다. 차라리 전 병력을 후퇴시켜 저들을 굶주리게 하심이 어떻습니까?”
“그건 우리 제국에게도 큰 피해가 되지 않는가.”
“하지만 현재 전황을 객관적으로 보자면 군부가 정면대결로 프로이센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더러 쓸모없는 식충이들이라고 한 거요?”
“거, 그런 말 한 번도 한 적 없는데 왜 그러시구려? 혹시 찔리시오?”
“뭐가 어째? 결투다!”
“그만!”
니콜라이 2세는 결국 참다 못해 한 마디 일갈을 해서 그들 모두를 닥치게 만들었다.
“지금 이렇게 싸울 때가 아니지 않은가!”
“.... 폐하, 지금이라도 단독협상을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 정도 피해면 프랑스도 이해해 줄 것입니다.”
“목표를 사실상 다 달성해놓고 협상을 하자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그럼 당장 달려오는 적들의 예봉을 한 번이라도 꺾어 놓으시오! 그러면 내 실수를 인정하리다!”
“지금은 도로가 진흙탕으로 변할 때입니다, 폐하, 저들은 겨울이 오면 결국 철군할 터이니 그저 시간만 벌 수 있다면 족합니다. 겨울까지만 기다리심이....”
입을 다물고 있던 니콜라이 2세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적들이 나르바, 혹은 벨리키노보고로드 중 하나를 위협한다면, 그때는 피난하겠소, 하지만 그 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을 것이오.”
***
“지금 전쟁을 멈춰야 합니다.”
노구를 이끌고 빌헬름 2세를 찾아온 비스마르크는 창자를 토해내듯 읍소했다.
“폐하, 소신이 들은 바로는, 이번 공세는 러시아 제국을 전열에서 확실하게 탈락시키기 위하여 행해졌다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멈춰야 합니다. 지금 공세를 멈추고 러시아와 협상해야 합니다!”
“비스마르크. 그대의 말대로라면 지금까지 점령한 영토를 전부 토해내란 말인가?”
빌헬름 2세는 고개를 저었다.
“안 되지, 아니 될 일이야, 발칸은 그렇다쳐도 발트 연안과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캅카스 지역은 제국의 강역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정도의 대승을 거두었는데....”
“폐하!”
미친 짓이다. 비스마르크는 냉정하게 평가했다.
빌헬름 2세가 요구한 지역들을 실질적으로 다 점령하지도 못한 건 둘째쳐도 그럴 경우 러시아는 결사 항전할 거고, 겨울이 코앞인데 그렇게 되면 동방에 있는 병력들은 죄다 나폴레옹의 몰락의 전철을 밟을 뿐이다.
“나폴레옹 1세의 길을 진정 뒤따르고자 하십니까.”
“이기면 그만이네, 이기면! 지금 퇴각하면 이 영토를 점령하는 데 몇 배의 희생을 필요로 할지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폐하, 동방 영토를 유지할 수는 있습니까?”
“유지 못할 게 뭔가?”
“동방 영토를 지키기 위해 얼마의 군대가 더 필요합니까, 그리고 그만한 군대를 충당할 곳이 서부전선 외에 있었습니까? 프랑스의 공세는 어떻게 막아내실 생각입니까.”
“.........”
“지금이라도 러시아와 단독강화한 뒤에 병력을 빼내서 서부전선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물쭈물하다가는 전군이 얼어죽을 거란 말입니다!”
비스마르크는 군무에 밝지 못하지만, 한 가지는 알고 있었다.
러시아와 전쟁을 한다면, 그리고 그 전쟁을 러시아 땅에 기어들어가서 하려고 하면. 무조건 겨울 되기 전에 끝내야 한다는 것을.
러시아의 동장군에게 군대의 대부분을 허망하게 헌납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
이탈리아 전선은 파멸했다.
방어선이 한 번 무너지자, 이탈리아 왕국은 방어선을 도저히 유지하지 못했다.
애초에 국가적 역량부터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약한 판이었다. 거기에 프랑스군이 방어선을 강타해 큰 피해를 입자 순식간에 병력들이 줄줄이 무너져내리고, 결국 전멸에 준하는 피해를 입어야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상실했던 베네치아를 되찾고 마침내 로마에 입성하는 쾌거를 이루어냈고, 이미 이탈리아의 전열 이탈은 그 시점에서 확정되었다.
대영제국의 전선도 끝장났다.
프랑스군은 이미 기능을 반쯤 상실했던 지브롤터를 공격해 유럽 내 영국의 마지막 거점을 무너트렸다. 점령당한 영국 본토 내에서 의용군이 맞서싸우고 있었지만 이들을 상대하는 아일랜드인들은 더한 폭압으로 응수했다.
아일랜드 독립군은 프랑스군이 런던을 제외한 브리튼 섬 전 지역에서 철수하자 즉각 포고했다.
-아군 한 명이 죽을 때마다 영국인 100명이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
그리고 이를 증명했다. 리버풀에서 아일랜드군 보급창에 폭탄 테러가 벌어져 아일랜드 독립군 26명이 즉사하자 즉각 맨체스터와 버밍엄의 아일랜드군은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아무나 잡아다가 2600명을 채운 뒤 광장 한복판에서 모조리 총살했다.
“이게 무슨 미친 짓인가!”
즉각 영국 주둔 프랑스군 사령관이 더블린까지 쫓아가서 길길이 뛰었지만, 아일랜드 독립군의 장교 한 명이 답했다.
“당신들은 당신의 형제자매들이 굶어죽어가고, 뼈에 가죽만 남은 채로 식량을 구걸하다가 영국인들의 개머리판과 군화에 짓밣히고, 한 줌도 되지 않는 빵부스러기를 구하기 위해 어머니가, 누이가, 딸이 수치와 모멸 속에 몸을 팔아야 하는 경험을 해 본 적 없으시겠지, 우리는 해 봤소, 우리 중 그런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자들이 없지.”
영국에 붙어먹은 이들은 우리가 영국인들보다 먼저 죽였으니까. 그렇게 말한 아일랜드인 장교는 거의 멱살을 잡다시피 하면서 외쳤다.
“그러니, 똑똑히 말해 보시오, 우리가 그렇게 죽어간 수많은 동포들의 원한을 피로 달래서는 안 된다고 우리 눈을 똑똑히 보면서 말해 보라고!”
프랑스군 사령관은 할 말을 잃었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뭐라 하든 좋소, 하지만 영국인들도, 당신들도 똑똑히 알아두시오, 우리는 아직 참고 있다는 걸.”
“이게 참는 거라고 했소?”
“적어도 우리 사람이 죽거나 다쳐야 총을 쏘잖소, 마음만 같아서는 런던 시내에 불을 싸지르고 도망나오는 놈들을 기관총으로 갈겨버리고 싶은 심정인데 말이지.”
“지금 진짜 영국인들과 사생결단을 낼 작정이오?”
“사생결단 좋지, 오히려 바라는 바요.”
영국인들을 더 많이 죽일 수 있지 않겠소?
그렇게 말한 아일랜드군 사령관의 눈에는 광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프랑스군 사령관은 결국 소득 없이 저 미치광이들을 무장시킨 상부의 선택을 탓하면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한편 캐나다로 피신한 영국 정부는 프랑스 해군이 태평양에서 날뛰는 것도 저지하지 못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인 채 협상을 요청할 시점을 조율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라스푸티차가 닥쳐오고, 동부전선에서 싸우던 프로이센군은 그대로 진흙 늪에 빠져서 모든 작전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프랑스군이 기갑부대를 앞세워 라인강까지 진격하는 것을 목표로 대대적인 공세를 가해왔고, 라인란트 지역에서 벌어진 프랑스군과 프로이센군의 결전은 수개월 동안이나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겨울이 도래했다.
***
동부전선,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군 주둔지.
몰트케는 묵묵히 보고를 들었다.
“현재 보급품이 극도로 부족합니다. 식량은 필요량의 5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탄약은 탄피가 젖어서 사용되지 못하는 것이 절반입니다. 게다가 보급품 대부분이 동프로이센에 묶여 있습니다.”
그동안 라스푸티차로 인해 길이 진창이 된 데다 러시아의 처참한 교통망 때문에 프로이센군은 장기인 철도망의 활용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동상자 보고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어제부로 동상자가 3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다음 주면 6만으로 증가할 것 같습니다.”
“포병대에서 들어온 보고에 따르면 포신 내에 얼음이 달라붙어서 유폭을 일으켰답니다. 소총과 권총 역시 추위 때문에 방아쇠를 당길 수조차 없습니다.”
“예상보다 러시아군의 방어가 단단합니다. 전방에 있는 러시아군은.... 약 30만에 달하는 걸로 추정됩니다.”
그것도 최소 수치였다. 물론 급하게 징병한 탓에 충분한 훈련도와 무장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밭에서 이반을 캐내는 러시아의 위엄은 그 수를 다섯 배, 여섯 배로 늘리고도 남았다.
정규군이 아무리 다 동방에 가 있다고 해도 그야말로 끝없는 물량으로 밀려오는 러시아군, 거기에 라스푸티차와 동장군의 대공세까지 이어지자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시기의 악몽이 닥쳐오는 걸 모두가 느껴야 했다.
“....... 후퇴해야 합니다. 장군님, 나폴레옹 꼴이 나지 않으려면....”
몰트케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 후퇴하면 후일을 기약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베를린에.... 카이저께 보낼 전문을 작성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