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공세(4)
북독일 연방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건 세 살 난 아이도 알 만한 일이었다.
서부전선에서 주력군 대부분이 몰살당했다. 그리고 동맹국들은 죄다 본토가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바르샤바 함락!>
<발칸을 짓밟던 러시아군이 폴란드에서 쫓겨나다!>
“바르샤바를 지키고 있던 러시아군은 전멸을 면치 못했다. 그들이 어떤 항쟁을 벌이든 간에 그들은 독일 민족의 승리라는 결말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우크라이나든 벨라루스든 캅카스든 결국 독일 민족에 의해 정복되리라! 나폴레옹조차 해내지 못한 러시아의 정복은 게르만 민족의 손에 이루어지리라!”
“지크 하일!”
“지크 하일!”
바르샤바가 함락된 뒤 민스크와 키예프를 향해 수백만 대군이 밀고 들어가고 있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함락도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모두가 의식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으니.
이번 공세를 위해 그나마 살아남은 정규 정예병들을 모조리 차출해, 서부전선에는 급하게 징집한 예비군들밖에 없다는 점.
물론 참호전에서는 그 폐혜가 상대적으로 적다. 신병이든 노병이든 간에 참호전에서는 결국 소모품이니까.
그리고 다른 문제는, 프랑스 제국이 참호선을 돌파하기 위해 신무기를 꺼내들었다는 것.
1893년 7월 25일, 프랑스 대육군과 네덜란드 육군이 모든 전선에서 공세로 전환했다.
강철의 기수들과 함께.
***
-콰앙!
-씨이잉! 콰앙!
-콰콰쾅!
포탄들이 떨어진다.
아니, 쏟아진다.
수천, 수만 발의 포탄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장마 속의 빗방울 하나하나가 포탄이라도 된 것처럼 미치도록 쏟아져내렸다.
그 가운데에는 가스탄도 포함되어 있었다. 프랑스군은 네덜란드 전선에서 독일군이 독가스를 사용한 것을 명분으로 전 부대에 화학무기 사용을 사단장 이상급의 지휘관 재량하에 무제한적으로 허가했다.
그 결과, 최루탄과 구토유발제, 독가스를 실은 독가스탄은 쏟아져내리고 있는 전체 포탄의 3분의 1에 달했다.
포탄이 참호선에 쏟아지고, 가스가 스멀스멀 퍼져오자 병사들은 다급히 방독면을 착용했다. 구토유발제와 최루탄 등으로 인해 작용제에 노출되는 병사들도, 방독면을 제때 쓰지 못한 병사들도 제법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 모두 이제 적응이 되어 있었다.
적응하지 못한 이들은 다 죽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어찌 보면 아이러니한 자연선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한 독일군 병사가 피켈하우베를 감싼 손을 덜덜 떨면서 말했다.
“저, 중사님.”
“뭐야.”
“이상한 소리 들리지 않습니까?”
“끽해야 그 망할 놈의 군가든 아니면......”
아니면?
순간, 참호에 있던 이들이 침묵에 잠겼다.
쇳소리.
끼익거리는 소리.
덜덜거리는 소리.
“엔진 소리 같습니다만......?”
예전에 벤츠에서 일해본 적 있다는 병사 한 명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엔진?”
“예, 그...... 그 큼직한 엔진..... 그게 뭐더라?”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이에도 그 소리는 점점 커졌다.
백린연막탄이 뿌린 흰 연무를 뚫고, 희미한 실루엣이 보였다.
“쏘, 쏩니까?”
“사격 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대가 먼저 답해주었다.
포격으로.
-콰아앙!
폭음이 울렸다.
제일 먼저 소음을 들었던 병사는 똑똑히 보았다. 그 실루엣의 측방에서 섬광이 비친 것을.
즉 저놈의 옆구리에 대포가 달려있다는.......
-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
기관총 소리가 미친 듯이 울리면서 픽픽 먼지를 피워올렸다.
미처 제때 몸을 숨기지 못한 병사들 몇이 그대로 유명을 달리했다.
-탕! 탕탕!
-타타타타타타타타타!
곧장 총성이 울렸다. 맥심 기관총과 마우저 소총들이 탄환을 퍼부었지만 당연히 그 강철 괴물의 장갑을 뚫을 수 없었다.
와지끈, 와지끈.
그런 소리를 내면서 윤형철조망을 뭉개버리고, 대인지뢰의 폭발쯤이야 무시하고, 참호를 타 넘으려 한다.
“도.. 도망쳐!”
그 순간 총성이 울렸다. 자리에서 벗어나 도망치려던 병사를 본보기 삼아 권총으로 쏴버린 장교가 악을 썼다.
“도망치면 살 수 있을 것 같나? 적전 도주는 군법으로 무조건 총살이다! 자리를 지켜! 참호에 걸리면 그때 놈들을 노린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한 대책이었기에 그들은 자리를 지켰다.
참호가 제법 넓은데 걸리겠지, 진흙에 빠져서 기어올라가지 못하겠지.
아니, 걸려야 한다. 걸리지 않으면 저들은 기관총으로 자신들을 여유있게 학살하리라.
사실 걸리더라도 기관총 진지 역할은 할 수 있는 저 쇳덩이는 참호 한가운데 솟아난 기관총 진지로써 그들을 잡기 위해 달려드는 병사들의 피를 증원이 올 때까지는 충분히 빨아마실 능력이 있지만, 일단 발이 묶이면 기회는 있다. 그렇게 믿는 게 편했다.
그게 아니면 그들에겐 정말 죽음뿐이었으니까.
-끼이익, 끼이익, 끼이익, 끼이익.
천천히 기어오던 쇳덩이는 그 머리를 참호선 위로 들이밀었다.
참호선 내로 들어온 쇳덩이가 멈췄다.
안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약간 연기도 나는 듯 했다.
“걸렸다!”
“지금이 기회다! 돌..... 컥!”
물론, 멈춰버렸다고 해도 감히 보병들이 범접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모든 방향에서 다가오는 적들을 기관총으로 학살한 쇳덩이는 계속해서 총질을 했다.
문제라면, 그 쇳덩이가 그들 하나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끼이익! 끼익!
무한궤도 굴러가는 소리가 나고, 또 다른 전차가 참호선에 몸을 들이밀었다. 이번에는 걸리지 않고 제대로 넘어갔다.
원래 어지간히 깊고 넓은 참호가 아니라면 그들은 걸리지 않도록 설계되었다. 선두 전차의 불운은 그냥 엔진이 과부하된 것뿐이었다. 회수해서 엔진과 기어를 수리하면, 아니, 응급조치만 해도 다시 움직일 수는 있으리라.
그 뒤에는 또 다른 종류의 차량이 나타났다.
구형에 차체가 굴러가는 것을 방지하고 방향 전환용으로 달아놓은 바퀴가 있고, 장갑은 없는 거나 다름없는 대신 기관총을 탑재하고 자동차용 엔진을 달아 구동하는 소형 경장갑 정찰 차량이었다.
사실 애초에 기관총 사격을 견딜 수도 없는 정찰용의 물건이었지만, 머릿수 부족을 그렇게라도 메우기 위해 엔진 달린 건 일단 투입하고 보라는 명령에 따라 일선에 투입되었다.
다행히 조종수가 알아서 잘 다른 전차들의 뒤에 숨어다니면서 표적이 되는 일을 피했기에 망정이지, 맥심 기관총 사격을 받았으면 장갑이라고 해 봤자 몇 밀리미터밖에 안 되는 정찰차량은 구멍이 숭숭 뚫려 벌집 신세나 되었으리라.
그런 식으로 한 대, 두 대, 다섯 대, 일곱 대, 열두 대.
샤를마뉴 대제의 이름이 붙은 신무기, 전차들이 전선을 가득 메웠다.
이 한 번의 공세를 위해 프랑스군은 조병창의 모든 인원이 잠도 안 자 가면서 조립한 전차들을 프로토타입까지 모조리 불출해서 전선에 배치했다.
떨어지는 신뢰성은 숫자로 메운다는 전략을 세운 프랑스군은 종류를 불문하고 수백 기에 달하는 전차들을 일거에 전선에 투입했다.
백여 대에 달하는 전차들은 해로를 통해 네덜란드 방면으로 넘어가 네덜란드와 합을 맞추어 공세에 나서 적의 후방을 분쇄했다, 프랑스군 역시 전차들을 앞세워 참호선을 돌파하고 자전거사단들을 투입해 적의 후방을 유린했고, 벨기에 포켓에 갇혀있던 벨기에와 독일군은 만신창이가 되어 이리저리 분단된 상태로 포위되고 말았다
벨기에 다음은 라인란트와 자를란트였다. 프랑스군의 공세는 이곳에서도 이어졌고, 요새화의 진척도는 훨씬 높았던 만큼 전차와 병력의 손실이 컸지만, 혈전 끝에 북독일 연방 자를란트 전선군은 궤멸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북독일 연방은 벨기에와 자를란트에서 얻은 전훈을 따라 라인란트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고, 급조한 원시적인 대전차지뢰를 준비하고, 전차가 지나가지 못하도록 넓고 깊게 참호를 파는 한편 경야포를 직사하는 방식으로 전차를 상대하기 시작했고, 이는 제법 효과를 거두었다.
그 결과, 프랑스 대육군의 공세는 라인란트를 점령하기 전에 공세종말점에 도달했고, 거기서 진격을 멈춰야 했다.
***
1893년 10월 31일, 파리 총참모부.
“보고하도록.”
“벨기에 방면의 공세는 총체적 승리였습니다. 현재 극소수의 잔존 적 병력들은 사실상 편제가 붕괴된 채 아군에게 포위되어 있는 상태이며, 네덜란드군과 연계에 성공했습니다. 다만....”
“다만?”
“투입된 전차 대부분을 상실했습니다, 네덜란드 방면에서 공세했던 전차들은 생존 차량이 없고, 벨기에에서는 90% 이상의 전차가 유기, 자폭, 격파 등으로 손실되었습니다.”
고장으로 인해 유기된 전차는 회수해서 수리하면 된다지만 그 비율이 너무 크다. 게다가 수리 자체도 쉬운 게 아니니, 벨기에 방면의 기갑전력은 전멸로 판정해도 좋을 듯 했다.
“자를란트-라인란트 공세는?”
“제가 보고드리겠습니다.”
40대의 장성치고는 젊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자를란트는 완전 점령했지만, 자를란트를 점령하고 라인란트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보유한 전차들을 전량 상실했습니다. 벨기에에서 살아남은 차량들과 신규 생산분, 유기된 장비 가운데 수리가 완료된 것부터 우선 전선에 배치할 것을 요청했지만 아직 일선 부대가 이를 수령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포슈 장군, 한 가지 묻겠네.”
나는 자리에 앉아서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벨기에는 우리가 손에 넣었고, 사르데냐, 자를란트도 마찬가지지, 그러면 아군이 내년 5월 전에 라인란트를 점령할 수 있나?”
“내년 5월....입니까?”
“그래.”
지금은 10월.
러시아에서는 라스푸티차가 시작될 시기다.
즉,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를 막론하고 독일군의 진격은 정체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
그리고 11월 중후반이 되면 어떻게 라스푸티차가 멈추지만, 그 다음에는 나폴레옹 1세를 패퇴시킨 러시아의 악명높은 동장군이 기다린다.
그리고 다시 얼음이 녹는 봄이 되면? 아주 잠깐의 휴지기 후에 3월 중순부터 4월 말까지 라스푸티차가 다시 찾아온다.
이거 뚫고 공세 지속할 수 있으면 인정해줘야지.
“러시아는 라스푸티차와 겨울 기간 동안 병력을 재정비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최소한 저들에 의해 모스크바가 함락되거나 한 것도 아니니, 병력을 재정비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고 봐야지.”
나는 패를 탁탁 옮겼다.
“그 기간 동안 동부전선은 소강 상태가 될 거다, 게다가 상당수의 예비병력을 동쪽에 박아놔야 하니 프로이센의 병력 운용도 자유롭지 못하게 될 거고, 프로이센 입장에서는 굉장히 생소한 상황이니 상당한 혼란이 빚어질 거다. 게다가 동부전선의 병력을 쉽게 빼지도 못할 테지.”
“그 틈을 노리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덤으로 러시아가 본격적인 반격에 나서기 전에 전황을 확고하게 뒤집는다.”
제대로 싸우지도 않던 것들이 어디서 막타를 경우없게 날름 하려고 들어? 죽을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