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공세(3)
북해. 유럽.
“전단장님, 이제 슬슬 보급이 한계입니다.”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던 전단장은 답했다.
“선단 하나, 하나만 더 습격하고 철수하도록 하지.”
지금까지 북해는 왕립해군의 공간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프랑스군이 북해에서는 거의 활동하지 않는 탓이었다. 사실 북해에 접해 있는 영해도 네덜란드 때문에 없다시피 하기는 했지만. 진짜 문제는 복원 안정성이 낮은 잔 다르크급이 북해에서 활동하지 못하는 탓이었다.
어쨌든 간에 프랑스 해군은 도버해협과 지중해 등지에서만 제한적으로 활동했다. 지브롤터 기지가 포격으로 쑥밭이 되었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들려오지만, 오히려 북해에서는 안전했다.
그러나 당연하지만 수송선단은 북해를 돌아다녔다. 물론 프랑스의 수송선단은 북해를 경유하지 않으니 죄다 네덜란드, 혹은 러시아의 수송선이었다.
왕립해군에게 있어 통상파괴를 하라고 판을 깔아주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 일단 스코틀랜드가 아일랜드군에게 넘어간 게 크다. 안정적인 보급기지를 영영 상실한 상황이니까.
그리고 왕립해군 역시 슬슬 손실이 커져가는 차였다. 몇몇 전대는 겁을 상실하고 영국해협 이남까지 내려가서 프랑스 함대를 습격했다가 잔 다르크급에게 남김없이 전멸당하기도 했다.
“아마 이번에 철수하면 한동안은 공격전을 벌이지 못할 거다.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지.”
“제독님, 선도함 견시가 수송선단을 확인했답니다.”
“규모는?”
“소규모입니다, 10척 정도? 호위함 포함해서입니다.”
“호위함 포함 10척이라.”
“대형함은 없습니다. 수송선 3척, 무장상선 3척, 그리고 방호순양함보다 작은 호위함 4척입니다. 국기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 정도는 케이크 한 조각 먹는 것보다 쉬운 상대였다.
“저놈들이 아마 마지막이겠지, 석탄수송선도 있었나?”
“너무 거리가 멀어서 확인하지는 못한 모양입니다만.....”
“호위함들은 격침시키고 석탄수송선이 있다면 그 석탄을 뺏어 써야겠군, 캐나다로 가려면 연료 여분은 넉넉한 게 좋겠지.”
지금도 가고도 조금 석탄 여유분이 남을 정도기는 하지만, 그래도 연료는 넉넉하면 좋다.
“함장, 귀항 전 마지막 전투가 될 거라고 수병들에게 전하게, 이번 전투만 끝나면 철수할 테니 마지막까지 깔끔하게 해 보자고 말이네.”
“알겠습니다, 전단장님.”
***
“적함 확인! 방호 순양함 4척에 기함으로 보이는 장갑순양함 1척! 왕립해군입니다!”
“제기랄.”
“전대장님, 명령을.....”
“후퇴한다! 보일러실에게 최대한 압력 높이라고 해! 탈출한다!”
당연한 소리였다. 배수량부터가 상대가 안 되는 판이었다.
적 기함의 배수량은 전대의 4척을 모두 합쳐도 그 3배를 가볍게 넘는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전대장님, 알비레오(abireo: 백조자리 베타별이자 쌍성)에서 깃발 신호입니다! 보일러에서 이상 발생! 배관 파열! 부상자 발생”
“뭐?”
“데네브(Deneb : 백조자리 알파성, 천진사라는 이명도 가지고 있음) 함에서 수기 신호입니다, 본 함이 알비레오의 예인을 시도하겠음!”
“집어치......”
당장 집어치우고 도망갈 생각부터 하라고 말하려 했으나, 순간 전대장은 주저했다.
알비레오와 데네브, 기에나흐, 이 세 척의 수송선에는 암스테르담으로 직행해야 하는 제법 중요한 장비가 실려 있다고 알고 있었다. 정확한 내용물은 기밀이지만.
그럼 데네브는 그냥 당장 도망치게 하고 다른 무장상선을 이용해 예인시켜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알비레오, 데네브, 기에나흐는 모두 상당한 출력을 가지고 있다.
한 마디로 고장난 알비레오를 예인하라고 시키려면 데네브나 기에나흐가 제일 낫다는 것이다.
“함장, 사격 준비, 알비레오에는........”
퇴함을 명령해야 하나.
알비레오, 데네브, 기에나흐, 백조자리의 세 별의 이름을 임시로 부여받은 수송선에 대해서는 전대 전체에 특별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들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호위할 것.
그러나 만일 이게 불가능하고, 적의 기습으로 인해 이 수송선들이 나포될 위험이 있다면.
공격해서 격침시킬 것.
이를 위해서는 수송선들의 승무원들이 퇴함했든 퇴함하지 않았든 간에 상관없었다. 필요하다면, 이 세 척의 수송선에게 공격을 가해 승무원 전체와 함께 수장시켜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사실 퇴함을 하나 안 하나 상관없었다. 당장 함대가 쫓아오기 전에 도망가야 하는 영국인들이 저들을 구호해주지도 않을 거고, 그들도 영국의 추격을 받는 와중에 퇴함하는 승조원들을 데려갈 여유도 없다.
퇴함을 한다 해도 대부분의 승조원들은 북해 한가운데에서 얼어죽게 되리라.
“밀라디에게 신호 보내.”
“뭐라고 합니까?”
“최대한 데네브를 지원하고, 필요하다면 해야 할 일을 하라고. 헤이그로 직행해라.”
“...........”
“아토스, 포르토스, 아라미스에게 통신, 전투 준비.”
전대장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 생애 가장 멍청한 결정이 되겠지.’
“우리가 시간을 끈다.”
***
“적함 4척! 고속으로 접근 중! 전투기가 올랐습니다!”
“뭐?”
당황한 목소리가 함교에서 터져나왔다.
“저놈들 뭔 배짱으로......”
-콰앙!
포성이 울리고 포탄이 날아들었다.
함선마다 4문씩 달린 107mm 포가 불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대응사격해!”
“발포!”
장갑순양함에 장착된 23.4cm 단장포들이 불을 뿜었지만, 한참 먼 곳에 물기둥을 세웠다.
“빗나갔습니다!”
“젠장, 저거 뭐가 이렇게 빨라!”
“적함 선회 중! 어뢰 투탄!”
“저건 그냥 호위함이 아닙니다! 프랑스 해군의 신종 함급입니다!”
함선마다 3연장으로 4기씩 달린 어뢰발사관에서 어뢰가 줄줄이 튀어나와 물 속에 입수하는 게 보였다. 한쪽 현측에서만 발사하니 6기, 4척에서 발사하니 총 24발의 어뢰가 방호순양함들과 장갑순양함을 향해 일직선으로 하얀 포말을 일으키면서 나아갔다.
“젠장, 회피해!”
장갑순양함이 아무리 강해도 어뢰 한 방이면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물론 재수가 어지간히 없어야 하지만, 불가능은 아니다.
물론 포탄도 재수없으면 치명상을 내는 건 똑같지만 그건 탄약고 유폭 같은 재수가 없어도 열 번은 없는 케이스고, 어뢰는 제법 흔하게 나온다.
그리고 방호순양함의 경우는, 일격에 두 동강이 나도 이상하지 않다.
“발포! 발포해!”
장갑순양함의 부포와 방호순양함의 주포들에서 튀어나간 6인치 포탄들이 어지럽게 날았다.
그리고 죄다 빗나갔다. 고속 회피기동을 반복하면서 어뢰와 포탄을 쏘고 멀어지는 구축함들은 의외로 때려잡기 어려운 상대였다.
그나마도 구식 설계사상 탓에 6인치네 4인치네 잡다하게 탑재되고 자기 멋대로 쏴대니만큼 명중률이 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속도가 30노트는 넘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니, 맞나?”
애초에 해상에서, 자기들도 격렬하게 움직이는 판국에 다른 함선의 속도가 어느 정도 되는지 알기는 쉽지 않다. 30노트인지 40노트인지 알 만큼 정신도 별로 없었고.
그리고 포탄이 다시 날아들었다.
-콰앙!
“피탄되었습니다!”
107mm 포탄에 얻어맞은 47mm 속사포의 포신이 엿가락처럼 구부러져 있었다.
“반격해!”
이미 멀찍이 달아나는 적 구축함에 약이 올랐지만, 대부분의 포가 포곽식이고, 포탑도 회전속도가 느린 탓에 날쌘 구축함들을 쉽사리 명중시킬 수 없었다.
게다가 재장전속도도 느린 판이었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제기랄.”
물론, 모기가 사람 손을 요리조리 피해다닌다고 해서 모기가 사람을 잡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걸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어뢰였다.
-콰아앙!
“뭐야!”
“HMS 마제스틱 피탄! 어뢰입니다!”
큼지막한 물기둥이 솟았고, 적함보다 5배는 큰 마제스틱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게 보였다.
“제기랄! 저 개구리 놈들이!”
그 직후 섬광이 터졌다. 대응방어를 한참 넘어선 6인치 포탄이 구축함의 함미에 직격하면서 대폭발을 일으켰다.
“명중!”
“계속 쏴!”
하필이면 기관실에 포탄을 직격당한 프랑스 해군의 구축함은 잠시 뒤 234mm 포탄에 직격당했고, 그대로 물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적함 굉침!”
“아직 안 끝났다! 전방에 적.......”
요리조리 포탄을 피해 가면서 근접한 구축함 한 척이 선회하면서 어뢰 한 다발을 풀어놓았다.
그 직후 포탄이 날아들어 적함의 용골을 둘로 쪼개버리는 바람에 순식간에 물 속으로 빨려들어갔지만, 어뢰는 그들을 향해 멈춤 없이 달려들었다.
-퍼엉! 퍼퍼펑!
1만 3천톤에 달하는 장갑순양함의 거체를 여섯 발의 어뢰가 덮쳤다.
함수에 세 발, 함미에 세 발의 어뢰가 직격했고, 그 폭발은 일순간 1만 톤이 넘는 강철로 이루어진 선체를 붕 떠오르게 할 정도였다.
붕 떠오른 선체는 그대로 다시 바닷물 위에 착수하고, 그 충격을 견뎌내지 못한 용골은 쩍 소리를 내면서 갈라졌다.
그 순간 장갑순양함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콰콰콰쾅!
장갑순양함은 용골이 부러지며 빠르게 물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남은 함선의 수는 3대 2, 방호순양함 셋에 구축함 둘이었다.
전우들의 분전에 용기를 얻었는지 바짝 접근한 구축함 두 척은 적 순양함 한 척은 확실하게 탈락시키겠다는 듯 어뢰를 풀어놓았다.
그 각도도 절묘해 하나를 회피하면 다른 하나를 맞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다급히 회피해 도망치던 순양함은 어뢰 사이에 끼어버렸고, 지금 날아가는 어뢰의 연료가 바닥나기 전에는 전장에 복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적 순양함 2척 접근 중!"
"좋아! 저놈에게 함포를 먹여준다!"
겁을 상실한 건 아닌지 걱정되는 수준이었다, 자기보다 몇 배는 큰 방호순양함에 어뢰와 함포 믿고 덤빈다는 것 자체가 만용에 가까웠지만, 그 만용이 지금까지는 제법 운이 따라줬다.
물론, 그 행운이 끝나는 순간이 그들에게 죽음이 닥쳐오는 순간이었다.
프랑스 해군의 구축함 한 척에 포탄이 직격해 두 동강이 나는 게 보였다.
최후의 발악으로 어뢰를 쏟아내어 적 순양함 한 척에 집중시킨 마지막 구축함의 함장은 두 눈을 똑똑히 뜨고 적 순양함들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순간 그의 생명을 앗아 갈 적의 모습을 두 눈에 똑똑히 담아놓기 위해서.
폭발이 일어나고, 암전되었다.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물건은 성공적으로 도착했는가?”
“그렇습니다. 호위함들은 전멸당했습니다만.”
“물건만 도착했으면 되었다. 구축함이야 좀 큰 어뢰정에 불과하니 더 양산하면 그만이지. 승무원들은 좀 아쉽게 되었지만..... 그보다는 그 물건이 더 중요하다.”
세 척의 수송선에 나뉘어 실린 물건.
세계 최초의 전차 ‘샤를마뉴.’
그리고 그 운용병들.
벨기에 공세에서 독일군을 협공할 프랑스 제국의 비장의 한 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