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공세(2)
샤를, 네가 짊어져야 할 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네가 짊어지게 될 짐은 단순히 한 국가가 아닌, 한 열강이자 제국의 운명이지. 네가 무엇을 하든, 그 파급효과는 전 세계를 뒤흔들 거란다.
하지만 기억하거라, 모든 이는 본질적으로 악하다.
사실 선과 악이라는 잣대도 재미있지, 이 아비도 구교도이다만, 교황 그레고리오 1세 시절에 지정된 죄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죄인 일곱 가지 죄악을 아느냐? 그래, 너 역시 알겠지,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란, 탐욕, 나태. 대부분의 종교와 문화에서 금기시하는 일곱 죄악 말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려무나, 과연 그 일곱 가지 욕구를 완전히 배제하면 인간이 행복할 수 있을까? 더 나가서, 존재할 수나 있겠니?
탐욕과 질투가 없다면 누구도 노력하지 않을 거란다. 누구도 음란하지 않다면 과연 인간이 어떻게 번성할까? 누구도 인색하지 않다면 과연 어떤 경제활동이 이루어지겠느냐? 누구도 나태하지 않다면 과연 어떤 발명이 이루어질까?
이 아비는 그래서 죄의 관념을 ‘과잉’으로 정의하고 있단다. 그 일곱 가지 욕구들을 적절히 절제하지 못하면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이지. 그리고 인간은 의지력이 있어서 그 욕구를 자제할 수 있기에 인간은 양심을 가지고, 선과 악을 이해할 수 있는 거란다.
그리고, 누가 되었든 간에 손을 뻗게 될 거다. 기회가 보이면 누구든지 내가 만들어놓은 질서를 흔들려고 하겠지.
그렇기에 아버지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 어떤 이도 완벽할 수 없고, 누군가가 완벽하다고 해서 다음에 그 자리를 차지할 이가 완벽하다고는 아무도 자신할 수 없지.
그렇기에 이 애비는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복수형으로 칭해야 하는 존재는 절대로 믿지 않는단다. 그저 시스템을 믿을 뿐이지. 네게도 경고를 해 주고자 한다.
네가 더 높은 자리를 위해 시스템을 한 차례 무너트렸다면, 그 시스템을 대신할 더 단단한 시스템을 만들거라, 그리고 네가 앉은 자리가 과연 안정적인지를 고민해 보거라.
오롯이 한 인간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불안정한 시스템은 그만큼 무너지기도 쉽다. 하지만 수많은 요소요소에 맞물려 있는 톱니바퀴라면 도리어 무너지지 않는 법이지.
어떤 천재라도 총알 한 발에 명을 달리할 수 있지만, 잘 구축된 시스템은 전쟁을 치러도 무너트리지 못할 수도 있단다. 내가 자유주의자들에게 많은 부분에서 양보를 한 이유도 그들의 세력이 강성해서도 있지만, 황제라는 자리 자체가 극도로 불안정했기에 이를 안정시키기 위함이기도 하단다.
그리고 기억하거라, 세상 모든 것은 결국 믿음에 달려있음을.
국민들은 물이고, 권력은 배다. 국민들이 권력을 거부하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것이 정권이다. 그러니 너는 그들의 귀에 이야기를 들려주거라.
그것이 반드시 사실일 이유는 없다. 그저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거라.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책임을 네가 지지 않는 것이다.
누구든 성공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실패의 위험이 있을 때에는 네가 전면으로 나서서는 안 된다. 다른 누군가가 전면에 나서게 하거라. 나는 그 대상으로 의회를 정했지.
국민이 네 편이라면 의회를 무력화시키는 일은 어렵지 않단다. 거짓과 진실을 교묘하게 배합하면 군중을 선동하는 것 역시 어렵지 않지.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것이 유명인의 입에서 나온 자극적인 이야기라면 그 진실을 캐내기보다는 그냥 믿어버리니 말이다. 대중은 진실보다는 자극을 바란단다, 그것을 잊지 말거라.
-N IV, EB
***
“러시아군이 형편없이 밀리고 있습니다.”
“동부전선의 붕괴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상관없네.”
언제부터 우리 프랑스와 러시아가 서로 죽고 못 사는 우방이었다고 도와주냐. 저놈들이 제때 동프로이센 안 찌른 원죄다.
“이탈리아의 주력군은 이미 충분하리만치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입니다. 나머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맡기고 서부전선에서 시험적인 공세를 가해봐도 좋을 것으로 보입니다.”
“독일 전선에서 공세라.”
나는 눈썹을 까딱했다.
“자를란트? 아니면 라인란트인가. 그도 아니면 벨기에?”
“바스토뉴입니다”
“바스토뉴.”
나는 전선을 쓱 그었다.
“뇌프사또에서 바스토뉴까지 27km를 진격해 바스토뉴를 점령하면 바스토뉴 인근의 모든 철도 교차점은 사용 불가, 따라서 벨기에 내에 잔존한 프로이센군의 보급로는 완전히 끊깁니다. 그리고 다시 리에주까지 진격, 그 전에 투르네의 아군 야전군을 동원해 조공을 가함으로써 벨기에군과 프로이센군이 주공을 착각하게 만듭니다.”
“27km라.”
나는 피식 웃었다.
“장군, 프로이센군이 1.4km를 전진하는 동안 몇 명이 죽었는지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벨기에 공세에서 발생한 프로이센군이 전사자만 약 10만, 점령한 지역이 시체를 묻기에도 모자라다.
그마저도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인해 점령 직후 도로 쫓겨났으니, 이미 전쟁 전에 가지고 있던 정예병력은 죄다 손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리가 반대로 공격을 한다면?”
“신병기가 있지 않습니까?”
전차.
“신병기, 샤를마뉴를 동원하면 됩니다.”
“아직 생산량이 충분하지 않아. 샤를마뉴는 아직 신뢰성이 부족하다. 그리고 그 부족한 신뢰성을 메울 건 하나다. 숫자.”
머릿수로 밀어붙인다. 천 대의 전차를 내보내 그 절반이 고장, 격파 등으로 손실된다고 해도 500대의 전차가 적 전선을 유린할 수 있다.
“게다가 아직 승무원의 운용 훈련 역시 충분치 않다. 샤를마뉴를 대량으로 동원하고 싶다면 공세를 늦춰야 한다.”
“프로이센의 공세 목표가 어디까지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현재 러시아군이 일방적으로 패배하고 있다는 것이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막말로 극동에 너무 몰빵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도 완성되지 않은 마당에 말이다.
많은 병력이 아직도 전선에 배치되지 못한 상태고, 유럽에 남은 병력도 사방팔방에 흩어져 있는 상황, 이들을 급하게 움직이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흐음.”
나도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혁명을 맞은 소련이 우크라이나랑 벨라루스, 캅카스 등을 독일 제국에게 다 날려먹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그 조약은 독일 제국에게 막대한 영토를 선물했지만, 결과적으로 11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이 치안유지를 위해 묶이는 바람에 춘계공세에 악영향을 끼치는 등 독일 제국을 패망시킨 원인이 되었다.
즉 오히려 러시아가 적절히 패배하면서 밀려나가면 북독일 연방은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기하급수적으로 많은 병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
게다가 겨울이 오면 그때는 문자 그대로 아주 음경 되는 거고.
그리고 그 틈을 우리가 찌르면?
목표인 왈롱과 자를란트, 라인란트를 확보하는 것도 시도해 볼 수도 있다. 물론 너무 피해가 커지면 적당히 빼야겠지만, 이미 보급선이 끊기고 막대한 사상자에 너덜너덜해진 벨기에 주둔군 정도야 네덜란드와 협력해서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우선 이탈리아 전선은 사르데냐 공세를 마지막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게 전선을 이양하고 접는 게 낫겠군, 그리고 왈롱을 노린다.”
목표 우선순위는 냉정히 말해서 점령하기 쉬운 곳이 우선이다.
전차가 없는 이상 점령하기보다 점령지 유지가 수십 배는 쉬운 건 서부전선에서는 상식이니까.
따라서 어지간해서 한 번 참호를 파고 들어앉는 것까지 성공하면 거기는 어지간해서는 안 뺏긴다고 봐도 된다.
현재 우리가 목표한 세 지역, 왈롱, 라인란트, 자를란트 중 공세의 난이도를 따져보면 왈롱, 자를란트, 라인란트 순으로 쉽다.
라인란트는 앙시엥 레짐 시절부터 프랑스가 노려왔던 지역이자 핵심 요충지, 주요 격전지가 될 게 뻔한 만큼 현재 몇 안 되는 생존한 정규 야전군 하나에 소집된 다수의 예비사단으로 새로 편제된 방면군 등 그야말로 막대한 규모의 병력이 모여 있고, 자를란트는 상대적으로 병력이 적을 뿐 그쪽이라고 해서 공략이 쉬운 편은 아니니 소거법으로 공세를 할 만한 지역은 왈롱밖에 없기도 하고.
“부대 훈련을 시작하도록, 공세작전에 대한 세부사항을 준비해서 조속하게 서면보고할 수 있도록 하고, 새로 편제할 기갑부대의 단대호와 부대 구성 등도 준비하라.”
“알겠습니다.”
***
캐나다, 토론토.
에드워드 7세는 묵묵히 내각을 바라보았다.
“덴마크를 경유해 들어온 소식입니다. 결국 스코틀랜드가 무너졌습니다. 본토의 마지막 저항군은 모두 무너진 것으로 판단됩니다.”
아일랜드인들의 원한은 강력했다. 사실상 런던 외에는 손을 뗀 프랑스군을 대신해 브리튼에서의 지상 군사작전을 도맡은 아일랜드인들은 스코틀랜드에서 저항하던 마지막 영국군을 처참하게 짓밟아 버렸다.
더 고통스러운 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었다.
런던이 프랑스군에게 짓밟히고 있고, 본토에 남아 있던 대영제국의 병사들은 남김없이 죽음을 면치 못했다.
잉글랜드의 귀족들이 민병대 수십만을 모았지만, 런던 탈환은 애초에 불가능했다는 것만 증명되고 수많은 피만 흘린 채 처참히 실패했다.
각지에서 아일랜드인들이 학살을 벌여댄다는 보고가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지만 그와 내각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들 모두의 아버지여야 할 국왕은 자신이 자식들이 죽어나가는 꼴을 대양 건너에서 발만 구르며 보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어서야 왕의 존재 의의는 무엇인가.
그리고, 국민의 대표자여야 할 내각은 또 무엇인가?
“단 한 곳, 단 한 곳에서라도 좋네, 승리의 소식은 없는가.”
“프랑스 해군은 현재 대규모 선단으로만 움직이고 있습니다. 종래의 통상파괴전만큼의 전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임시 제1해군경 피셔 제독이 답했다.
도버 해협 해전에서 적잖은 수의 함선과 생존자들을 빼낸 공로로 본토가 함락되면서 쓸려나간 내각과 군 사령부의 빈자리를 채우는 개각 과정에서 로열 네이비의 정점에 오른 그였지만, 도저히 달가워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태평양 식민지들이 프랑스 순양함대에게 공격당하는 형국입니다. 하지만 이를 막기 위해 전력을 차출하자니 시간이 적잖이 걸릴 뿐 아니라 프랑스에 대한 해상봉쇄가 약화됩니다.”
현재 영국에게 남은 건 피셔 제독이 간신히 살려낸 본토함대 일부와 식민지 함대에서 차출해낸 전함들뿐이었다.
그나마도 살아돌아온 본토함대 함선 중 태반이 수리를 요할 정도로 대파된 상태, 식민지 함대는 유럽에서 프랑스를 견제하는 데에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네덜란드가 동남아시아, 특히 해협식민지를 봉쇄해버린 탓에 아시아-태평양은 거의 손을 쓸 수도 없는 상태였다.
“지상전에서 프랑스를 상대해서는 가망이 없습니다.”
식민지 부대를 제외하고는 본토를 탈출한 병력이라고는 근위사단밖에 없었다. 물론 캐나다인들은 충성스럽지만, 미국의 분위기가 수상한 판국에 캐나다군을 엉뚱한 데로 돌렸다가는 토론토에서도 쫓겨날 가능성도 있었다.
“차라리 협상을 하면 어떻겠습니까.”
특정 식민지의 포기. 해군 조약 체결, 그리고 배상금.
프랑스가 요구한 게 이것저것 있었지만, 당장 영국에게 있어서 손해가 되는 것을 감안하면 이걸로 요약될 수 있었다.
“....... 프랑스가 인도 서해안을 요구한 것, 이것만 철회한다면 당장 항복 문서에라도 서명할 수 있겠지만......”
인도 서부는 인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다, 여길 떼네면 인도의 잠재력도 반쪽짜리가 되어 버린다.
“대영제국이 이스라엘을 보호국으로 삼은 상태에서 독립시키는 조건이라면 협상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에드워드 7세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많은 건 바라지 않네.”
“............”
“딱 한 번, 딱 한 번만, 소규모라도 좋으니 승리 소식을 가져오게, 그 다음 프랑스에게 강화를 청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