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공세(1)
뉴질랜드 식민지, 대영제국.
“망할 비바, 망할 랑펠로.”
중얼거린 병사는 몸을 웅크렸다.
프랑스 해군육전대를 피해다닌 지도 벌써 보름이었다.
병사들 중 생존자는 거의 없었다.
해군이 괴멸하고, 식민지 함대는 더 급한 지역으로 빠지고, 결국 태평양 식민지는 텅텅 비다시피 했다.
그리고 거기를 프랑스 해군이 찔렀다.
찌를 줄 모른 건 아니다. 쉽지 않으리라 판단하기는 했지만, 일단 네덜란드가 넘어간 이상 태평양 식민지들이 위협에 빠질 것이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영국은 저울질해야 했다. 뭘 얻을지가 아니라 무엇을 지킬지를.
프랑스 해군의 순양함들이 통상파괴를 하는 걸 막을 수 없다. 그걸 막으려면 지금 북독일 연방의 해상항로를 보호하고 있는, 그리고 프랑스 함대를 습격하고 다니는 함대에서 전력을 빼내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잔 다르크급을 만들어낼 수는 없었으니 영국에게 남은 길은 지리한 싸움으로 프랑스가 프로이센보다 먼저 나가떨어지게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현재 대영제국이 프랑스를 상대하는 방법은 나폴레옹 1세 시절의 전략을 그대로 답습했다. 다만 지금은 본토를 상실한 상태에서 전함과 순양함들을 동원해 압도적인 머릿수만을 이용해 찌르면 아플 법한 곳을 마구잡이로 찌르는 것 외에는 없었다.
문제는 그 아플 만한 데를 프랑스는 포기하거나 팔아버리면서 문자 그대로 청야전술을 펼치고 있다는 데에서 기인했다.
막말로 본토 말고 다 포기했다. 이래서야 아무리 찔러봤자 해상수송의 비중이 낮은 프랑스에게 치명상을 주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현재 영국군 총사령관이나 다름없는 지위에 있는 피셔 제독은 북독일 연방을 상대로 통상파괴를 진행 중인 프랑스 순양함대를 역공해서 소모시켜 가면서 북독일 연방의 숨통을 틔워 주는 방향으로 싸울 뿐이었다.
이를 위해 투입된 전함과 순양함들의 수는 막대했고, 이는 전부 영국의 식민지에서 소환되어야 했다.
본토로 복귀하지 않고 네덜란드에게 보급을 받으면서 태평양에서 깽판을 치는 게 임무인 프랑스 식민지함대와 통상파괴전대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는 환경이었다.
더 나아가, 이들은 대담하게도 뉴질랜드를 공격하기까지 했다.
뉴질랜드 공격은 표면상으로는 별 의미 없다.
다만, 공격당했다는 그 자체가 의미가 있다.
뉴질랜드가 공격당했다. 이 사실에 태평양 식민지 전체가 동요하리라.
이걸 진정시키려면 왕립해군은 순양함과 전함들을 남태평양으로 돌려야 하지만, 남태평양으로 돌리면 북독일 연방의 해상 보급선이 위험해진다.
즉 이 공격은 왕립해군의 선택지를 제한하기 위해서 행해지는 공격이었다.
단순히 포탄을 쏟아붓고 튀는 게 아니라, 뉴질랜드 본토에서 660km 가량 떨어진 피트 섬에 소규모 해군 육전대가 강습했다.
-타타타타타타타타타!
-퐁! 퐁!
지옥의 기관총 소리가 울렸고, 프랑스군이 동원한 소형 박격포 소리가 울려퍼졌다.
프랑스군은 박격포를 도수운반이 가능할 정도로 극단적으로 소형화해 운용 중이었고, 거기에 기관총까지 조합해서 방어선을 세우면 어지간해서는 뚫을 수 없었고, 영연방군의 시체가 이미 쌓인 시체 위에 쓰러져 지층처럼 되었다.
“허버트.”
“예, 대령님.”
“빌어먹을, 저놈들이 우리를 몰이사냥하는 느낌이야.”
“아마 그게 맞을 겁니다. 우리가 숨어들면 곤란하니까....”
한 번에 처리하려는 거 아니겠습니까.
순간, 저 멀리에서 포성이 울렸다.
“포격이다! 엎드려!”
폭발이 섬 사방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외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비바 랑펠로!"
"라이미 놈들을 섬멸해라!"
"으, 으아아아아!"
"중사! 닥치게 해!"
패닉에 빠진 병사 하나가 총을 난사하려는 차에 그대로 입이 틀어막히고 바닥에 강제로 엎어졌다.
"허버트 대위, 아무래도 이쪽은 아닌 것 같지?"
"섬이 작아서 놈들이 함포사격을 할 때 원탄을 좀 크게 낸 모양입니다. 저쪽 어딘가에 아군 저항군이 있어요."
"하지만 가다가 위치가 노출되어 당할 확률도 높고, 무엇보다 저들과 합류해도 저들과 같이 전멸당할 가능성도 제법 됩니다. 저놈들 병력이 저희 몇 배입니다."
"왕립해군이 와주기를 기다려야지."
"그 함대가 오기는 하는 겁니까. 아니, 오더라도 이길 순 있는 겁니까?"
"조용."
"아니, 솔직히 이미 왕립해군이 전멸했으면 올 배가 없잖습니까! 뒈지더라도 할 말은 하고 죽어야겠습니다. 런던이 함락되고 여왕 폐하가 스코틀랜드에서 개구리 놈들에게 사로잡혔다던데 여기서 죽어라 싸워봤자 죽기밖에 뭐하겠습니까!"
"그럼 어쩌자는 건가, 경청하겠네."
"항복하죠, 항복하면 죽이지는 않을 거고 나중에 복귀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항복? 이 멍청이가....."
"그만하게. 대위."
"하지만 소령님, 이렇게 대놓고 패배주의적인 언동을 하는데 본보기를 보여야 합니다!"
"지금은 한 명이 아까운 상황이네, 그리고 왕립해군은 전멸하지는 않았네, 아직 전함들이 남아 있고, 순양함들이 남아 있네, 아직 절망하기에는 일러."
"그렇다면 왜......"
"이봐."
대위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한 마디만 더하면 네놈 힘줄을 끊어놓고 버리고 간 뒤에 탈영으로 보고하겠다, 개구리 놈들이 네놈에게 마지막 식사를 제공해주기를 바라지."
그 순간, 총성이 들렸다.
-타앙!
아까 전까지 항복을 주장하던 병사의 목과 가슴 사이쯤에 구멍이 하나 생겼다.
"엎드려!"
"적이다!"
"매복이다!"
***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러시아 제국.
“뭐라고? 독일군이 쳐들어와?”
“예, 폐하!”
니콜라이 2세는 굳을 대로 굳어 있었다.
발칸을 통합하고 오스만을 사실상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흡수한 뒤, 이제 페르시아와 극동까지 장악하기 위해 손을 뻗고 있던 와중인지라 병력이 부족한 와중이었다.
“독일군은 지금 프랑스를 상대하기도 벅찬 게 아니었던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지원하기 위해 프랑스군 다수가 이탈리아로 빠져나가면서 여유가 생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폐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즉시 군을 재배치해야 합니다!”
“그래.... 일단 그건 군부가 알아서 하게, 저들이 진격해오지 못하게 막아야 하네.”
페르시아는 사실상 손에 넘어왔다. 아프가니스탄도 마찬가지, 이제 극동의 조선과 일본만 차지하면 러시아는 이 시점에 손에 넣을 수 있는 것 전부를 넣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반은 이루어진 거나 다름없었고.
그런데 유럽에서 박살나면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어진다.
“아버지.”
어린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프랑스군에게 즉시 서부전선에서 공세를 가해달라고 요청하심이 어떻습니까?”
알렉세이의 말은 합리적이었지만, 당연히 문제가 있었다.
이미 프랑스가 누차 지금 동프로이센 비었으니 공세해달라고 몇 번이나 요구했는데 발칸이 급하다면서 무시한 전적이 있는 것이다.
자신의 큰할아버지를 쏙 빼닮은 소년을 바라보던 니콜라이 2세는 상당히 곤혹스러운 상황이었다.
현재 니콜라이 2세와 러시아 제국의 상황을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황이었다.
프랑스의 뒤통수를 치고 단독강화를 하든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프랑스를 도왔어야 하는데 프랑스의 요청에 따라 공세하지도 않으면서 전쟁은 또 애매하게 지속했다는 게 문제인 것이다.
한 마디로 우유부단했다.
“들어가서 이야기하자꾸나.”
알렉세이를 데리고 들어간 니콜라이 2세는 요람에 잠들어 있는 어린 딸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이 아니더라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할 만한 어린 소녀, 자라면 전 유럽의 칭송을 대대로 들을 만한 미모를 타고난 니콜라이 2세의 두 아이 중 동생, 아나스타샤의 곁에 앉은 황제는 어린 황태자와 눈을 마주쳤다.
“알렉세이,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단다, 지금 프랑스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전쟁을 개전한 뒤 목적한 것을 덜 이루었으니 말이다.”
프랑스가 내건 종전조건은 자를란트와 사르데냐의 할양, 라인란트의 분리독립 및 프랑스의 독립보장, 태평양 식민지 다수의 할양, 벨기에를 네덜란드와 프랑스가 분할해 나눠가지는 것, 인도 서부 해안지대에 서가츠 산맥을 국경으로 이스라엘 독립, 남미에서 싸운 프랑스의 동맹 콜롬비아에 기아나 식민지를 할양할 것이었다.
우선 자를란트와 사르데냐는 프랑스가 아직 점령하지 못했다, 벨기에와 라인란트도 마찬가지, 태평양 식민지는 프랑스 해군이 들쑤시고 있지만 장기유지가 어려운 건 마찬가지이며, 인도와 남미는 말할 것도 없다.
프랑스는 문자 그대로 이 전쟁의 대부분을 캐리했으면서 정작 까보면 목표지점은 점령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만 잔뜩 점령한 셈이다.
그 점령한 곳이 영국 본토이니 문제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야기가 다르다. 이들은 북이탈리아를 넘어 아예 이탈리아 전체를 이탈리아 통일론이 대두되기 전, 즉 이탈리아 전체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토였거나 그 괴뢰국이었던 시절로 되돌리기를 원하고 있었다.
물론 이 역시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으면 가능할 법 했지만, 아직은 아니다, 즉 전쟁을 좀 더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런데 러시아는? 사실 지금 당장 전쟁에서 손 떼도 어지간한 건 다 얻었다.
먼저 발칸 전체와 오스만 제국의 영토 상당수,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은 이미 점령했거나 사실상 괴뢰화한 것이나 다름없다.
조선의 경우는 조금 시간이 걸리고 있지만, 전쟁을 계속하면 영국이 유래없는 속도로 몰락하면서 버림받은 조선과 일본을 먹어치우는 건 간단했다.
그렇게 되면 아예 두 국가의 왕조를 폐하고 니콜라이 2세 본인이 두 국가의 군주를 핀란드와 폴란드처럼 겸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는 폴란드와 핀란드의 군주이기도 했으니.
즉 프랑스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각자 자신들이 목표한 지역을 확보하는 걸 중시하지, 서로 도울 생각도 별로 없는 러시아의 곤란을 해결해줄 생각은 별로 없을 터였다.
문자 그대로 그들의 동맹은 ‘저놈들을 우리들이 적극적으로 힘을 합쳐서 쳐부수자’보다는 ‘우리끼리는 싸우지 않는다’ 수준에 더 가까웠으니까.
즉 현재, 러시아는 딱히 누구에게 기댈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니콜라이 2세 역시 기댈 생각은 딱히 없었다.
***
말들이 달린다.
서로 백여 명에 달하는 기병대가 서로를 향해 달려든다.
“황제 폐하 만세!”
“카이저를 위하여!”
기병들이 총을 꺼내들어 서로에게 쏘고, 기병창을 꼬나쥔 채 적에게 달려들었다.
-콰지직!
랜스들이 부러져나가고, 기병도가 번뜩이고, 권총과 기병총이 불을 뿜어댔다.
단 한 순간의 기병들 간의 충돌로 수십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순식간에 머릿수가 반토막 난 카자크 기병들은 다시금 프로이센 기병대에게 달려들고, 프로이센 기병대 역시 말머리를 돌렸다.
-탕! 탕탕!
그리고 총성이 울렸다.
프로이센 기병대는 다시 맞부딪히기보다는 거리를 두면서 레버액션 소총을 쏴대는 걸 택한 것이다.
그렇게 되자 카자크들도 총을 빼들어 쏴대기 시작했다.
얼마나 총격전이 벌어졌을까, 프로이센 기병들의 생존자들도 몇 남지 않았지만, 카자크 기병들은 남김없이 전멸했다.
하지만 이는 전초전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