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소용돌이(2)
“상비군 병력의 6할이 넘게 죽거나 포로 신세가 될 판인데 뭔 깡이지?”
“프로이센의 예비군 동원능력은 대단하니 말입니다. 무엇보다 아마 루르 문제가 크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협상해보려고도 안 하고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건.....”
나는 회의실에서 고개를 저었다.
“다들 그만하게, 지금 중요한 건 단 하나, 승리니까.”
그리고 문제는, 적을 짓밟아 승리할 마스터플랜 같은 건 없다는 거다.
상륙전? 불가능, 전차 개발? 마찬가지로 현재 기술로는 불가능.
지금 필요한 건 단 하나. 뚝심과 장기전이다.
“그리고 그 승리를 위해, 방어전에 들어간다.”
“예?”
“소모전이다.”
그거 외에는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우리는 저들을 최대한 소모시켜야 한다. 프랑스의 아들들로 하여금 나라를 위해 죽으라고 하지 마라, 대신, 저들의 아들들을 자신들의 나라를 위해 죽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최우선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우리의 전술을 모방하지 못할 것 같은가?”
불만을 말하려는 참모의 입을 나는 그대로 틀어막았다.
“저들이 우리의 전술을 흉내내지 못할 만큼 저열한가? 저들도 지뢰를 깔고, 철조망을 놓고, 포격을 가하고, 침호를 파고, 기관총을 쏴댈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국가도 현재로써는 이 길다란 참호선을 돌파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갖추지 못했다. 계속해서 시간과 자원을 투자한다면 신무기가 나올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이미 막대한 자원이 고출력에 신뢰성 좋은 엔진 제작과 구동계 개발 등에 쏟아부어지고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는 지금 방자의 화력이 공격자의 모든 수단보다 더 우위에 있는, 지금까지 없었고,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면 앞으로도 없을 시대에 살고 있다.”
그 시대의 종말은 전차라는 물건의 탄생으로써 선언되리라.
하지만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 제대로 된 전차가 등장하려면 기술적으로 넘어야 할 산이 제법 있다.
원 역사의 대전쟁에서도 영국의 마크 전차와 프랑스의 르노 전차들은 베를린을 짓밟지 못했다. 독일 제국이 이미 부족해져 가는 자원을 더욱 많이 퍼붓도록 촉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원 고갈과 내부 반란으로 패전할 때까지 독일 제국은 여전히 프랑스의 영토에 발을 딛고 있었다.
독일 제국을 패전시킨 것은 해상봉쇄였다. 뭐, 적어도 그거 하나는 잘 되고 있었지만. 정말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전차가 베를린까지 진격해서 카이저에게 굴욕을 강요하려면 원 역사 기준 40년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지금이야 그 필요성이 급증했으니 좀 나을지 모르지만 그래봤자다.
사실 드레드노트도 거의 프랑스의 총력을 기울이고셔야 간신히 제작이 가능했고, 거기에 초도함을 굴려보면서 문제점을 보충하는 데만 6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전차가 그보다 더 오래 걸리지야 않겠지만 3년만 지나도 전쟁이 그때까지 계속되고 있을지 알기 어려운 판이었다.
‘트랙터를 사올 수 없을까...... 근데 무한궤도 단 트랙터가 이 시기에도 생산되던가?’
일단 증기기관을 사용하는 트랙터가 지금 시대에 존자한다는 건 안다. 그런데 가솔린 구동 트랙터가 존재하나? 그것도 무한궤도 단 물건으로?
‘한 20세기 가야 할 거 같은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프로젝트, 지상함 프로젝트를 일부 개념 설계 정도는 병기국에서 진행해왔으나, 이번 일을 계기로 이를 대규모로 확대하겠소.”
내연 기관, 캐터필러, 이 두 가지를 가진 트랙터라면 개조해서 초기형 전차는 충분히 만들 수 있다.
‘상용화된 건 없는 게 맞는 것 같고, 그럼 결국 우리가 직접 개발해야 한다는 뜻인데.’
다행히 무한궤도라는 개념 자체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고, 내연기관도 벤츠가 최초로 개발한 뒤 전 유럽에 존재하며-존재하니까 복엽기와 비행선이 우리뿐 아니라 유럽 각지에서 날아다니겠지-트랙터도-증기기관을 쓰지만-상용화 상태로 존재한다.
그러니까 이 셋을 잘 조합해야 한다. 어떻게? 내가 그걸 알면 진작 만들었지.
내가 무기 만들 때 지금까지는 브라우닝에몽을 외치면 그럭저럭 됐는데 이건 총포 종류가 아니라 트랙터 기반 물건인지라 골치아플 따름이다.
“일단 내연기관을 이용한 트랙터부터 시작하지, 구동계통은 무한궤도로 해서.”
트랙터 여기 저기 뜯어내고 장갑이랑 무기 얹고 하면 그게 초기형 탱크다.
지금 군에서 가장 흔한 야포인 나폴레옹 야포랑 기관총 정도...... 얹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직 만들지도 않은 물건의 추진력이 충분할지 모르겠으니 일단 이놈이 견딜 수 있는 선에서 무장을 얹어야겠지.
“그 신형 ‘지상함’이 없으면 공세가 불가능하다고 보십니까? 폐하?”
“불가능하다고 하지는 않겠지만 그 피해가 클 걸세, 그리고 그 피해는 분명히 제국이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을 거고.”
프랑스의 상태는 개판이다. 나폴레옹 1세 이후 계속해서 저출산으로 인구는 폭락하고 있고, 19세기에 독일에게 인구를 추월당한 뒤 21세기까지 다시 따라잡지 못한다.
독일이든 프랑스는 인구 갈려나간 건 똑같은데 독일은 손실한 인구를 회복하고 프랑스는 회복하지 ‘못’ 한 거다. 그 원인은 일단 다양하지만, 쓸데없이 공세를 해서 몇 킬로미터쯤 얻겠다고 수십만을 갈아먹으면 인구절벽이 더 빨라지고, 후에 독일이든 영국이든 상대할 때 선택지가 확 줄 수밖에 없다.
지금이 전쟁 초기라서 참호전이 아직 정립되지 못했으면 나도 기병이든 자전거연대든 밀어넣어서 기동전으로 적 병력 짤라먹기를 시도하기라도 했겠지만 독일놈들은 이미 우리의 전술을 죄다 카피했다는 게 네덜란드군이 입은 막대한 피해로 증명된 상황,
딴 놈이 독버섯을 따먹고 뒈졌는데 그 버섯을 또 따먹으면 그게 인간이냐? 짐승들도 독버섯은 본능적으로 피한다는 점에서는 짐승보다 지능이 낮은 거지.
따라서 그 참호선을 파훼할 결정적인 수단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가 할 일은 존버 또 존버다.
어차피 국뽕은 영국 상륙과 현상유지만으로도 차고 넘치게 채우고 있고, 독일은 아주 느리게 해상봉쇄로 피와 살이 마르고 있으니까.
간단히 말해 동맹 두 놈이 똥만 안 싸면 된다. 똥만.
***
베를린, 북독일 연방, 프로이센 왕국.
“귀관들이 극구 반대해서 프랑스의 평화 제안을 묵살하기는 하였으나.”
빌헬름 2세는 융커들을 둘러보았다.
“대책이 있으니 반대했으리라 생각하오.”
융커들은 입을 조개처럼 꾹 다물고 있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숙련병과 장교 60%를, 그것도 최정예로만 골라서 공세하다가 벨기에에서 날려먹은 상태, 동맹국 하나 없이 유럽 한가운데에 고립된 상황을 상정한 전쟁계획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 와중에 입을 연 사람이 한 명 있기는 했다.
“지금 즉시 러시아를 공격해야 합니다.”
한때 프랑스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명장, 대(大)몰트케의 조카 소(小) 몰트케 장군은 입을 열었다.
“러시아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폐하, 현재 프랑스군의 방어는 견고하며, 그들의 전투능력은 강인합니다. 프랑스 제국은 명백히 본국에 대한 복수전을 위해 오랜 시간 준비해왔습니다.”
이미 주요 전선들은 무너지고 있다. 영국의 혓바닥에 놀아나 참전한 조선은 러시아에게 억 소리도 못 내고 무너져 평양을 내주었고, 영국의 목줄에 끌려가서 참전한 일본은 한반도가 러시아 손에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만으로 피똥을 싸고 있었다. 그마저도 쉽지 않았지만.
게다가 영국의 지원도 어려웠던 것이, 전쟁이 시작되기 무섭게 본토를 날려먹은 건 둘째쳐도 극동에 배치된 영국 해군의 허리가 잘려버렸다.
식민지 몇 개 팔아줄 테니 참전할래 아니면 그냥 나온 김에 프랑스에 합병당하는 것 중에 선택하라는 정중한 프랑스의 제안을 받은 네덜란드가 해협식민지를 막아버리자 인도양과 태평양의 연계는 숫제 끊어지다시피 했다.
거기에 인도 식민지에서 대대적인 반란으로 뭄바이항이 일시적으로 마비되는 등 인도 주둔 영국군도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상황이었고, 오히려 호주가 위험한 상황이었다.
발틱함대와 흑해함대가 프랑스의 협조 하에 극동으로 출동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미확인 정보까지 더하면 이미 극동은 망했다고 보는 게 옳았다.
아일랜드는 이미 사실상 자치정부를 세웠고, 스코틀랜드의 저항도 그리 오래갈 가능성은 낮았다.
이미 영국은 졌다. 그러면 이제 독일은 홀로 전 세계를 상대해야 할 판이었다. 오스만을 계산에 넣는 바보는 없을 거고. 그나마 동맹이라면 이탈리아가 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물고 뜯는 데만으로도 국력의 모든 것을 소진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현재 가용한 전력의 상당수를 극동에 쏟아붓고 있습니다.”
발칸은 다 먹어치우고 오스만도 망했다 싶으니 현상유지할 만한 병력만 남기고 싸그리 극동에 몰빵했다. 전함 하나 없는 일본 제국은 아무리 방자의 우위가 있다고 해도 극동함대와 발트함대가 연계되는 순간 실낱같은 보급선도 죄다 잃고 그대로 아사할 판. 러시아의 요구대로 조선과 일본을 합병해버리고도 남을 터였다.
“니키 녀석은 원래부터 극동에 관심이 제법 있었지.”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희와의 국경에는 병력이 방어만 할 수준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당연한 소리다. 북독일 연방은 당장 프랑스의 대공세에 뚝배기가 깨지는 걸 막기 위해 전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돌렸고, 러시아는 발칸을 파먹고 오스만을 조지는 일에나 관심이 있었다. 애초에 ‘베를린의 배신’ 이후에도 비스마르크는 해임당하기 직전까지도 어떻게든 러시아와의 관계를 수습해 보려고 매달려왔던 것이다.
결론만 말해 모조리 실패로 끝났지만. 아무튼 간에 얻을 건 다 얻은 러시아 제국에서는 굳이 독일과 싸울 이유가 있나 하는 생각이 꽤 돌았다.
일단 동맹은 동맹이고 조약은 조약이니 참전을 했다만, 베를린에서 뒤통수를 쳤어도 당시 러시아는 얻을 걸 다 얻어갔다. 독일에 대한 적대감이 하늘을 찌를 이유가 없었다.
결국 양측은 일종의 신사협정을 맺었다. 어차피 독일 입장에서 러시아가 발칸을 먹는다고 발작할 이유가 없고, 러시아는 독일과 사생결단을 낼 이유가 없으니 국경 인근에서 총질이나 좀 할지언정 서로가 제대로 된 공세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당장 동부전선에서 공세 좀 펴라고 왈왈거렸지만 현재 아쉬운 쪽은 프랑스였다.
게다가 승하한 알렉산드르 황태자의 측근이었던 세르게이 비테 재무장관은 양면전선을 열면 재정이 버티지 못할 거라고 발언하며 극동과 유럽 가운데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테의 의도는 유럽에만 집중하고 집적거려봤자 나올 건 딱히 없는 극동에서 손 떼자는 것이었지만, 청개구리 니콜라이 2세는 극동에 집중하고 이미 얻을 건 다 얻은 유럽에서는 독일과 신사협정을 맺는 쪽을 택했다.
그러나 문제는 신뢰가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동부전선에 배치된 수십 개 사단들은 이미 죽을힘을 다해 서부로 달려가고 있었고, 동프로이센은 텅 빈 거나 다름없었다.
동프로이센이 어디인가. 융커들의 영지다. 고로 동프로이센을 안정화시킬 수 있는 이 공세작전은 뒤통수가 서늘한 융커들에게 있어서 마음에 쏙 들 만한 작전안이었다.
“이 상황에서 러시아에 대해 우군이 공세를 가하면 러시아군은 일패도지할 것입니다.”
“여러 정황에 따르면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탈리아군과의 전쟁만으로도 한계에 부닥쳤습니다. 프랑스군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하지 않는 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연방의 남부를 공격할 여력을 낼 수 없을 것입니다.”
즉 프랑스 제국의 공세는 서부전선에서 빈틈없이 방어될 것이며, 남부에서는 치고 올라올 여력이 없으니 주력이 빠진, 그렇기에 성공 확률이 다른 둘보다 높은 러시아를 먼저 치겠다는 판단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무너트렸을 때 그 효과가 러시아보다 명백히 부족할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국경지대에는 참호를 깔기가 러시아에 까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따라서 공세 실패 확률이 높습니다.”
“그럼 그 뒤는 어쩔 건가?”
“극동으로 이동한 러시아군이 복귀하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 전에 러시아에 치명타를 입힌 뒤 강화협상을 하고, 프랑스와 결전을 벌입니다.”
역 슐리펜 계획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전안.
이는 융커들도 눈치챈, 이 전쟁에서는 엄청난 해프닝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공자보다 방자의 화력이 절대적 우위를 가졌다는 전제 하에 준비된 것이었다.
프랑스군이 그 빈틈을 노리려고 해도 기관총과 참호선으로 인해 충분히 저지될 터, 그러나 동부전선에서는 그런 전술이 발휘되기 어렵다, 기관총의 절대수량도, 그리고 참호를 파야 할 영역도 너무나 넓다.
참호와 참호 사이에서 기동전을 벌이기 좋은 환경이다. 그런 기동전 환경에서 프로이센군은 자신이 없었다.
질 자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