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리벤지 매치(5)
-마르크스는 화폐를 일컬어 인간의 노동과 생존의 양도된 본질이라 했으며, 이것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은 그것을 숭배한다고 비판했다. 분명히 세상 모든 것은 화페로 계측되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그 소득을 놓고 화폐로 잴 수 있는 거리가 있으며, 화폐를 매개로 가족관계를 포함한 모든 관계가 성립되기도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 본인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화폐는 결국 개인을 성립시키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렇기에, 마르크스의 사상 내에서도 화폐 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는 결코 폐기될 수 없다. 이는 화폐의 본질은 언어와 같이 개인을 성립시키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회를 유지시키고, 모든 인간을 개인으로써 남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런저런 글을 종이 위에 늘어놓던 나는 한숨을 쉬며 원고를 덮었다.
혹시 빨갱이들 들고일어났을 때 써먹을 일이 있을까 싶어서 대충 적어놓는 거였는데, 뭐 어쩌겠는가, 어차피 선동 한 줄이 더 영향력이 클 텐데.
브레너의 카펫이라고 아는가?
온갖 쓰레기들을 카페트 밑으로 다 쓸어넣은 뒤 그 위에 올라가서 카페트가 평평하면 괜찮은 거고, 그 위에 서 있을 수 없다면 싹 카펫 바깥으로 쓸어내야 한다는 거다.
원래는 분자생물학 분야에서 온갖 설명과 검증들에 지친 브레너라는 과학자가 다 무시하고 검증과 이론 수립의 과정을 다 건너뛰고, 어차피 이런 새로운 분야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질러보는 과감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양반은 나중에 노벨상 받았지만 어쨌든.
그래서 대충 비유하자면 대충 답이 이거다 싶은 게 있으면 이거가 맞나 아닌가를 카페트 위에 올라가서, 즉 맞다고 가정하고 그 과정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봐서 이론이 맞아떨어지는지 아닌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그게 학문에서만 이야기되는 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적용이 가능하다.
물론 브레너의 카펫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아무튼 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카펫 아래에다가 쓰레기를 버리다 버리다가 결국 카펫 위에 서 있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된 게 19세기 말, 20세기 초다.
아니, 이건 차라리 하인리히의 법칙에 비유해야 하려나.
그들은 결국 피해를 당하다, 당하다 못해 가해자가 된 피해자.
지난 삶에서 뼈저리게 느낀 사실이지만, 다른 이의 가시에 찔린 사람은 그 가시에 상처받으면서도 결국 그 가시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자신 역시 또 다른 상대를 찌르게 된다.
그때, 내 상념이 끊겼다.
“폐하. 보고드립니다. 네덜란드군의 공세가 중단되었습니다. 하지만 개전 초반에 보급선이 끊어진 이상, 탈출의 움직임을 보일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네덜란드군이 점령한 지역은 안트베르펜과 말메디-리에주 방면.
현재 독일군은 릴 방면에 몰려있고, 리에주 방면의 철도망을 통해 보급을 받고 있었기에 네덜란드의 공세는 치명적이었다.
아직 바스토뉴 방면은 열려 있었지만, 그 철도망은 까놓고 말해 너무 협소한 데다, 메스에 있는 프랑스군이 북상하면 바로 막혀버릴 위치에 있다.
“당분간 이 전쟁은 먼저 움직이는 놈이 지는 싸움이 될 거요, 현재 상황에서 독일군의 움직임은?”
“발악하듯이 공세를 취해서 파리를 노리거나, 아니면 벨기에를 통째로 포기하고 도망치겠지요, 아마 룩셈부르크와 자국 국경지대를 방어하는 데 주력이 배치될 겁니다.”
“우리는 벨기에로 먼저 공세를 가하지 않을 거요,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가 아닌 한.”
벨기에인들이 높은 확률로 맹렬하게 저항할 테니, 괜히 전력을 벨기에에서 낭비할 필요가 없다. 이미 런던이 무너진 상황이기도 하고.
“일단 최대한 빨리 대영제국의 항복을 받아내든 뭘 하든 해야 한다, 러시아랑 논의해서 종전 조건을 첨부해서 스코틀랜드에 항복 권고를 보내, 캐나다와 베를린에도.”
“거부하면 어쩝니까?”
나는 턱을 괴었다.
“글쎄, 어떻게 할까?”
“........ 무슨 생각이십니까?”
“이 전쟁이 한 4년 뒤에 터졌다면 좋았으리라는 생각?”
현직 미국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
그 다음 대통령, 월리엄 매킨리.
제국주의자.
팽창주의자.
미국의 고립주의를 깨트리는 첫 번째 인물.
“아니, 차라리 지금인 게 나을지도.”
현재, 미국은 사상 최악의 공황을 겪고 있다. 실업률은 하늘로 치솟고 디플레이션이 와서 농업은 초토화되었으며 은행 600여 개가 파산했다.
원 역사에서는 내후년에는 국가예산이 바닥나서 JP모건에 연방정부가 사정사정해가면서 돈을 빌리기까지 해야 했다.
그런 설상가상의 상황, 심지어 바로 내년에 중간선거가 있는 상황에서 클리블랜드가 당장 동원할 수 있는 대책은 뭐가 있을까?
“만일 에드워드 7세 왕과 빌헬름 2세가 평화를 기어이 거부한다면, 미국 대통령에게 밀사를 보내, 혹시 캐나다를 병합하고 싶은 생각이 없냐고 말야.”
지지율이 바닥을 치는 상황에서, 클리블랜드에게 있어서 제법 달콤한 유혹일 거다. 성공만 하면 지지율은 떡상이 확정이고, 영국이 이 정도로 약해진 기회는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쉽게 말해서 독이 든 성배지.”
받아들이면 엄청난 피해를 각오해야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없다.
‘거부하면 언론플레이 좀 해 주면 되고.’
여론 때문에라도 선전포고 안 할 수 없게 만들어주마, 언론플레이가 언제부터 비스마르크의 전유물이었더냐.
“캐나다도 날려먹고 호주로 도망가게 되면 그것도 웃기는 노릇이겠지.”
물론 미국이 그 과정에서 엄청난 피를 흘리든 말든 내가 알 바는 아니다. 영국과 죽이네 살리네 하면서 싸우든 말든, 내가 알 바도 아니다.
기관총이 나오고 참호전이 시작된 이상, 내가 먼저 공격해서 미련하게 엄청난 피해를 낼 생각도 없었다.
‘탱크 나오기 전에는 절대 선빵 안 갈긴다.’
원 역사에서 그랬듯이 해상봉쇄만 미친 듯이 하다 보면 독일은 알아서 무너진다. 애초에 식량 생산에 딱히 적합한 동네도 아니고.
***
토론토, 캐나다.
임시 내각은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명색이 평화의 제안이었지, 숫제 항복 요구였다.
“러시아 제국의 요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 불가리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루마니아, 아라니아, 마케도니아 등등 범슬라브권에 대한 합병 인정,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한 오스만 제국의 유럽 영토를 몽땅 내놓을 것.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조선, 일본 등에서의 러시아의 ‘특별한 지위’ 인정.
프랑스의 요구조건. 자를란트의 할양, 라인란트는 프랑스의 보호국이자 자주 독립국으로 분리독립, 라인란트의 북독일 연방 및 그와 유사한 국가연합에 대한 가입 불허, 사르데냐 섬의 할양, 태평양 식민지들 다수의 할양, 프랑스의 우방이자 동맹국으로 싸운 콜롬비아에 영국령 기아나 식민지를 넘길 것. 인도에서 반란을 일으킨 유대인들을 위해 인도 서부, 아라비아 해 연안의 서부 해안 평야 지역을 떼어줄 것. 영국령 인도와의 국경은 서가츠 산맥으로 한다. 이스라엘의 보호국은 영국이나 프랑스가 아닌 제 3국 가운데에서 선정한다. 벨기에를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분할하며, 세부적인 영토 분할은 양국 간의 추후 협상에서 정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요구조건, 북부 이탈리아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넘길 것,
하나하나가 눈 뒤집혀도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이었다.
문제는, 이들은 충분히 이 조건을 관철할 수 있다는 거다.
먼저 러시아의 요구조건은 그냥 자기들이 점령한 영토를 합병하거나 괴뢰화할 건데 니들이 그걸 승인해줬으면 좋겠다는 것, 사실 막말로 영국이 안 된다고 해도 러시아가 무시하고 강행해버리면 영국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프랑스의 요구조건은 그래도 아직 자기들이 손에 못 넣은 것이긴 하지만, 문제는 저들이 영국 본토 위에 눌러앉아 있고, 프로이센의 병력 중 6~7할 가량이 벨기에에서 보급이 끊어진 채 전진도, 후퇴도 못하고 말라죽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병력이 몰살당하면 프로이센은 문자 그대로 나라 기둥이 통째로 뽑히는 셈이고, 프랑스의 요구도 한층 더 강경해지리라.
영국이야 본토가, 잉글랜드가 날아갔는데 뭘 어쩌겠는가. 들고 일어난 아일랜드인들은 아예 독립을 일방적으로 선포해버린 상황이다.
문자 그대로 본토 돌려받고 싶으면 식민지에서 팔다리 한쪽씩 자르라는 것.
역으로 식민지를 이미 다 털린 상황이지만. 본토를 짓밟고 있는 게 프랑스라는 게 문제다.
“일단 협상에 나서야 합니다.”
“우선 러시아의 요구조건을 거부해봤자 러시아를 막을 힘이 없습니다. 냉정해져야 합니다.”
문자 그대로 러시아와는 협상 불가, 뭔 힘이 있어야 협상하지.
“기아나 식민지를 넘기는 것 정도는 사실 충분히 가능합니다. 다만 인도는........”
“인도 서부 해안 평원 지대는 인도 식민지의 핵심에 가까운 곳인데, 그곳을 통째로 독립시킨다면 사실상 인도 식민지를 포기하라는 통첩이나 다름없습니다!”
한참 침묵하고 있던 에드워드 7세가 입을 열었다.
“우선 협상하도록 하겠소, 일단 러시아의 입장을 후퇴시킬 수단도, 그리고 러시아가 협상에 임할 의지도 없다면 좋소, 러시아의 조건은 받아들이는 쪽으로 가지. 하지만 프랑스의 조건은 최대한 협상할 수 있을 만큼 협상해서 조건을 최대한 줄이는 쪽으로 움직이시오.”
“알겠습니다. 폐하.”
***
프로이센, 베를린.
빌헬름 2세는 분노에 차서 길길이 뛰었다.
“이 쓸모없는 것들! 이 멍청이들 같으니라고! 도대체 무슨 짓을 해야 5개 군이 통째로 벨기에에서 포위당한단 말인가!”
“..........”
“프랑스가 요구한 게 뭐라고?”
“자를란트는 프랑스에 합병, 라인란트의 분리독립 및 프랑스의 독립보장, 일단 프로이센에 요구한 것은 이 두 가지입니다.”
“루르를 독립시키라고.”
루르는 어디로 보나 독일의 것인데, 물론 프랑스가 삼키겠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지만, 괴뢰화시키려 들 것 아닌가.
“지금 남아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되지?”
“3개 군입니다. 나머지 병력은 모두 벨기에에 포위되어 있습니다, 예비군 병력을 추가로 징병하면......”
“그 3개 군 중 하나는 동부와 남부전선을 전부 책임지고 있고, 나머지 2개 군은 알자스-로렌 방면에 있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이 상황에서 러시아가 서진하기 시작하면 막을 수 있는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북상한다면?”
“이중제국 군대의 북상 가능성은 낮습니다. 무엇보다 이중제국군은 현재 이탈리아에 맞서 고전하고 있는데 이 상황에서 전선을 하나 더 열 확률은 낮습니다, 진짜 문제는 러시아군이고, 예, 장담할 수 없습니다, 페하.”
“........ 빌어먹을.”
“러시아와의 단독강화 가능성은 어떤가.”
“니콜라이 2세는 표트르 3세가 아닙니다.”
“그 정도로 사리분별을 못 하는 멍청이는 아니지, 나도 알고 있네. 오히려 내가 생각하는 정도로는 생각하지 않겠나.”
빌헬름 2세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기적이 여기서 반복될 리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