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리벤지 매치(2)
전쟁을 시작하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동맹국에는 이변이 발생했다.
알렉산드르 2세가 노환으로 세상을 뜬 것이었다. 나이를 감안했을 때 오래 버티긴 했지만.
“니콜라이 2세 폐하께 즉위를 축하한다고 전해드리게, 그리고 지금 상황이 여의치 않아 직접 대관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에 양해를 구하게.”
“전쟁 중이시지 않습니까. 충분히 이해하고 계십니다.”
나는 러시아 대사를 흘겨보았다.
“그리고 조속히 동프로이센에 대한 공세를 취해 줄 것을 요청하는 바이네.”
“..... 차르께 전달드리겠습니다.”
망할 것들이 지금 서로 짰냐? 지금 그 뭐 가짜 전쟁 그런 거야?
독일 놈들은 동쪽으로 한 발자국도 안 가고 국경을 텅텅 비워놨고, 러시아군은 동프로이센을 찌를 생각은 안 하고 발칸을 집어먹고 오스만 제국을 쥐어패서 영토 땅따먹기 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극동에 대규모 병력을 보내기까지 했다니 옆에서 보는 우리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조선이랑 일본 따위 조질 병력 있으면 동프로이센을 찌르라고!
그리고 그 병력은 지금 다 알자스-로렌과 벨기에로 밀고들어오고 있다, 에미.
내가 진짜 러시아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은 굉장히, 굉장히 많은데 그래도 명색이 황제인지라 참고 또 참고 있다. 대부분이 그다지 공식석상에서 할 만한 말은 아니기도 하고.
다행한 점이 있다면 알자스-로렌의 요새화는 충분하고, 벨기에는 교통 인프라 자체가 충분하지 않아서 우리가 참호전을 준비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단 거지만.
그렇다. 1914년이 20년 일찍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 독일 놈들은 이제는 오스트리아-헝가리도 이탈리아에게 맡겨놓고 관심을 끈 모양새다. 사실 이거 대전쟁이 아니라 그냥 보불전쟁, 오스트리아-이탈리아 전쟁, 러시아-튀르크 전쟁 따로따로 치르는 건가? 그럴듯한데.
***
토론토, 캐나다.
“국왕 전하 만세!”
“국왕 폐하, 장수하소서!”
대관식은 끝났다.
빅토리아 여왕은 스코틀랜드에서 항전하고 있었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전황은 어려웠다. 아직 식민지들은 전부 영국 왕실에 충성하고 있고, 식민지의 총독들은 결코 영국 본토에 세워질 괴뢰정부의 말 따위는 들어먹지 않으리라.
그러나 식민지들이 전부 그들에게 충성한다고 해도 본토를 못 되찾으면 말짱 꽝이다. 다행히 충성스러운 신민들은 본토 주둔군이 죄다 전멸 판정을 받은 상황에서도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고, 왕립해군의 전함들은 압도적인 머릿수를 동원해 목숨을 걸고 프랑스의 수송함대를 끊어먹고 있다.
그 와중에 격침당하는 전함과 순양함들도 많았지만, 육상과 해상에서의 게릴라는 프랑스군이 스코틀랜드로 진격하는 걸 주저하게 만드는 것만큼은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잔 다르크급이 아무리 무서워도 선단마다 잔 다르크급을 상주시킬 수는 없는 노릇, 대규모 수송선단이 갈 때는 한 척 정도는 동반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잔 다르크급은 세계에 5척밖에 없는 귀하신 몸이다.
전투를 거치고 정비하는 것 등을 고려하면 전쟁 극초기 같은 상황을 제외하고 프랑스가 동시에 동원할 수 있는 최대 숫자는 많아야 세 척, 게다가 북독일 연방, 그리고 이탈리아와의 싸움은 안 할 건가?
그렇기에 아직 애든버러까지 진격한 프랑스군이 빅토리아 여왕을 사로잡는 상황까지 나오지는 않았지만, 시간문제였다.
이에 빅토리아 여왕은 결단을 내려 캐나다로 탈출한 에드워드 7세에게 양위를 선언했다.
물론 호화로운 대관식은 없었다. 거의 형식상의 대관식이었다. 애초에 대영제국에게 있어서는 현 상황은 이미 충분한 굴욕이었다. 이번 대관식은 사실상의 본토 포기 선언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호화로운 대관식을 할 의지도 없었고, 할 능력도 없었다.
더욱이 시기를 맞추어 아일랜드 독립 세력이 봉기했고, 아일랜드 주둔 영국군은 지원을 받을 가망도 없이 절망적인 저항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아무리 그들이 잘 싸워도 탄약도, 식량도 없이 뭘 하겠는가.
그러나 탈출시켜줄 여력은 없고, 항복시킨다고 하면 아일랜드인들이 그들을 가만 둘지도 의문이었다.
스코틀랜드의 저항군이 얼마나 더 버틸지도 미지수, 왕립해군의 전함들도 당연하게도 수가 꾸준히 줄어가고 있었다.
일단 초반에 본토함대가 박살나고, 각 지역에서 모아서 프랑스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인다고 해도 잔 다르크급에 재수없게 잘못 걸려 격침되는 경우도 많았고, 해안포에 걸려들거나 기뢰에 당하거나, 아니면 아예 프랑스의 구형전함에게 숫적으로 밀려서 격침당하기도 했다.
영국 해군의 대패 후에는 카이저마리네와 레지아마리네 모두 식겁해서 항구에 틀어박혀 해안포 지원이나 받으며 접근거부 전략이나 세우면서 프랑스가 다음 순서로 자기들을 패러 오지 않기를 바라는 판이었다.
대영제국에게 있어 유일한 희망은, 프로이센군의 선전뿐이었다.
***
우리의 작전계획은 기본적으로 모든 부대를 북해에서부터 스위스까지 배치하고, 요새화가 충분히 진행된 알자스-로렌은 현상 유지를 할 수 있는 병력만 배치하고 주력을 벨기에 방면에 배치하는 것이었다.
벨기에로 적의 주공이 올 것이라는 예상 하에 세워진 계획이었고, 이는 프로이센의 막대한 예비군 동원 능력을 감안한 것이다. 게다가 세계 최초의 기관총과 신식 야포를 도입한 것도 우리니까 이만하면 1차대전기 프랑스군보다 더 우리 사정이 좋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벨기에 방면으로 우회해 온 적 병력 규모가 얼마라고?”
“대략 5개 야전군 병력으로 보입니다.”
“많기도 하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놈들이 벨기에로 꾸역꾸역 오고 있단 말이지.”
진격 속도야 안 봐도 비디오다, 19세기의 벨기에 인프라로, 아무리 벨기에가 저항이 없다고 해도 슐리펜 계획을 그대로? 철도 상태는 벨기에가 저항하는 거랑 별로 차이도 없을 거 같은데.
내가 장담하건데 지금 독일군 참모본부, 특히 군수과는 죽어나갈 거다. 어디서 사고 하나 발생해서 열차 하나만 지연되어도 개판이 날 테니까. 아니, 시간상 슐리펜 계획의 특성인 그 정밀한 동원계획까지는 못 짰을 가능성도 제법 있긴 하다.
슐리펜 계획이 내가 알기로는 슐리펜이 정확히 구상한 시점은 모르겠지만 슐리펜이 퇴임할 때쯤에 기본 골격을 잡아놓고, 슐리펜은 죽어가면서도 계속해서 진격안을 검토하고, 검토하고, 검토한 데다 소 몰트케는 그걸 독일 내의 모든 철도역과 화차 사용, 각 부대별 이동을 분 단위까지 정밀하게 맞물려서 계획했다니까. 아마 그 정도로 정밀한 계획은 아직 없을걸?
슐리펜은 죽기 직전까지 사단 몇 개만 더 있었더라면 이런 식으로 중얼거렸다는데, 슐리펜이 국가에 대한 마지막 충성 겸 혼신의 역작으로 만든 걸, 아무리 본인이라지만 그렇게 단시간 내에 완성시키지는 못했을 거다. 즉 그런 정밀함도 없다는 거고, 진격 속도는 배는 느려졌을 거다.
“저놈들의 최우선 목표는 우리를 라인 방면으로 끌어들여 섬멸하는 것일 거다. 알자스-로렌에 배치된 모든 병력에게 독일군의 유인 시도가 있을 가능성이 높은 만큼 현 위치를 고수할 것, 그리고 진격을 불허한다고 재차 강조하라.”
“알겠습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지만, 방어도 때로는 최선의 공격이기도 하다.
네덜란드 안 통과하고, 벨기에와 아르덴 산림지역만 써서 온다고? 아르덴은 어디서 탱크라도 굴러나오기 전에는 난공불락이고 벨기에 회랑은 좁아터졌다. 폭격기만 있었으면 갈아버렸을 텐데 비행기란 것들이 죄다 제 몸 가누기도 어려운 놈들이라, 비행선은 저런 목표를 상대하기 부적합하고.
공간이 좁아터졌는데 축차투입 말고 방법이 있겠냐? 그리고 나오는 공간에는 우리 군이 진을 치고 있다.
‘한번 와 봐라, 그놈의 슐리펜 계획, 어디 얼마나 잘 써먹나 보자.’
***
“카이저 만세! 프로이센 만세!”
“돌격! 돌격하라!”
-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
지옥의 합주곡이 시작된다.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한바탕 포격을 주고받은 다음, 정해진 대로 공격자인 독일군이 총검돌격을 가한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참호에서 기관총을 퍼붓고, 좀 더 가까이 가면 소총탄이 핑핑 날아들기 시작한다.
“어딜!”
“커흑!”
참호로 뛰어든 첫 번째 독일군의 피 묻은 피켈하우베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총검에 그대로 목을 찔린 병사는 피를 한 움큼 토하고는 절명했다.
-탕! 탕탕탕!
달려드는 독일군의 얼굴에 탄환을 박아준다. 애쓰게 볼트를 당길 것 없이 방아쇠만 당기면 바로 차탄이 나가는 브라우닝 자동장전 소총은 단발 위력은 마우저 소총보다 약할지언정 다가오는 적들에게 줄줄이 탄환을 박아주는 데에는 최적이었다.
징집병들에게는 한 발 한 발의 정밀한 사격을 당연히 기대할 수 없었기에 좀 더 가까이 온 다음에 발포해야 한다고 쳐도 적의 몸통에 박히는 탄환의 기대수량은 한 발이 빗나가도 바로 차탄을 쏠 수 있는 반자동소총이 볼트액션보다 낫다는 건 당연한 것, 일선 참호에 도달하기도 전에 쓰러져나가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면도날 철조망에 걸려 쓰러지고, 기관총에 벌집이 되고, 지뢰를 밟아 터져나간다.
프랑스-벨기에 국경지대 전체는 개전이 확실시된 직후부터 프랑스군이 열심히 만들어놓은 인간의 철저한 도살장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머릿수가 워낙 많았기에 최전방 참호가 돌파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프랑스군은 당연히 이를 상정하고 있었다. 보불전쟁 후반부를 장식한 파리에서의 지옥같은 시가전과 참호전을 경험한 게 그들이었으니.
참호전은 전차가 나오기 전까지는 절대 파훼되지 않았다. 후방의 보급능력이 작살나지 않는 한 영원히 유지될 수 있는 게 참호선이다.
적에게 넘어간 참호를 향해 아군의 포탄이 쏟아졌고, 참호 안에서도 착검까지 한 길쭉한 볼트액션 소총을 든 독일군보다는 프랑스군이 더 유리했다.
-타타타타타타!
“죽어라 크라우트 놈들아!”
한 프랑스군 병사는 막 참호선을 넘은 완전자동으로 개조된 브라우닝 소총을 난사했다. 곧장 막 참호에 들어온 독일군 병사들의 집중사격이 날아들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 병사는 기어이 15발의 탄창을 싸그리 비워버린 뒤에야 쓰러졌다.
그 병사 한 명에게 4명이 죽고 한 명이 부상당했다. 그 시점에서 그들은 선택해야 했다.
여기서 전우를 후송하려다가는 적 기관총 화망을 돌파해야 할 가능성이 높고, 게다가 최소 두세 명이 빠져야 한다. 그렇다고 여기 놔두면 무조건 죽는다.
병사들은 아주 잠시 고민했지만, 프랑스군이 그들의 걱정을 덜어 주었다.
부상당한 동료를 구하기도 전에 그들의 머리 위로 프랑스군의 75mm 나폴레옹 야포탄이 정확하게 직격한 것이었다.
그렇게 산산조각난 10여 개의 팔다리가 본래 누구의 것이었는지는 이제 아무도 신경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런 상황이 전선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