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리벤지 매치(1)
“오게 두어라. 기관총이 굶주렸다.”
“예?”
내 헛소리에 앙리 장군이 눈썹을 치켜떴다.
“크흠, 흠, 벨기에를 통해서 오고 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의미없군, 벨기에 방면군에 증원병력이나 좀 보내도록.”
“..... 의미가 왜 없습니까?”
“지금 프로이센군이 몰려오고 있지, 벨기에로, 그러나 벨기에가 어디 사람 다니기 좋은 길인가?”
일단 내가 진작부터 벨기에 우회 가능성을 예측한 상태에서 인근에 병력을 배치하고 미리미리 요새화 준비를 완료했다는 부분은 제외하고 이야기하자, 솔직히 저 슐리펜 계획이 얼마나 유명한데 당하는 쪽이 바보 아닌가.
1914년 기준으로도 벨기에가 순순히 독일 제국에게 문 열었다고 해도 계획상 충분한 병력을 밀어넣기에는 벨기에가 가진 교통 인프라 자체가 부족한지라 의미가 없었다는 게 중론이다.
하물며 1893년에? 슐리펜이 아니라 슐리펜 할아버지가 와도 못 지나가고, 어떻게 밀어넣었다고 쳐도 그 다음에 와야 할 보급물자가 못 오고, 육로로 행군에 오는 바람에 탈진한 병사는 총 들 힘도 없을 거다.
그러면 뭐 기관총으로 앉은 자리에서 갈아주면 그만이지. 슐리펜은 패배 책임을 물어 모가지가 날아갈 거고. 그 자리에 소 몰트케가 앉아주면 좋긴 하겠는데.
소 몰트케의 능력은 명백히 몰트케보다는 떨어진다는 게 중론이다. 호부견자.... 아니, 삼촌이랑 조카니까 호숙견질? 물론 그래도 무슨 원균급 졸장까지는 아니다. 사실 원균급만 졸장이라고 부르면 졸장의 범위가 좀 많이 줄어들겠지만, 그래도 나름 어느 정도 능력은 있다고 보는 게 맞겠지, 안 그랬으면 아무리 몰트케의 조카라고 해도 거기까지 쉽게 올라가지는 못했을 테니까.
문제는 '충분히' 유능하지 않다는 거다, 사람은 자기의 무능이 드러날 때까지 승진한다던가.
물론 적이 멍청하게 행동해 주기를 바라는 것만큼 무의미한 것도 없지만, 일단 전선이 한 번 참호전으로 고착되면 게임 끝이다.
“러시아군은 발칸으로 신속하게 진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에 대규모 러시아군이 진입했고, 콘스탄티노플로 러시아군이 진격하고 있습니다.”
차르의 뜻인지는 알 수 없지만, 러시아 내에 들어가 있는 스파이들의 보고에 따르면 러시아 정부 내에서는 이번 기회에 슬라브를 대통합, 그러니까 발칸 전역을 집어삼키고 싶어한다는 주장이 돌고 있다.
그 슬라브 대통합을 하겠다는 게 무슨 뜻이냐,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그리스, 콘스탄티노플 서쪽의 모든 오스만 영토,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등등을 몽땅 집어삼키겠다는 소리다. 괴뢰국도 아니고 아예 합병해서.
당연하지만, 먹으면 100%, 아니, 140% 탈난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그런 여론이 강한 데다.... 알렉산드르 2세가 지금 국정을 주도하고 있는지가 불명확하다. 그 전부터 건강이 안 좋아져서 요양이 잦았는데, 선전포고 이후부터 공식석상에 단 한 번도 나오지를 않고 있다.
그렇게 되면 가능성 있는 섭정은 계승 서열 1위인 니콜라이 황태손. 원 역사의 니콜라이 2세다.
‘.... 그 팔랑귀라면 충분히 옆에서 부추기면 가능할 법도 한데.’
“러시아에서는 극동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고 합니다.”
“왜 안 나는지 이상하다 했어, 그래, 홍콩 총독부인가?”
“아닙니다.”
“응? 아냐? 그럼 캐나다군?”
“아닙니다.”
“...... 그럼 뭔데?”
“조.....선? 조선과 일본... 조일 연합군이랍니다. 영국군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보니 영국 정부가 급하게 끌어들인 것 같다는 주러 대사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에?”
아니, 걔들이 왜 거기서 나와?
***
조선, 경복궁, 근정전.
조선 국왕 이형은 영국 공사를 맞이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영제국은 조선 왕국의 도움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만주 전역은 조선의 것이 되도록 대영제국은 모든 도움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구라파에서 가장 강한 나라라는 영길리의 대표자라는 공사는 그를 찾아와 입발린 소리로 아첨하고 있었다.
“왜국을 끌어들인 것이 아직도 걸리는구려, 그들은 만주에 손 대지 않는 것이 맞소?”
물론, 걸린다는 것은 ‘이미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전리품에 일본이 침을 흘릴까 봐 신경쓰는 것에 가까웠지만, 영국 공사는 신경쓰지 않았다.
사실, 이미 일본에도 이중 약속이 되어 있었기도 했고. 무엇보다 두 국가는 문자 그대로 총알받이였다. 러시아의 발목만 잡아도 그 역할을 다 하는, 쓰고 버리는 패.
그런 놈들 따위에게 뭘 약속해주든 지킬 필요는 애초에 없었다.
“물론입니다. 저들은 북방의 섬 몇 개를 약속받았습니다.”
속으로는 상대의 미련함을 비웃으면서도 공사는 말을 이었다.
“청나라는 결코 개입하지 않을 것입니다. 조선은 자주국인데 굳이 청의 꼭두각시로 움직여야 할 필요도 없죠.”
“하하! 맞는 말이오, 공사가 정말 맞는 말을 잘 하는구려, 이번 전쟁이 끝나 만주를 되찾는다면 그때는 칭제 건원을 해도 될 것이오.”
당당하게 칭제건원을 논하는 이형에게 주 조선 영국 공사인 토머스 공사는 열심히 맞장구쳐주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싸늘했다.
조선군이 어떻게 굉장히 선전해서 블라디보스토크라도 함락해준다면 바랄 나위가 없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러시아군이 병력을 일부라도 재배치해준다면 충분했다. 동양의 원숭이들은 숫자만 엄청나게 많으니, 러시아도 어중간한 병력만으로는 제압하지 못할 터, 그러면 유럽에서 승전을 거둘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물론 현실은 달랐다. 런던 함락과 동시에 꽁지에 불붙은 내각이 삼국동맹을 공격할 수 있는 모든 국가를 끌어들이기 위해 발버둥친 결과 조선과 일본이 선전포고를 하기는 했지만, 간도에서 청군과 쌈박질 좀 하던 소규모 병력이 러시아 카자크에게 궤멸된 것 이외에는 제대로 된 소집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병력이 소집되고는 있었지만, 이들을 북쪽으로 올려보낼 능력도 없는 건 덤이었다. 차라리 병사 하나에 소총 한 자루를 지급 못 하는 육군과 증기선 하나 없는 해군일지언정 육군과 해군의 동원은 어찌어찌 되고 있는 일본은, 영국의 눈에는 여전히 부족하기는 했지만 상대적으로 양반이었다.
물론 상관없었다. 원숭이들이 얼마나 죽든 간에, 저 곰탱이들의 바짓가랑이라도 잡으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
파리, 프랑스 제국.
“17순양함전대가 전멸했습니다.”
“이유는?”
“두 배에 달하는 왕립해군 순양함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었답니다. 분전한 결과 적함 두 척을 격침하기는 했지만.....”
나는 얼굴을 구겼다.
모든 함대에 잔 다르크급을 붙일 수는 없다. 그리고 잔 다르크급을 떼고 붙으면 프랑스 해군은 왕립해군에 비해 압도적인 열세다.
질적으로도, 숫적으로도.
게다가 초도함 잔 다르크는, 기밀사항이지만 안정성이 떨어져서 제대로 된 원양항해능력이 부족하다. 지금 북해에서 차단작전에 나선 게 구식전함과 순양함뿐인 이유가 뭐였던가. 영국해협은 사실상 연안이었고.
2번함부터는 설계를 대폭 바꿔서 안정성을 높이긴 했지만 그래도 불안불안한 게 현실이었다. 지중해 너머 이탈리아의 압박 등이 쉽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지금 왕립해군의 지휘권을 잡은 게 누구라고 했지?”
“피셔 제독입니다.”
“넬슨이 환생한 것 같군, 제기랄, 트라팔가르에서 이겼는데 왜 전쟁이 안 끝나는 거지.”
런던은 무너졌다. 프랑스군은 런던을 장악했고 레드 코트들은 전멸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계속 저항하고 있다.
“신대륙과 아프리카 식민지에서도 전투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알제리와 기아나의 상실은 기정사실화된 듯 합니다.”
“포기해, 식민지는 협상으로 되찾을 수 있다. 타국에 팔아넘기더라도 더 좋은 곳을 뜯어오면 돼.”
“알겠습니다.”
“명심해라, 결국 승부는 유럽 대륙에서의 승부로 결정된다. 어차피 조일 연합군 정도면 러시아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겠지만......”
“폐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이탈리아군에게 참패했답니다!”
“........ 에라이 진짜.”
저놈들은 개전 이후로 이겼다는 소식을 못 들어봤어.
***
루이 나폴레옹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
“나라에 공헌도 하고, 겸사겸사 너도 이제 결혼해야지. 이 노총각아. 형이 벌써 애가 둘이다.”
“잠깐,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형, 지금 내가 뭘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니 신붓감 알아놨다고, 다만 니가 해외에 나가서 살아야 하는 리스크가 있기는 한데, 한참 어린애랑 결혼하는 거니까 그 정도는 감수해라.”
“아니, 누군데? 아니, 그 전에 나랑 상의도 안 하고.....”
“무려 한 나라의 여왕님 되신다. 감사한 줄 알아, 나도 공주였지 여왕은 아니었거든?”
“형은 황제잖아, 그리고 여왕? 농담이지?”
“진담이다. 네덜란드 정부와 접촉해서 너랑 그 동네 여왕이랑 혼담이 오가고 있다, 올해 13살이기는 한데 약혼은 지금 하고 3년쯤 뒤에 정식으로 결혼할 거다.”
“아니 왜 나한테 말도 안 해주고......”
“왜, 마음에 둔 여자라도 있냐?”
“.......”
말문이 막힌 걸 보자, 나는 확신했다.
“있구만.”
“그게..... 그..... 마리라고, 응....”
“마리가 누군데? 어느 가문?”
“..... 내가 고용한 하녀인데.”
“돌겠네 진짜.”
차라리 시녀면 낫지.
시녀랑 하녀는 다르다. 왕가의 시녀급은 최소가 백작부인급인 엘리트들이다. 물론 귀천상혼이 굉장히 깐깐한 합스부르크 왕가에서는 백작 영애랑 결혼했다고 황태자의 자식들의 계승권을 박탈한 사례도 있긴 한데 그건 이중제국 놈들이 엄청나게 깐깐한 거고, 사실 황태자 계승권도 박탈하려다 말았다지?
그리고 하녀는..... 흔히 생각하는 그런 거 맞다. 물론 프랑스에서는 귀천상혼이 혁명 이후 굉장히 널널한 편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래도 하녀급은 아니지 진짜. 왕실의 격 문제인데.
“..... 헤어지라고 하고 싶지만 사람 마음 그렇게 쉽게 되지는 않겠지?”
“.........”
“정부로 삼든가 해, 대신 조용히, 정식 결혼은 꿈도 꾸지 말라고 하고, 만약 그 여자애 때문에 네덜란드랑 외교 문제 생기면 알지? 내가 언제 암살자를 보낼지 몰라.”
반은 농담 반은 진담이었다.
“고마워, 형, 그리고.... 미안.”
“지금 맘 같아서는 니 쪼인트부터 까고 싶으니까 다물고 있어.”
“아니, 근데 진지하게 이건 형이 나랑 이야기 하나 안 하고 마음대로 일을 추진해서 생긴 거 아냐?”
“너 장가보내라고 날 들볶은 건 어머니거든? 안 그랬으면 나도 니 인생 니가 알아서 하라고 신경 끌 생각이었어, 하녀랑 놀든 성냥팔이 소녀랑 놀든. 불만 있으면 어머니한테 가서 따져.”
“아 그건 좀, 화나신 어머니는 나도 무서운데. 근데 조인트가 뭐야?”
“알려줄까? 잠깐 그 자리에 가만 있어봐라.”
몸으로 알려주마, 망할 녀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