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개전(1)
“제독님, 본토에서 긴급 전문입니다.”
“뭔가?”
“프랑스 제국이 현 시간부로 대영제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했답니다.”
“..... 알겠다, 즉각 등화관제 시작하고, 견시들은 최고 경계태세를 유지하도록.”
존 피셔 제독은 본인의 기함 HMS 로열 소버린의 함교에서 묵묵히 해상을 바라보앗다.
불과 며칠 전 취역한 이 함선은 지중해 함대의 기함으로 배치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전쟁 위기가 닥치면서 본토함대에 임시 배속된 상태였고, 이번 항해는 그의 제독으로써의 첫 일선 배치였다. 전함의 함장이었던 그가 작년에 제독으로 승진한 뒤 처음 맡은 직무가 본토의 해군 병기창 책임자였던 탓이다.
그러다가 이번 위기가 오면서 급조된 전함전대의 전대장으로 임명되어 일선에 나오게 되었다.
당연히 수병들도 대부분 신병이고 사관들도 다수 경험이 모자랐다.
제독으로써는 환장할 노릇이었지만, 이제 와서 숙련병을 달라기에는 다른 제독들이 주려고 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불안감은 그런 곳에서 오지 않았다.
‘조안 오브 아크.’
그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전함.
그러나 왕립해군의 제독들은 그의 주장을 ‘여러 전훈을 감안해 볼 때 비현실적이다’ 한 마디로 묵살했고,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여왕 폐하께 보낸 투서도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분명 대영제국의 수뇌부는 조안 오브 아크의 많은 배수량이 고성능을 어느 정도 보장해주리라고는 생각했다. 그러나, 왕립해군은 큰 배보다는 많은 배를 선택하며 발전해온 군대다.
식민지와 여러 해얀에 뿌려놓을 함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쓸데없이 배수량 큰 전함 한 척보다는 여러 척의 적당한 배수량의 전함이 훨씬 유리하다는 게 그들의 생각.
만약 프랑스 해군이 아크급 전함을 앞세워 공격해 온다면, 지금 이렇게 대규모 함대를 결집시켜 놓는 것은 되려 먹이를 제공해주는 것이 아닐까.
전쟁 전에 그들도 아크급 전함을 다수 건조했다면 최고였겠지만, 아크급 전함을 건조하자는 제안이 기각되었을 때 피셔는 다른 전략을 생각해야 했다.
해군력이 부족한 상태의 적에게만 아크급 전함이 있고, 자기들에게는 없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전함은 다른 함종으로 어떻게 못 하니까 전함이다. 아크급 전함을 상대할 수 있는 건 동급의 아크급뿐이다.
결론은 빠르게 나온다.
함대를 분산시켜서 적들의 분함대를 털어먹는다. 전함의 수에서는 왕립해군은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고, 프랑스군은 전함의 질을 제외하고는 총체적 열세다.
프랑스가 뭔 재주를 부려도 모든 함대에 전함을 동행시킬 수는 없는 법, 프랑스 제국이 보유한 순양함이나 그 이하 함급들을 유인해서 수를 계속해서 줄여나간다.
이를 위한 전제조건은 다양하지만, 절대 결전에 응해줘서는 안 된다. 결전에 응하는 순간 프랑스가 만들어낸 강철의 다섯 자매가 미쳐 날뛰면서 왕립해군의 전함이란 전함은 죄다 용궁으로 주소지를 이전해주고 그 다음에는 전함 수가 크게 줄어든 왕립해군은 해안포 지원을 받으면서 항구 지키기 급급하다가 프랑스 해군에게 죄다 찢겨나가는 결말밖에 안 보인다면 과장일까.
문제는 현재 전함들이 대규모로 이 곳, 영불해협으로 집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내각과 군부의 불안은 이해한다. 프랑스 제국의 통신이 칼레에서 급증하고 있고, 네덜란드와 프랑스가 비밀리에 접촉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가능성은 낮지만 네덜란드의 이반에도 대비하고 칼레도 틀어막으려면 대규모 전함들을 모아서 아예 기어나올 여지도 차단해버리는 게 최선이다.
기존의 관념으로써는 당연한 일이지만, 피셔 제독은 이게 적이 노리는 바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짙게 들었다.
프랑스 함대가 대규모로 출동하면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프랑스 함대를 갈아버리겠다고 몰려들 거다. 이 시점에 프랑스 함대의 출격 정보가 유출된 것도 수상했다.
왕립해군이 제발 한 곳에 모여주기를 바라는 듯한 행동.
왕립해군은 이번 전투가 제 2의 트라팔가르 전투가 될 거라고 자신하고 있었지만, 어떨까.
‘만일 아크급이 예상한 것대로의 전력, 어쩌면 그 이상의 전력이라면, 왕립해군은 전멸을 면치 못한다.’
아니, 전멸만 면치 못할까. 그대로 프랑스 해군이 상륙을 기도해도 아무것도 못 한다. 현재 로열 네이비가 상륙에 대해서 아무 걱정도 하지 않는 것은 상륙해봤자 제해권이 영국에 있는 이상 바로 끊기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시대도 아니고 보급 없이는 육군은 아무것도 못한다.
런던에 상륙한다거나 하면 깽판을 치면서 런던을 불바다로 만드는 정도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걸 아니만큼 해안포와 전함들이 런던은 보호하고 있다.
그러나 그건 왕립해군의 건재가 전제조건.
왕립해군이 이 해전에서 전멸당한다면, 그때는 정말 끝장이다.
“함장.”
“예, 제독님.”
“지금.......”
순간, 어두운 하늘이 밝아졌다.
“뭔가?”
“조명탄입니다!”
견시의 외침에 피셔 제독은 다급히 쌍안경을 들었다.
“어딘가?”
“어.......?”
견시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조명탄을 쐈다는 건 적함이 어딘가 있다는 것, 함대 상공에서 조명탄이 터진 것을 보아하니 인근이 분명한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그 순간, 저 멀리에서 불길한 포성이 울렸다.
***
원시적인 형태의 복엽기 몇 대가 고고도를 날아가면서 조명탄을 떨어트렸다.
황제가 요구한 급강하폭격 능력이나 어뢰 투하 능력은 기술적 문제로 구현하지 못했지만, 낙하산에 매단 조명탄을 적당히 집어던지고 가는 것쯤은 이 시대의 전투기로도 가능했다.
기계적으로 수많은 이들이 움직였다. 측거의의 프리즘을 이용한 거리 측정, 풍선을 이용한 풍향과 풍속 측정 등 수많은 변수가 빠르게 사격통제장치에 입력되었다. 이날을 위해 오로지 이것만 훈련한 부사관들의 손놀림이 재빨랐다.
-덜컹!
톱니바퀴가 돌아가며 사격 제원이 산출되자, 포술장이 사격 제원에 맞춰 포를 조준했다.
“현재 시각 파리 시간 00시 06..07분이군, 사격을 허가한다. 트라팔가르의 설욕을 오늘 이 자리에서 한다!”
“발포!”
함장의 명령과 함께 잔 다르크의 함포들이 일제히 영국의 구식 전함들을 향해 불을 뿜었다.
“근탄!”
“포술장! 5탄 내에 협차를 기대하겠다.”
“알겠습니다!”
잔 다르크급 전함의 승무원들은 일개 사병까지도 모두 최고의 대우와 지옥훈련을 모두 받은, 프랑스 해군에서 걸러내고 걸러낸 최정예, 야간전은 그들에게 있어 결코 약점이 아니었다.
“제독님, 구축함전대가 뇌격 허가를 요청합니다!”
“불허한다, 요청할 거면 조명탄 터지기 전에 했어야지! 적 함대의 전투력이 절반 이상 상실되면 전진을 허가하겠다.”
“알겠습니다!”
물론 조명탄 터지기 전이라고 구축함전대가 딱히 뇌격을 할 만한 상황이었냐면 아니기는 하지만, 조명탄이 터진 이상 더더욱 어렵다.
“협차!”
여러 개의 물기둥들이 일제히 한 척의 전함 주위에서 피어났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적 전함 한 척에서 불꽃이 피어났다.
“명중!”
“계속 쏴! 적 함대를 모조리 수장시킨다!”
***
태양이 솟아오르자 전투 상황이 명확해졌다.
도무지 믿을 수 없지만, 왕립해군은 일방적으로 도살당하고 있었다.
“HMS 임플래커블 격침!”
“HMS 로열 소버린 퇴함 진행중!”
“이게.....”
말이 되나.
전함들이 떼거지로 덤벼드는데 그 전함들이 단 다섯 척을 이기지 못하고 줄줄이 피탄당하고, 연기를 흘리고, 대파되고, 침몰하고 있었다.
그들을 조롱이라도 하듯이 최대 사거리 넘는 거리에서 이를 악물고 달려드는 전함들을 하나둘 격침시키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고, 중간포 사격은 튕겨내면서 주포 사거리 내에 들어가기 전에 12문에 달하는 주포에서 뿜어지는 강철의 폭풍이 자랑스러운 대영제국의 전함들을 갈가리 찢어버린다.
“HMS 던컨 굉침!”
“어뢰정 편대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해군도 당연히 보조함들을 동원해 전함 미만 함급이 얼씬하지 못하게 버티고 있었다. 사실 방호순양함이나 장갑순양함들도 포격 한두 번에 쓸려나가는 입장이라 그들이 제압할 건 프리깃이나 포함들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빗발치는 사격을 뚫고 접근한 날렵한 어뢰정들을 향해 속사포가 쏟아져내렸다.
-텅텅텅텅텅텅텅텅!
개틀링건을 기반으로 존 브라우닝이 개량한 오토 캐논이 빗발치듯이 고속정들을 향해 쏟아졌다. 전기모터로 탄이 공급되도록 개량된 오토캐논은 접근해 오던 고속정들을 순식간에 벌집핏자로 만들어버렸다.
주로 목재로 만들어진 고속정들에게 항거할 수 없는 폭력이 쏟아져내렸다, 사실 전금속제 고속정이라고 해도 저런 화력을 연타로 두들겨맞는 이상 항행능력을 보존할 수 있을 리 없었지만, 전함뿐 아니라 보조함들까지 주렁주렁 달고 나온 속사포 앞에 어뢰정들은 반딧불이 신세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피셔 제독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 작자들에게 보여주고 싶군.’
뭐? 협차 전술은 이론상으로나 그럴듯하지 실전에서는 불가능해? 아크급은 빚 좋은 개살구, 제 2의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그런 망언이나 지껄이던 놈들 때문에, 그리고 그 망언에 홀려 자신의 제안을 묵살한 자들 때문에 이게 무슨 짓인가.
이제는 너무 늦었다.
이제 전 세계가 알게 되었다.
왕립해군은 이제 최강자가 아니다. 기존에 있던 모든 전함은 쓰레기가 되었다.
필연적인 진보 앞에, 시대 앞에 대영제국의 해가 저물 때가 되었다.
파도를 지배하는 자는 이제 그들이 아니다.
“나폴레옹.”
세인트헬레나의 망령이 그들에게 맞서고 있었다. 삼색기, 그리고 조안 오브 아크로.
포성이 울리고, HMS 후드가 산산이 부서졌다. 엠프레스 오브 인디아가 기울어졌고, 라밀리스는 보일러가 폭발했는지 연통이 하늘 높이 튀어올랐다.
“리벤지, 레졸루션, 리펄스, 로열 오크가 교전 중입니다!”
“HMS 센추리온에서 입전! 나 아직 싸울 수 있음!”
“HMS 포미더블 속도 3노트로 감속! 표류합니다!”
“HMS 런던, 마제스틱 퇴함 중!”
끝이다.
적 주력함은 단 하나도 탈락하지 않았다. 보조함은 몇 척 잡았지만 가장 중요한 전함간의 전투에서는 압도적인 사거리 차이로 인해 일방적으로 찢겨나가고 있다. 게다가 사격통제장치라는 개념이 아직 없는 로열 네이비로써는 프랑스 해군이 도대체 무슨 수로 저런 정확도를 발휘하는 건지는 이해가 안 갈 정도였다.
전투지속력도 차원이 달랐다. 포탄도 몇 종류씩 실어야 하는 로열 네이비의 전함과는 달리 압도적인 배수량과 두 종류로 통일된 포탄이라는 이점은 엄청난 양의 포탄을 실을 수 있었다.
게다가 장기전을 애초에 각오하고 온 탓에 탄약고가 미어터지도록 포탄을 넣어두었고, 이 포탄들은 유폭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안전수칙도 위반해 가면서 포탄을 쟁여놓은 가치를 했다.
그리고 자정부터 지금까지 포격을 주고받은 결과, 추가로 가져온 포탄들은 제일 우선적으로 소모되고, 탄약고도 반 넘게 비워진 상황이라 유폭 위협 자체는 크게 줄었지만, 대신 슬슬 프랑스 해군도 진지하게 포탄 고갈을 고민해야 할 상황이었다.
물론 전멸을 진지하게 우려해야 하는 왕립해군만큼은 아니었지만.
피셔 제독은 총기함을 증오스러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지금쯤 런던에서도 난리가 났으리라. 그들이 패배하면 프랑스군은 즉각 상륙을 개시할 것이다.
그때, 굉음이 들렸다.
-바아아아악!
“제독님! 피하십시오!”
퍽, 그 소리와 사관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새뮤얼?”
피셔 제독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전혀 현실감이 없었다.
함교의 방탄유리가 부서져 흩날렸다. 그 참상을 만들어낸 검은 그림자가 그를 스쳐갔다.
“항공기....”
프랑스인들이 하늘을 날았다는 소문은 들었다. 당연히 타국에서도 열심히 항공 산업에 투자했고, 영국도 복엽기 정도는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항공기를 이용해 전함을 공격한다는 발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프랑스군도 작정하고 공격하라면서 항공기를 띄운 건 아니었다. 표적획득용으로 띄운 육군 항공대의 복엽기 한대가 명령 없이 대구경 기총을 소사하고 지나간 것이었다.
“제기랄.”
그가 지휘관이었다면 당장 런던에 급보를 전하고, 소수의 함선으로 적을 붙드는 한편 전 함대에게 알아서 살아남으라며 총퇴각을 명해서 몇 척이라도 남기려 했으리라.
그러나 그의 상관은 주저하고 있었다. 적이 소수라고 해도 숫적 우위를 살릴 기회는 애저녁에 사라졌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채.
“후퇴해!”
“예?”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지금 전선을 고수하다가는 왕립해군의 전함이란 전함은 모조리 포세이돈과 영접하게 될 거다! 오늘 항복할 게 아니라면 전력을 보존해야 해!”
“하지만..... 바로 뒤가 런던입니다!”
“..... 어쩔 수 없다! 해군성에 연결해서 당장 내각과 왕실을 탈출시킬 것을 요청해! 이대로 가다가는 다 죽고 런던이 불타는 것 외의 길이 없다!”
어차피 패배는 기정사실이라면, 마지막 불씨라도 남기느냐, 아니면 전부 장렬하게 불타느냐, 여기서 더 싸워봤자 남는 거라고는 저들이 런던에 쏟아부을 포탄 몇 발을 더 낭비하게 만드는 것 외에는 없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