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보나파르트-38화 (38/200)

38화 예레반 사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국가 간의 긴장은 가면 갈수록 심화되고, 그만큼 제국주의는 극심해졌다.

프랑스 제국은 내실을 다시면서 공장을 늘리고, 군을 정예화하는 데에 신경을 전부 쏟았지만 타국들은 이야기가 달랐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각국이 차지한 식민지는 계속 넓어져만 갔고, 반항하는 자들은 학살당했다.

1887년, 프랑스 제국의 전함 잔 다르크가 '제대로' 실전배치되었다. 진수는 진작, 1881년에 되었지만 함선을 굴리면서 온갖 오류를 잡아내는 데에만 3년이 걸리고 이 설계상의 오류들을 다 잡아내어 개수를 끝낸 뒤 테스트까지 다시 거쳐서 실전배치하는데에 6년이나 걸린 것이었다. 동 해, 2번함 나폴레옹, 3번함 리슐리외가 새로운 설계도에 따라 건조되기 시작했다.

1888년, 북독일 연방과 영국 간의 결혼이 있었다. 헤센 대공국의 공녀와 1순위 계승권자인 앨버트 왕세손과의 결혼이었다. 영국과의 연합을 위해 발버둥친 비스마르크의 작품이었다.

같은 해, 알렉산드르 2세는 증손자를 보았다, 니콜라이 황태손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녀이자 루돌프 황제의 여동생 마리 발레리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은 알렉세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한편 북독일 연방에서는 날 수차례 엿먹였던 대 몰트케가 노령으로 사임했다.

독일에서는 빌헬름 1세가 사망하고 프리드리히 3세가 즉위했다. 그리고 또 얼마 가지 않아 사망해 빌헬름 2세가 즉위했고, 영국에서는 잭 더 리퍼 사건으로 인해 혼란이 빚어졌다.

1890년, 앨버트 왕자의 첫 아들인 필립 아서 프레드릭 왕자가 태어났다. 이것도 역사가 심하게 틀어진 증거다. 이렇게 되면 원 역사대로 앨버트 왕자가 요절한다고 해도 조지 5세에게 왕위가 가는 게 아니라 필립 왕자에게 갈 테니까. 사실 그게 진짜 요절한 건지도 음모론이 많기는 한데 어쨌든. 같은 해, 비스마르크가 빌헬름 2세와 충돌을 빚다가 사직하고 낙향해버렸으며 대 몰트케가 사망했다. 또한 잔 다르크급 2번함 나폴레옹 이하 도합 4척의 동시건조가 끝나 취역해 프랑스 제국이 보유한 잔 다르크급은 5척이 되었다.

그 시점에서 우리는 전쟁에 대해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대 몰트케도, 비스마르크도 없는 입장에서 북독일 연방은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프랑스 내각의 공통적인 견해였고, 군부 인사들은 아예 몰트케가 사망하고 비스마르크가 사임하자 그날 밤 축배를 들어올렸다.

그 다음 해인 1891년, 러시아 제국은 본격적으로 발칸 전역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면서 오스만 제국의 국경 인근으로 군을 전진배치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격렬한 반발이 이어지는 바람에 러시아 제국은 아직은 전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판단 하에 슬그머니 군대를 빼냈고, 튀르크 민족주의에 불이 붙었다. 한편 알렉산드르 2세는 첫 증손녀 아나스타샤를 품에 안아볼 수 있었다.

1892년, 동아시아 식민화 작업에서 다대한 성과를 거둔 세실 로즈 전 총독이 보수당 의원으로써 노동환경 개선을 목적으로 한 주거법안 문제로 사회주의자라는 비난까지 받으며 물러난 솔즈베리 후작 로버트 게스코인세실의 뒤를 이어 대영제국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 모든 평온은, 한 꺼풀 벗겨내는 순간 파국을 맞이할 거짓에 불과하다고.

1893년 2월 13일, 러시아 제국, 예레반.

알렉산드르 황태자는 지친 표정으로 차의 시트에 몸을 묻었다.

‘지치는군.’

오늘따라 기분이 찝찝했다.

언젠가, 그는 제국을 물려받아야 한다.

아버지의 건강은 가면 갈수록 나빠지고 있었다. 반역자들은 10년 전의 암살사건 이후 완전히 뿌리가 뽑혀 섬멸되었기에 더 이상의 암살 시도는 없었지만, 시간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황제가 될 재목이 아니다.

‘형님.’

죽은 형 니콜라이 황태자가 생각났다.

그의 형,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문자 그대로 완벽한 군주감이었다. 연약하지만 배포가 컸고, 자유주의적이었으며, 똑똑했다. 부모가 정해준 약혼녀에게만 충실하기도 했다.

그런 형이 있으니, 한때 그는 군에 투신할 생각이었다. 정치는 자신과는 맞지 않았으니.

형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떠나지만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그때였다. 코너를 도느라 차의 속도가 느려진 틈을 타 중절모를 쓴 남성이 인파들을 뚫고 튀어나왔다.

“신은 위대하시다! 압제자에게 죽음을!”

그리고 총성이 울렸다.

***

“보고하게.”

긴급 소집된 내각에서 내가 입을 열었다. 총리부터 주요 내각의 장관들, 장군들까지 모두 동석한 상황, 의회도 현재 비상상태다.

“암살자는.”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심문해보니 오스만 제국 출신 의대생이라고 했습니다.”

“의대생?”

“이름은 메흐메트, 코카서스 지역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적 러시아의 박해를 피해 오스만 제국으로 피신한 집안 출신입니다.”

“제기랄, 그럼.......”

“러시아가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명분을 아주 가져다 먹여준 상황이니....”

“그래, 그렇겠지.”

순간, 사라예보 사건이 떠올랐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상황은 누가 봐도 러시아에게 명분이 있다. 러시아 제국이 원 역사의 오스트리아-헝가리처럼 미적대지도 않을 거고, 영국도 명색이 정식 국호가 연합왕국인데 황태자가 암살당한 상황에서 오스만 제국을 옹호하고 나서지는 않을 거다. 아마 러시아에게 빌고 끝내라고 하겠지.

문제는 오스만 제국에게 러시아가 내밀 최후통첩이다.

“외무장관, 러시아 제국에 연락해서 만약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게 최후통첩을 보낼 계획이 있다면 그 전에 그 내용을 본국에 공유해달라고 요청하게.”

“러시아 제국이 반드시 저희 측에 참전 약속을 받아내려 할 겁니다. 그건.....”

“제기랄.”

나는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해.”

“예?”

“프랑스 제국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러시아 제국의 결의에 대해 지지하겠다고 해, 다만 참전에 대한 확답은 하지 말도록.”

지지한다는 게 같은 편으로 참전해주겠다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말로만 응원해주겠다는 뜻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오스만 제국 하나 러시아가 못 이길 리가 없잖은가.”

“그리고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 하나 때문에 저희의 확답을 바라는 것도 아닐 겁니다.”

“당연하지.”

나는 서쪽을 바라봤다.

“영국을 우리가 막아주기를 바라서겠지.”

“어쩌시겠습니까?”

“방법이 없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영국이 참전했는데도 우리가 개입하지 않으면 그때는 삼국동맹은 붕괴다. 게다가 영국이 혼자 참전할 리가 없지 않은가, 북독일 연방을 끌고 참전하겠지.”

“러시아도 북독일 연방을 공격하는 걸 그리 주저하지는 않을 겁니다.”

“당연하지, 알렉산드르 2세도 프로이센에 대한 분노가 죽은 프란츠 요제프보다 크면 크지 작지는 않은 인물이야.”

원 역사에서 1894년, 러시아군이 250만 대군을 소집해 독일 제국을 기습적으로 침공하려 한다는 헛소문이 독일에 돌아서 독일 제국이 예방전쟁을 거의 실행할 뻔한 사건도 있었다. 명령 내리기 전에 헛소문이란 게 확인되었으니 멈췄지.

“게다가 아들이 죽었다.”

자식 잃은 부모의 심정을 누가 알까.

명분도 완벽하고, 분노도 가득한데, 누가 전쟁을 주저할까.

“전 프랑스에 동원령을 내리도록. 실제 상황이다.”

“알겠습니다.”

“잔 다르크급 전 함선을 즉각 이동시킨다. 지중해에 배치된 함선들도 전부 칼레 방면으로 이동시켜. 별도의 명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실전에 준하는 상황으로 가정하고 미식별 함선에 대한 무제한적인 발포를 허가한다.”

“영국이 선공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놈들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육군 항공대와 해군 항공대 전력을 총동원해서 로열 네이비의 전함들 위치를 특정해, 최소한 본토함대의 위치라도 알아내야 한다.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도 비밀리에 전달해두도록, 우리는 아마 참전하게 될 거라고.”

참전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돌프라면 알아서 하겠지.

이탈리아 북부를 되찾고 싶으면 지금이 기회라는 것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미국 대사에게는 지금 즉시 미합중국 국무부와 예비 회동하라고 해.”

나는 씩 웃었다.

“미국에 생피에르 미클롱, 과달라프, 마르티니크를 판매할 의사가 있다고.”

영국이 아무리 혐성 혐성 해도 니들만 혐성질 할 줄 아냐?

“폐하, 그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실제 양도가 선언되기 전까지 영국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하라는 거다.”

영국이 잘 속아주면, 아마 영국은 전쟁 초반에 캐나다군으로 생피에르 미클롱 등의 신대륙의 프랑스 해외 영토를 공략할 거다. 왜냐고? 나폴레옹 전쟁 때도, 미국 독립 전쟁 때도, 번번이 그랬거든.

그런데 캐나다군이 프랑스 땅인 줄 알고 밀고 들어간 곳에 성조기가 꽂혀 있고 미군이 주둔해 있었다면? 당장 전쟁이 터지지는 않아도 미국과 관계가 험악해져 주기만 해도 영국은 가뜩이나 부족한 레드코트들을 분산해야 할 거다.

그리고 독일도 이제 해볼 만 하다. 비스마르크는 쫓겨났고, 몰트케는 늙어죽었다. 빌헬름 2세는 외치는 영 꽝이다.

다만 상대가 소 몰트케면 몰라도 슐리펜인지라..... 그래도 아직 슐리펜은 그 유명한 슐리펜 계획을 쓰지도 못했을 시점이기는 하다.

“모든 대사관에게 비상을 걸어, 극동에 있는 대사관들도, 인도차이나 총독부에도 연결하게.”

“뭐라고 합니까?”

“시암에게 베트남 빼고 인도차이나의 나머지 영토를 줄 테니 버마를 침공하라고 하도록.”

“버마면....”

“영국 식민지지, 아시아에 배치된 영국군을 거기 묶는다. 그리고 네덜란드 주재 대사에게도 전달하게, 만약 해협식민지를 왕립해군이 통과하지 못하게 해협을 폐쇄하고, 프랑스에게 네덜란드령 지역의 군사통행권을 준다면 베트남, 생마르탱, 레위니옹, 코모로, 4개 식민지를 줄 수 있으니 교섭하라고.”

“좀 과하지 않습니까?”

“그 정도가 아니면 네덜란드가 대영제국에게 소극적으로나마 적대하겠나? 시암은 또 어떻고?”

“........”

“지금 이 전쟁을 우습게 보는 멍청이들이 있을까 해서 말해두겠는데, 이번 전쟁은 절대 그렇게 간단히 끝날 전쟁이 아니네, 후세는 이 전쟁을 ‘세계 대전’이라 부를 걸세, 전 세계가 두 편으로 나뉘어 총알을 주고받고, 수십만 정도의 시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병력을 쏟아붓게 될 거라고.”

나는 곧장 지도에 선을 그었다.

“기이아나 식민지도 공격당할 거다, 대서양 건너로 증원군을 투입할 여력은 없어. 아마 영국은 에콰도르를 끌어들이고 기이아나 식민지군으로 공세를 펼치겠지,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에 즉각 접촉해라.”

“알겠습니다.”

“외무장관, 유대인들을 움직일 수 있나?”

“정보부가 그동안 꽤 준비를 해 뒀습니다만......”

“프랑스령 인도는 애초에 지킬 수 없다. 유대인들이 인도 서해안 전역을 개판으로 만들어놓기만 해도 우리 목적은 달성돼, 유대인들이 봉기 과정에서 얼마나 죽든 상관없다. 개전과 동시에 봉기시켜. 인도 서해안 항구를 못 쓰게 만들고 인도 부왕령의 병력을 빼내지만 못하게 만들면 충분하다.”

“알제리는 어찌 하시겠습니까?”

“최대한 많은 노동인구를 본토로 빼돌리고, 가져갈 수 있는 건 다 가져간 다음 파괴한다,”

못 지킬 곳은 전부 부숴버리고, 팔아버린다.

“유럽에서 대승을 거두면 얼마든지 되찾을 수 있다. 알제리가 접한 상대는 영국, 이탈리아, 독일의 식민지다, 그걸 상대로 알제리 주둔군이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장군 있나? 있으면 명령을 철회하겠다, 대신 본인이 직접 알제리에서 싸우도록, 보급도, 증원도 못해주니까 알아서. 잘 싸우도록.”

당연히 손을 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똑똑히 듣도록, 어떤 식민지든 간에 우리가 이 전쟁에서 현실적으로 지킬 수 있는 지역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없다. 그러니 팔든, 포기하든 한다. 점령당하고 다른 나라에 팔리더라도 전쟁만 이기면 협상장에서 대체할 만한 곳을 빼앗아 올 수 있다. 무슨 뜻인지 알겠나?”

“예.”

“총리, 의회를 납득시킬 수 있겠소?”

“의원들 중 반대하는 사람은 식민지 방위사령관 자리를 줄 테니 직접 영국군 상대로 식민지를 지켜보라고 하면 모두 납득할 겁니다.”

“믿고 있겠소.”

나는 손목시계를 벽에 걸린 시계에 맞추었다.

“지금부터 프랑스 제국은 전시상황에 돌입하는 바요, 모두 건투를 빌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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