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폭풍 전의 고요(4)
앙카라, 오스만 제국.
젊은 청년들 여럿이 어둠 속에 모여 있었다.
“메흐메트.”
“투날레, 자넨가.”
메흐메트, 투날레, 수크루. 그렇게 불리는 세 청년은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청년들은 평범한 대화로 시작했지만, 그 대화는 얼마 가지 않아 성토로 바뀌었다.
러시아를, 그리고 무능력한 오스만 제국의 지도층을.
의대생, 공장장의 아들인 대학생, 교사를 목표로 하는 대학생.
그 청년들에게는 한 가지 연결고리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비밀 결사, 연합진보위원회(Committee of Union and Progress)의 일원이자 주요 멤버였다.
“술탄은 헌법도 폐지하고 전제정으로 돌아가고, 러시아인들은 우리를 멸망시키기 전에는 멈추지 않겠지, 이 두 가지를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에겐 미래가 없어.”
그 방법은?
조금만 생각한다면 명확한 방법이 있다.
전쟁.
전쟁을 통해 술탄을 실각시키고 뜻 있는 청년들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
전쟁을 통해 러시아를 패퇴시켜야 한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은 그들에게 웃어주는 듯 싶었다.
아무리 늦어도 20년 내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것은 모두가 예측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프로이센에 복수하려 할 거고, 러시아는 발칸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고 싶어하며, 영국은 러시아를 도로 동토에 밀어넣고 싶어하고, 이탈리아인들은 불완전한 통일에 분개하고 있으며, 북독일 연방 역시 완전한 통일을 이루고자 하고 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역시 북이탈리아를 되찾고 프로이센에게 설욕하고자 하고 있다.
모든 징후가 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것을 노려야 한다.
“러시아와 프랑스, 이중제국의 동맹은 기정사실이야, 그러니 우리는 영국의 편에 붙게 될 거다.”
영국은, 누가 뭐래도 비교할 상대가 없는 유럽의 최강자다.
룰 브리타니아라는 이름은 허명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노리는 것은 단 하나.
2차 크림전쟁이었다.
2차 크림전쟁으로 술탄의 권력을 약화해 폐위시키고, 자유주의자들로 권력을 잡아 개혁을 해나간다, 영국과 북독일 연방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를 몰아낸다.
모험이지만, 충분히 해 볼 만한 모험이었다. 무엇보다 영국이 그들의 편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 수단은 당연히 러시아와 오스만 간의 전쟁 촉발이었다.
그게 가장 간단할 뿐 아니라 확실하다. 러시아와 오스만 간의 전쟁이 다시 일어난다면 영국은 무조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참전할 테니까.
설령 삼국동맹의 나머지 둘이 참전하지 않는다고 해도 영국은 반드시 참전한다.
그 과정에서 설령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의기로 죽을 힘을 다해 하려고 하면 무엇이든 하지 못할 것이 있을까.
그날, 새로운 음모가 싹이 텄다.
***
브라우닝 박사가 오랜만에 독대를 청해서 받아 줬다.
“그래, 브라우닝 박사, 혹시 뭐 필요한 게 있나? 돈?”
“예산은 차고 넘칩니다. 감사합니다.”
“음, 그럼 뭐가 문제지?”
“신형 기관총에 대한 청사진을 현실에 구현하기가 좀 골치아픈데.... 일단 이건 넘어가죠, 기술적 문제도 문제고 비용도 비용인지라 짧게 이야기해드릴 차원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건 자네도 알겠지만 특수한 환경에서 특수한 목적에 맞게 사용될 무기네, 범용성 있게 설계할 필요가 애초에 없어.”
“알고 있습니다.”
프랑스 제국은 세계 최초로 군 항공대를 창설했다.
물론 이 시대의 항공기란 물건이 좀 많이 개판이라서 좀 이르기는 하다. 아직 보유한 고정익 항공기도 21대에 불과하고, 한 개 대대에 8대가 겨우 배정되니까.
그러니까 총 2개 완편대대에 편성 중인 반쪽짜리 대대가 하나다.
문자 그대로 어? 어? 하는 순간 추락이 일어나는 판이니 목숨을 내놨다고 볼 수밖에.
어쨌든 간에 프랑스의 항공대는 육군 항공대와 해군 항공대, 해군 항공대는 비행선을 운용하며, 육군 항공대는 고정익기를 운용한다. 이는 비행선의 운용방식이 비행‘선’(船)이라는 단어에 맞게 상당 부분 해군의 함선 운용과 유사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정찰임무나 좀 하다가 알루미늄 녹여서 전투기 만든다고 해체되긴 했지만 2차 세계대전기 LZ 127, LZ 130 경식 비행선 그라프 체펠린 역시 크릭스마리네 소속이었다.
한 마디로 승무원을 조달하기가 더 편했기에 해군 소속에 배정된 것이다.
물론 육군과 해군에서 모두 용처가 많은 기구의 경우는 아예 따로 비행단에 소속되지 않고 포병대나 군함 등에서 직할 관측부대로 운용하고 있었다.
반대로 고정익기가 육군에 소속된 것은 당연히 항공기는 지상에서 날아오르기 때문이다. 아직 수상기는 개발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아직 공군을 독립시키기에는 좀 많이 이르고.
“그럼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 병기국에게 요구한 물건 말입니다.”
“크흠.”
알아, 나도, 아직 이거 만들기는 좀 많이, 심각하게 많이 이르긴 하지?
한 30년 잡고 만들어야 할 물건 아무리 기술 좀 발전했다지만 지금 만들어달라고 했으니 욕 먹어도 할 말 없다.
내가 내놓은 청사진이 뭐냐고?
그.... 2차대전 탱크하면 흔히 생각나는 물건..... 그래, 욕 쳐먹을 만 하다. 지금 19세기인데.
1930년대에나 무리 없이 만들 법한 물건을 19세기 후반에 만들려고 했으니 100년은 아니고 50년은 이르다.
“지금 만들라는 건 절대, 절대 아니네, 현재 내연기관 기술이나, 그런 부분이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네. 그냥 이건 문자 그대로 청사진이네, 한 40년? 그 정도를 목표로 잡고 만들자 이거지.”
“40년입니까.”
“1920.... 아니, 1930년까지 차근차근 기술을 발전시켜나가서 개발하자는 거네.”
“그거라면 불가능이라고 말하지만은 않겠습니다만.”
“물론 나도 이런 병기를 장차전에서 쓰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아네, 불가능을 요구하는 건 아니야, 그저 장차전이 끝나더라도 그 뒤에 전쟁이 없겠는가. 설령 평화를 지킨다고 한들 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하네, 힘.”
“그렇군요.”
“내 말을 믿게, 이미 기관총이라는 물건이 개발된 이후로는 이런 ‘장갑 트랙터’가 전장의 승패를 좌우하게 될 걸세, 인간은 몇천 명이 달려들어도 기관총에게 박살나고 끝이겠지만 장갑 트랙터를 투입하면 1만 명의 일을 몇 대의 장갑 트랙터가 대신할 수 있게 될 테니 말이네. 그럼 그만큼 죽는 사람도 줄지 않겠나?”
“그러니까, 지금 당장 결과물을 내놓으라고 하는 건 아니란 말이군요.”
“내가 1890년 넘기 전에 결과물 비슷한 거라도 내놓으면, 아니, 진행상황을 물어보기라도 하면 날 쏴도 좋네. 그냥 이건 아이디어야,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려놓은 설계도 뭐 그 비슷한 거란 말이네.”
“..... 알겠습니다.”
"대신이라기는 뭣하지만 그래도 지금 기술로 만들어낼 수 있는, 문자 그대로 험지도 지날 수 있는 장갑차량은 시험 삼아서라도 연구개발했으면 좋겠군, 당장 다음 전쟁이 일어나면 필요해질 가능성이 제법 있네."
"너무 무리한 요구조건만 아니라면 달성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후, 넘겼다.
내가 미친놈도 아니고 설마 19세기에 티거를 내놓으라고 했겠냐, 아니 뭐 만들 수 있으면 좋은데 만들고 싶다고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렇지.
그래도 마크 전차 비스무리한 거라도 전쟁 나기 전에 만들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해서 개발부에 좀 찔러본 건데 이 개발부 놈들이 브라우닝 박사한테 징징댔나 보네, 니들은 야근 확정이다.
현재 프랑스의 거의 모든 무기 개발을 총괄하며 병기개발국에서 유일하게 나한테 반발할 수 있는 인물이니 어쩌면 당연한 건가,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브라우닝 박사를 소홀하게 대할 수는 없잖냐....
아무튼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일 문제로 징징댔으면 일로 혼나야지, 대구경 야포 연구하느라 눈물 좀 빼봐라.
“아, 그런데 잔 다르크급은 요즘 어떻던가?”
“배는 제 일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그 배에 달려있는 포는 박사 일이잖나.”
“무기체계 문제는 딱히 없습니다. 포격 반동 때문에 조준이 틀어지는 문제가 좀 있었는데 해결했고요, 충격으로 사격통제장치의 조준장치가 뒤틀리는 문제도 부품을 좀 더 묵직한 물건으로 고쳐서 해결했습니다.”
“그거 해결됐으면 출력 문제만 해결되면 문제 없는 거였나?”
“뭐 그럴 겁니다. 그런데 그건 제 분야가 아니라서 말입니다. 보일러 문제지.”
“아니면 증기 터빈이 동력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하는 게 문제일지도. 아무튼 간에 박사는 뭔가를 쏴 날리는 쪽이지 뭔가를 돌리는 쪽은 아니긴 하니.”
“사실 증기터빈을 돌리는 것도 증기를 쏴 날리는 거기는 합니다만. 공기총처럼 말입니다.”
농담처럼 덧붙인 브라우닝은 한숨을 쉬었다.
“그쪽은 기술팀이 알아서 할 겁니다. 저번에 라발 박사랑 이야기나 해 볼까 하고 가서 한 번 보고 왔는데 연구진들의 피골이 상접해 가더군요.”
“터빈 쪽 문제가 아니면 보일러 문제가 되었든 뭐가 되었든 문제가 있겠지.”
“그쪽에서 대충 들었는데 보일러가 터지지 않는 수준까지 높였는데도 목표 출력이 안 나와서 터빈 날개의 형상이나 개수 등을 바꿔 가면서 실험 중이랍니다. 그게 안 되면 그냥 보일러의 밀폐를 더 튼튼하게 한 다음 압력과 온도를 더 높일 수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뭐 나야 그런 기술적인 사항까지는 잘 모르니, 구스타프 박사에게 실험비용은 아낌없이 지원해줄 테지 재질이든 형상이든 계속 바꿔 가면서 최고의 효율을 내는 구조를 만들어보라고 하게, 그게 아니면 철강회사들을 더 족쳐볼 수밖에.”
사실 다른 문제도 있다. 무게중심으로 인해 능파성 문제가 불거졌는데, 이건 솔직히 말하자면 포탑구조 자체의 문제점이자 이 시대의 전함 상당수가 포곽식 주포를 택하는 원인이기도 해서 내가 뭐라고 할 말이 없다.
그런데 포탑구조 안 쓰고 포곽식 주포를 쓰면 그건 드레드노트가 아니라고! 포탑을 돌려서 상대를 쏠 수도 없으니 한 번에 쏠 수 있는 주포가 반토막나고, 당연히 협차사격을 포기하든가 아니면 주포를 두 배로 늘려야 하는데 주포를 두 배로 늘리면 그만큼 배수량은 커지고..... 한 마디로 효율이 너무 많이 떨어진다.
그런고로 식민지는 진짜로, 진짜로 못 지킨다. 북해에 잔 다르크급을 내보내는 건 자살행위가 될 거고, 지중해 횡단까지는 못 할 거다. 연안을 따라서 파도 약한 곳만 돌아다니면 가능하긴 한데..... 그러면 뭐하러 전함 만들었냐.
알제리까지도 가기 힘들 테니, 역시 영국해협 넘는 데나 써야겠다. 설마 영국해협에서 전복되어 침몰한다거나 하지는 않겠지. 영국과 해전을 벌이려면 파도가 잔잔한 날에 벌여야 할 것 같다. 아예 개전일을 파도가 조용한 날로 고르고 초전박살내버릴까.
물론 그 전술도 영국 해군이 도버 해협으로 맞아 싸우러 와주지 않아서 시간이 끌리거나 중간에 갑자기 날씨가 바뀌면 말짱 꽝이긴 한데. 이건 또 어떻게 처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