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보나파르트-35화 (35/200)

35화 폭풍 전의 고요(3)

1882년 3월 8일. 파리, 튈르리 궁.

“아.........”

나는 멍하니 내 품에 안겨 있는 존재를 바라보았다.

흔히 핏덩이라고 하던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불그스름한 피부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아기의 모습을 본 나는 가슴이 마구 뛰는 걸 느꼈다.

아기.

‘내’ 아이.

딸.

공주, 황녀.

아니, 뭐든 상관있을까, 내 아이다.

전생에서도 가져보지 못한.

“..... 엘렌.”

나는 간신히, 간신히 아이가 딸이면 지어주기로 정해두었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냈다.

“엘렌, 네 이름은 엘렌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요람에 아이를 눕혔다.

살짝이라도 힘을 주면 살갖이 다칠까, 너무 힘을 풀면 행여 놓치기라도 할까 두려웠다.

“엘렌, 엘렌 보나파르트.”

나는 내 장녀의 이름을 반복했다.

아직 말도 못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내 아이였다.

“아들이 아니었군요..... 아들인 줄 알았는데.”

“다음에 또 낳으면 돼, 수고했어, 엘리자베타.”

나는 지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로, 정말로 수고했어.”

“그래, 아들이 뭐가 중요하겠냐, 너희 둘 다 무사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어머니, 언제는 괜찮을 테니 걱정 하나 안 해도 된다면서......”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래도 나이가 좀 덜 찬 것도 사실이니 걱정이 되기는 했지 당연히.”

외제니 황태후, 어머니도 제법 마음을 졸이셨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나를 잡아끌었다.

“내가 들었는데 산모랑 아기 근처에 가급적 있지 말라더라, 나와라.”

“아 잠깐만, 잠깐만요, 제 발로 나갈 테니까 일단 이것 좀 놓으시고.....”

내가 방 밖으로 끌려나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입가를 가리고 쿡쿡 웃는 아내의 모습이었다.

나도 닫히는 문 너머로 웃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

영국, 런던.

“총리님.”

“아, 로즈 의원.”

“예, 잠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없더라도 자네 말이면 내야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답한 디즈레일리는 차를 내오라고 손짓했다.

“그래, 무슨 일인가?”

“이번 아프리카 개척에 대해서 제안드릴 것이 있습니다.”

“세실.”

디즈레일리는 진지하게 표정을 바꿨다.

“지금 내각의 의견은 일치하네, 중국 식민화가 먼저야, 칭(청나라)의 시장도 시장이지만, 무엇보다 러시아의 부드러운 아랫배를 찌를 수단이 필요해.”

“그러다가 프랑스에게 선점이라도 당하면......”

“적어도 현 황제 재위 중에는 프랑스가 추가적으로 식민지를 개척하려 들 가능성은 낮다는 게 외무부에서 내린 결론이네. 나폴레옹 4세는 사석에서 식민지에 대해 경제학적으로 비용 대비 효용이 낮다는 주장을 고수해왔고, 이는 계속해서 프랑스 제국의 외교적 행동에 반영되어 왔네, 일단 가지고 있는 식민지는 유지하더라도 식민지를 더 늘리려고 들지는 않는다는 거지.”

물론 식민지를 개척하지 않아 아낀 비용은 전부 건함과 군사력 증강에 투입되고 있다.

사실 프랑스는 이미 전 세계 기준으로 한 손 안에 드는 강력한 열강이었기에 뭔가 외국에 아쉬운 소리를 할 것도 없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사오면 그만이고 인구압이 심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인구 감소를 걱정해야 할 판이라 전쟁이 나면 당장 초반을 넘긴 뒤에는 알제리인들을 프랑스인과 동등하게 대우해주겠다고 선언하고 알제리인들을 징병해 전장에 투입하는 것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는 게 프랑스의 현실이었다.

“아무튼, 우리에게 있어서 최우선순위는 아시아네. 괜히 우리가 조선과 일본에 공을 들이고 있겠는가?”

러시아를 극동에서 귀찮게 만들어야 하니까 그런 게 아닌가.

무슨 수를 써서든 다음 전쟁에서 러시아를 그 동토로 도로 밀어넣지 않으면 그때는 진짜로 끝장이다. 현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에서 한두 발짝 떨어진 상황에서 맴돌고 있는 거나 다름없는 것 아닌가.

아프리카 정복 같은 배부른 소리 하기에는 시간이 없다. 북독일 연방이나 이탈리아 왕국처럼 속 편한 멍청이들이나 식민지 만들겠다고 날뛰지, 대영제국은 지금 러시아가 부동항을 얻어 바다로 기어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하고 있었다.

“지금 중국 식민화, 그리고 스페인 문제만으로도 대영제국의 대외투사능력의 한계가 시험받고 있는 상황에서 아프리카 식민화 문제 가지고 부하를 더 늘릴 수는 없네.”

“알겠습니다.”

진짜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세실 로즈가 고개를 끄덕이자 디즈레일리도 한숨을 푹 쉬었다.

오늘따라 제 정적이었던 양반이 부러웠다. 아예 정계에서 은퇴해 야인으로 떠도는 글래드스턴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로써 제2의 삶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차라리 이 권한도 많지만 책임은 그 이상으로, 문자 그대로 깔려죽을 만큼 묵직한 자리보다 저런 삶이 더 낫지 않을까 요즘 진지하게 고민되는 디즈레일리로써는 분명히 상대를 은퇴시켜버리는 데 성공한 최후의 승자는 자신인데 뭔가 자기가 진 것만 같은 기분을 숨길 수가 없었다.

내각에서 중국에 총력을 투입하기로 결의하고, 이탈리아도 끌어들였지만-북독일 연방은 비스마르크가 반대 입장이 너무 확고해서 끌어들이기 어려웠다-그럼에도 쉽지 않았다.

그냥 덩치가 너무 크다.

“아니면 자네가 중국 쪽 문제를 해결하러 가겠나? 중국 문제를 빠르게 해결할 수 있으면 대영제국 역시 자네 말처럼 아프리카에 시선을 돌릴 여유가 나겠지.”

디바이드 앤 룰.

머릿수 늘리는 데에는 가장 만만한 인도인들을 대거 이주시키고, 차별대우와 문화적 차이를 활용해 중국인들을 분열시켜서 자기들끼리 싸우게 하고, 마침내 저들 사이에 동질감이 옅게 만들어서 저들 스스로 협력하지도, 하다못해 통일 국가를 스스로 유지할 수 없도록 만든다.

말은 쉽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조선과 일본 역시도 통제해야 했고.

“원한다면 홍콩 총독으로 발령내줄 수 있네, 안 그래도 조만간 자리가 날 가능성이 크니 말이네.”

곰곰이 생각하던 세실 로즈는 입을 열었다.

“제게 몇 가지 권한만 허락해 주신다면, 대영제국의 영광과 여왕 폐하를 위해 기꺼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쉰브룬궁.

“폐하, 이제 좀 결혼을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싫다.”

황제의 단답에 내각의 대신들은 앓는 소리를 냈다.

이미 쉰브룬궁은 황제의 파탄난 가정사를 상징하기라도 하듯 휑해졌다. 아들과의 갈등에 못 견딘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황태후는 아예 더 이상 쉰브룬궁에 오지도 않았고-사실 그 전이라고 황궁에서 지냈냐고 물으면 그건 절대 아니지만-황제의 자매들은 단 한 명도 황궁에 남아 있지 않았다.

누나인 기젤라는 결혼해서 떠난 지 오래고, 여동생은 아직 약혼 상태로 86년에나 식을 올릴 예정이었지만 러시아에서 사랑받는 황후가 되어야 하니 러시아에 미리 가서 적응하란 명목으로 쫓아내다시피 보내버렸다.

명백히 부자연스러운 행동이었기에 수많은 소문이 퍼졌고 로마노프 황실조차도 거절은 못했어도 상당한 당혹감을 드러냈지만 아무튼 간에 여동생까지 그런 식으로 어거지로 쫓아내다시피 보내버리자 진짜 문자 그대로 황궁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황후를 들이고 애를 낳으면 좀 나아질까 해서 수많은 결혼 상대를 제안했지만, 황제는 그 모든 걸 걷어찼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원 역사에서도 루돌프 황태자가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와 결혼한 것도 다른 정략혼 상대를 죄다 걷어찬 끝에 다른 상대가 없어서 결혼한 것이었으며, 원 역사에서 애인과 동반자살을 했어도 실제로 그 애인을 사랑한 게 아니라 애초에 처음부터 자살을 결심하고 그 명분으로 애인을 이용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을 만큼, 루돌프는 한 여성에게 사랑을 준 일이 없었다. 그저 여색을 밝힌 건 스트레스 해소용이었다는 이야기도 제법 많았다.

황태자 시절에도 그랬을지언정 권력을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고 어머니도 집에 안 붙어 있는 데다 자매들은 다 시집가서 눈치를 볼 사람도 없는 황제가 된 지금 황후를 들이라는 제안을 모조리 걷어차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때문이라고 해야 할지 현재 1순위 상속권자는 황제의 숙부인 카를 루트비히 대공, 그리고 2순위 상속권자는 그 아들이자 황제의 사촌인 오스트리아에스테 대공, 프란츠 페르디난트였다.

일단 결혼을 해야 애가 생기니까. 물론 결혼 안 한다고 애가 안 생기라는 법은 없지만, 너무나도 당연히 사생아에게 제위를 물려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상당히 문란한 사생활로 유명한 탓에 분명히 동성애자는 확실하게 아닌데도 아내를 맞는 건 한사코 거부하는 태도에 속이 썩어들어가는 건 오스트리아 총리와 헝가리 총리-이중제국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총리가 따로 있으며 내각도 따로 구성된다-를 비롯한 내각 구성원들이었다. 물론 소문에는 양성애자가 아니냐는 소리도 있었지만, 확실히 증명된 건 없었다.

자존심상 도무지 실행하지는 못할 소리였지만, 차라리 그나마 루돌프 황제가 고집을 부릴 때 설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로 알려진 황제의 누나 기젤라나 절친한 친구로 알려진 프랑스의 나폴레옹 4세를 찾아가서 설득을 부탁해 보자는 소리가 사석에서 나왔겠는가.

누나인 기젤라 황녀는 외국에 시집갔고 나폴레옹 4세는 심지어 단순한 외국인도 아니고 프랑스의 황제인데도 그런 소리가 나온다는 점에서 지금 루돌프의 고집이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알 만한 일이었다.

애초에 황제가 고집을 부리고, 그게 정책 문제도 아니고 자기 개인사에 관련된 일이면 사실상 합스부르크 황실과 황제의 위엄 그 자체로 유지되는 제국인 이중제국에서 내각이 뭔가를 쉽사리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는지라 그저 총리들은 위장약이나 찾아 먹을 뿐이었다.

"짐은 적어도 지금은 결혼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폐하, 그러면 대체 후계를 누구로 세워야 한단 말입니까?"

"짐에게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사람은 많지 않은가? 당장 왕위 계승법상으로 카를 루트비히 대공이 있으며, 그 아래로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있다. 그리고 짐이 어디 평생 결혼을 안 하겠다던가? 어디 마음에 맞는 처자가 있으면 할 수도 있는 법이지."

"폐하, 폐하와 격이 맞는 여인들은 거의 다 거절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설마 아직 어린 여인이 자라기를 기다리시거나 아니면 천한 신분의 여인을 들일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차라리 어린애를 좋아하는 거라면 낫다. 그냥 약혼만 맺어두고 결혼을 천천히 하면 되니까. 약혼은 태어난 직후에 해도 솔직히 상관없다. 물론 뒷말이야 좀 나오겠지만 어디 역대 황제 가운데 뒷말 안 나오는 황제가 있던가.

문제는 귀천상혼이었다. 적어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황제가 귀천상혼을 하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일 상태가 아니었다. 원 역사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겪은 고초와 황태자가 죽은 뒤 자식들에게 가해진 박해만 봐도 알 일이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 경들이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을 테니 염려하지 않아도 좋다."

그래도 하는 짓을 보면 귀천상혼이라도 좋으니 결혼하겠다고 하면 감지덕지할 판인 듯 했다. 그야 결혼을 안 하면 귀천상혼이고 뭐고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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