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폭풍 전의 고요(1)
“형.”
“뭐냐?”
한창 영국의 뒤통수를 칠 작업에 매진하던 내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익숙해서 내 목소리만큼이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나 입대할래.”
“....... 뭐?”
루이 녀석의 말이 들려오고.
그날 집무는 다 봤다.
***
우리의 대화는 전형적인 5단계였다.
“내가 잘못 들은 거지?”
“입대할래.”
“아니, 니가 뜬금없이 왜 입대를 해? 어떤 새끼가 헛바람 불어넣었냐? 말해봐.”
“다 생각이 있어서 가겠다는 거야... 경솔하게 결정한 거 아니고, 난 더 이상 10대 어린애가 아니라고.”
부정.
“아니 야, 너 정신나갔냐? 내가 일하느라 어머니 못 돌봐드리니까 너라도 잘해드려야 할 거 아냐! 네가 없으면 어머니 쓸쓸해하셔. 그보다 계승서열 1위가 일반병으로 전선에 나가는 경우가 대체 어디있냐? 어? 내가 아들이라도 낳았냐고!”
“형이 아들이든 딸이든 한 명만 낳으면 끝날 문제야. 그리고 형이든 형수님이든 아직 젊어서 충분히 후사 기대해볼 만 하잖아, 난 형수가 아직도 애가 없는 이유가 솔직히 이해가 안 가.”
분노.
“군 계급 줄게, 생각해 보니 다른 왕국이나 제국들은 다 황족에게 군 계급 줬는데 우리는 안 주고 있기도 했고, 앙리 장군에게 오늘 바로 말해서.....”
“그런 특권을 원했으면 가겠다고 하지도 않았어, 난 한 명의 시민으로써 입대할 거야. 장교든 사병이든.”
협상.
“됐어, 나가 이 자식아.”
“아니 형, 말을 좀 듣고........”
“됐어, 형 일한다. 지금 한창 바쁜 시기야. 나가, 당장 나가. 혼자 있고 싶다.”
우울.
그리고 수용까지.
결국 나는 어머니를 호출했다.
***
“루이가 군대를 가고 싶어한다면 못 가게 할 건 없지 않니?”
아니 이보세요.
원래 당신 원 역사에서 루이가 영국군 입대하는 거 극구 반대하지 않으셨어? 왜 된다고 하시는데요. 그때 빅토리아 여왕이 내가 안전한 데에 있도록 손써줄 테니까 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주라고 설득해서 간 거 아니었어?
물론 그 결과 루이가 원주민들에게 아주 처참하게 살해되었고, 이것이 기사화되어 보도되자 유럽 전체가 들끓었고, 원주민들 대표는 루이가 프랑스 황태자인 줄 몰랐다고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아 결국 영국이 원주민들을 식민화하는 데 도움만 줘버렸다.
근데 여기서는 왜....... 아, 내가 있어서 그런 건가? 아닌가?
일단 원 역사와 다른 점은 남편이 폐위되지 않아서 프랑스 제국의 황태후 자리를 꿰차고 있다는 것, 내가 있다는 것, 이 두 가지인데....... 아.
순간 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원 역사에서 루이가 입대한 건 보어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지금은? 프랑스는 지금 전쟁을 할까 말까 하는 분위기지 전쟁이 ‘난’ 게 아니다.
하긴 전쟁이 났는데 최전선에 자원입대하는 거랑 그냥 평상시에 군대 한 번 경험해보고 오겠다고 지원하는 건 이야기가 다르지.
음, 합리적이다, 게다가 나랑 루이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닌데 장남이 자기 동생 사지로 보낼까 싶은 것도 있고.
그런데 상대가 내새우는 논리가 합리적이라고 해도 내가 그 논리를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되지 못하지.
“그래도 전 반대입니다. 하다못해 사관학교로 가란 말입니다 그럼. 대체 어느 나라 왕제(王弟)가 사병으로 입대합니까?”
“..... 그래, 그 말도 맞긴 하지.”
“사관학교 입학 추천서는 써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병으로 입대하는 건 제 눈에 흙이 들어가지 않는 한 안 됩니다.”
눈에 흙이 들어간다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잠시 못 알아들은 외제니 황태후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대충 맥락상 감을 잡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루이에게 말해두겠네.”
“그래주십시오, 제 말은 지지리도 안 들어 쳐먹...... 크흠.”
“어허.”
"죄송합니다."
"황제가 되었으면 품위를 지켜야지."
젠장, 또 한바탕 혼나게 생겼군.
***
결국 루이는 자기가 목적했던 걸 조금 다른 형태로라도 이루었다. 그리고 그게 열이 뻗쳤다.
“후우.”
나는 침대에 누웠다. 창밖으로는 어두운 하늘이 보였다.
에펠탑 없는-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가능성도 제법 있는-파리의 조용한 밤에는 달 하나가 떠 있었다.
그리고 내 옆에는 한 여성이 누워 있었다.
나의, 나만의 아내.
사실 좋아서 결혼한 건 아니지만-내가 결혼하자고 한 건 맞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철저한 정치적 목적으로 이루어졌으니-어찌되었든 간에 내가 평생 책임지고 함께해야 할 여성이다.
내 아내는 뒤척이듯 움직이다가, 내게 몸을 돌렸다. 그녀의 눈은 떠져 있었다.
“여보.”
“.... 응.”
“고민 있어요?”
“아니.”
“거짓말.”
“...... 그래, 많아.”
국가를 통치하는 데 있어서 고민이 없으면 이상한 거다.
“그거 말고요.”
“..........”
나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
“살다 보니까.”
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나는 별 이유도 없이 아버지와 멀어졌던 것 같아.”
“그건........”
나는 답이 돌아오기 전에 말을 이었다.
맑은 하늘에서 별이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당신을 이제야 조금 이해했는데.
내가 불합리하게 당신을 대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싶은데.
내가 너무 늦게 깨달은 걸까.
깨닫고 나니, 아버지, 당신은 더 이상 이 곳에 계시지 않는군요.
그걸 깨달은 순간, 지독하게 슬퍼졌다.
***
프랑스 제국, 마르세유 항
여객선 여러 척이 정박한 채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증기기관에서 나오는 연기들이 굴뚝에서 뿜어져나와 엔진이 가동되었음을 알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탑승했다.
황제가 의회에 통과할 것을 요청하고, 의회가 승인한 칙령에 의해, 한 줄기 희망을 건 수많은 이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프랑스령 인도에 유대인 전용 거주구를 세우고 자치권을 부여하겠다.
사실상의 추방선언이었고, 격리였지만 그래도 괜찮다.
이미 유대인에 대한 여론은 밑바닥에도 바닥이 있다는 걸 알려주듯이 추락하고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적어도 자제하라고 촉구하기는 하였으나, 지난 전쟁의 패배와 현재진행형인 대공황 양자 모두가 유대인의 세계 지배 음모라는 소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자들이 꽤 많았다.
그 와중에도 누군가는 유대인을 보호해 주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린치하고는 하는 상황.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매일 밤 두려움에 떨며 잠을 설치는 것보다는 게토에 갇히게 되더라도 하룻밤이라도 편안하게 잘 수 있다면.
그렇다면 먼 길을 기꺼이 떠날 이들도 제법 있었다.
자신의 고향에서 버티겠다고 결심한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하루가 멀다 하고 방화, 투석, 폭행 등을 당하다 보면 결국 도망치는 길을 택하고는 하는 상황이었다.
도대체 몇 년을 이어지는지, 대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경제 침체와 공황급 불경기 앞에 가장 만만한 분풀이 상대는 유대인이었고, 명분도 있었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도망칠 마지막 쥐구멍을 제공해주는 것은 프랑스 제국의 마지막 양심일까, 어찌되었든, 프랑스의 유대인들 상당수가 그 배에 오르기로 결정했다.
“엄마, 우리 어디 가?”
“응, 우리는 바다 너머로 갈 거란다.”
“바다 건너?”
“그래.”
아마 다시는 돌아오기 어려울 것이다. 재산을 몰수당하는 등의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인도행 뱃삯은 그리 싸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와 봤자 남아 있을 것은 적의뿐. 차라리 프랑스령 인도에 남아 있는 것만 못하리라.
칭얼대던 아이가 잠들자, 여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프랑스에 살던 유데인들만 온 게 아니었다. 이미 유대인들에 대한 적개심은 전 유럽에 만연했다. 러시아, 북독일 연방, 스페인 등등.
게다가 유대인들 사이에서 프랑스가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는 이유로 프랑스령 인도의 지배권을 조만간 포기할 것이라는 소문도 조금씩 돌고 있었다. 그렇다면 프랑스령 인도는 그 이후 누구의 것이 되겠는가.
항구도시 네 개로 이루어진, 합쳐서 562제곱킬로미터 크기에 불과한 작은 영토지만, 정말 어쩌면 유대인 독립국가가 세워질지도 모른다.
한창 시오니즘이 태동할 시기, 유대인 독립국가는, 설령 그게 성스러운 땅과는 좀 많이 먼 곳이라고 할지언정 매력적인 속삭임이었다. 그리고 그 희망에 모든 걸 건 수많은 이들이 배에 올랐다.
***
프랑스 제국. 파리, 튈르리 궁.
“어차피 못 지킨다.”
“예?”
“프랑스령 인도, 생피에르 미클롱, 둘 다 영국의 주요 식민지의 코앞이야, 인도군과 캐나다군에 맞서서 그 조그마한 지역 둘이 얼마나 버티겠는가?”
사실 생피에르 미클롱도 어업의 전진기지로나 좀 쓰지 경제적 가치는 그거 하나 빼면 그야말로 지하 그 미만으로 곤두박질치는 땅이다.
프랑스령 인도는 유지관리부터가 빡센 땅이고.
“차라리 가격이라도 맞는다면 아메리카 식민지들은 미국에 팔아넘기는 것도 괜찮겠지. 루이지애나처럼.”
최적의 경우는 그걸 미국에 팔아넘기고 그로 인해 미국과 영국 사이에 마찰이 발생하는 건데, 그게 그렇게 쉽게 일어날 상황은 아니다.
“미국이 끼어들어주면 일이 훨씬 편해질 텐데.”
아쉬운 일이었다.
***
남아프리카, 킴벌리.
옷을 잘 차려입은 신사의 손에서 종이가 구겨졌다.
전보용지에는 여러 말이 주저리 주저리 쓰여 있었지만, 결론은 간단했다.
-불허함. 일개인에게 그렇게 큰 권한을 줄 수 없음.
“빌어먹을 것들.”
본국의 의회에 이거 때문에 쏟아부은 돈이 얼마인데 퇴짜를 먹여?
“무능해 빠진 것들, 하기야 그러니까 러시아가 발칸으로 나오는 것도 못 막았겠지만.”
영국의 4천만 인구를 내란으로부터 지키고 과잉 인구를 수용하기 위한 대성전의 선두에 선 그를 지원하기 위해 특별법을 제정해도 모자랄 판에 발목이나 잡아대는 의회에게 욕설을 내뱉은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내가 개인이 아니게 되면 되겠군.”
어찌되었든 간에, 그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대영제국의 영광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디즈레일리 총리를 존경하기도 했다.
제국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더욱 진취적인 식민지 개척이 필요한 시점이었고, 보수당과 디즈레일리는 거기에 대해서만큼은 그와 뜻이 일치했으니까.
‘하지만 모자라.’
그렇다 한들 결국 삼국동맹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형편이 아닌가.
그날, 그 남자는 귀국을 결심했다. 귀국한 뒤 할 계획도 세웠다.
보수당 입당과 정계 입문.
다행히, 그는 돈은 흘러넘치도록 많았다. 남아프리카는 이미 그의 사유지나 다름없었고 그의 기업인 드 비어스를 통해 그는 세계 최대의 광산재벌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넘쳐나는 돈과 강력한 신념, 이 두 가지로 무장한 남자에게 있어 정계는 새로운 모험일 뿐이었다.
그 남자, 세실 로즈는 얼마 뒤, 런던행 여객선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