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성녀(5)
프랑스 영해, 툴롱 인근.
“발사!”
전성관을 통해 명령이 전달되고, 포성이 울렸다.
“빌어먹을, 이제야 뭐가 좀 작동하는군.”
함장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지난 포격 훈련 때는 포탑 세 개가 모조리 고장나 단 한 발도 못 쏘는 미친 상황이 벌어졌었다. 그 전에도 포격을 하자 그 충격파로 인해 사격제원을 계산해줘야 할 사격통제장치의 톱니바퀴들이 뒤틀려서 응급조치 따위로는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의 손상을 입는 바람에 사통장치의 톱니바퀴를 더 충격에 강한 물건으로 모조리 교체하는 등의 소동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번 훈련의 목표는 응급조치를 제외한 정비 없이 얼마나 오래 작전할 수 있는가, 즉 얼마나 많은 포탄을 정비 없이 쏴댈 수 있는가, 얼마나 먼 거리를 정비 없이 갈 수 있는가 등이었다.
물론 화포와 포신의 수명 등은 이미 다 측정되었지만, 아직 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게 제법 있었다. 예를 들어 포격을 장시간 지속할 때 함선에 누적되는 충격이라거나.
이런 걸 확인하기 위해 기술자 다수가 동승한 채 여전히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소문에 따르면 이놈 결함 보완하고 수리하고 개선하는 데 든 돈이 이거 한 척 더 만들 돈이랍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실제로 예산이 제법 소모되었다더군, 추가 예산이 편성되지 않으면 5번함은 정말 건조가 취소될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렇습니까.”
현재 잔 다르크급의 건조는 자재 준비 및 조선소 확장 정도에서 중단되어 있는 상황이다. 일단 1번함인 잔 다르크에서 함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설계상, 운용상의 난점을 영혼까지 다 뽑아낸 다음 그걸 전부 보완한 설계로 2번함 이후의 함선들을 뽑아낼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뒤에는 잔 다르크도 장기간 도크에서 다른 함급과 같은 수준으로 대개장이 예약되어 있었고.
완전히 새로운 설계의 전함이라는 데에서 오는 태생적인 문제였다.
그럼에도 프랑스, 적어도 황제는 이 전함이 바다의 모든 패권을 뒤집을 한 수라고 여기고 있었다.
***
“잔 다르크는 단도다.”
“예?”
앙리 장군은 이놈이 또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거 불경죄다.
“장군, 체스를 둘 때, 누가 봐도 두 수 이내에 체크메이트를 당할 수밖에 없네, 여기서 이기는 방법은 무엇인가?”
“지지 않는 방법이 아니라 이기는 방법입니까? 지지 않는 방법이라면 스테일메이트(stalemate, 킹이 체크 상태가 아니면서 이번 차례에 스스로 체크가 되는 자충수 외에는 둘 수 없는 상태, 다른 모든 조건이 체크메이트인데 킹이 체크 상태가 아니라는 조건이 필요한데, 엔드게임이 꼬이면 다 이겨놓고 스테일메이트가 나올 수 있다. 스테일메이트가 나오는 경우 남은 기물의 수 등에 무관하게 무승부로 처리됨)를 유도하는 방법이 있겠습니다만.”
“있네, 이기는 방법.”
“무엇입니까?”
“체스판을 엎어 버리거나, 체크메이트를 내려는 상대의 손목에 단도를 꽃아버리거나.”
“........”
뭐 이딴 소리가 다 있냐, 대충 그런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앙리 장군은 한 가지를 유추해냈다.
“잔 다르크가 그 단도라는 거군요.”
“영국의 손목에 박아넣을.”
“전 잘 모르겠습니다. 나폴레옹 1세께서도 신무기에 대해서는 굉장히 비판적으로 평하시지 않았습니까? 증기선만 해도......”
“그리고 트라팔가르에서 졌지. 사실 체스판을 엎어버린다는 발상은 전 세계가 다 할 수 있네, 외교에서 체크메이트 직전에 몰린 국가가 판을 뒤집기 위해 전쟁을 택하는 일, 흔해빠진 일 아닌가?”
“..... 그건 그렇습니다만.”
“물론 이는 굉장히 소모적인 전략이야, 일반적으로 외교에서 체크메이트 직전까지 몰렸다면 전쟁을 이기는 건 더더욱 어렵거든, 전쟁은 그 자체로 외교적인 우위를 점하게 해 줄 수 있지만, 반대로 외교적으로 몰린 끝에 전쟁을 일으킨 경우라면 오히려 자멸의 길로 향하는 폭주기관차 신세가 될 가능성이 훨씬 높지.”
대표적인 사례가 나치 독일, 그리고 일본 제국이다.
전투는 전략의 승리를 확인받는 최종 결재권자의 도장 같은 것, 그리고 전쟁 역시 일어나기 전부터 외교를 통해 승리를 확정지어놓고 시작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지난 전쟁에서도 그랬네, 전쟁 개시 직전에 이미 비스마르크라는 플레이어에게 대부분의 기물이 잡히고, 몰트케라는 플레이어가 펼친 엔드게임, 전쟁을 통해 체크메이트까지 단 한 수 남은 상태에서, 단 한 개의 기물이 판에 난입하면서 체크메이트를 스테일메이트로 만들었지. 하지만 반복할 수는 없어, 이미 스테일메이트를 이끌어내기까지 우리가 날려먹은 기물이 너무 많아서, 다음 판이 열릴 때까지 그 말들을 다시 만들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는 상태니까.”
프랑스의 국력 손실이 심대하다. 독일은 순식간에 복구가 가능하지만, 프랑스는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제 스테일메이트 유도를 넘어 체스 게임을 이기려면 뭘 해야겠는가. 이번의 영국과 프로이센의 적이란 적은 다 끌어모아 삼국동맹을 구성한 것 역시 간신히 만들어낸 더블 스코어일 뿐인데. 상대는 당대 최고이자 역사상 최고 수준의 플레이어고 우리는 말도 몇 개 빠졌네, 게임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기물을 내려놓고 시작해야겠지, 그 상황에서 게임을 이기려 한다면 어떻게 해야지?”
“...... 판을 엎거나, 말씀하신 대로 상대의 손목에 단검을 박아야겠죠.”
“게다가 우리가 상대해야 할 플레이어는 하나가 더 있지, 우리보다 말이 세 배는 많고 우리가 한 수를 둘 때 두 수를 둘 수 있는 플레이어가.”
대영제국.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자, 모든 바다의 지배자.
그 오만하기 그지없는 이름을 현실로 가져온 강자가 우리의 또 다른 상대다.
정신줄 놓고 실실 웃을 뻔했다, 솔직히 난이도 미쳤냐고.
그런데 어떻게 해, 그거 말고는 남은 길이 전부 막혔는데.
지금 프랑스는 문자 그대로 식민지 원툴이란 말이다. 그런데 식민지, 특히 프랑스 식민제국의 식민지는 대부분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큰 효용을 보기 어렵다.
“장군, 100년 전까지는 식민지는 금광이었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아버지의 시대 이후, 식민지는 뱃살이 되겠지.”
“뱃살.....입니까?”
“머나먼 과거, 인간이 농사를 알기 전, 사냥으로 먹고살던 시대에 복부에 축적되는 지방은 인간이 얼어죽거나 한동안 식량을 찾지 못했을 때 기댈 수 있는 보급고였네, 하지만 농경이 시작된 지금은? 문자 그대로 흉하기만 할 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네. 아니, 오히려 짐이지, 프랑스 제국의 식민지는 넓지만, 정작 전쟁에서는 눈곱만큼도 도움이 되지 않았어.”
“식민지를 줄이시겠단 것입니까?”
“그렇네.”
앙리 장군은 현재 군부를 완전히 장악한 상태, 그리고 더 나아가 총리보다도 신뢰할 만하기에, 나는 내 비전을 그와 공유했다.
“아프리카 정복 계획은 이미 보불전쟁 이후 예산 부족으로 잠정 중단됐지만, 완전히 중단할 걸세, 이미 아프리카에서 가장 황금같은 땅들은 영국의 손에 넘어갔어. 차라리 북독일 연방이 아프리카에서 힘을 빼게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알제리는 어쩌시겠습니까?”
“거긴 예외, 아프리카는 알제리 외에는 손대지 않는다. 그리고 인도차이나 총독부 말이네.”
“예.”
나는 인도차이나 식민지를 둘로 잘랐다.
“베트남과 나머지들. 베트남은 일단 유지하되, 나머지 잡스러운 놈들은 시암과 거래할 수 있겠지.”
“시암입니까?”
시암, 다른 이름은 태국.
원 역사에서도 속칭 ‘대나무 외교’를 통해 식민지가 될 운명을 모면한 시암은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친밀했으나,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정복해나가자 위기를 느끼고 영국으로 갈아탄다.
“분명히 일어날 전쟁에서, 영국의 뒤통수를 후드려패주는 대가로 베트남을 뺀 인도차이나 식민지 전체를 약속한다. 그리고 베트남은 생마르탱과 함께 네덜란드에게 미끼로 던질 거다.”
“네덜란드입니까?”
“네덜란드를 손에 넣으면 런던은 일격에 불바다로 만들어버릴 수 있으니까.”
“영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 여기시는군요.”
“귀관은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앙리 장군의 얼굴도 씁쓸하게 변했다. 그런 길이 있을 리 없다.
“네덜란드가 항구 개방과 군사통행권, 더 나아가 대영 참전까지 약속한다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도 약속해줄 수 있다. 물론 그 대신 왈롱 정도는 우리가 가져가야겠지만. 만약 참전하지 않고 중립을 지킨다면야 국물도 없는 거고.”
만약 프랑스를 상대로 참전한다? 멸망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겠지.
“지켜야 하는 식민지는 알제리와 누벨칼레도니, 폴리네시아 총독부, 기아나, 이거면 충분하고, 별일 없으면 굳이 버릴 필요까지는 없는 식민지는 톈진 조계, 생피에르 미클롱, 남극 인근 섬들, 과달라프, 레위니옹, 코모로, 마르티니크.”
지금 나열된 식민지는 전부 적자‘는’ 안 나는 식민지다. 지켜야 하는 식민지는 국가 위신에 치명적인 문제거나 중요 자원이 있거나 군사적 요충지에 위치한 식민지고.
나머지는 전부 국가 경제를 잠식하는 식민지.
“오히려 이런 군살을 떼내는 게 프로이센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는 실마리일지 모른다. 저들의 경제력이 우리를 압도한다는 데에서 이미 식민지가 경제력을 잠식한다는 것은 증명된 사실이고.”
19세기부터 저출산에 시달려온 프랑스에게 있어서 필연적으로 본국의 인구를 분산시키게 될 식민지는 오히려 암덩어리다. 영국이나 독일이면 모를까.
“유대인들 문제는 어쩌시겠습니까?”
“아, 그것도 문제지.”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미 프랑스 내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도는 극상이다. 괜히 영국 정부가 베를린 회담 와중에 유대인들에 대한 포그룸에 대해서 깐 게 아니라는 말이지.
“인도로 보내면 어떤가?”
“예?”
“프랑스령 인도 지역 말이네.”
프랑스령 인도, 21세기에는 푸두체리라고 불리는 지역으로, 연결된 하나의 큰 영토가 아니라 네 곳에 나뉘어 있는 개미 눈곱만한 월경지들이다.
“인도 서부에는 다수의 유대인들이 이미 살고 있네, 꽤 오래된 유대교 공동체들이지, 그런데 프랑스령 인도를 이용해 유대인 다수를 인도로 밀어넣으면 어떻겠는가?”
“........ 당장의 의미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일단은, 그렇지.”
나는 인도 서부 해안 지역을 슥 그었다.
“인도 서해안의 특징은 좁고 길다는 거네, 해안에서 100km 정도에 거대한 산맥들이 죽 이어져 있으니 말이네.”
굳이 말하자면 칠레 모양이다.
“그리고 인도 제국은 그 자체만으로 엄청나게 뒤섞여 있네, 하나의 인도인으로써의 정체성이 없다는 거고, 따라서 독립운동이 일어나더라도 종교, 카스트, 민족 등의 문제로 강력한 폭발력을 가지기 어렵지.”
마하트마 간디가 해내기는 했다만, 간디 이전이라고 아무도 영국의 지배에 저항하지 않았겠는가? 영국의 인도 지배는 현지인들 협조 없이 이루어진 것 같은가?
현지 토호들은 영국이 자신을 지배해주는 게 이득이 되니 영국에 복종한다. 이래서야 무슨 세계 최강의 최면어플 공산주의를 들고 와도 인도에서의 혁명이나 독립운동 등이 쉬울 리가 없다.
하지만 유대인이라면 어떨까.
엄청나게 폐쇄적이고, 엄청나게 민족과 혈통에 집착하며, 2000년 넘게 학대당했는데도 민족 정체성을 아직 가지고 있는, 진짜 지독한 민족. 저 정도로 밟혔으면 그냥 민족 자체가 와해되어서 다른 민족에 편입될 만도 한데 아직도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경이로울 따름이다.
“그 유대인들을 이용한다. 박해가 심한 유럽을 떠나 식민지에서 새 삶을 살게 해주는 거지, 하지만 프랑스령 인도는 매우 작은 공간이니, 저들은 주거를 위해서라도 영국령 인도, 특히 인도 서부 해안 지역에 퍼질 거다, 그렇게 만들어야지.”
그리고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영국이 전쟁에서 지면 프랑스에 의해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인도 서부 해안 지역을 유대 독립국가로 떼어주겠다고 하면?
아마 죽기살기로 덤빌 거다. 그리고 영국도 좌시할 수 없는 것이, 인도 서부 해안 지역은 21세기 기준으로도 인도에서 평균 GDP가 가장 높은 지역일 정도로 잘 발달된 지역이다.
햄버거 세트에서 햄버거가 탈주하는 꼴이니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적잖은 병력이 인도에 묶일 거다. 본토에서 지원병력이 가지 않더라도 인도에서 징병되어 유럽에 투입될 병력자원이 그대로 인도에 묶이는 것만 해도 엄청난 이득이다.
그 와중에 유대인이 영국 손에 홀로코스트를 당하든 말든 내가 알 바는 아니고..... 전쟁 이기면 그때 약속 지키면 되지.
“그러니 유대인들에 대한 디아스포라를 준비해주게, 외무장관에게는 라마 5세와 접촉해보라고 하고, 인도차이나의 땅 일부를 떼어줄 수도 있다고 하면 본인이 직접 파리까지 뛰어나오겠지.”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