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보나파르트-31화 (31/200)

31화 성녀(4)

파리, 프랑스.

“...... 저, 어머님.”

“아, 왔나요?”

외제니 황태후는 몸을 일으켜 소녀를 반겨 주었다. 소녀는 반대로 쭈뼛쭈뼛 하면서 들어올 뿐이었다.

“앉아요, 하루이틀도 아니고, 가족끼리 이렇게 불편해해서 되겠어요?”

따뜻한 커피가 두 사람의 사이에 놓여졌고, 부드럽게 웃은 황태후는 커피에 각설탕을 집어넣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달디달게 먹는 걸 좋아하시죠.”

딱히 입맛이 다르지는 않았던 소녀, 엘리자베트 황후는 얼굴을 붉혔다.

“다른 곳에서는 다 어른스럽게 굴지만, 속은 아직도 아이같답니다. 물론 생각해 보면 남자들이 커도 애라는 이야기가 괜히 나온 건 아니겠지만요.”

“...... 그런가요.”

잠깐의 침묵이 지난 뒤, 외제니 황태후가 입을 열었다.

“사실, 그래서 미안한 감도 없지 않아요.”

황태후가 뜬금없이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자, 어린 황후는 입천장을 데이고 사레가 들릴 뻔 했다.

“예?”

“미안해요.”

외제니 황후는 그 자애로운 모습으로 말했다.

“황제 폐하... 내 아들이 당신에게 알게 모르게 소홀하고, 그것 때문에 힘들어한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

멍한 표정이 된 황후에게, 황태후는 말을 이었다.

“그 아이는 모든 이들에게 벽을 칠지언정, 기본적으로 착한 아이에요, 정말로요. 하지만 단지 착하다는 것만으로는 어린 나이에 가족과 생이별한 당신의 빈자리를 채우기 어렵다는 것, 잘 알고 있답니다. 아이라도 빨리 생겼으면 좀 덜하겠지만요.”

“...... 알고 계셨군요.”

“조급해보였으니까요.”

오래 전 자신과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기에, 외제니 황후는 과거의 자신을 보는 듯한 소녀를 다독일 수 있었다.

“저 역시 아이를 빨리 낳아야 한다는 조급함에 빠졌던 적이 있답니다. 그래서 친구의 조언을 받은 적도 있죠.”

엘리자베트는 그런가 하고 넘어갔지만, 사실 그 친구라는 여성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여주인인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사실 루이는 사고에 가까웠답니다. 의사들도 제 몸이 더는 버티기 어려울 거라고 이야기했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저나 그 아이 중 하나도 큰 문제 없이 무사히 태어나도록 신께서 허락해 주셨죠, 감사할 따름이에요.”

“.......네.”

황태후는 딸처럼 느껴지는 황후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충동을 잠시 느꼈다.

“너무 걱정하지 마요, 내가 도와줄게요, 세상에서 저만큼이나 그 아이를 잘 아는 사람은 없답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할 수 있도록.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수 있도록.

일견 당연해 보이는 일이지만, 얼마나 많은 남편과 아내가 그것을 하지 못해서 불행해졌던가.

***

명예와 자긍심은 권리이며 승리와 생존은 의무다.

명예로운 패배, 비겁한 승리 따위는 없다.

수치스럽게 승리하더라도 명예로운 패배보다는 낫다.

그것이 대영제국의 행동원리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여왕, 신앙의 수호자이시며 하노버의 대공녀이시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공녀, 작센코부르고타의 공비이자 작센 공비, 인도의 여황제, 조지 4세 왕립 기사단장, 가터 기사단장, 씨슬 기사단장, 성 패트릭 기사단장, 바스 기사단장, 성 마이클과 성 조지 기사단장, 영국령 인도 기사단장, 인도 메리트 기사단장, 인도 성 기사단장, 로열 빅토리아-앨버트 기사단장, 인도 제국 기사단장, 인도 왕좌 기사단장, 무공 기사단장, 빅토리아 왕립 기사단장이신 빅토리아 여왕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기품있는 모습의 여왕이 걸어와 자리에 앉았다.

총리 이하 내각 구성원들 일체가 일제히 예를 갖추었고, 여왕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디즈레일리 경.”

“하명하십시오, 여왕 폐하.”

“프랑스와의 외교 관계가 파국에 이르렀다고 들었소.”

“....... 송구하옵니다.”

“그와는 별개로, 짐에게 이러한 투서가 들어왔소, 투서? 아니면 탄원서라 부르는 게 더 적합할지도.”

빅토리아 여왕은 편지 하나를 자신의 팔걸이 위에 내려놓았다.

“프랑스 제국의 신형 전함, 조안 오브 아크(잔 다르크)급에 대해 해군부가 터무니없이 낙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소.”

제1해군경부터 시작해 해군의 고위 인사들의 표정이 미미하게 비틀렸다.

“폐하, 조안 오브 아크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분석관들의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덩치만 클 뿐, 여러 제한이 많다고 말입니다.”

먼저 부포라고는 소형함 방어용 속사포밖에 없다는 게 감점, 심지어 어뢰조차 없다.

이 시대, 전함이 어뢰를 다는 건 상식의 범주에 속하는 시대에 대구경 부포도, 어뢰도 없이 달랑 주포와 속사포만 달고 있는 모습은 대영제국의 왕립해군 보수파 제독들의 눈에는 그저 초거대 어뢰정으로만 보였다.

주포의 명중률이 낮다는 건 이 시대에는 상식이다, All-Big-Gun? 협차사격? 이미 남아메리카 전쟁에 파견되었던 관전무관단이 장갑함으로 비슷한 시도를 한 칠레 해군의 사례를 들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는 보고를 올린 지가 오래인, 잠깐 반짝했다가 폐기된 아이디어.

전함 주포가 14인치라는 사실은 조금 신경쓰일 정도기는 하지만, 사실 이 시대에는 16인치, 18인치 주포도 왕왕 있다.

물론 짧은 사거리와 뒤떨어지는 명중률 탓에 전부 요새 공격용이거나 근거리에서 적 전함에게 결정타를 먹이는 용도로 사용될 뿐. 후대의 드레드노트급의 주포와는 억만광년쯤 차이가 있는 물건들이다.

즉 프랑스는 이미 폐기된 개념안을 기초로 비현실적인 목표를 위해 막대한 국가예산을 낭비했다고 판단한 상황이었다.

물론 이걸 가지고 영국 해군성을 비난하기는 너무한 일일 것이다. 애초에 원 역사에서도 실제로 HMS 드레드노트가 건조되기 전에는 협차라는 개념이 괜찮아 보이기는 해도 실전에서 그게 가능하겠느냐는 질문에는 대부분의 해군 인사들이 부정적이었으니.

당대 상당수의 해군 인사들도 드레드노트 건조에 반대하던 걸 피셔 제독이 확신을 가지고 밀어붙여서 드레드노트의 건조가 개시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 피셔 제독은 이제 겨우 일개 함장이었고, 해군성의 결정을 뒤엎기는커녕 해군성의 제독들 회의에 한 마디 얹어보는 것도 불가능한 위치였다. 의외로 연공서열을 지독하게 따지는 게 왕립해군이니까 함부로 말을 꺼냈다가는 선배들을 뭘로 보냐며 매장당할 수도 있었고.

아무튼, 왕립해군이 잔 다르크를 보는 시선은 프랑스가 왕립해군을 상대하기는 쫄리니까 별별 짓을 다해본다는 쪽에 가까웠고, 일반 전함, 원 역사에서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이라 불릴 군함들을 추가로 양산하면 충분히 대응이 가능하며, 그냥 덩치만 큰 바보라는 평가를 줄 뿐이었다.

그러나, 그 광경을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던 이가 있었다.

“마분지로 군함을 만든 게 아닌 한 2만 톤은 말도 안 된다고도 첨언했더군요, 프랑스가 발표는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무거울 거라고 말입니다.”

“페하, 이미 그 실험안은 폐기된 안건입니다. 저희 왕립해군의 관전무관단 전체가 동의한 사안입니다. 누가 폐하를 충동했는지는 모르지만.....”

“실험은 해 볼 수 있는 게 아닙니까?”

“전함을 순수히 실험용으로만 건조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미 충분한 데이터가 쌓여 있는 데다 전함을 한 척 건조하는 데 드는 비용을 감안해 주십시오, 폐하.”

빅토리아 여왕은 살짝 이마를 찌푸렸다.

그녀는 이 투서를 익명으로 받은 게 아니라, 투서의 작성자 본인으로부터 직접 받았다. 그 남자는 이전에 한 파티장에서 만난 걸 계기로 앨버트 공, 그리고 자신 모두와 제법 친분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는 결코 무능한 인물이 아니다. 여러 공적을 세웠음에도 그놈의 연공서열 때문에 전함의 함장직만 지겹게 맡고 있었지만, 이미 많은 전장에서 수많은 공훈을 대영제국에게 바친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헛소리를 한다? 가능성은 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으니까. 그는 확신하는 듯 보였지만, 그가 스스로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면 충분히 잘못된 확신을 가지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녀가 직접 투서가 날아왓다는 형식을 빌어 해군성을 찔러본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의 직감에도 위험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해군부의 말대로 프랑스가 거하게 찬 똥볼에 불과하다면 다행이지만, 그 남자, 피셔 대령의 말대로 만일 전 세계 모든 해군을 송두리째 바꿔 버릴 무기라면?

이미 프랑스는 조안 오브 아크급을 4척 더 건조하고 있다. 1척은 실전배치되었고.

만일 왕립해군에게 엄청난 행운이 있어 조안 오브 아크의 설계도를 손에 넣어 그대로 건조할 수 있다고 해도 이런 함선을 건조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일이 걸린다.

이미 대영제국의 전함 머릿수는 프랑스 제국을 한참 압도하고 있으나, 그 전함들이 전부 시대에 뒤떨어진 금속 폐기물 신세가 되고 부랴부랴 건조하는 후발주자가 된다면?

최악의 경우, 프랑스에게 영국이 바다에서 패전한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트라팔가에서 넬슨이 패배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 가뜩이나 지금처럼 유럽의 외교상황이 대영제국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은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진짜 건조해서 실험해보자니 전함의 건조비가 그렇게 만만한 것도 아니고, 기존에 있던 전함들로 협차를 실험해봤는데 현실적이지 않다고 까이고 폐기되었다는데 해군 제독도 아닌 빅토리아 여왕으로써는 뭐라 할 말도 없었기에 해군경의 말을 반박할 수는 없었다.

분명히, 해군경의 말은 합리적이었으니까.

“해군부에서 입수한 다른 정보에 따르면, 프랑스의 조안 오브 아크는 현재 잔고장이 너무 잦아서 제대로 된 전투항해도 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사격훈련 도중에 주포탑 전체가 모조리 고장나서 발포가 안 된 일도 있다고 하니 말입니다, 게다가 반드시 수반함을 동원해야 하니 비효율적입니다. 그녀의 설계사상대로 작전하기 위해서는 수반함이 없으면 작전이 불가능한데, 그렇게 될 경우 함의 항속거리와는 무관하게 수반함의 항속거리가 곧 작전반경이 됩니다. 이는 보급함 없이는 원양과 식민지에서의 작전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단 한 번 작전하기 위해서 다수의 보급함이 붙은 한 개 전대가 움직여야 하며, 여러 작전에 투입할 수 있는 범용성이 극도로 부족한 문자 그대로의 하나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한 전함입니다. 식민지도 없는 북독일 연방이라면 모를까, 왕립해군이나 프랑스 제국의 입장에서는 채용할 가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북독일 연방을 비롯한 국가들이라고 해도 실질적으로는 기존의 전함을 양산해 다용도로 운용하는 게 훨씬 낫습니다.”

해군성이 내놓은 결론은 간단했다.

성능은 기존 전함보다 조금 나은 정도일지도 모르지만 아닐 가능성 높음, 범용성은 바닥, 현실에서의 작전능력을 제대로 발휘하려면 수반함이 바리바리 붙어야 해서 보급소요는 하늘을 찌르는 그런 물건을 왕립해군이 구태여 연구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야매로 짜집기해서 개념만 선진적이지 결함투성이인 전함에 시선이 끌린 영국과 독일이 드레드노트를 경쟁적으로 건조하기 시작하는 바람에 국가 재정이 파탄나고 관계가 험악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던 파리의 누군가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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