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성녀(3)
프랑스의 신형 전함이 전 세계 해군에게서 부당한 저평가와 무시를 당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영국은 이로써 프랑스가 명백히 대영제국을 적대하고 있다는 걸 확신했다.
단순히 북독일 연방을 우려하는 거였다면 애초에 우위에 있었던 만큼 그냥 그 페이스대로 건함을 계속했으면 그만일 터, 굳이 신무기를 연구하려 든다는 것은 프랑스가 가상적국으로 상정한 게 이탈리아나 북독일 연방 따위가 아니라는 걸 암시했다.
그리고 그럴 만한 해군력을 가진 국가는 단 하나, 왕립해군을 가진 대영제국이었다.
물론 이미 예지된 사실이었지만, 씁쓸한 결과이기도 했다. 원 역사에서 폐위된 외제니 황후와 그 아들 루이를 자기 궁전에서 지내게 해 줬을 만큼 그녀와 친분이 있었던 빅토리아 여왕 역시도 적잖이 씁쓸해했지만, 이미 양국의 관계는 보불전쟁 때부터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건 모든 식자층이 동의하는 사실이었다.
보불전쟁 때 영국이 은근슬쩍 프로이센을 지지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하다못해 나폴레옹 3세가 전사하지만 않았어도 이 정도의 관계 파탄을 불러오지는 않았을 테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대영제국은 엎질러진 물을 아까워하기보다는 관계가 틀어진 상대방을 최대한 엿먹일 방법을 궁리하는 쪽이었다.
대영제국 수상 디즈레일리는 입을 열었다.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극동부터 보고해보십시오.”
“청국은 이미 국가를 유지할 역량이 없습니다.”
영국은 청나라를 먹어치우는 데에 전력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영국이 원래 중국까지 넘보지 않았던 것은 진짜로 중국까지 다 먹어치우면 이미 인도를 먹어치운 판에 유럽의 공적이 될 판인지라 그랬던 것 뿐이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전혀 달랐다.
이미 프랑스는 대놓고 영국을 가상적국으로 설정하고 있었으며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등도 삼국동맹을 맺어 똘똘 뭉쳤다.
아군이라 할 만한 북독일 연방은 오히려 이쪽에게 동맹을 애걸해야 하는, 문자 그대로 영국이 아쉬울 게 없는 입장이고 이탈리아 왕국 역시 독자적으로 삼국동맹을 상대하라면 눈이 캄캄해질 지경이니 영국에게 매달려야 할 판.
따라서 영국이 식민지를 과확장한다고 태클을 걸 국가 자체가 없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상식은 식민지가 곧 국력이라는 것. 따라서 삼국동맹을 상대하기 위해 국력을 키워야 했던 영국은 최악의 경우 전면전도 각오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국력을 크게 키우는 것을 필요로 했다.
중국에 대한 식민화를 주저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문제는 중국은 영국이 단시간에 집어먹기에는 너무 크다는 것.
물론 영국은 진짜 중국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많은 인구를 가지고 얼마나 골치아픈 동네인지까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쉽지 않으리라는 점은 인도 경영 경험에 비추어 보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즉 단시간에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다른 극동의 두 국가를 노려야 하는데, 그 극동의 두 국가, 조선과 일본은 상황이 달랐다.
“일본에서는 세이난 전쟁이 장기화되어 2년차에 접어들었습니다. 사쓰마 번에 프랑스는 여전히 대량의 무기를 판매하여 양측의 균형을 고의적으로 맞추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프랑스를 막으면 십중팔구 전쟁이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우리는 두 번째 대륙봉쇄령을 당할 수도 있네, 지금은 프랑스가 일본에서 설치도록 놔둘 수밖에.”
프랑스가 군제를 개혁하고 신형함을 개발하고 건조하는 데에 돈이 한두 푼 드는 게 아니었고, 예산 확보에 혈안이 된 프랑스 제국은 그야말로 팔아치울 수 있는 건 다 팔아치웠고 식민지도 수탈했다.
현재 일본에서 내전 중인 양쪽이 어느 쪽도 이기지도 지지도 못하게 하기 위해 양쪽에 무기를 다 팔아먹는 건 애교였다. 그래야 더 길게 뽑아먹을 수 있으니까.
아무튼 이로 인해 세이난 전쟁이 장기화되자 영국은 일본보다는 조선에 더 신경쓰기 시작했다. 우선 통상 조약을 체결한 뒤 청국을 압박하는 한편 조선을 친영 국가로 만들어 극동에서 블라디보스토크를 위협하는 대 러시아용 지렛대로 쓸 목적이었다.
“일본은 프랑스에 내주도록, 우리는 조선을 갖는다. 중국을 식민화하는 건 천천히 해도 되지만 러시아를 막을 방패막이는 당장 필요하니 우선순위가 뭐가 더 큰지는 명백하네.”
“예, 총리 각하.”
“인도차이나에서도 프랑스가 적극적인 식민화에 나서고 있습니다, 또한 러시아가 노골적으로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에 손을 뻗고 있고, 오스만 제국은 자국 영토도 제대로 간수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프랑스와 러시아가 손을 잡았다, 이 사실이 이토록 귀찮은 문제로 번지게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비스마르크가 보불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고의적으로 영국과 프랑스 사이를 이간질해놓았다는 걸 알게 되면 아마 중립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볼 사람들은 비스마르크의 손에 놀아난 영국 정부가 제 무덤을 팠다고 할 터였다. 그만큼 유럽에 영국의 적이 많았다.
“다음 전쟁에서는 오스만은 반드시 멸망합니다.”
반드시 그럴 것이다. 이미 오스만은 껍데기만 남았으니까.
설령 러시아가 오스만을 살려두더라도 오스만이 스스로 망할 거다.
유럽을 넘어 구대륙 전체에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늙은 사자는 자신이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다는 걸 자각하고 부랴부랴 친구를 끌어모으지만 그 수는 여전히 부족할 따름이었다.
***
“글라이더.....연구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글라이더.”
총리는 의문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런 장난감을 정부에서 후원할 만한 가치가 있겠습니까?”
차고 넘친다.
분명히 말하건데, 글라이더는 기본적으로 동력 비행기의 뿌리가 될 수 있다. 아직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띄우려면 20여 년 정도가 남은 지금, 글라이더가 있어야 비행기를 만들 기초적 항공역학 기술이 쌓인다.
물론 그냥 최초의 동력비행 타이틀 같은 거나 따려고 내가 이러는 건 절대 아니다.
‘공군.’
하늘을 지배하는 자, 전장을 지배하리니.
세계 최초의 공군을 만들어야 한다. 영국과 전쟁을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시간이 걸릴 거다, 19세기를 통으로 쏟아 20세기에 들어선 뒤에나 쓸만한 전투기가 나올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시작해둬야 나중에 뒤늦게 뛰지 않을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동력기관과 금속 연구도 강력하게 지원하게, 고열과 강한 충격을 오래 견딜 수 있는 합금 기술이나 제강법을 만드는 것도 지원하고.”
이 시대의 야금술은 21세기에 비해서는 애들 장난 수준이다, 진짜로.
하지만 뭐가 되었든 간에 돈이랑 시간을 투자하면 안 될 건 없는 법이기도 하다.
“......... 폐하, 도대체 뭘 생각하시는 겁니까?”
정밀기계공업은 이 시대 프로이센이 최고다, 벤츠 엔진 같은 것만 생각해도 그렇다.
하지만 우리가 프로이센에게 엔진 기술 좀 사고 싶다고 말할 처지는 아니니까, 다른 방향을 찾아야지, 간단한 구조에 싸고, 좀 수명이 짧더라도 쉽게 고칠 수 있고.
다행히 나는 그런 종류의 엔진을 알고, 취미삼아 직접 만들어서 날려 본 적도 있다. 재료가 틀리니 완벽하게 구현할 수는 없더라도 비슷하게나마 만들 자신도 있다.
펄스제트 엔진, 그냥 충분한 내열성을 가진 철판을 둥글게 말아서 용접하고, 연소실가 베기관, 벨브를 만들고 연료분사기와 점화플러그만 달면 완성.
난 21세기에 그걸 주말에 집에서 자작한 뒤 무선모형에 달아서도 날려봤다. 효율은 낮고 소음이 크지만 초기 비행기 상대로는 감지덕지할 수준, 막말로 프롭기의 프로펠러와 엔진 만들기보다 훨씬 쉽고 신뢰성도 오십보백보다. 연료도 딱히 가리는 것 없이 등유든 LPG든 LNG든 넙죽넙죽 잘 받아먹는다, 이건 다수의 제트엔진들의 공통적인 특징이긴 하지만.
얼마나 단순한지 동네 대장간에서도 생산과 수리가 가능하고, 엔진 수명이 짧긴 하지만 10여 분이면 정비가 가능하고 무엇보다 속도가 2차대전 후반 전투기 수준은 나온다.
1차대전 시기에만 맞춰 나와줘도 하우네브급 오버테크놀러지다. 포커 삼엽기나 캐멀 전투기 따위로 시속 600km는 찍는 글라이더 꼬리날개에 쌍발 펄스제트 엔진 달아서 만든 전투기 상대해봐라, 욕이 절로 나올걸?
대신 속도조절이랑 착륙이 안 돼서 글라이더마냥 활공해서 착륙해야 한다는 점 등이 어렵겠지만 그래도 1차대전기 조종사 양성보다는 훨씬 쉽다는 것도 이점. 무장은..... 속도 감안하면 명중률은 몰라도 단시간에 적을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는, 연사력이 미쳐돌아가는 물건이 필요할 텐데.
그쯤 되는 장비를 만들면 제공권은 확실히 우리 거다. 왕립해군의 해상봉쇄도 극복할 수 있을 거고, 우리 항공기가 런던에 수류탄이라도 몇 발 던지고 튀면 공습이라는 개념이 없는 영국이 얼마나 혼란에 빠질까?
하지만 총리에게 그 기나긴 내용을 다 설명해줄 자신은 없었다.
그저 한 마디를 해줬을 뿐.
“미래.”
프랑스, 아니, 유럽 열강 전체의 운명은 하나다.
어느 쪽에 서든, 이기든 지든 간에,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한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할 방도는 전혀 없다, 엄청난 행운으로 첫 번째 대전쟁을 피했다고 해도 두 번째 대전쟁에서 열강이란 이름을 가진 나라치고 그 지옥도에 휘말리지 않을 방법은 문자 그대로 전혀, 단 하나도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전쟁을 준비한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lum), 짐은 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이 전쟁은 분명, 짐이 요절하지 않는다면 짐의 생전에 반드시 일어날 걸세. 유럽은 오래전부터 화약고 위에 올라앉아 있는 형국이었으니까.”
비스마르크가 이렇게 말했다지? '작금의 유럽은 화약고고, 지도자들은 그 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지, 언제 그 화약이 터질지 알 수는 없지만, 어디에서 터질지는 알 수 있지, 발칸에서 벌어질 저주받은 바보짓이 그 화약고를 터트릴 거야.'
역시 엄청난 통찰력이다. 머잖아 빌헬름 1세가 죽은 뒤에는 빌헬름 2세에게 쫓겨난 뒤에 늙어죽을 거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내가 치세 내내 저 양반이랑 싸워야 했으면 나도 제명에 죽진 못했을 거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군으로 두기에도 골치아픈 상대고, 솔직히 자기 외에는 유지할 수도 없는 체제를 만들어놓은 건 본인 책임이지, 그걸 연착륙시켜서 바보가 굴려도 제법 돌아갈 수 있는 체제로 바꿔놓는 게 위정자의 할 일 아닌가?
오죽했으면 빌헬름 1세가 비스마르크 '밑에서' 황제 노릇하기 너무 힘들다고 비꼬았을까. 너무 전권을 쥐고 흔들어서 견디다 못한 상급자가 자기를 쫓아내게 만든 것도 어떻게 보면 본인 처신의 실패지. 인간이 완벽할 수는 없다고는 해도 비스마르크가 마냥 무결점의 초인은 아니다. 그래도 능력이 위인급인 건 사실이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