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보나파르트-29화 (29/200)

29화 성녀(2)

역사 속에서 벨 에포크라 불렸어야 할 이 시기.

그러나 그 벨 에포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전 유럽을 뒤덮는 군비경쟁이 시작되었다.

영국은 사상 최대의 함대 건조 예산을 통과시켰다. 신형 철갑함, 그러니까 원 역사에서는 프리-드레드노트, 전노급이라 불렸을 전함들을 문자 그대로 찍어내겠다는 영국의 선언이 있었다.

거기에 호응한 것은 북독일 연방이었다. 프랑스 제국의 해상봉쇄 때문에 전술적 승리를 거두고도 전략적 패배로 끌려들어가야 했던 북독일 연방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프랑스 해군을 상대하는 것을 목표로 대대적인 해군 예산 증강을 통과시켰다.

반면 프랑스 제국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기는 했다.

주된 움직임은 육군의 강화와 병력 자원 및 제독들의 질적 향상이었다. 프랑스는 이를 나폴레옹 커리큘럼이라 말했지만, 뭘로 보나 이들이 프로이센의 참모본부 체계를 벤치마킹했다는 건 분명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신무기들이 드러났다. 총탄의 위력을 약화시킨 대신 반자동으로 사격이 가능한 중간탄급 반자동 소총, 단총신 기관총, 성능으로 크루프 야포를 압도하는 신형 75mm 야포들은 빠른 속도로 전군에 배치되어갔고, 기존 무기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 등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해군 함선의 추가 건조는 거의 없었다. 사실 이해하지 못할 움직임도 아니었다.

당장 프로이센과는 육로로 연결되어 있었고, 지난 전쟁에서의 패배가 너무 뼈아팠을 테니까. 그러나 문제는 그 정도가 좀 과하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함선들을 러시아나 극동에 판매하기도 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이던 프랑스 제국은 자국의 주요 함선들을 칠레와 전쟁을 벌이는 볼리비아와 페루에게 비싸게 팔아먹는 등 해군력 증강에는 관심이 없다시피 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그 와중에도 청나라와 한바탕 전투를 벌여 베트남을 식민화하는 등의 여력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해군력이 약화되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 보였다.

거기에 프랑스 제국 내에서 도는 이야기는 각국에게 그런 인식을 부채질했다.

흔히 청년학파라 불리는 이들은 어뢰정으로 연안해군 전략을 세우자고 주장했지만, 프랑스 해군은, 특히 군 예산을 분배할 권한을 가지고 있던 황제부터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일축함에 따라 무시당했다, 그러나 기만전술의 일환으로 여전히 대외적으로 이러한 인식을 고착시키기 위해 프랑스가 공식적으로 청년학파 전략을 채택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알고 있던 유럽 각국의 뒤통수를 프랑스 제국은 시원하게 후려쳤다.

툴롱, 프랑스 해군 군항.

프랑스 제국의 황후 엘리자베타가 직접 와인병을 들었지만, 문제는 10대에 불과한 그녀의 팔힘이 한 방에 와인병을 깨트기에 모자랄 것을 우려한 프랑스 해군 관계자들은 리본으로 묶어놓은 병의 끈을 끊으면 중력이 병을 후려치게 만든 뒤 그 끈만 황후가 끊도록 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황당한 상황이 이어지긴 했다.

“........ 이거 너무 무거운데....”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표정으로 내 아내가 중얼거리는 걸 들은 나는 얼굴을 감쌌다.

“어머니, 제 아내 좀 도와주시죠.”

하긴 그냥 도끼도 아니고 무슨 중세 시대에 바랑인 근위대나 썼을 법한 무식한 크기의 도끼를 가져다놨으니 저 가느다란 팔로 들기 힘들 법도 하지.

다행히 외제니 황태후의 도움을 받아 들 정도는 되었는지 간신히 도끼를 들어올린 두 사람은 그대로 도끼를 내리찍어 리본을 끊었다.

-쨍강!

그리고 그대로 풀 스윙된 포도주병은 깔끔하게 깨졌다.

그와 동시에 환호성이 울렸다.

잔 다르크급 전함 1번함 잔 다르크의 진수식이 성공적으로 진행된 것에 대한 환호였다.

물론 의장공사와 시험항해가 있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잔 다르크의 진수는 프랑스 해군이 오랜만에 건조한 대형함이자, 세계 최대의 전함의 진수식이기도 했다.

2만 톤을 넘어 3만 톤에 좀 못 미치는 거대한 크기, 이 거대한 함체를 추진하는 스웨덴 기술자의 협조로 만들어진 프랑스제 증기터빈, 그리고 대함 화력을 책임지는 14인치 4연장 포탑 3기와 이를 통제하는 기계식 사격통제장치. 어뢰정들을 상대하기 위해 장착된 브라우닝이 주도해 개발한, 전기구동식 개틀링 타입 부포. All or Nothing이라는 개념 하에 배수량을 줄이며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집중방호구역 설계까지.

전 세계의 모든 군함들을 고철더미로 바꿔버릴 신병기가 전 세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막판까지 참 사람 조마조마하게 한 군함이었다.

우선 가장 큰 설계변경을 꼽자면 포신 생산 공정을 개선해서 주포를 훨씬 가볍게 만들 수 있다면서 내가 제안한 3연장 포탑도 충분히 모험인데 4연장 포탑이라는 기술적인 대모험을 해보자고 제안해온 해군부의 제안에 대해 가능하다면 해보라고 제안했고, 일단 포 간의 간섭 현상은 어느 정도 잡아내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해군부 놈들의 주장에 따르면 3연장보다 4연장 포가 더 만들기 쉽다고는 하던데, 무슨 논리인 걸까.

“아름다워.......”

엘리자베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성녀라는 이름에 걸맞게 온통 흰색인-사실 아직 위장도색이 제대로 되지 않은 거지만-잔 다르크의 자태를 본 나 역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한 폭의 동화 속에 나오는 성과 같다고 할까, 바다 위에 버티고 선 거대한 요새의 모습은 그야말로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었으니, 농담이 아니라 베르사유 궁전보다 저 배 한 척이 더 아름다울 지경이었다.

‘역시 프랑스제랄까.’

나는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거성을 바라보았다. 무장이라고는 단 두 가지였지만 그 두 가지만으로 충분했다. 어차피 전투는 기본적으로 수반함과 치르는 것이고, 잔 다르크의 임무는 적 전함을 격침시키는 것, 그것 하나로 충분했으니까.

그러나, 그녀가 가져온 파급력은 내 예상보다 너무 낮았다.

***

런던, 해군성.

“조안 오브 아크(잔 다르크의 영국식 발음)라.”

“이름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백년전쟁에서 프랑스를 패배시킨 성녀의 이름, 물론 그녀가 화형당할 때 영국인들조차도 우리가 성녀를 죽였다며 비난 여론이 강했고, 실제로 관련자들이 줄줄이 살해당하고 의문사하고 급사하는 등의 상황이 벌어지자 성녀를 죽여 천벌을 받은 거라며 비난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조차 그녀를 마녀로 묘사했을 만큼 그녀의 이름은 영국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파급 효과가 그렇게 클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 화력은 무시무시합니다만, 일단 다수의 함선을 확보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굳이 말하자면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같은 물건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정식 명칭 누에스트라 세뇨라 데 라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그 의미는 성삼위일체의 성모 마리아 함이며, 약 100여 년 전에 건조된 4층 전열함이다.

버지니아산 최상급 떡갈나무로 제조되어 134문의 화포를 장착한 역대 최고의 전열함이었지만 트라팔가 해전에서 허무하게 영국 해군에게 나포되었다가 폭풍에 손실되었다.

“그런 물건이 있었음에도 우리 대영제국은 트라팔가르에서 이겼습니다. 그거 하나 믿고 대영제국에게 그 꼬마가 도전한 거라면 웃음밖에 안 나오는군요.”

“하지만 저 전함이 나타낸 새로운 개념은 주목할 만 하지 않은가? ‘All big Gun’이라고 했던가.”

“제독님, 이미 실험 다 해 봤습니다. 저희 관전무관단이 칠레와 볼리비아가 벌인 해전에서 이러한 시도를 하는 걸 봤고, 이를 통해 실전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지 오래입니다.”

원 역사에서도 러일전쟁 중에 관전무관단을 보낸 영국 해군은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었다. 다만 칠레와 볼리비아 간의 전쟁이 영국과 프랑스가 신형 전함을 판매하면서 원 역사보다 치열해진 덕에 같은 결론에 더 빨리 도달한 것 뿐이었다.

잘못된 전훈에 의한 잘못된 결론에.

“그럼?”

“개구리 놈들이 헛발질을 제대로 했습니다. 그 청년학파인지 뭔지, 소형 어뢰정으로 우리 왕립해군을 상대하겠다는 망언과 하등 다를 거 없는 무의미한 시도라는 게 해군부의 결론입니다.”

만일 세계 최선두를 달리는 대영제국의 왕립해군이 비슷한 함선을 건조했다면 전 세계가 주목했으리라, 그러나 프랑스 해군에 대한 유럽의 시선은 ‘요즘 똥볼 오지게 찬다’에 가까웠고, 결국 왕립해군마저 잘못된 전훈에 의거해 ‘무식하게 크기만 하지 실전성 없음’의 딱지를 떼버리고 관심을 꺼버리자 잔 다르크는 세계 최대 최강의 전함의 지위에 등극하고 최초의 잔 다르크급이라는 패러다임을 시작했음에도, 한동안 거의 완벽하게 부당한 무시를 받아야 했다.

그 진가를 알아본 사람이 왕립해군에 없는 것은 아니었으되, 그 남자, 존 피셔는 안타깝게도 굉장한 유망주라는 평을 받고 있을지언정 아직 일개 함장에 불과했고 해군성의 제독들이 내린 결론을 뒤집을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

‘뭐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나는 이마를 짚었다.

아니, 드레드노트가 나왔으면 그동안 실컷 찍어낸 전함이 사실 고철더미라는 걸 깨달은 왕립해군은 ‘아이고 맙소사 우린 이제 망했어’라고 외쳐대고 세계 각국이 ‘전 세계 해군력 리셋이다! 세계 1위 해군 열강국 가즈아!’ 하면서 미친 듯이 전함을 찍어내고 건함경쟁에 돌입해야 하는 거 아냐?

아니 다들 왜 이래? 아니, 왜 전노급을 신건조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다들 미친 것 같아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군대가 얼마나 보수적인 집단인데 그러십니까. 폐하.”

앙리 장군은 어이가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 잔 다르크급이 어떤 함선인지는 전 잘 모릅니다. 아름다운 함선이라는 인상은 받았습니다만, 그런데 말씀으로는 거의 신기술로 도배를 하다시피 해서 건조한 전함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맞네. 완전히 새로운 개념도 다수 들어갔고.......”

“군에서는 그런 걸 싫어합니다. 그런 거 잘못 도입했다가는 최악의 경우 패전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검증되지도 않은 기술과 개념을 함부로 도입하는 건 군에서 굉장히 싫어하는 행위입니다.”

“.............”

“전 육군입니다만, 폐하께서 제안하셨다는 그 함선이 아무리 혁신적이라고 한들 실전에서 증명되지 않으면 아무도 먼저 나서서 도입하자고 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도입했다가 그게 실패작이라고 결론나면?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그것도 소총이나 대포라면 수습이라도 되지, 전함이라는 한 척만으로도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전략병기라면 주저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입니다.”

“............”

나는 밀려오는 현기증에 탁자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뭐 맘대로 되는 게 없어......’

그렇다고 내가 건함경쟁 촉발시키자고 전함 다수가 투입되는 전쟁을 지금 일으킬 수도 없는데 말이다. 아니, 이 상황에서 열강들 사이에서 전쟁 터지면 절대 곱게는 안 끝난다. 유럽 전체가 휘말리지.

‘아니, 슬퍼할 건 아닌가.’

아무튼 간에 우리 빼고 나머지가 존나게 삽질을 선택한 상황이잖아?

그럼 우리가 이 기회에 열심히 드레드노트, 아니, 잔 다르크를 만들어서 격차를 벌릴 생각을 해야지 건함 경쟁 못 촉발시켰다고 슬퍼할 이유가 없잖아?

저놈들이 열심히 전노급을 만들어줄수록 저놈들이 받을 충격도 커질 테니 좋으면 좋은 일이지 나쁜 일은 아니기도 하고.

다만, 좀 허탈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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