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파문(5)
라일락과 백합 향기가 진하게 풍긴다.
아버지의 관 앞에 선 청년은 무감각한 눈빛으로 그 관을 바라보았다.
그는 정말로, 단 한 점의 슬픔도 느끼지 못했다.
아버지와의 기억은 없다. 되돌아보니 소중했다? 그런 건 없었다.
단 한 차례도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은 아버지를, 단 한 차례도 자신의 편을 들어준 적이 없는 아버지 따위를 그리워할 만큼 그는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단 한 번도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에게 단 한 번이라도 '잘했다' 한 마디라도 해 주었던가?
그에게, 자신의 외아들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해주기가 그렇게 어려웠던가?
차마 잘 죽었다는 말까지 꺼내는 건 불가능했지만, 도무지 눈에서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차라리 장례식에 참석한 그의 친구, 나폴레옹 4세가 더욱 슬퍼해 누가 보면 그가 아들인 줄 알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황제다.”
청년, 루돌프 황태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먹을 쥐었다.
그래, 황제였다.
아무리 과거에 자신을 멍청이 취급하는 아버지와 자식을 대놓고 차별하는, 자신과 누이는 버려놓고 막내만 예뻐서 어쩔 줄 몰라하던 어머니, 지랄맞은 할머니 등의 사이에서 고통받는 시절은 끝났다.
이제 형세는 역전되었다.
그는 황제다. 그 누구에게도 비견할 수 없는 지고한 위치에 올랐다.
결혼에 관련된 닦달도, 아니면 다른 그 무엇도, 황제의 권력으로 찍어눌러버릴 수 있다.
그가 희망한 대로 제국을 마음대로 뜯어고칠 수 있다.
그리고, 제국은 변할 것이다.
그렇게 다짐하며 내심 웃는 동안, 죽상이 된 러시아 대사가 다가왔다.
“황제 폐하.”
“아, 이바노프 대사.”
“이번...... 참사에 대해서는 도무지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알렉산드르 2세 폐하께서 경호 실패에 대한 사죄를 하셨고, 내무부의 관료들을 문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책임자들은 전원 태만 행위에 따라 중징계를 받을 것입니다, 오흐라나부터 경호원들까지, 그러니 부디 분노를 거두어주.......”
“하지만, 삼국동맹은 여전히 강철같아야 하오.”
루돌프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로써는 원수지간이라고 불러도 이상할 게 없는 아버지가 죽어줬으니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정도의 이성은 있었다.
“대사, 본국에 한 가지 제안을 전할 게 있소, 양국의 동맹이 여전히 튼튼함을 영국과 프로이센에 똑똑히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오.”
“경청하겠습니다.”
“우리를 노리는 자칼(아프리카, 중동, 유럽에 서식하는 여우와 늑대를 섞어놓은 듯한 생김새를 가진 개과 포유류, 승냥이와 닮았으며 짐승의 새끼를 노리거나 시체를 뜯어먹는다)들이 사방에 가득한 상황에서, 삼국의 동맹이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내 여동생 마리 발레리와 귀국의 니콜라이 황태손과의 약혼을 제안하는 바요.”
결코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 중 하나인 그의 누이 기젤라는 엘리자베트 황태후의 개인적 문제, 즉 막내 외삼촌이자 황태후의 막내동생이 작센의 공주 아말리에를 사랑해서 자기 동생의 사랑을 위해 아말리에와 혼담이 오가던 상대를 치워버리기 위해 어린 나이에 정략혼을 시키고 완전히 없는 자식 취급해버렸으면서 동생인 마리 발레리는 자신이 원하는 상대와 결혼하게 해주겠다면서 자유롭게 풀어놓는 일방적인 편애에 대한 복수심은 아니었다. 국가적 대계조차 아니라 본인의 욕심 때문에 그랬다는 것 때문에 화나서도 아니다.
어린아이였던 남매를 버리고 외국으로 훌쩍 떠나서 여행을 다녔던 어머니가 그 아이를 임신하자마자 그 아이에게 헝가리 계승권을 주겠답시고 헝가리로 여행을 떠나서도 아니었다.
물론 어머니의 행동으로 인해 자신의 계승권이 위협받지는 않았다. 만약 아들이었다면 그의 계승권이 위험했겠지만, 더 나아가 제국 해체를 우려해야 했겠지만 아이는 딸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들의 장래를 눈곱만큼이라도 걱정했다면 자신의 태중에 있는 아이를 위해 헝가리에서 애를 낳아 헝가리의 계승권을 그 아이가 확보하게 하겠다는 말을 했을 리가 없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이던가? 그는 어디서 주워온 아이던가? 그녀가 열 달 동안 뱃속에서 품고 있다가 낳은 아이가 아니던가?
도대체 어떻게 하면 황태자의 생모이자 황후가 멀쩡히 자기가 낳은 황태자가 받을 정당한 영토를 갈라서 뱃속에 있는 황태자의 동생에게 주고 싶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고 다니는 것인가?
설령 마리 발레리가 아들로 태어났다고 쳐도 장성하지 못했는데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덜컥 죽어버리면 루돌프가 무슨 조치를 취했을지 거기까지 생각이 안 미쳤을까?
제국 해체를 놓고 내전이 터지거나, 정말 암살을 청부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계모면 이해나 해도 생모 아니었는가?
황태후의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사랑 없는 결혼을 한 게 아니라 저기서 울어주고 있는 자신의 착해빠진 친구와 누님이 결혼했다면 동맹은 더욱 굳건해지고 누님도 행복했으리라고 여겨서도 아니다. 얼굴부터가 나폴레옹 3세를 닮아 반반한 나폴레옹 4세와 영 못생겼다는 평을 받는 자신의 매형이 비교되어서는 더더욱 아니다.
아무튼, 이건 황태후에 대한 복수와, 딱히 잘못한 건 없지만 보기만 해도 화가 치밀어오르는 막내 여동생을 머나먼 타국으로 쫓아내려는 건 절대 아닌, 그저 국익을 위한 행동이다.
***
-와장창!
쉰브룬궁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소동은 귀머거리가 아니면 모두 들었겠지만, 시녀, 하인, 귀족, 경비병 등등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못 보고 못 들은 척, 귀머거리고 벙어리고 장님인 척을 해야 했다.
그건 간단했다, 이건 모자 간의 싸움박질이었고, 그 모자가 황태후가 될 황후와 황제가 될 황태자여서야 당연한 일이었다.
“그 어린애를 정략혼으로 러시아에 보내겠다니, 그것도 상의 한 마디 없이.....”
“제가 왜 당신과 상담해야 합니까?”
“난 널 낳았고 그 아이도 낳았다!”
“낳아 줬으면 다입니까? 제가 자라는 동안 한 번이라도 저에게 신경쓴 적이 있습니까? 당신이 그러고도 내 어머니라 자칭해? 뻔뻔하기 그지없군요!”
“뭐..... 뭐?”
“누님이건 나건 한 번도 사랑한단 말 따위 해준 적 없으면서! 우리 둘을 진심을 다해 안아준 적도, 입맞춰준 적도 없으면서! 그러면서 뭐가 잘났다고 내 어머니를 자칭해! 결국 그 계집애 아니었으면 나한테 끝까지 말 한 마디 안 섞었을 거면서!”
“너.......너.......”
“기젤라 누님도 당신 동생 도와주려고 어린 나이에 시집보냈으면서! 당신은 정략혼으로 16살에 결혼했다고 툭하면 한탄하면서 정작 누님은 15살에 정략혼을 시켰지? 웃기지도 않아. 게다가 누님에게는 훨씬 어울리는 남자가 있었다고! 그와 결혼하면 누님은 훨씬 행복했을 거고, 국익을 봐도 당신 남동생 도와주려고 결혼하는 것보다 훨씬 이득이었겠지, 당신 욕심 채우려고 보내는 것보다는!”
“난..... 난 네 어머니야.”
“당신이 내 어머니라고, 우리 어머니라고 자칭하고 싶었다면 최소한 의무를 방기하지는 말았어야지! 당신은 당신의 의무를 방기했어! 의무를 방기해놓고 권리만 행사하겠다? 웃기지 마, 그리고 황제는 이제 나야! 이제 내가 정한단 말야! 아버지는 당신이 뭘 하든 하고 싶은 대로 놔뒀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을 거니까, 절대로!”
황실의 패륜을 똑똑히 들은 모든 이들은 차라리 기절하고 싶었다. 합스부르크 황실의 오랫동안 쌓여온 고름이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죽음을 계기로 폭발해버리는 걸 직접 보고 들었다면 누군들 같은 생각이 아니겠냐마는.
원래는 몇 년 뒤에 루돌프 황태자의 자살로 파국을 맞았지만, 지금은-상당히 패륜적인 내용이 심하게 많이 함유된-말싸움 수준으로 폭발했으니 좀 나은 것일지도 몰랐다. 듣는 이들 입장에서는 현기증이 절로 날 상황이었지만.
그러나, 모자 간의 싸움은 결국 루돌프가 이길 수밖에 없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문제가 아니다. 둘은 남보다 못한 부모자식이었으니까.
그냥 권력의 문제였다. 남편이 죽은 이상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는 그냥 황태후였고, 루돌프는 황태자가 아니라 사실상의 황제였다. 아직 대관식을 치르지 않았을 뿐.
따라서 루돌프가 찍어누르려고 하면, 패륜적이라고 할지언정 엘리자베트의 의견 따위는 가볍게 묵살할 수 있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가정사에서 우유부단하기 그지없는 인간이었기에 그 권한을 행사하지 않았지만, 루돌프는 전혀 달랐다.
어느 순간, 목소리가 끊겼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리고 문이 벌컥 열렸다.
“황태...... 황제 폐하.”
“결혼은 내가 말한 대로 진행될 걸세, 뭐라 하든 신경쓰지 말고 진행하도록.”
대기하던 외무장관에게 황제가 하명했고, 외무장관은 뭐라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예, 폐하.”
완전히 무심하게 걸어나가는 황제의 등 뒤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황태후 마마! 의사! 의사를 불러!”
너무 충격이 큰 나머지 기절해버린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를 깨우기 위해 의사들이 다급하게 달려왔지만, 루돌프는 눈곱만큼도 미안하지 않았다.
차라리 다른 이가 기절했다면 신경이나 썼겠지만, 반대 상황이라면 엘리자베트가 그의 아들에 신경이나 썼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가 없었다.
몇 번이고 생각했지만, 루돌프는 차라리 자신의 프랑스인 친구와 형제로 태어났다면 훨씬 행복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실로 오랜만에 행복한 날이었다, 잘못한 게 없어도 꼴보기 싫은 동생은 차차기 황후로 만들어준다는 명목 하에 외국으로 치워버리게 되었고, 동시에 저 빌어먹을 가족들에게서도 해방되었다. 빌어먹을 혼담 이야기 역시 더는 듣지 않아도 된다.
정말 완벽한 날이었다.
***
“...... 거 참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나.”
외무부의 보고를 받으면서 처음 나온 말이었지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일단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속칭 씨시가 그만큼 낙제점 어머니였던 탓이 컸다.
나야 뭐 양국 관계가 더 돈독해지면 나쁜 일은 아니었지만..... 내 안의 유교맨이 ‘아무리 그래도 어머니에게 대놓고 패륜은 좀’ 이라고 속삭인다.
근데 솔직히 이건 그 여자가 자초한 일 같기도 하고...... 쯧, 그냥 부모 잘못 만난 거라고 해야 하나.
‘나도 자식을 저 모양으로 안 만들려면 아내와 애한테 잘해야지.’
문제는 아직 애가 없다는 거지만 뭐 어떤가. 애야 천천히 만들면 되지.
그리고 아내에게 애정을 가지고 대해주자는 건.... 마음은 그런데 행동으로 잘 이어지지가 않아 문제였다.
‘아이라.’
나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들었다.
‘나는 내가 욕하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