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보나파르트-25화 (25/200)

25화 파문(3)

파리, 프랑스.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짐은 황제의 권한을 국가원수로써 필수적인 권한 일부를 제외하고는 의회에 반환하고자 한다.”

내 연설에 국민의회의 의원들이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다.

내가 모든 권력을 의회에 넘기는 대가로 요구한 권한은 일곱 가지였다.

군 통수권, 사면권, 외교권, 면책특권, 면세권, 거부권. 의회 해산권.

독재자나 다름없는 사실상 제국의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있다가 다 내려놓고 이것만 가지고 있겠다는데 문제는 반발이 나왔다.

“군 통수권, 사면권, 외교권, 거부권은 이해하겠습니다. 그런데 면세권과 면책특권은 뭡니까?”

“아니 그럼 황제도 세금 내라고? 황실 전체도 아니고 황제 한정이잖아.”

“황제는 국민 아닙니까?”

“옆동네 군주들 중에 세금 내는 인간 있나 봐봐!”

원래 왕은 세금 한 푼도 안 낸다. 진짜로.

사실 생각해보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원래 세금은 왕‘이’ 걷는 건데 왕도 세금을 내면 자기가 자기한테 세금 내냐고.

영국 왕실의 경우 21세기에도 원칙적으로는 세금 한 푼도 안 내도 된다. 근데 퍼포먼스성으로 엘리자베스 2세는 조금 내긴 한다더라.

“그래서 프랑스 황제가 그런 굴러다니는 군주들입니까?”

이것도 할 말 없음, 프랑스 황실은 사실 존재하는 결이 그런 것과는 달라서.......

“오케이, 좋아, 타협하자, 군 통수권, 사면권, 외교권, 거부권, 의회 해산권, 면책특권. 대신 조건으로 헌법에 황제의 지위를 확실하게 적어놓고 개정 못 하게 하자, 솔직히 내가 가진 실권 너희들에게 줬는데 그거 가지고 나나 내 후계자 모가지 자르려고 들면 억울하지 않겠냐?”

“그럼 면책특권도 축소하고, 거부권과 의회 해산권에도 제한을 건다면 동의하겠습니다.”

“어떻게?”

“면책특권은 지금 초안대로면 황제를 상대로는 어떤 민사 및 형사 고발을 할 수 없고, 거부권과 의회 해산권도 딱히 제한이 없는데, 면책 특권은 형사 기소에만 적용하고 거부권이 행사되어 법률을 재심의할 때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거부권을 무효화하는 조항을 삽입하고 싶습니다. 거기에 의회 해산은 1년에 한 번으로 제한하는 규정을 넣겠습니다.”

“뒤의 두 개는 몰라도 면책특권 축소는 좀 과한데, 내가 외교관만 못하냐.”

“좋습니다. 그럼 거부권 제한과 의회 해산 제한 규정까지만 하죠.”

대충 요약하자면 그런 내용의 대화가 각 계파의 당수들과 오가고, 밀고 당기는 타협과 협상 끝에 황제의 권한은 군권, 외교권, 사면권, 거부권, 의회 해산권, 면책 특권의 여섯 가지로 합의되었다. 그 외에도 프랑스 국민으로써의 권리는 당연히 행사할 수 있지만 그건 넘어가고.

사실, 독재나 다름없는 강력한 권한을 누리던 상황에서 의회와 타협해서 자리만 보장받는 형식으로 권력을 내려놓는 게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환호했지만.

우선 첫 번째 이유는 프랑스 내부의 정치적 갈등이 반독 선전 정도로는 어떻게 하기 어려울 만큼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심해질 건 뻔한 일이고, 이걸 내가 다 조율할 수 없는 바에야 그거 조율할 책임을 싹 의회에게 떠넘기고 무슨 일이 발생해도 다 의회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게 낫지.

그리고 둘째, 왕정주의자들의 힘이 명백히 약해지고 있다.

프랑스 국민들의 지지 아래에서 행사되는 게 프랑스의 황권이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부여해준 권위가 없다. 나폴레옹 3세의 순교? 말이 좀 이상한데 아무튼 사망 이후로 당장 황실을 끌어내리자는 여론이 나오고 있지는 않지만 왕정주의자 세력들은 부르봉이든 오를레앙파든 보나파르트파든 간에 계속해서 힘이 약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자리를 공화주의자들이 채우고 있다.

사실 이건 내 책임이 없지는 않은데. 왕당파의 주요 정치적 지지층을 내가 숙청했으니까. 개혁을 위해서, 그리고 내가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과정이었지만, 그 결과는 내 지지기반 약화로 돌아왔다. 부르봉과 오를레앙은 체제 전복 기도세력이니 뭐 숙청해도 되지만 그 과정에서 보나파르트주의자들도 같이 갈려나가서 말이지.

우리가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일 때 관대하게 타협해야 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유주의자들은 내게 환호했다.

“자유의 수호자 나폴레옹 4세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나폴레옹 1세보다 나폴레옹 4세 폐하가 더욱 위대하다, 나폴레옹 1세는 혁명을 배신했으나 나폴레옹 4세는 황태자로 태어났음에도 혁명을 완성했다!”

뭐, 뒷공작으로 안 부추긴 건 아니지만 그 열기는 뜨거웠고, 황실 지지율은 끝을 모르고 치솟았다.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최소한의 권한만 남기고 전부 의회에 위임하면 당연히 자유주의자들 입장에서는 그 배경이 어찌되었든 간에 칭송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나는 국내의 모든 문제는 새로 설립된 의회와 총리에게 떠넘겨버렸다.

내각불신임이 날아가고 총리가 의회해산을 선언하는 게 일 년에도 몇 번씩 벌어지든 말든 이젠 내 책임이 아니다. 의회해산은 나는 1년에 한 번으로 제약되지만 총리의 의회해산은 그런 제약이 없는지라 이쪽이 정권을 잡으면 상대가 드러누워 의회를 마비시키고 불신임안을 제출하고, 온갖 협잡으로 정부를 마비시키는 등 그야말로 개판이 따로 없었다.

그래도 이번에 새 총리가 취임한 뒤에는 그래도 상황이 그럭저럭 수습되는 모양새였다.

***

“카지미르페리에 총리, 총리 역시 러시아와 손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은 나와 같다고 생각하오.”

나보다 고작 7살이 많을 뿐인, 역대급으로 젊은 총리인 장 카지미르페리에는 고개를 열성적으로 끄덕였다.

“프로이센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랄 게 없습니다. 본국의 상황이 그렇게 여유로운 것도 아니고요.”

명백한 것은 현재, 프랑스는 절대로 북독일 연방을 상대할 수 없다. 혁명 이후의 혼란기로 인해 인구 감소와 저출산이 심각해지고 있고, 공업 수준은 뭐 말할 것도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 프랑스는 이미 유럽의 2인자가 아니다. 3인자다.

다만 그 진실을 받아들이기에는 이들의 자존심이 너무 강할 뿐.

그렇기에 러시아와 손잡는다. 독일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양면전선을 만드는 게 가장 좋다는 건 역사에서도 입증되었으니까.

그 반대급부로 영국과 관계가 악화되는 건 좋은 일은 아니기는 했지만, 감당할 만한 리스크다. 애초에 영국은 우리랑 제휴할 생각 자체가 없었으니까.

영국의 힘을 빌려 독일을 막을 수 있었다면 나도 그렇게 했겠지, 하지만 영국은 절대 총알받이를 자처하지 않는 나라다.

총알받이가 되어줄 여력이 없어서 동맹을 구하는 건데 한 놈은 총알받이 외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되고 한 놈은 나를 총알받이로 써먹을 생각이 만만이라면 당연히 전자 아닌가. 아무리 후자가 돈 많고 세더라도 그놈이 필요한 곳에 도움이 안 되면 없는 거나 다름없다. 사막에서 금덩어리가 있다 한들 물이랑 식량이 없으면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이번에 황제 폐하께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직접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제일 확실하지 않소, 외교권은 여전히 내게 남아 있기도 하오, 그것도 의회에서 가져갈 생각이오?”

“진지하게 고려해볼 만한 일이로군요.”

농담조로 답한 총리는 한숨을 쉬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도 참석 의사를 밝혔습니다.”

“아무래도 나와 알렉산드르 2세가 직접 만나기로 했는데 혼자서만 대리인을 보내기에는 면이 서지 않았겠지.”

“격이 떨어지니까요, 무시하는 걸로 보일지 모릅니다.”

사실 이건 소소한 자존심 싸움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지 모르지만, 그 국가 간의 자존심 문제 때문에 전쟁까지 벌어지는 게 유럽의 현실이다. 당장 지난 보불전쟁만 해도 명분은 스페인의 왕위계승 문제였지만 당장 양국의 전쟁이 확정된 시점은 엠스 전보 사건 당시 양국 간의 여론이 프로이센은 프랑스가 외교 결례를, 프랑스는 프로이센이 외교 결례를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폭주한 것이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국민들의 자존심 때문에 전쟁이 터지는데 동맹은 못 깨지겠는가? 그걸 막기 위해서, 그리고 요금은 다 치러놓고서 상품은 못 받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프란츠 요제프 1세도 빈에만 박혀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리라.

“아무튼 간에, 이번 회담에서 영국에 대한 행동방침도 어지간하면 정해질 가능성이 높네, 영국 측은 아무래도 우리 동맹을 적대하기로 결심한 것 같더군, 뭐 예상 범위 내이기는 했네만.”

“그들의 선택입니다.”

“대제 시절 이후 계속 그래왔지. 영국은 유럽이 계속해서 전쟁에 휘말리기를 원하니까. 유럽에 단일 패권국이 들어서는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차라리 주변에 아무도 없는 인도로 꺼져버릴 것이지.”

“현재까지 수집된 정보에 따르면 러시아 내에서 테러가 연신 벌어진다고 합니다. 러시아의 대대적인 외교적 승리 탓에 궁지에 몰린 인민주의자들이 테러를 벌이는 거죠, 그만큼 지지세력은 역으로 깎아먹고 있습니다만.”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자칭 혁명가란 놈들이 다 그렇지 뭐, 알렉산드르 2세는 개혁 성향인데 개혁 성향인 차르가 계속 집권하고 있으면 자기들이 외치는 주장을 알아서 해 주니 국민 불만이 낮아지고, 결국 자기들이 권력을 못 잡거든.”

권력의 망자들이자 위선자들. 나는 씹어뱉듯 말했다.

“냉소적이시군요.”

“그런 인간군상을 하루이틀 본 게 아니니까.”

원 역사에서는 국내외 불만이 증폭되자 자기들 세상이라고 날뛰었는데 여기서는 대외적인 성과를 거두고 개혁도 효과를 얻으니까 발악하는 건가. 아니, 사실 원 역사에서도 개혁이 멀쩡히 잘 돌아가고 여론도 긍정적으로 변화해 갈 뿐 아니라 러시아가 입헌군주제로 변화할 초석이 막 놓여진 상태였는데도 혁명을 위해서라면서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한 게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거기에 영국의 입김이 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러시아 내의 불안을 증폭시키려는 거죠.”

“하여튼 썩은 고기를 탐하는 까마귀 같은 것들..... 사자가 아니라 왕실 문장을 까마귀로 바꾸라고 하지.”

나는 짜증스럽게 투덜거렸다.

“이번 회담에서 오흐라나와 우리 정보부의 교류도 제안해봐야겠어, 동맹국 내정이 불안한 건 우리에게 있어서도 도움이 안 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