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파문(2)
북독일 연방, 베를린.
초청이라고 읽고 사실상 황궁에 소환당한 헤센 대공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알릭스는 10살도 안 되었소, 대체 그 어린애와 약혼을 논하는 건 전례도 거의 없는 일이오.”
맞는 말이었다. 14살에 결혼하는 게 심심찮게 있는 정략결혼의 세계에서도 10살도 안 된 아이의 약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전쟁을 막기 위해서, 그리고 독일 민족을 위해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주십시오.”
부탁이 아니라 숫제 협박이었고 압박이었다.
헤센은 사실상 망한 거나 다름없는 상황, 영토를 뜯기고 간신히 명목상으로나마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북독일 연방은 아예 관료들을 보내 헤센의 영토를 통치하고 있었다. 대공가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사실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을 제외한 독일계 국가들 중 같은 처지가 아닌 국가들이 어디 있냐마는.
한편, 헤센 대공을 압박하고 있는 남자, 비스마르크는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
이게 전쟁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영국과 맺어지는 것.
비스마르크 역시 강력한 정보조직을 운영하고 있었고, 영국의 앨버트 빅터 크리스티안 에드워드, 통칭 앨버트 왕세자가 헤센의 공녀 알릭스 빅토리아 헬레네 루이제 베아트릭스에 큰 관심을 보였다는 것은 호재였다.
다만 알릭스가 너무 어리기에 좀 시간이 지난 뒤에 청혼하겠다면서 손을 뗀 거지만, 비스마르크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이를 기정사실화하려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프랑스-이중제국-러시아의 대프로이센 포위망이 현실화된 상황에서, 삼면전선을 막기 위해서는 영국의 권위가 절실했다. 군부야 그런 상황에서도 전쟁을 외치면서 3개 국가를 동시에 상대할 전략을 연구하고 있었지만, 미친 짓이다. 객관적으로.
그렇기에 아군이 필요했다. 영국은 왕실이 국정에 잘 개입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왕실의 영향력은 엄청나다.
그리고, 비스마르크는 진지하게 당대의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그 관례를 잘 지키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10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싹수가 노랗다는 소문이 자자한 앨버트 왕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빅토리아 여왕의 혈압 그래프를 우상향으로 올려주고 있다.
괜히 그가 원 역사에 사인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요절했을 때 사실 죽은 걸로 하고 정신병원에 넣었다거나 타살설 등이 줄줄이 제기된 게 아니었다. 심지어 잭 더 리퍼의 정체가 앨버트 왕자라는 설까지 돌았으니 오죽할까.
아무튼 간에, 그런... 속된 말로 제 꼴리는 대로 사는 왕자가 왕이 된다고 자기 사심을 국정에 안 개입시킬 리 없다. 그리고 까놓고 말해 영국은 군주가 작정하고 국정을 자기 멋대로 움직이려고 하면 제어할 법적 수단이 거의 없다.
그리고 헤센의 공녀가 대영제국의 국왕에게 시집가서 사랑받는 아내가 된다면 그녀의 조국을 위해 영국의 힘을 써줄 수도 있겠지.
당장 쓸 수 있는 힘은 아니지만, 향후 10년간은 삼국동맹도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비축하기 바쁘니까.
그리고 10년이면 헤센 공녀가 왕비, 못해도 왕세자비가 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물론 그녀가 그런 막장 남편과 함께하는 삶을 불행하게 느낄지 행복하게 느낄지 따위는 비스마르크에게 사소한 문제였다.
그리고 다른 건 몰라도, 헤센 대공 역시 앨버트 왕자의 막장 행각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이래서야 프린스 오브 웨일스라도 시집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 리가 없었다.
그러나 프로이센과 헤센은 철저한 갑과 을이었다. 그리고 비스마르크는, 권력이 군부에게 상당히 빼앗겼다고 해도 여전히 프로이센의 지도자였다.
노련한 외교관이자 독일 역사상 최고의 문민 관료의 협박과, 회유와, 설득, 압박 끝에.... 결국 헤센 대공이 고개를 떨궜다.
***
“골치아프게 됐군.”
나는 사과를 잘근잘근 씹으며 중얼거렸다. 아삭하고 새콤한 맛이 없이 그냥 설탕덩어리 먹는 기분이라서 영 깼지만.
“영국은 아직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이번 총체적 외교실패와 그레이트 게임의 패배가 눈앞에 다가왔다고 생각하니 그렇지, 어떻게 지중해 연안 항구에 대한 비무장을 약속받아놓기는 했지만 그걸로는 부족하지,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발칸에서 러시아를 몰아내고 싶을 거다.”
러시아는 세르비아네 뭐네 하지만 결국 전부 로마노프 가문이 통치하는 러시아의 괴뢰정권, 기회를 봐서 꿀꺽 집어삼켜버릴 것이다.
어쩌면 바로 다음 전쟁에서.
“그리고 그 와중에 북독일 연방.... 편의상 독일이라고 하지, 독일이 저자세로 나온다면.”
“손을 잡겠군요.”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자국의 발칸 영토를 러시아에 팔아넘긴 순간부터 루비콘 강을 건넜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3국 정상회담을 해야겠군, 앨버트 왕세자가 알릭스 공녀를 아내로 맞이하는 게 기정사실화되면 우리도 거기에 맞춰서 대응할 준비를 해야 해. 그 전에도 계속 접촉해야겠지만, 상징적인 퍼포먼스가 필요하다. 사진만 같이 찍고 오더라도 할 건 해야 해.”
최악의 경우는 그냥 드레드노트 설계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에 뿌리는 것도 생각한다. 우리랑만 경쟁하는 게 아니라 이중제국과 러시아와까지도 경쟁한다면.... 아, 둘 다 해군 병신이지.
삼국동맹의 해군은 우리가 사실상 담당하고 있으니 군함 대리 건조해주고 명의는 이전하되 전쟁 기간 동안만 우리가 너희 해군 장교들도 훈련 겸 태워서 대리로 운용할 테니 건조비 내놓으라고 하면 어떨까.
고민해볼 일이었다.
“언제쯤 하는 게 좋겠습니까?”
“드레드노트의 기초기술 개발이 끝나면. 그래도 그 전에도 계속 만나서 의견을 교환하든가 해야겠지만.”
드레드노트의 기초기술 개발이 끝날 때쯤이면 프랑스도 전쟁의 상흔을 웬만큼 씻어낸 후일 것이다.
이놈의 세상은 어떻게 되먹었는지, 지금 앨버트 왕세자도 결혼이 충분히 가능한 나이이긴 하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청소년 보호라는 개념이 생긴 게 20세기가 되어서라는 게 확실하게 느껴진다. 나도 교복 입을 나이의 황후를 둔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셰익스피어 시대의 작품이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도 다들 간과하지만 줄리엣의 나이는 13살이었다. 그런데도 결혼이네 사랑의 도피네 뭐네 하는데 약혼은 당연히 더 빨리 할 수 있다.
지금도 딱히 다르지는 않고. 하지만 81년이면 성혼하기는 아직 이르다. 10살은 되어야지 결혼을 하네 마네 하지.
상당히 아슬아슬한 타이밍이다.
“그때 우리 조약을 공식화한다, 우리의 공격 목적이 프로이센임을 명확히 밝히고, 세계에 외쳐야지, 우리 편에 설 거냐, 말 거냐.”
다들 알지만 공식화되지 않았던 동맹을, 공개 비준한다.
이 세상의 드레드노트, 잔 다르크의 건조 시작에 맞춰서.
***
전쟁은 언제나 모든 이의 관심사다.
러시아부터 영국까지. 유럽 전역뿐 아니라 바다 건너 신대륙에서조차도.
전쟁은 돈이 된다고 생각하는 장사꾼들도, 전쟁을 두려워하는 민초들도, 민족주의에 휩싸여 전쟁을 부르짖는 학생들도. 거기에서 자국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을 냉정하게 계산하는 정치인들도, 그리고 전선에 나가 싸워야 할 군인들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어쨌든 간에 전쟁은 반드시 일어난다. 1872년 말의 평화 협정은 20년간의 휴전 협정에 불과하다.
프랑스는 사상 최대의 군제개편과 군비증강을 단행하고 있었고, 북독일 연방은 지난 전쟁에서 경제붕괴로 인해 단기결전을 강요받다가 병력 절반을 파리 시가전에서 날려먹은 일을 거울삼아 해군 증강을 진행하고 있었다.
흔히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이라 불리는 철갑선의 업그레이드형 전함들이 건조되기 시작했고, 목표는 단기적으로는 전쟁이 나더라도 프랑스 해군이 함부로 해상봉쇄를 하며 날뛰지 못하게 하는 수준이었다.
사실 저평가되기는 하지만 프랑스 해군의 함선건조기술과 혁신성은 로열 네이비보다 훨씬 우수한 수준이었다. 숫자에서도 밀릴 뿐 아니라 수병부터 제독까지 그 질이 로열 네이비를 상대하기에는 떨어지기에 백전백패가 예상될 뿐.
하지만 다르게 말해 북독일 연방이 프랑스를 위협하고, 더 나아가 압도할 정도의 해군력을 보유하는 순간 이는 영국에게 있어서 극도로 위협적인 신규 해양 세력의 등장을 의미한다.
비스마르크가 헤센 대공을 윽박질러 헤센의 공녀 알릭스를 앨버트 왕자와 어거지로 약혼시킨 것은 이 상황에서 영국과의 우호를 어떻게든 유지해 보려는 몸부림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한계가 명백했지만. 아무튼 대영제국은 내부적으로도 노선이 극명히 갈렸다. 먼저 화평파는 전쟁을 일으킨 쪽-높은 확률로 프랑스를-무조건 적대하겠다고 엄포를 놔서라도 러시아가 발칸을 집어삼킬 계기가 될 전쟁 자체를 일으키지 못하게 하자는 소극적 의견을 내놓았고, 반독파는 차라리 북독일 연방을 영국이 개입해 붕괴시킨 다음 이를 통해 프랑스나 러시아 등이 개전할 명분을 없애자는 주장도 했지만, 이 두 해결책을 지지하는 자들의 수는 극히 적었다.
대부분의 인물들, 실질적으로 수상 이하 영국 내각 대부분은 대영제국의 룰 브리타니아식 전통적인 해결법을 지향했다.
이미 발칸의 상당 부분이 러시아의 손에 넘어간 이상 이미 그레이트 게임은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북독일 연방을 지원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게 하고, 프랑스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없다면 중립을 지키게 압박한다.
만일 이조차 불가능하다면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탈리아 왕국으로 상대하게 한다. 신생 왕국인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이기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중제국이 자기 북쪽을 보지 못할 정도만 하면 된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프랑스를 누가 상대하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스페인? 내전이 심심하면 터지는 유사 아프리카가 프랑스를 막을 능력이 있는가? 프로이센? 가장 확실한 수단인데 프로이센군을 프랑스로 돌리면 진짜 핵심인 러시아는 누가 막을 건데? 네덜란드나 벨기에? 프랑스랑 싸울 체급은 되던가? 이탈리아? 너무 멀기도 하거니와 이중제국 상대하는 것도 버거울 놈들을 양면전선까지 강요하면 절대 참전 안 할 거다.
아니면 영국 스스로가? 영국 육군이 아무리 정예라고 해도 10만에 불과하다, 그 10만의 병력은 전 세계에 또 흩어져 있다.
어디 인도에서 대규모 병력을 징병해오기라도 하지 않는 한 대규모 지상군을 프랑스에 투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리고 그것도 쉽지 않다, 세포이 항쟁이 끝난 지 얼마나 되었던가?
그리고 식민지 유지를 위해 필요한 최소인력을 뺀 전력을 모아 만들어낸 기껏해야 몇 개 사단 규모의 영국 육군을 상대하는 데에는 오를레앙의 성녀도 필요 없다. 10배 20배에 달하는 병력을 투입해서 갈아버리면 그만 아닌가.
무엇보다 지금 영국은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현재진행형이었다. 그 와중에 또 다른 전쟁을 벌이는 것은 적잖은 부담이었다. 해전이면 모를까 지상군 투입까지 일을 키우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즉, 프랑스는 가급적 외교로 전쟁에 못 끼어들게 해 보자....가 런던에서 합리적으로 도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유일한 문제는 그 프랑스가 지금 프로이센에게 꼭지가 돌아 있는 상태라는 거였다. 여전히 상처가 덜 회복되어서 먼저 치고나가지는 못하고 있지만, 언제든 간에 전쟁이 일단 터지면 프로이센의 뒤통수를 상쾌하게 후려치려 들 게 틀림없었다.
상처 회복에 전념하는 중인 야수라고 해도 영국이 소규모 지상군에 네덜란드나 벨기에군 정도 끌어내서 집적댈 정도로 프랑스가 만만하지는 않으니 차라리 프로이센을 지원해서 프랑스를 확실하게 눕히고 러시아와 결전을 벌이게 할까 고민했지만, 그랬다가는 수면 위로 드러난 삼국동맹의 나머지 둘이 사양하지 않고 프랑스에 전념하는 프로이센의 뚝배기를 깨 버릴 거고, 그러면 정말로 뒷감당은 아무도 못 한다.
혐성질로 프랑스의 시선을 딴 데 못박아 놓자니 현 상황에서 뭐가 됐든 프랑스에게 프로이센보다 우선순위가 높을 것 같지는 않았다.
외통수라면 외통수였지만, 영국은 대책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