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삼국동맹(4)
회담은 평행선만을 달렸다. 당연히 한목소리로 러시아의 남하를 반대해줄 줄 알았던 프랑스는 그런 거에 관심없이 ‘내가 관심있는 건 오롯이 프로이센을 엿먹이는 것’ 이라는 티를 팍팍 내면서 북독일연방의 모든 안건에 태클을 걸어대고, 심지어는 이해당사자에 가까운 오스트리아-헝가리조차 소극적으로 굴자 영국과 북독일 연방만으로는 주장에 힘이 빠지는 것이다.
결국 핵심 중의 핵심인 러시아의 남하 문제는 합의될 여지 없이 엉뚱한 이야기나 나올 뿐이었다.
“프랑스 내의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은 상당히 우려스러운 수준임이 분명합니다.”
“귀국에서 출판된 그 도서, 시온 의정서라고 했던가요? 그 시온 의정서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프랑스 제국을 무너트리기 위해 북독일 연방에 자금지원을 했을 뿐 아니라 작금의 경제위기 역시 초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상당수의 프랑스인은 그 말을 믿고 있고요.”
“위조 가능성이 매우 높은 글이라는 건 둘째치고 시온 의정서의 내용이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라고 해도 대부분의 평화로운 평범한 다수의 유대인들을 탄압하는 게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프랑스 제국은 유대인을 탄압하는 법률이 없습니다.”
“하지만 보호하고 있지도 않지요. 북독일 연방은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유대인에 대한 폭력 행위에 대한 우려를 가지고 있습니다. 프랑스 정부에서 인권이라는 관점에서 어떠한 책임 있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한 국가는 다름아닌 귀국이 아니었습니까?”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제 1조에 의거하면 사회적 차별이 무조건 금지되는 게 아닙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는 그럴 수 있죠. 그리고 유대인들이 프랑스 사회를 전복하고자 한다면 이에 대한 차별이 정당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하면 시온 의정서의 진위를 밝히는 게 우선시되어야 하는데, 실제로 상당 부분이 들어맞지 않습니까? 공황이 발생했고,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우연일 수도 있지요.”
“물론 우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연이 두 번, 세 번 반복되면 우리는 그걸 필연이라고 부르기로 약속했습니다. 논점이 이상하게 흐려졌는데, 결국 작금의 문제는 유대인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욕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전후가 바뀌지 않았습니까. 모르타라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식으로 툭하면 탄압당하는데 누구든 국가를 세우고 싶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게 발칸의 민족들이 슬라브 민족국가를 세워야 할 가장 핵심적인 이유입니다. 디즈레일리 경, 경은 그 불쌍한 유대인들을 위해 인도 최남단에 땅을 좀 떼어서 영국의 보호국으로 이스라엘을 탄생시켜줄 의사는 없습니까? 데칸 고원쯤이면 그다지 부유한 동네도 아니지 않습니까. 거기 하나쯤 보호국으로 만들어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말꼬리 잡기, 억지쓰기......
이게 열강들의 품격 있는 회의인지 아니면 싸우자고 모인 사람들의 쌈박질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사실 둘 다였지만.
“인권을 존중하는 대영제국이 뭔들 못 하겠습니까? 한번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기로 하죠. 프랑스가 억지를 그만 부린다면 말입니다.”
“모든 평등한 인간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권한이 있다는 것이 언제부터 억지를 부리는 것이 되었는지 의문이군요.”
“그렇다면 지금 당장 알자스-로렌에서 국민투표를 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하도록 하죠, 북독일 연방이 영구히 단 한 치도 영토를 확장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행동으로 옮겨준다면 말입니다. 우선 헌법에 오스트리아나 바이에른 등 독일계 국가들과의 병합은 물론 국가연합이나 연방으로의 통합도 불허한다는 조항을 박아놓는다면 우리도 알자스-로렌에서의 국민투표를 긍정적으로 검토하죠. 아,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도 독립투표를 해야겠군요. 거기에 스페인과 발칸에서도 전부 투표로 결정하기로 하죠. 이탈리아는 어떻습니까?”
“이런 소모적인 논쟁은 그만두는 게 어떻겠습니까? 당신들끼리도 의견 통일이 안 되면서 뭘 요구하겠다는 겁니까? 이번 회담은 결국 우리 러시아의 정당한 강역을 포기하라는 각국의 희망에서 나온 것 같은데 당신들 스스로조차도 의견에 일치를 보지 못하면서 이 회담을 열었다는 것 자체가 어이가 없군요, 이만 이 웃기지도 않는 회담을 종결하는 게 좋겠습니다.”
“대영제국은 러시아가 기존 합의안을 관철시키려 한다면 전쟁을 불사할 각오가 되어 있소, 이대로 회담이 끝나면 러시아가 받을 것은 대영제국의 선전포고문 외에는 없소.”
“지금이 크림 전쟁 시기인 줄 아시오? 어디 한 번 해보시오, 선전포고.”
다른 건 몰라도 프랑스는 러시아 편으로 돌아섰고 프로이센은 참전할 처지가 아니다. 병력을 동쪽으로 집결시키는 순간 프랑스가 기꺼이 바게트를 가져다가 프로이센의 뒤통수를 대가리가 부서지도록 아낌없이 후려쳐댈 테니까.
결론적으로 현재 러시아는 확실한 자신감이 붙어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진짜로 발칸 전역을 집어삼키려 들 정도로.
동맹 없는 영국은 애초에 눈곱만큼도 두렵지 않은 상대다. 해상봉쇄? 백 년 천 년 해 보라지.
자고로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지만 그건 해군만으로 모든 전쟁에 이길 수 있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니까. 결국 마지막에 깃발을 꽃는 건 육군이 아닌가.
***
“차라리 그때 프로이센의 확장에 제동을 걸었어야 했소.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이겼을 때부터..... 아니, 늦어도 프랑스와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개입했어야 했소, 아무리 벨기에 문제가 있었더라도........”
프랑스와 관계가 틀어진 대가는 처절했다. 나폴레옹 3세 시기, 프랑스는 영국에게 많은 외교적 양보를 하며 영불관계에 상당히 신경을 썼다.
그런데 그 신경쓴 영불관계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과 프랑스를 저울질해본 영국 정부는 벨기에를 프랑스가 병합하려 한다는, 나폴레옹 3세가 직접 부정한 뜬소문을 근거로 프랑스를 지원해주는 걸 거부했었다.
그 결과는 당연히 반영감정의 증폭과 프랑스가 영국이 하는 일을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다가 사사건건 훼방을 놓는 전통적인 관계로의 회귀였다.
그리고 이렇게 되고 보니, 작정하고 발목을 잡아대는 프랑스는 굉장히 귀찮은 상대였다.
“이제와서 그때 지원을 했어야 하느니 논의해봐야 의미가 없소, 이제 와서 프랑스인들을 달래려고 해봤자 역효과밖에 안 날 테고. 다만 프랑스인들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정말 러시아인들이 발칸을 집어삼키면 무슨 사태가 일어날지 예상이 안 되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오.”
“복잡하게 생각할 게 있습니까? 그냥 미친 겁니다. 복수심에 말입니다. 황제부터 시민들까지 말입니다.”
물론 이런 일이 없는 건 아니다.
누가 그랬던가? 내일만 보고 사는 놈은 오늘만 보고 사는 놈에게 먹힌다고. 근데 열강쯤 되는 놈들 중에 오늘만 산다는 수준으로 폭주하는 경우는 거의 희귀한 경우였으니 문제지만.
“벌집을 쑤셔놓은 꼴이군.”
한숨을 쉰 디즈레일리는 고개를 들었다.
“글래드스턴, 뭔가 대책이 서 있나? 제발 그렇기를 바라겠네. 프랑스의 협조를 얻을 수 없으면 북독일 연방의 협조도 물 건너가니까.”
“몇 가지 정도 있네, 우선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북독일 연방에는 외교적 지원만 맡기고 이탈리아를 밀어주는 방법이 있겠군. 이탈리아군을 동원해서 러시아군을 실질적으로 압박하는 거네, 다만 이렇게 된다면 이탈리아에 대해 이를 가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협조는 물건너간다는 게 문제지.”
“다음은?”
“가장 확실하지만 또 가장 어려운 방법이 있지, 오스만 제국을 지원해서 러시아를 몰아내는 것.”
그리고 가장 성공 확률이 희박한 선택지다.
“그건 거의 불가능하잖나, 다른 건 없나?”
“영국이 진짜 전쟁을 불사할 각오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법이 있네, 프로이센식 동원령을 도입하는 걸 공식화하면 러시아도 주춤거릴 걸세, 저들이 안하무인으로 설칠 수 있는 원인은 타국들은 다 개입할 상황이 아닌데 대영제국의 육군 규모가 적다는 거니까.”
“....... 어느 쪽이든 쉽지 않은 방법이군.”
“가장 소극적인 방법이네만, 기존 합의를 유지하되 발칸의 남부 해안선의 비무장화 및 보스포루스 해협의 군함 통과를 국제적으로 불허하는 방법이 있네.”
“........ 끄응.”
“어쩔 수 없네, 프랑스가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게 이렇게 골치아픈 문제가 될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네만.”
“누가 생각했겠나.”
영국의 두 정당의 당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프랑스의 설득이 불가능하다면..... 선택을 해야겠지.”
***
프랑스군 헌병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는 숙소의 밀실에서 여러 사람들이 회동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차르를 뵙습니다.”
“나 역시 명성 높은 나폴레옹의 후예를 만나게 되어 기쁘오, 프랑스의 황제여.”
나는 곧장 예의를 갖추어 다른 한 사람에게도 예의를 갖추었다.
“명성 높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를 뵙습니다.”
“프랑스의 황제 폐하, 과례는 비례입니다.”
“친구의 아버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대화를 나누면서 꽤 분위기는 풀어졌고, 본론이 나올 때가 되었다.
“프랑스의 진심은 러시아 측에 충분히 전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영국과 대립하는 것을 불사하고 러시아가 발칸을 지배하도록 지원했죠,”
“프랑스 제국의 진심은 충분히 느꼈네, 이 우호관계가 지속되었으면 좋겠군.”
알렉산드르 2세는 나보다 서른여섯 살이 많은 아버지뻘이었고, 프란츠 요제프 1세 역시 24살이 많았다. 거의 아들이나 조카뻘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확답만 주신다면, 우리의 유대관계는 프로이센과, 이탈리아를 상대로 지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매우 높은 확률로 영국도 말입니다.”
“빌어먹을 영국 놈들.”
짜증스럽게 알렉산드르 2세가 말을 뱉었다.
그로써는 전쟁을 통해 정당하게 얻은 자신들의 영토를 영국이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강탈하려는 것처럼 느껴질 테니 욕이 안 나올 수가 없겠지.
“바이에른과도 접촉할 필요성이 큽니다. 일단 바이에른이 북독일 연방에 통합되면, 북독일 연방은 3개국 중 하나, 아니, 둘 이상이 뭉쳐도 상대하기 버거울 만큼 커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급적 비텔스바흐 가문과 혼사를 맺고 싶습니다.”
“괜찮은 아이가 하나 있지, 원한다면 내 아내를 통해서 내가 주선해보도록 하겠네. 아직 조금 어리기는 하지만 약혼에는 충분한 나이네. 바이에른의 공주 가운데 이사벨라라는 아이가 아직 혼처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나는 감사 인사를 했다.
“별 거 아니네, 자네의 부탁대로 발칸을 포기하기로 했으니 한 가지 약속만 지키게나.”
“북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정당한 영토고, 프랑스는 전쟁이 10년 내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오스트리아의 동맹으로써 참전할 것입니다. 프로이센을 상대로도 마찬가지로 기꺼이 참전하겠습니다. 문서화해도 좋습니다.”
“왜 10년인가?”
“지난 전쟁에서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프랑스의 피해가 큽니다. 복구하지 못할 피해는 아니지만, 무능하다고 판명된 군부를 싹 쓸어버리는 데에는 그만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허, 10년이라.”
“그 사이에 추가적인 유대를 공식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제가 딸을 낳는다면 러시아 황실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실과 혈연의 유대를 맺을 수 있겠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딸을 가지고 정략결혼을 논하니, 좋은 아버지는 못 될 팔자군.”
알렉산드르 2세가 농담조로 말했다. 물론 농담이었다.
공과 사를 구분 못 할 정도로 물러터진 인간은 이 자리에 없었기에.
“어쩌겠습니까. 국가를 위해서 황족이 조금 희생해야죠. 제 딸이 차차기 황후로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키워내긴 해야겠습니다만. 이야기가 조금 샜군요.”
나는 지도를 가리켰다.
“일단 목표는 기존 합의안에서 약간 후퇴해서 러시아 측의 지중해 연안에 대한 요새화나 병력 주둔을 금지하고, 마르마라해의 군함 통행 금지 정도의 조건으로 합의를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당장 전쟁을 할 상황은 아니니... 어쩔 수 없겠군, 대신 약속은 지키게.”
“프랑스제 병기는 재고분이 생기는 대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싼값에 지원해드리겠습니다. 절대 공식 문서로 남길 수는 없겠습니다만. 원가와 운송비만 받기로 하죠.”
“오스트리아-헝가리도 러시아에 무기를 좀 판매할 수 있겠군, 우리 무기가 구식이긴 해도 자네들이 쓰는 그 구닥다리 머스킷보다는 우수할 걸세.”
“좋군.”
물론 내가 단지 호구라서 퍼주는 게 아니다. 러시아 제국이든 오스트리아-헝가리든 간에 후장식 소총을 비롯한 신무기는 아직 생산라인은커녕 실물도 없다. 설계도는 있으려나.
그 상황에서 우리 무기를 받아쓰면, 장기적으로도 우리 규격에 맞춘 무기를 운용하게 될 거다.
장사하기 딱 좋은 상황이다. 싼값으로 재고무기 처리하는 건..... 투자비라고 생각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그냥 재고 땡처리 겸 용돈벌이용으로 팔아먹을 작정인 모양이지만 거기까지 내가 신경쓸 이유는 없고. 그리고 로렌츠 탄에 퍼거션 캡을 쓰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전장식 머스킷은 머스킷 중에서는 최고급 수준이니까 발칸의 슬라브계 국가들에게 막 뿌리는 용도로는 쓸만할 거다.
“그러면 이로써 반 프로이센 동맹의 성립을 선언하겠습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알렉산드르 2세가 내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누었다.
곧장 프란츠 요제프 1세와도 악수를 나눈 나는 두 사람이 악수하는 걸 보면서 커피를 홀짝였다.
후대의 역사에 삼국동맹이라 불릴 동맹의 성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