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보나파르트-17화 (17/200)

17화 삼국동맹(3)

베를린, 북독일 연방, 프로이센.

베를린의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이 어둑어둑했다.

그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비스마르크의 연설은 열기를 더해갔다.

“우리 북독일 연방은 이 위기 상황을 통해 어떠한 종류의 이득도 얻으려고 시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며, 영토에 대한 어떠한 야욕도 없습니다.”

나폴레옹 4세가 들었으면 즉각 니들이 알자스 로렌 내놓으라고 추하게 늘어지던 건 뭐냐고 그 자리에서 비판했겠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이 자리에 없었다.

각국의 고위 인사들이 이 회담에 참여하기로 예정되면서 회의 개최가 코앞이 되자 슬슬 격의 문제가 대두되고, 결국 나폴레옹 4세를 비롯한 각국의 군주들이 그 엉덩이를 떼었지만, 결정이 좀 늦은 바람에 나폴레옹 4세는 아직 열차에 몸을 싣고 있었다.

다른 국가의 군주들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왕실은 외무장관에 이어 총리까지만 보냈지만 바이에른, 오스트리아-헝가리, 그리고 러시아의 군주들은 이 회의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한창 달려오고 있었다.

이들 모두는 군주가 그 국가의 운영에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국가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국가의 실질적인 정부수반이 움직이지 않는 이해당사국은 사실상 없었다.

유럽의 거의 모든 열강들이 총집합하는 이 회담에서, 비스마르크는 유럽의 평화를 주장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

“북독일 연방이 평화를 논하다니, 웃기지도 않는구려, 프랑스를 고의적으로 도발해 여론을 악화시켜 마지막까지 전쟁을 반대하셨던 아버님을 돌아가시게 만든 것이 바로 당신 비스마르크였는데 말이오.”

비스마르크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내 말은 누가 들어도 대놓고 시비조였으니까.

물론 비스마르크는 여기서 정면으로 감정적으로 맞대응하는 하수를 두지는 않았다. 애초에 프랑스의 협력이 필요해서 나온 입장에서 프랑스가 감정적으로 시비를 걸어댄다고 해서 맞대응하면 회의는 파탄나고 비스마르크는 아무것도 못 얻어갈 공산이 크니까.

괜히 비스마르크가 베를린 회의를 열었겠는가. 이 상황이 지속되면 가장 손해를 보는 게 자기니까 열었지.

‘하지만 애초에 글러먹었거든?’

난 애초에 독일이 제시하는 제안에 단 하나도 찬성할 마음이 없었다. 애초에 프로이센과 우호적이 되는 건 현실적으로도 보불전쟁이 터지는 순간 물건너갔고, 우호관계가 된다고 해도 좋을 게 없었으니까.

물론 비스마르크도 그 정도는 생각했을 거다. 내가 뭐든 간에 어깃장을 놓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제발 그렇게 계속 생각해주기를 바란다.

“그 문제는 결국 종전 조약을 통해 무배상-무할양으로 합의를 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난 전쟁으로 프랑스의 피해가 크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미 끝난 전쟁에서 괜한 감정 싸움으로 두 국가의 긍정적인 미래를 해치고 외교적 단절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 이야기를 기대했소.”

내가 웃으며 답하자 비스마르크의 말이 멈췄다. 뭔가 종잡을 수 없는 상대를 봤을 때 보이는 눈빛인데 저거.

“스페인인들은 지난 전쟁의 결과에 따라 스스로의 국가 체제를 선택할 자유를 얻었지, 귀국은 스페인인들이 스스로의 국가를 결정할 자유가 있으며, 어떤 국가도 스페인인들에게 그럴 권리가 없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고 했소, 틀렸소?”

“맞습니다, 하지만.....”

“그럼 다시 묻겠소, 독일 민족은 스페인인들과 같이 타국에게 부당하게 간섭당하지 않고 자신의 국가를 정할 자유가 있소, 맞소?”

“...........”

이쯤 되자 비스마르크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눈치챈 듯 했다. 얼굴이 면전에서 썩지 않는 걸 보니 역시 외교관이라고 할까, 표정 관리 능력이 충분히 대단한 것 같은데.

이걸 부정할 수 있을 리 없다, 부정해버리면 니들이 바이에른 등을 합병해 독일 제국을 선언할 여지가 사라져버리고, 북독일 연방의 존재 의의를 자기 입으로 부정하게 되는 거니까.

“그렇다면 슬라브인들은 어떻소? 슬라브인들이 게르만인이나 스페인인들보다 하등한 인종이라서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자유가 없다고 말하지는 않으시리라 믿겠소.”

여기서 슬라브인들이란, 세르비아인들, 크로아티아인들, 불가리아인들, 아르메니아인들, 러시아인들을 지칭한다.

따라서 여기서 예라고 말해 버리면? 발칸의 민족들이 러시아에 병합된다고 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아니라고 하면? 러시아를 하등인종이라고 비난해버린 셈이니 뭐..... 비스마르크의 희망사항인 러시아와의 3제 동맹은 그대로 쫑나는 거지.

뭐 말장난을 해서 쟤들은 슬라브인이 아니라 남슬라브가 어쩌고 할 수도 있겠는데 그것도 핵지뢰인 건 마찬가지다, 범슬라브주의자들의 뇌관을 건드리는 거나 마찬가지인 발언이고, 아마 그 발언이 신문에 실리면 비스마르크는 당장 대중 앞에서 연설도 못 할 거다, 총알 날아올까 봐.

참고로 그 범슬라브주의의 지지자들에는 러시아의 차르와 군부가 포함되어 있다.

“스페인과 발칸은 엄연히 상황이 다릅니다. 스페인은 수백 년간을 독립국으로 존재했습니다.레콩키스타 시대 이후로 모든 스페인인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고, 거대한 식민제국을 세울 정도로 강성했습니다. 하지만 발칸의 슬라브인들은 수백 년간 오스만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오스만 역시 몇백 년간 저들을 통치한 만큼 이들의 처우에 대해 개입할 권리가 있으며, 또한........”

“알자스-로렌을 우리가 통치하기 시작한 건 대략 300년이 넘었고, 가장 늦은 로트링겐 공국의 병합만 따져도 100년은 가뿐히 넘소만, 그렇다면 북독일 연방은 왜 알자스-로렌을 요구했던 거요? 러시아가 전쟁의 승리의 대가로 발칸을 요구하는 것이 옳지 않다면 귀국이 알자스-로렌의 영유권을 지난 전쟁의 협상 과정에서 강경하게 주장한 것 역시 잘못되었으므로 유럽 각국이 당연히 개입해서 북독일 연방이 알자스-로렌을 반환하게 만드는 것이 옳았겠구려. 당연히 신성로마제국이 한때 그 영지를 통치했다는 이유로 타 국가의 국민을 선동하거나 협박해서 연방에 끌어들이는 것 역시 당연히 잘못된 일이므로 타국이 개입해서 못 하게 하는 것도 옳을 것이고.”

알자스-로렌 클레임 영구히 포기하고 바이에른 병합 포기할래 아니면 러시아가 발칸 먹는 거 용인할래? 골라봐. 욕나오지?

이쯤 되면 그냥 후자를 택하는 게 나아 보이겠지만, 후자를 택하면 최소한 영국과는 상종 못 할 사이가 된다.

아니, 이제 내 논리가 나온 이상 세르비아, 불가리아, 기타 등등의 독립을 인정하느냐 마느냐 문제가 아니라 발칸을 러시아가 털도 안 뽑고 삼키는 걸 용인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되었다. 근데 너희들도 로트링겐 공국 부활시킨다고 한 게 아니라 알자스-로렌을 통째로 삼키려고 했잖아. 니들 업보다.

물론 그 과정에서 평화를 사랑하는 독일, 영토 욕심 없는 독일의 이미지 구축은 당연히 날아간 꼴이고. 베를린에서 굳이 자청해서 회의를 연 첫 번째 이유가 회의 첫 날부터 요단강을 건넜으니 이 상황에서 얼굴이 시뻘개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표정관리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 번 예시를 들어서 우리 프랑스 제국이 왈롱을 침공해 병합한 뒤, 우리 프랑스는 유럽 각국의 평화를 추구하므로 독일계 국가들 중 하나가 자발적으로 프로이센에 병합되는 것을 막겠다고 선언한다면 귀국은 본국의 진심을 이해해주겠소?”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은 영국 대표단이 입을 열었다.

“일단 과거에 끝난 전쟁의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알자스-로렌을 결국 귀국은 현재도 정당하게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내 아버지와 수십만 프랑스인들의 피로 되찾은 것이지, 당연히 우리가 점유하고 있는 게 아니오, 그게 아니었다면 알자스-로렌은 꼼짝없이 프로이센의 일부로 할양되었을 거요. 거기에 무거운 배상금을 물리고 주요 국경지대 요새를 그 담보로 차압하고 본국의 국방을 붕괴시키려고 했겠지.”

원 역사 보불전쟁에서도 그랬거든.

“과언이십니다.”

“국경은 과거든 지금이든 변해 왔고, 변하고 있소, 만약 프로이센이 승리했다면 알자스-로렌은 그들의 소유가 되었겠지, 그리고 전쟁의 결과로 러시아는 큰 영토를 얻었고. 그런데 귀국의 행태는 귀국이 영토를 얻는 것은 괜찮고 남이 영토를 얻는 것은 못 봐주겠다는 이기주의로 보이는군.”

그거 맞다. 다만 외교라는 게 그걸 어떻게 포장하느냐의 기술인데, 그 명분을 내가 대놓고 비웃어 줬으니 머리가 꽤 아플 거다.

물론 이렇게 해도 억지로 밀어붙이는 건 가능하다. 밀어붙이는 건.

문제는 세계 외교는 그냥 명분에 의해 돌아가는 거고, 명분 없이 뭘 하는 건 중세시대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허용된 적이 없다. 적어도 유럽에서는.

할 수는 있지만, 그에 뒤따르는 데미지도 감안해야 하는 것.

“잠시 휴회하도록 제안합니다.”

***

휴회가 선언되자마자 영국 측은 다급히 나와 접촉했다.

“폐하,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설마 러시아가 지중해로 나오게 용인하시고 크림전쟁의 피를 전부 무(無)로 돌리시겠다는 겁니까?”

응, 미안해, 그거 맞아.

“파리를 불바다로 만든 프로이센이 평화를 위한다고 설치는 꼴을 보자 배알이 꼴려서 말이오.”

직설적인 말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영국인들을 보자 고소하다.

“그리고 막말로 그게 틀렸소? 그러면 왈롱의 프랑스인들도 자신의 국가를 선택할 권한이 있으니 영국 역시 우리가 벨기에의 왈롱을 내놓으라고 하면 우리 편을 들어주셔야겠군.”

“벨기에는 대영제국이 독립을 보장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벨기에의 독립이 침해받는 경우는.....”

“그러니까 그네들이 주장하는 명분이 의미가 없다는 거요.”

물론 세상은 명분이 아니라 힘으로 돌아간다고 답할 수도 있겠지만, 프랑스는 아무리 못해도 두 세대 전에 유럽을 짓밟아버린 강국이다. 영국조차도 방심할 수 없는 상대, 한때 대륙봉쇄령으로 영국의 경제를 파탄낼 뻔한 상대다.

영국이 아무리 최강자라고 해도 쉽게 볼 수 없는 상대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대가 애초에 비협조적으로 삐딱하게 나오기 시작하면 영국이든 북독일 연방이든 간에 혈압이 수직상승할 게 뻔한 일이다.

“뭘 원하십니까?”

나는 피식 웃었다.

“이제 좀 협상을 할 자세가 되셨구려, 먼저 전제조건이오, 당신들 덕분에 프로이센에 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분노가 제어할 수 없을 수준이 됐소, 프로이센을 압박해서 우리 국민들의 분노를 진정시킬 뭐든 간에 내놓게 만드시오, 그게 아니면 우리는 이 회담에서 결정되는 어떠한 안건에도 찬성하지 않을 테니.”

“..........”

그걸 우리더러 이제 와서 어떻게 하라는 거냐는 표정이지?

"스페인 왕위라도 원하십니까?"

필요없어, 그런 파탄국가 왕위 따위.

“그래도 되고, 아니면 우리가 포기한 게 있으면 저쪽도 뭔가 하나를 뱉어내야 공정하지 않겠소? 북독일 연방을 더 확장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나, 바이에른의 독립보장이라든가?”

다른 건 몰라도 독일 놈들이 독일 통일 성공하는 꼴은 못 봐준다. 영국이 바이에른을 독립보장하는 순간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은 영영 물건너가는 거니까.

“........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총리 데려오시오, 글래드스턴 총리랑 디즈레일리 그 양반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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