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삼국동맹(2)
연전연패.
오스만 제국의 상황은 그걸로 요약할 수 있었다.
러시아의 개전 이후 싸우기만 하면 지는 오스만군은 이미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었고, 러시아 제국의 사기는 반대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발칸의 형제들을 해방하고 성지, 콘스탄티노플을 이교도의 손에서 되찾는다! 전군 돌격!”
“황제 폐하 만세!”
“으아아! 도망쳐! 도망치라고!”
“알라의 이름으로 맞서 싸워라 겁쟁이들아!”
“무슨 개소리야! 버틸 수가 없는데! 니나 싸워!”
“황제 폐하 만세! 러시아 만세!”
“해방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슬람 놈들은 꺼져라!”
비우호적인 현지인, 바닥을 치는 사기, 구닥다리 무기, 구시대적인 전술, 부정부패까지.
아무리 러시아군이 구시대적인 군대라고 해도 망할 요소들은 다 갖추고 있는 오스만군을 상대로 못 이기면 그게 이상할 일이었다.
그리고 연전연패 끝에 오스만 제국은 사실상 백기를 들었고, 러시아 제국은 곧장 오스만 제국과 산 스테파노에서 협정을 체결했다.
그 조항은 다음과 같았다.
- 1. 오스만의 종속국이자 자치정부로써 불가리아 공국을 설립한다. 불가리아 공국은 모든 행정과 독자적인 법률, 독자 군대를 보유할 권리가 있다.
- 2. 오스만 전 군대는 즉각 불가리아에서 철수하며 불가리아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러시아군의 주둔을 허용한다. 군대 주둔의 연장은 최소 2년 뒤에 재협상할 수 있다.
- 3. 오스만 제국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의 독립을 인정할 것.
- 4.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제국에게 도브루자, 바투미, 올투, 카르스, 아르다한 등 아르메니아 지역을 할양한다.
- 5.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레타, 에피루스, 테살리아에 자치 정부를 수립할 것,
- 6. 오스만 제국 내 아르메니아인들을 박해로부터 보호하는 내용의 법률을 제정할 것
- 7.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제국과 그 동맹국에게 14억 1천만 루블을 전쟁배상금으로 지불할 것
- 8.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모든 국가에게 개방할 것.
그러나 곧장 유럽 곳곳에서 반발이 터져나왔다.
영국, 내각 회의실.
“이건 말도 안 되는 폭거요!”
야당 당수 디즈레일리가 고함을 질렀다.
“디즈레일리, 진정하게.”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수상 각하? 러시아가 흑해 자유통행권을 얻어냈습니다. 러시아가 지중해로 나온단 말입니다! 지난 크림전쟁 이후 러시아의 흑해 비군사화 제한을 해제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걸 풀어주자마자 전쟁이 터지지 않았습니까!”
글래드스턴은 이 부분에 대해서 할 말이 없었다. 분명 흑해의 요새화를 금지했던 조항을 러시아의 관계개선을 위해 파기해준 건 사실이었으니까.
“어차피 의미 없습니다.”
솔즈베리 후작 로버트가 입을 열었다.
이곳에 앉아 있는 사람은 자유당과 보수당을 막론하고 영국의 주요 인사 전부였다. 애초에 영국의 정쟁이 치열하다 한들, 국가 위기 상황에서까지 그럴 얼간이는 없기도 했다.
“군사행동에 나설 준비를 해야 합니다.”
“신중해야 하오.”
“신중은 무슨....”
“지금 상황이 그렇게 좋지가 않단 말이오, 만약 일이 꼬여서 러시아와 선전포고를 해야 한다면, 동맹국이 필요하지 않겠소?”
그건 당연한 소리였다.
영국의 전략이 뭔가, 해군으로 해상봉쇄를 하면서 물자를 지원하고, 육군은 천천히 증강하다가 필요하면 파병하되 실질적인 전쟁은 동맹국이 치른다.
“그런데 지금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움직여줄 만한 우리의 우방이 누가 있소?”
“.........”
“프랑스는 지난 전쟁의 상흔을 복구하느라 바쁘고, 프로이센도 민간 피해는 적을지언정 군 피해가 큰 걸로 알고 있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럼 대체 어느 나라가 우리를 대신해 러시아와 싸워주겠소?”
“.... 북독일 연방이 그나마 해볼 만 하겠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당장 자국의 발칸 문제를 억누르는 것만으로도 벅찰 거고, 프랑스는 나라 절반이 쑥밭이 되었다. 파리가 한 차례 완파되기까지 한 걸 생각하면 프랑스가 그 상흔을 씻어내기까지는 한 세대가 족히 걸리리라.
“디즈레일리 경,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프랑스는 러시아고 뭐고 만약 프로이센이 전쟁을 개시해서 러시아랑 정신없이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면 주저하지 않고 프로이센의 뒤통수를 후려칠 겁니다. 이건 어떤 정치세력이 프랑스의 헤게모니를 거머쥐든 간에 변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현재 프랑스가 당장 전쟁을 시작하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황제가 군부를 수습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가 되었든 간에 프랑스는 다시 전쟁을 시작한다. 이는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바였다.
그리고 북독일 연방의 시선이 동쪽으로 쏠렸을 때 가뜩이나 원한에 불타는 프랑스가 그 먹음직스러운 뒤통수를 후려갈기지 못하게 하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상대적으로 온건파인 현 황제의 지지기반을 굳건하게 하도록 지원하는 게 최선입니다. 적어도 황제 본인은 상당히 아버지가 망쳐놓은 외교관계를 수습하려 시도하는 등 외교적인 해결책을 우선하는 이성적인 인물입니다. 보나파르트 가문을 축출하는 건 쉽지만, 축출한 다음 정권을 잡을 상대는 전부 초강경파뿐입니다.”
나폴레옹 4세의 대안이 없다. 말이 통하는 상대와 말이 안 통하는 칼 든 미친놈 중에 영국이 상대하기 그나마 나은 상대는 당연히 말이 통하는 상대니까.
“프랑스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설득해서 압박에 참여하게 하는 게 최선일 겁니다. 북독일 연방에는 최대한 늦게 접촉하는 것이......”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뭔가?”
“북독일 연방에서 비공식 연락입니다. 작금의 사태에 대해 북독일 연방 정부가 본국과 협력할 의사가 있다고 합니다.”
***
파리, 튈르리 궁.
“비스마르크의 방법이야 뻔하지. 결국 영국과 협조해서 러시아의 위협을 과장함으로써 전 유럽의 힘을 모아서 러시아를 저지하려고 할 거다.”
크림 전쟁 때처럼.
하지만 우리는 그럴 생각이 없다.
그레이트 게임, 세계에서 가장 장구하고 가장 많은 비용이 들었으며 가장 오래 걸린 쉐도 복싱.
러시아는 애초에 부동항에 대한 욕심이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동항을 가지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걸 굳이, 굳이 국운을 걸고서라도 얻어야 하는 국가적 목표냐고 물으면 아닐 뿐, 그냥 저놈들은 땅 넓히는 게 좋은 거다.
그런데 영국은 그걸 모른다, 아니, 어디 영국뿐이던가, 전 세계가 그걸 이해 못 한다.
대영제국과 패권 경쟁을 하기에는 저놈들 대가리가 그렇게 잘 돌아가는 게 아니라는 거를.
‘하지만 그래서 좋지.’
바로 그렇기에, 나는 여기서 러시아와 손잡는다는 선택을 할 수 있다. 러시아가 설령 진짜 위협적인 존재로 발전한다고 해도, 프랑스는 문자 그대로 단단한 벙커 안에 틀어박힌 거나 다름없으니까.
북독일 연방과 바이에른, 오스트리아 헝가리를 다 밟고서야 러시아군이 우리한테 이를 수 있다. 이거 뚫고 우리를 패려면 어디 공군이라도 띄우셔야지? 해군? 로열 네이비를 러시아 해군이 뚫는다면 그야말로 코미디겠지.
원교근공, 모든 시대, 모든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적용 가능한 명제다.
‘원 역사의 베를린 회담에서 러시아의 여론은 독일에 대해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그건 비스마르크가 원 역사와 완벽하게 똑같이 행동한다면 북독일 연방을 상대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터.
즉 우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잘 달래면서 발칸을 러시아 품에 넘겨주고 군사동맹을 체결해 북독일 연방에 대한 반국가동맹을 형성한다.
거기에 북독일 연방에 합류하지 않은 독일 소국들을 끌어들이는 건 덤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측에서 많이 인내해주는 게 필요하다는 게 문제인데.”
발칸에서 한 번만 인내하면 꼴 보기 싫은 프로이센을 쥐어패고 독일의 패권을 돌려줄 것이며 북이탈리아를 되찾게 지원하겠다고 약속하기는 했지만, 일단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내 말을 믿어 줄까.
‘아니,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
믿게 해야 한다.
***
빈, 쉰브룬궁.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루돌프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아버지, 프로이센에 복수할 기회입니다.”
프랑스의 제안은, 그대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꽤나 달콤했다.
발칸은 애초에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있어 매력적인 땅이 아니다. 만일 발칸과 북이탈리아를 교환할 수 있다면 기꺼이 북이탈리아를 선택하리라.
그러나 문제는, 프랑스를 신용할 수 있느냐는 것.
“나폴레옹 4세는 그 아버지와는 다릅니다. 아버지.”
“네 친구인 것은 안다.”
“그는 만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선택하겠다고 했습니다.”
“실제 상황이 되지 않으면 모를 일이지.”
사실, 황제의 마음도 제법 끌리고 있었다.
프랑스와 함께해서, 프로이센을 혼쭐내고 북독일 연방을 붕괴시킨다면. 그리고 발칸을 포기하는 대신 북이탈리아를 되찾고 독일에서의 패권을 점진적으로 회복한다면?
“프랑스 제국은 만일 우리가 합류한다면 프랑스제 무기를 원가만 받고 판매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프랑스제 무기는 아시다시피 프로이센의 무기에 결코 밀리지 않습니다. 반면 본국의 무기는......”
뛰어난 편이 아니다. 모두가 그걸 알고 있다.
지난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그가 얼마나 굴욕감을 느껴야 했던가.
“만일 프랑스-오스트리아-러시아 동맹이 체결된다면 러시아에 우리가 가진 무기를 판매하고 프랑스 무기로 재무장해서 그 차익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폐하, 놓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기회입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칸은 어차피 계륵에 불과했던 것.
나오는 것 없는 발칸을 러시아에 던져주고, 만일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킨다면 프랑스가 자동으로 참전한다는 공수동맹 조약을 명문화하고, 북이탈리아를 손에 넣는다면. 더 말할 것도 없는 흑자였다.
***
“됐어!”
나는 무릎을 내리쳤다.
가장 어려운 바늘귀였던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이 성사되었으니 그 다음은 볼 것도 없다. 이번 베를린 회담에서 러시아는 명백히 아쉬운 쪽. 여기서 우리가 러시아의 편을 들어주고 발칸 전역을 삼키도록 지원해주면 프로이센은 끝이다.
당장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어도 비스마르크는 제법 목이 졸리는 기분을 생생히 느껴야 하겠지. 거기에 독일 소국들과 북독일 연방을 분열시키는 공작도 할 예정이니까.
분명한 건 이번엔 한 점 따냈다. 북독일 연방은 고립주의를 채택할 상황이 절대 되지 못하니까 결국 러시아와 원수를 질 수밖에 없게 된다.
이걸로 비스마르크의 외교 전략은 끝장이니 골든골은 아니어도 전환점 정도는 되겠지.
물론.... 비스마르크는 분명 불세출의 재상이다. 분명 뭔가 다른 수단을 강구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봐야겠지.
하지만 적어도 베를린 회담까지는 중간에 새어나가지 않는 한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뒤통수를 두들겨맞을 거다.
‘베를린 회담, 참 기대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