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삼국동맹(1)
보불전쟁이 끝난 지 몇 년도 되지 않아 유럽은 순식간에 전쟁위기로 빨려들었다.
영국의 개입으로 양측 간의 무배상-무할양 평화로 종전이 선언된 지 만 2년이 되지 않았다.
사전적으로라면 프랑스의 패배다. 사실 국내여론에 떠밀려 벌어진 전쟁에서, 애초에 전략 목표랄 게 없었지만, 아무튼 간에 선전포고를 먼저 한 건 나폴레옹 3세였고, 결과적으로 프랑스 제국은 전쟁의 기폭제가 된 스페인에 대한 개입을 포기했다. 그럴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이번 전쟁으로 달성하려던 전략목표를 실패했다. 프랑스를 완패시켜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독일인의 민족국가를 세우려던 계획은 좌절되었다.
대독일이 무산된 뒤 거기에서 오스트리아를 뺀 소독일을 추구했으나, 지금 프로이센이 독일 제국을 세웠을 때 확실하게 통합할 수 있는 것은 북독일 연방뿐, 뷔르템베르크와 바덴, 헤센, 바이에른의 4개국은 여전히 독립한 상태다.
그나마 헤센과 바덴은 마찰 없이 통합할 수 있지만, 가장 큰 문제가 바이에른이었다.
바이에른은 그 문화가 독일의 스테레오타입이 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주류 독일인들과 굉장히 다른 문화색을 가지고 있었으며, 비텔스바흐 왕가는 대대로 프로이센보다는 오스트리아와 친했고, 프로이센 위주의 통합에 거부감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보불전쟁에는 민족주의 여론을 못 이기고 참전했지만 보불전쟁이 애매모호하게 끝나버리면서 프로이센 위주의 통일을 강행한다고 쳤을 때 바이에른이 참가할지 자체가 의문스러운 상황이었다.
프랑스를 상대로 깔끔한 승리를 거두었다면 바이에른도 군소리 없이 독일 연방에 가입했겠으나 그것도 아니고, 프랑스는 언제고 복수를 위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것은 유럽 모든 이들이 동의하는 사항이었다.
그러니 프로이센은 억지로 독일 제국을 성립시킬 수 없었다. 바이에른이 빠졌는데 빼놓고 성립했다가 영영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가 독일 민족에서 이탈해버리면 애초에 생활상에 더불어 프로이센과의 지역감정까지 나쁜 마당에 걷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비스마르크는 물론 호엔촐레른도 바라지 않는 바였다.
그런데, 그 마당에 이번에는 발칸에서 일이 터졌다.
“북독일 연방의 논리대로라면 사실 러시아 제국의 발칸 진출은 정당하고, 오히려 각국의 지원을 받아야 할 일이오, 하지만 현실은 어떻소? 대사.”
나는 와인을 홀짝였다.
너무 독한 술은 몸에 맞지 않았다, 내 나이가 그렇게 많지도 않고.
“러시아는 연전연승하고 있지, 일단 거기에 대해 축하부터 하고 넘어가겠소.”
“..... 프랑스의 황제께 그런 말씀을 들을 줄은 몰랐습니다.”
“크림 전쟁 때는 내가 집권하지 않았지, 그리고 황제가 바뀌면, 제국의 운영도 바뀌는 법이오, 우리 모두 유럽에서 고립되다시피 했다는 특징이 있지, 특히 이번에 프로이센에게 배신당한 이상 러시아 역시 유럽에는 친구가 없어졌다고 봐야 하지 않겠소? 이번에 북독일 연방 명의의 휴전 요청은 누가 봐도 오스만의 편을 든 것이니.”
“......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이미 본국 여론이 끓어오르는 중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폐하, 폐하께서 지금 저희를 위해 영국과 북독일 연방을 압박해주시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만.”
“우리도 한동안은 상처를 보듬어야 할 판이오, 당연히 그러기 어렵지. 하지만 때로는 동맹은 그 자체로도 무기요, 우리가 영국의 편을 들지 않고 이탈한다는 것만으로도 적잖은 의미가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텐데.”
“물론 그렇습니다만, 그걸로는 공수동맹을 체결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무엇보다 귀국은 한때 폴란드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신 전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내 이름으로 약속하겠소, 폴란드의 독립운동은 다시는 러시아에서 벌어지지 않을 것이오, 애초에 그것도 국민들 사이에 폴란드에 대한 동정심이 퍼졌던 것이 원인이고, 지금은 폴란드가 대수겠소? 당장 프로이센에 대해 복수부터 하고 봐야지.”
“그렇습니까.”
“그리고 한 가지를 더하자면, 북독일 연방과 영국은 군사행동을 하지 않을 거요, 비스마르크는 양면전선을 벌일 만큼 멍청하지 않고, 현 영국의 수뇌부는 도덕외교를 중시하니까. 아마 베를린쯤에서 조만간 국제회담을 벌여서 전쟁을 현실적으로 끝내자는 소리를 하겠지. 무엇보다 귀국이 개전을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 제안을 반쯤 받아들인 것 아니오?”
“역시....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발칸에서 저희를 지지하는 외교적 입장을 선택했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중동에서의 프랑스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프랑스는 오스만에 러시아가 무슨 짓을 하든지 신경쓰지 않을 것이오, 그게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조건이오, 이 반 프로이센 동맹에 러시아가 참여하는 것에 대한 반대급부.”
내가 결혼해서 애를 낳았더라면 국혼이라도 제안해볼 수 있었을 테지만. 아직 내 결혼도 논의 단계인지라.
물론 러시아와의 동맹을 확고히 할 수 있다면 러시아 황세손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딸을 맺어주는 것도 충분히 넣을 수 있다.
거기에 바이에른을 어떻게든 독일 제국에 합류하지 못하게 하고 친 프랑스파이자 나와 편지를 지금도 주고받는 루돌프 황태자의 자살을 막아 황제로 올린다면?
3제동맹은 애초에 발칸을 러시아에게 떼어주겠다고 제안하고, 교황령을 복구시키고 북이탈리아를 오스트리아가 되찾도록 화끈하게 지원해준다면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 양자 모두에게 메리트가 전혀 없다.
즉 비스마르크에게 남은 길은 영국과 어떻게든 동맹이나 그에 준하는 상황을 이끌어내는 것.
그것도 결코 쉽지만은 않을 거다. 아니, 빌헬름 2세만 등판하면 바로 깨진다.
당장 프로이센이 지금 총력을 기울이는 게 해군 양성 아닌가? 우리 해군에게 목이 졸려서 단기결전을 강요받았던 그 기억 때문에 말이지.
그런데 말이 쉽지 함대를 증강하면 할수록 영국의 시선이 날카로워지는 건 상수다.
원 역사에서도 그렇고.
즉 함대를 포기하고 영국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 안 그러면 유럽에서 고립될 테니.
..... 당연하지만 이건 최대한 희망회로를 굴린 거고, 현실에서는 문제가 터져나올 소지가 크다.
러시아에게 발칸,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북이탈리아를 떼어줘서 동맹을 유지시킨다 치더라도 바이에른까지 확보하기는 어려울 공산이 크다. 그리고 솔직히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제일 약한 고리 같아 보인단 말이지.
‘내가 비스마르크라도 오스트리아-헝가리를 공략하겠지.’
뭔가 확실한 수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동안, 대사는 내용을 정리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답은 주지 않는 거요?”
“제가 특명전권대사이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도 이 건은 너무 큽니다. 차르께 일단 보고드리고 윤허를 받아오겠습니다.”
“동의하오, 국가 원수 대 국가 원수로 일을 처리하는 게 최선이겠지, 귀국 외무부에서 얼마나 논의할지는 몰라도, 적어도 개전하기 전에는 답을 주시오, 우리는 전후 처리 과정에서나 개입하겠지만 그래도 입장을 확실히 해 주면 좋겠지.”
“물론입니다. 그 말씀도 꼭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 답을 구할 차례다.
***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가장 핵심적인 구심점이 뭐냐고 물으면, 역시 합스부르크 왕가다.
바로 그것이 입헌군주정이 정착하기 힘든 환경을 조성했고, 동시에 황제에게 업무부담을 가중시켜 합스부르크의 비극적인 가정사를 초래했다는 평가도 있다.
아무튼 간에, 황제를 설득하면 뭐가 됐든 된다.
그리고 다행히도, 나는 황태자와의 끈을 가지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내에서는 내가 황태자의 펜팔 친구라는 것에 우려를 느끼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뭐 어쩌라고.
‘누님이 결혼했어, 너보다도 조금 어린데 어머니가 너무 빠르게 밀어붙이시는 것 같아.... 너도 조만간 결혼한다고 했지? 아직 신부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난 네가 기젤라 누님과 결혼했으면 했어, 그랬으면 참 멋진 일이었을 텐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두 사람이 가족이 되는 거고, 너도 내 가족이 되는 거잖아.’
루돌프 녀석이 보낸 편지를 쓱 훑은 나는 답장을 적었다.
-...... 난 정말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 국가적으로도 그게 이익이고, 무엇보다 너와 전쟁을 벌이고 싶지는 않거든, 네가 황제로 있는 국가에 국민 여론에 떠밀려 선전포고하게 된다면 난 정말 비참한 기분일 거야, 네 아버지가 프랑스와의 동맹을 진지하게 고려해줬으면 참 좋을 것 같은데, 프랑스는 지금 동맹 하나가 다급한 실정이야, 외교적 고립이 표면화된 거지, 내가 이끄는 프랑스는 당분간 식민지를 늘리면 모를까 유럽 대륙에서는 땅쪼가리를 욕심낼 상황이 아니지, 오히려 같이 프로이센에 맞서줄 동맹국 하나가 절실한데, 너희 아버지도 한 차례 북독일 연방으로 인해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지.
나는 잠시 펜을 멈췄다.
-어쩌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충분히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공동의 적이 있으니까. 너희 가문에 치욕을 주고, 내 아버지를 침대에 누워서 돌아가실 수 없게 한 자들, 프로이센 말이지. 우리는 프로이센에 복수하고, 너희도 복수할 뿐 아니라 북이탈리아를 손에 넣을 수도 있을 거야. 지금 우리 여론은 프로이센에게 보복할 수 있다면 악마와도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입장이야, 합스부르크와 동맹을 공식화하는 것쯤이야 못 할 게 어디 있을까? 분명 너희도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데 말이지.
네가 혹시 너희 가족을 설득해줄 수 있을까.... 따위의 글은 적지 않았다.
어차피 황태자에게 가는 편지를 중간에 뜯어보는 놈이 없을까? 자식 편지를 멋대로 뜯어보는 부모도 쌔고 쌘 세상인데? 분명 황제에게 보고가 들어간다.
그리고, 합스부르크에게 확실한 메시지를 전해줄 수 있으면 충분하다.
‘우리는 너희의 적이 아니다.’
‘프랑스는 지금 동맹을 구하고 있다. 오로지 프로이센에 복수하기 위해서.’
‘너희 역시 잃어버린 영토가 제법 있지 않던가? 프로이센에 당한 치욕도 제법 크지 않던가?’
황제에게 보고가 들어가면, 분명 프란츠 요제프 1세도 고려할 수 있겠지, 무엇보다 유럽에서 단 한 뼘의 영토도 더 이상 욕심내지 않는다면, 프랑스와 손 못 잡을 게 뭐가 있냐는 생각도 할 테고.
-나도 조만간 결혼해야 하는데, 너희 어머니가 다리를 놔주면 편하기는 하겠어, 바이에른 쪽에서 찾아보고 있거든, 하하, 그리고 적어도 내 아내를 찾는 동안은 너를 좀 덜 들볶지 않겠어?
이런 가벼운 문장들도 섞어줘야 한다. 어린애가 흔히 할 법한 결례를 저지르는 것, 그건 내가 어른이 아니라 아직 청소년의, 미숙한 햇병아리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연막이다.
그래서 편지의 나머지 내용에 신뢰성을 좀 더 부여한다.
서명을 끝낸 나는 편지를 봉인했다. 조만간 루돌프 황태자는 이 편지를 읽고 두툼한 답장을 보내겠지.
그거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