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새로운 시대(1)
불타고 무너진 도시에서, 반파된 대성당으로 한 소년이 걷고 있었다.
그 뒤를 수많은 이들이 따르고 있었다.
피에 젖은 듯이 붉은 융단을 걸어서 앞으로, 앞으로.
여전히 불타고 무너진, 처참하게 파괴된 도시는 아직 복구되지 못했지만, 소년의 뒤를 따르는 국민위병들도, 시민들의 눈에도 절망은 없었다.
도망치지 않고 어린 나이에도 조국을 수호한, 패망의 위기에 몰린 프랑스를 구원한 소년의 모습에서, 수백 년 전 보였던 희망과 같은 것이 보였다면 과장일까.
성녀는 이 자리에 없었지만. 프로이센군의 포격에 맞아 부서진 첨탑에 내걸린 삼색기와 하얀 바탕에 새겨진 붉은 로렌 십자가는 그들에게 과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외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주님의 자식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자는 앞으로 나오라.”
전쟁의 흔적이 남은 시내 곳곳과 마찬가지로 대성당 역시 전쟁의 흔적은 명확했다. 총탄이 박힌 성화와 깨어진 스테인드글라스는 아직 수리되지조차 못했고, 부서진 천장의 틈으로 햇빛이 내리쬐었다.
선명한 태양의 광채가 소년의 길을 밝히듯 내리쬐었고, 온전한 침묵이 주변을 감쌌다. 유럽 각국의 대사들과 국민위병들, 파리의 시민, 정치인들, 그 누구도 감히 이 침묵을 깨지 못했다.
마침내 소년이 무릎을 꿇었을 때, 교황의 입이 열렸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앞에, 프랑스인의 황제로써 이 제국을 통치할 자, 외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곳에 섰으니, 신이시여, 그를 축복하소서.”
교황의 손에 들린 잔에서 성유가 흘러내린다.
10대 후반에 갓 접어든 소년의 정수리에 흘러내린 성유가 그의 뺨을 타고 턱까지 흘렀다.
소년이 고개를 들었을 때, 교황의 손에는 빛나는 관이 들려 있었다.
프랑스 제국의 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취한 이후, 세 번째 주인을 찾은 제관이 소년의 머리에 씌워졌다.
관을 쓴 채로 고개를 돌린, 황제가 된 황태자는 외쳤다.
“나를 믿고 따라 준 시민들이여,”
“이 자리에서 신과 그대들 앞에 감히 맹세하겠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도, 쉬지도, 안주하지도 않겠노라고,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되찾기 전에는 결코 포기하지 않겠노라고! 프랑스는 과거에 그러했듯 짐의, 모든 프랑스인의 대표자의 치세에 다시금 위대해질 것이라고!”
그러자, 환호성이 닥쳐왔다.
“비바 랑펠로!(Vive L’Empereur!)”
“황제 폐하 만세!”
“나폴레옹 4세 폐하 만세!”
“프랑스 만세!”
“프랑스 제국이여! 영원하라!”
삼색기가 휘날린다.
삼색기 가운데에 새겨진 로렌 십자가가 태양빛을 받아 환하게 빛난다.
그리고 사람들이 있었다.
울고, 웃고, 환호하고, 기대하는.
나는 그들을 보았다.
그들도 나를 보고 있었다.
왕홀과 보주를 든 나는 그들의 환호를 받았다.
사실,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보내는 환호를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이 있다. 권력을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이 있듯이.
그러나, 그것에 한 차례 중독된다면, 그것을 갈구하게 된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깨닫지는 못했겠지만 전생부터였겠지.
이런 감각은 마치 마약과도 같아서, 한 번 이러한 감각에 중독된 인간의 심장은 일반적인 믿음 정도에는 만족하지 못하고 더더욱 갈구하게 된다.
이것을 무엇이라 해야 할까? 권력욕?
아니면 그게 아니라 또 다른 무언가일까?
무엇이든 상관없다.
그는 도저히 이 감각을 거부할 수 없었기에.
***
대관식은 프랑스 군부의 몰락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우선 대관식 이후 3일 만에 초대형 사건이 터졌다. 군부 내에서 의회를 무력화시키려는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는 고발이 접수되었고, 증거가 되는 편지가 입수되었다.
보불전쟁에서 살아남은 장군들 대부분은 그 직후 체포되거나, 옷을 벗어야 했다.
군이 정치에 기웃거리니 전쟁에서 졌다는 비판 여론이 충분히 고조되자 곧장 황제는 군 개혁안을 반포했다.
우선 프랑스 대육군과 국민위병이 합쳐졌다. 정확히는 근대식 예비군 제도로써 국민위병을 군에 편입시킨 것이었지만, 대육군의 피해가 막대함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장성들과 영관급들이 다수 전사하기도 했고, 그 이상으로 끌려가서 졸지에 감옥살이를 하거나 옷을 벗게 되는 등 대육군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상태, 장성부터 장교들까지 빈자리가 많았지만, 그랑제콜을 비롯한 사관학교에서 충원해오거나 진급을 빠르게 하는 게 아닌, 국민위병에서 인원을 전속시키는 방식으로 공석을 채워버렸다.
물론 진급이 없는 건 아니었다. 유능하다고 인정된 자들, 용맹하다고 인정된 자들은 빠르게 진급해 요직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수의 사례에 불과했고, 순식간에 머릿수로 밀어붙인 국민위병 파벌이 프랑스 군부 내에 생겨버렸다.
기존의 군부 카르텔에 있어서 엄청난 타격이었다.
모든 반발은 백년전쟁 이후 최악의 모욕을 당한 마당에, 이미 무용한 기존 체제를 개혁하는 방안에 반대하는 비애국자라는 말 한 마디면 충분했다.
비애국자, 그 말 한 마디면 누구든 매장해버릴 수 있었다.
의회의 의원이든, 정치 인사든.
전쟁에 반대했던 인물들부터 매장당했고, 그 다음은 공화주의자들, 그 외에도 부르봉파나 오를레앙파들 가운데에서도 친프로이센 성향자들이 있었다는 이유로 공격을 받았다.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건 대(對) 프로이센 항전의 상징 그 자체나 다름없어진 어린 황제뿐이었다. 군부는 그 무능함이 사실 프로이센과 내통해서 그런 게 아니냐는 비난을 받았고, 국민위병들은 그 내부적으로도 파벌이 너무 많아 유의미한 정치세력화되기 어려웠다.
이러다 보니 기존 정치세력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서로를 규탄해야 했다. 상대를 패전의 원인으로 몰지 않으면 자기들이 패전의 원인으로 몰릴 판이었으니까.
사실 패전의 결정적인 원인은 군부의 무능, 특히 최고통수권자 나폴레옹 3세의 무능과 더불어 적이 너무 강했다는 것이었지만, 죽은 사람을, 그것도 전대 황제를 대놓고 비판할 수는 없었다. 자칫하다가는 새 황제, 나폴레옹 4세를 비판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으니까. 당연하지만 나폴레옹 4세를 지금 비판했다가는 곧장 프로이센 간첩, 비애국자 행이었다.
보불전쟁은 명백히 프랑스가 패배한 전쟁이었다. 명색은 조건없는 평화였지만, 프랑스는 스페인에서 손을 떼어야 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국토는 초토화되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종전 선언 직전까지 황태자조차도 죽음을 각오하고 항전을 이끌고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부정의 여지가 없다.
한편, 그 혼란 속에서도 황제는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나이가 어리다는 것도 이유였지만, 진짜 이유는 간단했다.
나설 이유가 없었다.
프랑스의 정치세력들이 서로 물고 뜯고 싸워줘야 지친 국민들이 자신에게만 충성하게 될 테니까, 그러니 그놈이 그놈이라는 인식을 심어 줄 때까지 싸워줘야 했다.
왕당파와 오를레앙파든, 공화파와 군부든, 자본가와 사회주의자든 간에.
죽을힘을 다해 싸워줘야 했다.
***
나는 칼을 꺼내 편지봉투를 뜯었다. 인장 반지는 굉장히 익숙한 형태였다.
그 편지의 내용을 훑은 나는 씩 웃었다.
“교황 성하께서 화끈하게 도와주셨군.”
편지의 내용은 긍정적이었다. 교황청은 비공식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뿐 아니라 바이에른에도 접촉했고, 두 곳 모두에게서 일단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물론 이건 교황이 다리를 놓아 줬으니 일단 이야기를 들어는 보겠다는 제안에 가까웠지만 그게 어디인가.
나는 줄 수 있는 것과 얻을 수 있는 것을 면밀하게 계산했다.
‘먼저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전통적인 동맹이다. 물론 민족주의 여론이 강해서 보불전쟁 때는 바이에른도 프로이센 편에 섰지만, 왕가와 귀족들은 프로이센을 싫어하지, 그리고 그 김도 사실상 프로이센이 얻은 것 없이 물러나면서 상당히 빠졌을 터.’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말할 것도 없다. 국력이 약해서 그렇지 프로이센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러시아.
이건 이전의 구상을 그대로 실현해도 된다.
‘러시아가 발칸을 통째로 삼키는 걸 묵인해준다, 어차피 오스트리아-헝가리도 보오전쟁 이후로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대가로 발칸을 내줄 의사가 없는 게 아니었으니 이건 쉬운 일이다. 러시아가 거절한 유일한 이유는 영국과 프랑스가 끼어들어 2차 크림전쟁이 터지는 거였는데, 우리 프랑스가 거기서 이탈하겠다면 영국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영국의 레드코트는 ‘고작’ 10만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전 세계에 흩어져 있다. 영국은 언제나 동맹국에게 자금지원과 해상봉쇄를 해줘서 동맹국이 결정타를 먹이게끔 판을 깔아줄 뿐, 대규모 지상병력을 파견해서 전면전을 벌이는 일은 거의 없다.
프랑스가 묵인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동의하고, 러시아가 작정한 상황에서 발칸이 러시아에게 넘어가는 걸 막을 수 있는 수단이 뭐가 있을까? 유럽의 병자 오스만이 자기 집을 지킬 능력이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테니 끽해야 프로이센이다. 조금 더 하면 이탈리아?
그런데 비스마르크든 비토리오 에메누엘레 국왕이든 간에 프랑스,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를 동시에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하면 손을 내저을 거다. 당장 보불전쟁 전까지 어떻게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자존심을 보전시켜줘서 전쟁기간 중 적대행위 못하게 한다고 비스마르크가 얼마나 외교전을 펴 댔는지 알면 비스마르크가 아무리 영국이 끼었다고 해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를 동시에 상대한다는 자살수를 둘 리가 없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고. 이탈리아도 마찬가지다.
즉 진짜로 현실성이 생긴다. 문제는 국민여론인데..... 지금 프랑스의 여론은 프로이센에 복수할 수만 있으면 악마랑도 손을 잡겠다는 수준이고, 러시아 제국이 언제부터 여론이 중요한 동네였던가. 다만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바이에른 내의 게르만 민족주의자들이 문제인데. 뭘 내주고 뭘 가져오냐에 따라 달렸겠지.
‘그건 그거고, 제대로 싸워보려면 역시 기관총이 필요하다.’
맥심 기관총, 주퇴복좌기 달린 신식 야포,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손에 넣어야 할 물건 1번이다, 그리고 역시......
‘총 하면 미국이지, 하이럼 맥심도 원래 미국 사람 아니었던가.’
***
존은 천재였다.
그의 아버지는 총포 기술자였고, 자라면서 본 것은 총 만드는 기술이었다.
그의 아들로 태어난 청년도 당연히 배운 것은 총포 만드는 기술이었다. 10살에는 실제로 작동하는 총을 폐품 창고의 잡동사니를 모아 만들었고, 14살 때는 나무로 1:1 사이즈의 거의 완벽한 모형을 만들었다.
갓 성인이 된 청년이 자신의 직업을 총 만드는 쪽으로 잡은 건 우연은 아니었을 터였다.
그리고, 그 청년은 오늘 날아온 편지 한 장에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청년의 앞으로 온 편지에는 별말이 쓰여 있지 않았다.
그저 약간의 개념도가 그려져 있었다, 대략적으로 어떤 원리인지는 추론할 수 있을 정도의 형태로 그려진 그 총기의 설계도를 본 청년의 눈이 확 뜨일 정도의 획기적인 설계였다.
그 이름도 적혀 있었다.
가스 작동식 기관총.
그 설계도 뒷면에는 몇 줄의 글이 쓰여 있었다.
이 설계를 현실에 구현해줄 최고의 총기 기술자가 필요하다는 말.
그리고 연락처.
자신이 누구인지, 그를 어떻게 알았는지 등은 단 한 줄도 쓰여 있지 않았지만, 청년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지 못했다.
기술자로써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이 설계를 누가 만들었을까, 무엇에서 연상을 받아 어떻게 만든 것일까.
궁금했다,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궁금증을 해결해줄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청년, 존 모지스 브라우닝(John Moses Browning)은 곧장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파리의 어느 황제는 그날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오, 이게 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