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보불전쟁(6)
베를린, 프로이센 왕국.
“무배상, 무할양이라.”
비스마르크는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확실하게 프랑스를 제압해 독일 통일의 방해물을 없애고 알자스-로렌을 확보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었다.
둘 다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탈리아를 압박해서 교황령을 뱉어내게 만드는 것 자체는 가능합니다만, 향후 이탈리아를 우방으로 끌어들일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겠지.”
어린애라도 줬다 뺏으면 화낸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물론 가끔 그걸 이해 못하는 저지능자들이 고위직이나 기자 같은 자리에 있긴 하지만 적어도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를 비롯한 현 프로이센 수뇌부는 거기 해당하지 않는다. 자기들이 부추겨서 땅을 넓혔는데 이제 와서 협상 결과가 그렇게 났으니 도로 뱉어내라고 하면 당연히 길길이 뛰겠지.
설령 선봉에 프랑스가 서서 압력을 가한다고 해도 프로이센이 발을 빼면 배신감을 반드시 느낄 거다. 이걸로 인한 관계의 악화는 한동안 회복하기 어려울 거다.
만약 프로이센이 완전히 베를린까지 밀려서 완패했다면 모를까 프랑스 영토 일부를 여전히 점령한 상태에서 그런 조약을 맺었으니 더더욱.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프랑스랑 계속 전쟁하다가 나라의 기둥뿌리를 뽑아먹느냐, 아니면 이탈리아의 분노를 사더라도 국가의 여력을 남기느냐를 놓자면 후자니까.
“가능한 선에서 교황령 문제에 대해서는 협상을 계속해보더라도 일단 받아들이는 쪽으로 가는 게 낫겠지.”
“무엇보다 어느 정도 위신을 세울 거리를 주지 않으면 제정이 붕괴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적어도 프랑스 당국자들은 진지하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사죄나 배상이든, 뭐든 간에 위신을 세울 거리가 필요하다는 거군, 그게 교황령 문제인가?”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숨을 푹 쉰 빌헬름 1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권을 줄 테니 이 전쟁을 조속하게 마무리하게, 피해는 우리도 큰데 얻은 건 하나도 없군.”
“송구합니다.”
스당 요새에 예상보다 더 많은 탄약과 식량이 비축되어 있지 않았다면, 그리고 나폴레옹 3세가 결사항전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무난하게 이겼을 터, 그러나 전투에서는 이겼음에도 결국 협상장에서 프로이센이 얻어간 건 사실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알자스-로렌조차도 가져가지 못했으니.
하지만 이 평화가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터였다.
***
<휴전 기간을 틈타 선제 폐하의 시신 운구되다, 병마가 그분의 숨을 앗아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미래를 우려하시던 폐하의 관이 들어오자 눈물바다가 된 파리>
<프로이센 ‘조건 없이 모든 상황을 전쟁 전으로 돌려놓자’..... 파리의 항전에 겁먹은 프로이센?>
<익명 사설 - 프로이센은 군사력에서는 우리를 이겼으나 우리의 의지를 두려워한다>
<황태자 전하의 즉위식은 종전 이후?>
<초토화된 파리, 프랑스의 전쟁지속능력은?>
<전쟁 내내 드러난 군부의 총체적 무능과 부실, ‘프로이센과 싸우기 전에 프랑스군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겠다!’ 황태자 전하의 일갈>
<군부는 무쓸모, 결국 파리와 프랑스를 구한 것은 황태자 전하의 지도력과 시민들>
<이번 전쟁은 제국 내의 옥석을 가려낼 기회, 무능한 자는 쳐내고 유능한 자들을 기용해야>
<교황 성하께서 황태자 전하를 축복하시다>
프랑스 군부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언론이 움직이고 있었다.
언론들은 전쟁 내내 드러난 군부의 무능과 결국 승리를 가져다준 건 자발적으로 일어난 국민위병들이었다는 것을 조명하면서 군부를 때려대기 바빴고, 동시에 분하더라도 지금은 평화를 받아들인 뒤 내부의 적들을 쓸어내고 힘을 비축해서 복수를 준비할 때라는 주장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 모든 건 명확했다.
군부가 공격받고 있었다.
프로이센과 전쟁을 계속하면 군부를 숙청할 수 없다. 전쟁을 이끄는 건 어찌되었든 군부니까.
스당 등에 포위되어 있던 병력 일부와 해군을 제외하고는 기존 군부가 지휘하던 병력들은 사실상 전멸했고, 지금 파리를 지키는 것은 국민위병들이었다. 황제에게만 충성하는 국민위병들.
즉 군부가 파리를 무력으로 장악하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군부가 공격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누가 배후인지 알지 못했다.
“역시 루이 쥘 트로시 그놈이.......”
“레옹 강베타 그놈 아닙니까? 그놈은 공화주의자잖습니까!”
“쥘 그레비일지도 모릅니다. 일단 파리의 영웅이신 황태자 전하를 감히 공격할 수는 없으니 우리부터 무너트리려는 거죠!”
“일단 황태자 전하께 강하게 진언드리고 의회를 압박합시다. 전쟁을 지금 끝내자고 하는 건 프로이센 편을 드는 반역자라고 말입니다!”
***
“지금 프로이센과 계속 싸우자고 했나? 그럴 병력은 있고?”
“국민위병들을 동원하면......”
“국민위병은 문자 그대로 최후의 수단이네, 국민위병들이기에 앞서 저들은 프랑스의 경제를 수습하고 전후를 이끌어나가야 할 프랑스의 국민들이란 말이네! 적에게 맞서 싸우기만 하면 그만인 군인이 아냐! 국민위병들은 가볍게 소모해도 좋은 소모품이 아니네, 프로이센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던데 그놈들과 싸우다 보니 물들어서 병사들이 숫자로만 보이나? 그래서 파리에서 짐이 싸우는 동안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나? 응?”
“..........”
“내 분명히 말하지만 프로이센은 그거 때문에 망할 걸세, 그리고 자네들 말을 들었다가는 우리 프랑스도 그 뒤를 따를 거고! 알아들었으면 냉큼 사라져!”
황태자의 고함에 쫓겨난 군부 인사들은 의회로 갔지만, 국민위병들을 믿는 의회가 군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실병력이 있어야 쿠데타를 하든 말든 할 것 아닌가.
하지만 군부가 이로써 확신한 것이 있었다.
적들은 의회 내에 있었다. 황태자라고 하기에는 황태자는 너무 어렸고, 의회 내부에 적이 있으리라.
***
“멍청이들.”
나는 지도를 훑으며 중얼거렸다.
“자기가 뭐 때문에 죽는지도 모르고 죽겠군.”
프랑스의 군부는 총체적 난국이다.
부정부패부터 시작해서 정경유착, 문민통제 무시 등 답이 안 나오는 수준.
차라리 지금, 내 카리스마와 애국심에 의해 움직이는 국민위병들이 파리를 장악했을 때 프로이센과의 강화를 맺고 군부를, 부패한 장성들을 처리하고 내 사람들을 심든가 해야 한다.
“앙리 준장.”
“예, 황제 폐하.”
“아직은 황태자지.”
나는 보송보송한 뺨을 만지작거렸다.
앙리 준장은 군인이면서 내가 믿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다.
나폴레옹 3세와 갈라지기 전부터 내 개인 수행무관이었고, 내가 팔레 루아얄로 갔을 때에도 날 따라왔으며 전쟁 전부터 전쟁 중에도, 지금까지 계속해서 내 곁을 지키며 경호와 기타 잡일을 도맡아 해준 이.
능력은 몰라도 충성심만은 입증되었다고 할 만 한 존재다.
적어도, 지금은 능력이 어지간히 수준 이하가 아닌 한 능력보다는 충성심이 더 중요한 상황이기도 하고.
나는 물건 하나를 그에게 쥐어주었다. 미국 독립의 아버지 중 한 사람, 제퍼슨이 만들었다는 암호체계에서 사용되는 제퍼슨 디스크였다.
“그대가 나를 위해서, 프랑스를 위해서 해 줘야 할 일이 있네.”
내 말을 끝까지 들은 앙리 준장은 무릎을 꿇었다.
“비바 랑펠로(황제 폐하 만세), 기꺼이 목숨을 걸고 해내겠습니다.”
***
프로이센과의 협상은 적잖은 시간을 끌었지만, 결국 타결되었다.
이탈리아는 기껏 먹은 교황령을 2년도 못 되어 뱉어내라는 것에 길길이 뛰었지만 그들의 편을 들어주는 열강이 없었기에 울며 겨자먹기로 토해내야 했다.
물론 교황령 전체가 아닌 로마만을 뱉어내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이탈리아 왕국의 위신은 이미 치명타를 입은 지 오래였다.
프로이센군은 함락 직전에 놓여 있던 스당과 점령에 간신히 성공했던 메츠 요새 등에서 철수, 전쟁 이전의 국경으로 되돌아갔고, 양군은 모든 포로를 조건 없이 석방했다.
그러나 개운하게 끝나지 못한 전쟁 탓에 프랑스 국내의 불만은 팽배했고, 그 불만은 군부를 향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특정 기업들과 군부 장성들이 결탁한 혐의가 있으며....”
“군납비리 때문에 우리 장병들이 제대로 싸우지를 못했소! 군부의 구더기들이 이 전쟁의 승리를 가로막았다고!”
주요 장성들 상당수는 전쟁 도중 불귀의 객이 된 지 오래, 나머지도 파리에 부재중인 등의 이유로 악화되는 여론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없었다.
정계의 모든 세력은 한 마음 한 뜻으로 군부를 이번 패배의 제물로 삼기로 결정한 듯 쉴새없이 군부를 물어뜯었다.
구심점이 될 명망 있는 장성 다수가 스당에서 전사한 데다, 최후의 수단으로 고려해봤을 쿠데타조차도 파리를 국민위병들이 장악한 마당에 현실성이 없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방문하자 가뜩이나 바닥에 붙어 있던 가능성은 수직으로 하락했다.
대관식을 위해 비오 9세 교황이 파리를 방문한 것이었다.
***
“교황 성하.”
“고개를 드십시오, 황제가 될 분이시여.”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을 이끄는 교황 앞에 예를 갖춘 나는 고개를 들어 교황을 바라보았다.
“황태자 전하의 신앙심에 대해서는 충분히 느낀 바 있습니다.”
“프랑스는 가톨릭의 장녀, 마지막 순간까지도 프랑스는 교황청을 수호할 것입니다.”
비오 9세, 자유주의적인 인물이었지만 교황에 즉위하면서 극렬 보수파로 탈바꿈했고, 14살의 어린 하녀가 어린 아이에게 세례를 못 받은 아이는 죽은 뒤 천국에 못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대교 집안의 아이에게 어설프게 세례를 주었다는 이유로 아이를 가족에서 떼어내어 강제로 가톨릭 신자로 키운 모르타라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
그는 한없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럴 만도 하긴 했다.
교황령 전부는 아니어도 로마를 뺏기고 바티칸 경내에 칩거하던 입장에서 프랑스가 개입해 모든 상황을 원상복귀시켰으니 내가 이뻐 보일 만도 하지.
내가 바라던 바였다.
‘내가 그리던 구도를 완성하려면 어차피 이탈리아 왕국과는 적대 관계로 돌아서야 한다. 그럴 바에는 교황에게 눈도장을 화끈하게 찍어두는 게 낫지.’
교황의 지지를 얻는다는 것, 가톨릭 세가 강한 프랑스는 물론이고 오스트리아-헝가리, 남부 독일 등에서도 제법 먹혀들 거다.
“교황 성하께 제 미력한 도움이 보탬이 될 수 있었다면 기쁘겠습니다.”
뭐, 도움이 되긴 엄청 됐겠지, 그러니까 운을 띄워보자마자 버선발로 대관식을 집전해주겠다면서 파리까지 오신 거 아니겠나.
그러자 교황은 미소를 지었다.
“이번 일은 진정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행여 어떠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을 때, 이 늙은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돕겠습니다.”
“그렇다면 성하, 한 가지 부탁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무엇입니까?”
“합스부르크 황실과 다리를 놓아주셨으면 합니다. 비밀리에 말입니다.”
판을 뒤집을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