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보불전쟁(5)
베를린, 프로이센 왕궁.
“협상해야 합니다. 폐하.”
비스마르크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회의장은 침울했다.
“협상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파리 함락이 목전이라고 하지 않았나?”
“상황이 다릅니다. 프랑스인들은 아직도 결사항전하고 있고, 황제가 우리 손에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상황이 악화되고 있습니다.”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파리를 압박하면 황태자도 항복해서 전쟁이 끝나리라 여겼다. 해상봉쇄 때문에 파리를 공격해야 할 상황이 되었을 때도 파리를 뚫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판단 착오였다.
파리는 끝없이 프로이센의 피와 프랑스의 피로 물들고 있었고, 몰트케도 이런 전황에서 뾰족한 수를 낼 수 없었다.
사실 몰트케가 아니라 누구를 데려와도 이런 상황에서는 뾰족한 수가 없었으리라. 차라리 20세기나 21세기였으면 시가전을 대비한 교리나 무기체계가 있기나 하지 참호전에 뒤이은 시가전을 19세기에 체험하고 있는 몰트케의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리라.
심지어 진짜 문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를레앙 방면에서 프랑스의 대군이 북상 중입니다. 지방에서 급하게 끌어모은 병력과 해군 육전대로 판단되며, 이들은 파리를 포위할 작정입니다. 안에 들어 있는 우리 군의 주력도 함께 말입니다. 이 병력을 막으려면 메츠와 스당 방면의 군단을 빼내야 하지만, 그 군단들은 현재 메츠와 스당에 갇힌 프랑스 정규군의 탈출을 막는 누름돌 역할이기도 합니다.”
즉, 엄밀히 말해서 이들은 예비대가 아니다, 전투중만 아닐 뿐.
“동원된 예비군을 모아서 그쪽으로 보낸다면 어떤가?”
“시간이 걸립니다.”
“군사적인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지금 파리에 황태자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 자체입니다. 만일 우리 군과의 전투 중 황태자가 사망하기라도 하면 둘 중 하나입니다. 프랑스가 멸망하거나, 프로이센이 멸망하거나.”
설령 살아남는다고 할지라도, 그 뒤의 프로이센은 성인 남성 인구가 급감한 나머지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도 벌벌 기어야 할 정도의 약소국이 되어 있으리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여전히 지난 전쟁과 관련해 이를 갈고 있다는 걸 뻔히 아는 입장에서 프랑스와 뒤 없는 충돌을 벌이는 것은 자멸의 길이라는 걸 모를 만큼 빌헬름 1세도, 비스마르크도 어리석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이어야 한다.
아직 병력이 남아 있을 때, 아직 그들의 프랑스의 영토를 점령하고 있을 때, 아직 그들이 협상을 강요할 힘이 남아 있을 때.
더 많은 것을 강요하려다가는 모든 걸 잃어버릴 수도 있으며, 지금이 뭘로 보나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극대화된 시점이었다.
***
파리의 총성은 잠시 멎었다.
영국이 중재에 나서 사상자 수습과 민간인 대피를 위해서라도 일주일 간의 교전 중지를 제안했고, 양측은 이를 받아들였다.
프랑스는 어차피 시간을 버는 게 목적이었고, 시간을 더 줄수록 남부에서 더 많은 병력이 올라올 걸 알았기에, 프로이센은 어떻게든 협상 테이블을 마련할 계기가 필요했기에 그러했다.
그리고, 헬무트 폰 몰트케가 직접 튈르리 궁으로 향했다.
“나폴레옹 4세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타국의 군주에 대한 예우를 갖춘 몰트케는 자리에 앉았다.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몰트케 장군, 내가 그대를 체포하거나 사살하려 들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는데 어떻게 적지에 들어올 생각을 하셨소?”
“폐하께서는 그러지 않으실 거잖습니까.”
“어찌 보면 귀공은 내 선친의 원수이오만.”
“.....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는 절대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이해하고 있소, 당신들이 아버지를 고의로 돌아가시게 만들고 싶었을 리가 없으니.”
나는 커피 잔에는 손을 대지 않고 몰트케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어째서 오셨소?”
“본국에서 이번 휴전을 기회로 해서 프랑스 제국과 본국 간의 종전을 논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종전이라.”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지금 우리가 종전을 논할 단계라 생각하시오? 우리가 종전을 논하려면 파리에 귀국의 검독수리가 내걸리거나, 최소한 이 프랑스의 영토에서 단 한 명도 남김없이 귀국의 병사들을 쫓아내든 죽이든 한 뒤가 되어야 맞지 않겠소?”
“이미 충분히 많은 피가 흐르지 않았습니까.”
몰트케는 밖을 바라보라는 듯 손짓했다.
“수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대학에서 청춘을 노래해야 할 학생들, 한 가정의 가장,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들들이.....”
“그건 전쟁을 하고 싶어서 뒷공작을 시도했던 귀국의 수상이 책임을 져야 할 요소가 아닌가 싶소만. 그렇소, 아름다운 도시 파리는 파괴되었소, 이번 전쟁은 오롯이 우리의 영토에서 진행되었고, 대부분의 사상자도 우리의 병사와 민간인들이지, 그렇다면 우리 역시 귀국의 병사와 민간인들을 사상자로 만들고 베를린을 파리만큼 초토화시켜 주어야 수지가 맞지 않겠소?”
“자신감이 넘치시는군요. 하지만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하십니까? 우리 역시 마지막까지 항전할 텐데 말입니다. 게다가 우리뿐이 아닙니다. 북독일 연방과 바이에른을 비롯한, 오스트리아를 뺀 독일계 국가 전체를 상대하셔야겠죠. 자신 있으십니까?”
“자비를 베푼다는 말투는 그만두시오, 내가 귀공보다 어리기는 하지만 사리분별도 못 하는 어린애는 아니니까. 나 역시 나면서부터 황태자였소, 그리고 적어도 당신만큼은 현재 전황을 명확하게 알고 있지.”
“........”
“지금 예비대가 부족하잖소, 오합지졸 국민위병들이 생각보다 열심히 싸우며 결사항전하느라 파리에서 소모가 크고, 후방의 예비대까지 하면야 우리보다 많지만, 그 병력들이 빠져나오면 스당과 메츠 등에서 요새에 틀어박혀 포위당해 있는 우리 군이 당신네들의 뒤를 쳐도 막을 수단이 사라지지, 무엇보다 해로가 틀어막혀서 슬슬 당신네들도 음식 가짓수가 줄어들고 있는 걸 느낄 때가 되지 않았소? 해안포 때문에 항구를 박살내기는 어려워도 당신들 배가 항구 밖으로 나갈 엄두를 못 내게 해주는 건 어렵지 않지. 짧은 시간 내에 이 시가전에서 승리할 해법을 찾아내 파리를 무너트리거나, 아니면 협상 외에 전쟁을 끝낼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것 아니오?”
“우리에게는 여전히 군대가 많습니다. 귀측이 대대적인 강도 높은 징병을 실시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아측 역시 충분한 예비군이 있고, 더 나아가 프랑스의 국민위병보다도 정예병력이죠, 파리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오실 거라면 모를까 국토를 탈환하고 더 나아가 라인을 향해 진격하고 싶으시다면 통상전도 벌이셔야 할 텐데, 과연 숫적으로 압도적이지도 않은 오합지졸만으로 승리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이번엔 내 말문이 막혔다.
그래, 아직 프로이센은 예비대가 많다. 그리고 그 동원체계 역시 압도적이다.
프랑스에서 아무리 많은 병력을 징병한다 한들, 그 병력을 제때 배치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전쟁의 기본은 적 접면에 적보다 더 많은 병력을 밀어넣는 것, 아무리 많은 병력이 있들 프랑스의 처참한 철도운용체계를 생각해 보면, 그리고 프랑스군 지휘부와 프로이센 지휘부의 수준 차이를 감안해 보면 어떻게 방어면 모를까 반격이 가능하긴 할지에 의문 부호가 찍힐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병력의 질과 무기까지 생각해보면 더 암울해지고. 안 그래도 크루프 대포 때문에 포병 화력에서 밀려서 혈압올라 죽겠는데.
“게다가 프랑스와 프로이센이 게속 싸우면 가장 이득을 보는 게 누구일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결정타다.
프랑스가 대대적인 동원을 시작했다는 건, 곧 나라의 기둥뿌리를 뽑고 있다는 의미를 고풍스럽게 말하는 거다.
심지어 프랑스는 독일에 비해 인구성장력도 계속 뒤처지는 판이니 문제가 더 심하다. 이번에 어떻게 프로이센을 때려부순다고 해도 그 뒤에 한동안 유럽의 병자 신세가 되어 골골대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프로이센도 한동안 비슷한 꼴이겠지만.... 유럽에 우리 둘만 있는 게 아니다.
스페인이야 반병신 다 됐으니 넘어가고, 영국,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제국. 굵직한 애들만 세 봐도 그 정도다.
“하지만 우리 둘 다 너덜너덜해지면 제일 먼저 표적이 될 게 누구라고 생각하나? 본국은 아닐 것 같네만.”
이것도 사실, 이미 내전으로 너덜너덜해진 환자 신세인 스페인을 빼면 프랑스가 경계할 만한 상대는 영국과 프로이센 뿐이다. 러시아는 너무 멀고, 이탈리아? 걔들 아직 통일도 완수 제대로 못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프로이센이 뻗으면? 영국만 경계하면 끝인데, 영국 육군으로는 아무리 우리 프랑스가 골병이 들었다고 한들 단독으로는 승전을 거둘 수 없다. 주변 동맹국의 지원이 필요한데... 누구랑? 프로이센 조지느라 바쁠 오스트리아-헝가리? 그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조져질 상황이 된 프로이센? 그레이트 게임 중인 러시아? 반쯤 망한 스페인? 아니면 아직 혼란이 가시지 않은 이탈리아? 네덜란드나 스위스 같은 소국따리는 애초에 프랑스랑 싸울 체급이 아니고.
물론 우리도 계속 소모전 벌이면서 싸우자면 쫄리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프로이센이 엿 먹는 정도가 우리가 엿 먹는 것보다 더하다.
“그렇다면 계속 전쟁을 하시겠습니까?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필요하다면 아국은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러시아든 영국이든 간에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귀국의 편을 들어줄 국가는 현재 없습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아픈 데 찌르네, 매너없게.
여기서 나폴레옹 3세 욕 한 번 더 하고 넘어가자면, 저 양반의 막장외교 때문에 유럽에 아군이 없다는 정도만 해두겠다.
“...... 조건은 뭐요?”
“알자스-로렌의 할양, 이외의 조건은 없습니다.”
“지랄하지 마시오.”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어떠한 종류의 영토 할양이나 배상도 있을 수 없소, 그리고 이번 전쟁 중에 이탈리아 왕국이 프랑스군이 보호하던 교황령을 침공해 병합했는데, 마땅히 원상복귀하도록 이탈리아 왕국에 공동으로 압력을 행사해야 할 거요. 이탈리아 왕국을 부추긴 것도 귀국의 재상으로 아는데 도로 뱉어내게 하는 것도 쉽겠지. 대신 스페인 왕위 문제에 대해서는 프로이센 국왕이 스페인 왕을 겸하는 것만 아니면 더 이상 상관하지 않겠소.”
배상도, 영토 할양도 없다. 조건 없이 전쟁 전으로 돌아가자. 대신 전쟁의 직접적 방아쇠가 된 스페인 왕위 문제는 손 떼겠다.
물론 배상금을 요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전쟁 내내 쳐맞다가 파리랑 스당만 간신히 지키고, 무엇보다 계속 전쟁을 해서 이길 자신도 없다. 만약 저 몰트케가 어떻게 해서 지방에서 모집된 의용군을 각개격파해버리면 불리해지는 건 우리다. 실제로 개병신 같은 철도망과 낮은 숙련도 때문에 그럴 가능성도 제법 있고.
“본국에 일단 폐하의 제안을 보고하겠습니다. 부디 합의에 이를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