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보불전쟁(4)
황제가 죽었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프로이센 내각은 죽음 같은 침묵에 빠졌다.
"공세를 개시해야 합니다. 파리를 최대한 빠르게 무너트리고 종전해버리는 것 외에 방법이 없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히 아군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전 병력을 동원하면 파리의 방어선을 뚫어낼 수 있을 겁니다."
"가능한가?"
"..... 가능하지 못하면, 전부 끝장입니다."
***
알베르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특징이라면 파리에 산다는 것일까?
그저 아무런 특징도 없는 소년.
그는 올해 16살이라는 황태자의 연설을 듣고 국민위병에 합류했다. 황태자가 마지막 순간까지 파리를 지키겠다고 했을 때, 그는 직감했다.
이 전장에서 내뺀다면 프랑스에서 다시는 얼굴을 들고 살 수 없으리라고. 누구도 뭐라 하지 않더라도 그가 부끄러워서 자살하고 말았을지도 몰랐다.
문제는, 파리의 창고에는 모든 국민위병에게 나눠줄 만큼 넉넉한 보병용 소총이 없었기에, 말을 타 본적이 없음에도 그는 희한하게 생긴 기병총을 받았다.
다행히 그가 배운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약간 견착하는 방법이 달라졌을 뿐, 이 소총을 지상에서 사용하는 법은 보병총을 쓰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했던 행진이나 분열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총을 쏘는 법을 알려준 다음에는 삽질, 삽질, 삽질이었다.
장교들은 포탄에 맞아 프로이센군의 면상을 보기도 전에 배때지가 터지고 싶다면 빨리 파라고 악을 써 댔고, 황태자까지 직접 나와서 곡괭이질을 하려다가 질겁한 근위대원들이 황태자를 끌어내 황궁으로 돌려보내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아무튼 간에 황태자까지 끌려나가기 전까지 몇 삽이긴 했지만 아무튼 간에 삽질을 해댄 걸 생각하면 병사들이 구시렁거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열심히 삽을 푼 뒤에는 그 안에 들어가 앉아 있어야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포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멍하니 정신줄을 놓고 있던 알베르의 뒷덜미를 한 노병이 낚아채 참호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포격을 먼저 시작한 건 프로이센군이었다.
프랑스보다도 우위에 있는, 아니, 명백히 이 시기 세계 최강이라 할 수 있는 프로이센의 포병대가 쏟아붓는 사격에 국민위병들이 열심히 쌓아둔 장애물들과 지뢰들이 폭발하거나 파괴되었다.
그러나 수십 년 뒤의 1차 세계대전에서도 증명되었듯이, 이 정도 포격은 억수로 재수 없게도 포탄이 참호 안에 직격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참호를 파고 들어앉은 병사들을 살상할 수 없었다.
-콰앙! 콰콰쾅! 콰쾅!
포성이 끊임없이 울리고, 방어선 자체를 포격으로만 쓸어버리겠다는 듯이 방어선 전역에 포탄을 쏟아부은 프로이센군은 병력을 전진시켰다.
“오 명예 드높은 독일이여, 충성스러운 성스러운 국가여.”
“동쪽과 서쪽에서 명예의 광휘가 늘 새롭게 빛나라!”
“그대는 적의 힘과 기만을 향해 그대의 굳건한 산처럼 서 있고, 둥지에서 날아가는 독수리처럼 그대의 넋이 날아가네!”
“견뎌라! 견뎌라! 깃발이 펄럭이도록 높이 세워라! 그에게 보여주어라! 적에게 보여주어라! 우리가 충실히 단결한다는 것을! 우리가 우리의 옛 힘을 시험해 본다는 것을!”
“함성이 우리를 향해 미쳐 날뛴다면, 폭풍의 노호 속에서 견뎌라! 폭풍의 노호 속에서 견뎌라!”
승리를 확신하며 군가를 부르며 행진해오는 프로이센군을 마중하는 프랑스군 역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일어나라 조국의 아이들아! 영광의 날이 왔도다!”
“우리에 대항하여 압제자의 피 묻은 깃발이 일어났도다!”
“들리는가! 저 들판의 흉폭한 병사들의 고함소리가! 놈들이 우리의 지척까지 와서 우리의 아들과 아내의 목을 베려 한다!”
“무기를 들라 시민들이여! 대열을 갖추라! 전진하라! 전진하라! 놈들의 더러운 피로 우리의 밭고랑을 적시도록!”
그랬다.
저 프로이센의 피 묻은 압제자의 깃발들이 다가오고 있다. 정말 지척까지 왔다.
저들에게 패배하면, 어떤 비참한 운명이 우리를 기다리겠는가. 그걸 막기 위해 우리들이, 시민병들이 모여서 맞서 싸울 준비를 갖춘 게 아니던가?
목청이 떨어져라 노래를 부른 알베르는 포격이 그치고 다른 병사들이 사격 위치로 이동하자 곧장 그들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포성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후방이었다.
위치를 숨기고 있던 프랑스군의 포탄이 일제히 프로이센군을 향해 퍼부어졌다. 고폭탄과 산탄의 집중포격이 쏟아지고, 매복하고 있던 미트라예즈가 미친 듯이 불을 뿜었다.
성형 요새의 모양을 따서 복잡하게 설정된 참호선의 첨점 부분에 집중적으로 배치된 미트라예즈는 장전된 총알을 미친 듯이 토해냈다.
빗발치는 탄환을 간신히 뚫어낸 프로이센군의 선두가 선두 참호로 뛰어들고, 산탄총과 흉갑, 몽둥이와 권총 등으로 중무장한 참호부대가 그들을 화끈하게 환영해주었다.
총검도 집어치우고 야전삽으로 가장 먼저 다가온 적병의 목에 삽을 박아준 한 병사는 곧장 산탄총을 들고 참호에 뛰어든 적병들에게 산탄총을 마구 쏘아댔다.
2선과 3선의 참호들에서도 탄환이 쏟아졌다. 철조망에 걸린 적들은 좋은 표적이었고, 지뢰를 밟아 기동력이 상실된 적, 거꾸로 꽃힌 총검들이 숨겨진 함정에 떨어진 프로이센군들은 고통스러워하며 죽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 위로 포탄이 쏟아졌다. 프랑스군의 포탄이었다.
애초에 1선 참호가 넘어갈 것 같으면 포탄을 쏴갈겨버리도록 이미 좌표 다 따놓고 조준하고 있었기에 명령만 떨어지면 돌파구 자체에 불의 비를 쏟아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던 포병들은 몇몇 아직도 살아 있던 프랑스군과 돌파해온 프로이센군을 구분 없이 쓸어버렸다.
결국 참호선이 자기들 쪽에서 공격하기는 어렵지만 2선과 3선 참호에서는 상대적으로 공격하기 쉽도록 구성되었다는 자명한 진리를 깨달은 프로이센군의 선두가 피해를 감당하지 못하고 물러나자 다시 프랑스군이 시체더미가 된 참호를 되찾았다.
“2소대! 1선 참호로 이동한다! 움직여!”
총을 몇 발 쏘기는 했지만, 아군이 있거나 없거나 포탄을 쏟아붓는 포병과, 1선 참호에서 벌어진 처참한 육박전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알베르는 그대로 얼어 있었다.
“너! 가라고!”
“예, 예?”
“마지막으로 말한다, 저 앞으로 가!”
으르렁거리며 말하는 장교의 고함에 질겁한 알베르는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예!”
***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프로이센군의 총사령관인 몰트케는 충분히 명장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가 지금까지의 전투와 프랑스군의 방어전술이 뭔가 다르다는 걸 눈치채기까지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공격할 만한 지점에는 모조리 미트라예즈를 매복시켰고, 지뢰에..... 저건 대체 뭐지?”
윤형 철조망을 생전 처음 본 몰트케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시기 유럽의 상식으로는 일단 철조망은 ‘축산업용’ 물건이었다.
아니, 일단 철조망이 많이 퍼지지도 않았기는 하지만, 일단 사용한다고 해도 군에서 사용된 적은 단 한번도 없이 주로 축산업을 하는 사람들이 가축들이 도망 못 가게 설치하는 정도였다, 혹은 방범용으로 가끔 설치하는 염가형 울타리라는 인식이 더 컸다.
원 역사에서조차 군에서 처음 사용된 건 1895년 포르투갈군이 기지 방어용으로 사용한 게 처음이었으니 오죽할까.
그나마도 프랑스 밖으로는 거의 퍼지지도 않았던 데다, 윤형 철조망은 아예 외부에 판매하지도 않다가 이번에야 첫 데뷔를 한 물건이었다.
“기병들의 활동을 막으려고 만든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피해를 늘리려는 건지 작은 칼날을 군데군데 달아놨더군요, 저게 포격에도 잘 날아가지 않아서 기병들을 투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럼 보병만 꾸역꾸역 밀어넣으라는 건가, 허.”
몰트케는 한 방향을 가리켰다.
“열기구를 띄워서 참호가 삐죽하게 튀어나온 부분들을 확인하고, 그 모서리 부분을 포병대로 집중 타격하라고 해, 거기 직사포든 미트라예즈든 죄다 숨어 있을 거다.”
“예? 어떻게 확인도 안 하시고.....”
“나라면 그런다.”
“알겠습니다!”
몰트케는 전선을 노려보았다.
‘방어를 총지휘하는 게 황태자라고 했던가.’
몰트케는 중얼거렸다.
“이제 고작 열여섯 살이라는데, 자기 종조부를 닮은 모양이군. 제 아버지와는 다르게.”
***
여러 겹으로 된 참호선은 프로이센군에게 엄청난 희생을 강요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군은 며칠 가지 않아 이 방어선의 약점을 알아냈다.
직사포로 사용되는 구식 대포든 볼리 건이든 쉽게 실어나를 수 있는 물건이 아니고, 돌격하는 병사들을 갈아버리려면 적의 측면에서 갈기는 게 제일 효율적이다.
산탄을 갈기든, 기관총 대용으로 쓰는 미트라예즈든 간에 맥심 같은 물건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오래 전 교본에서 읽은 중대전술기지를 생각해냈다.
화력이 약해빠지고 75mm 구경의, 21세기 기준 구닥다리 화포가 주력인 데다 막말로 현대전 기준 대대급 중화력도 존재하지 않는 병력이 징그럽게 많이 모인 상황에서는 이런 전술이 유효할 수 있었다.
물론 여러 문제가 있다. 우리가 지켜야 할 면적은 넓으니 고스란히 같은 전술을 적용하기는 불가능하고, 기관총은커녕 자동화기 비스무리한 게 결함이 많다 못해 개틀링보다 못하다고밖에 볼 수 없는 미트라예즈밖에 없는 등의 문제다.
결국 나는 곡사포는 최대한 많은 포병화력을 제공해줄 수 있는 위치에 고정배치하고, 미트라예즈와 산탄을 장전한 직사포들을 여럿 방어선의 꼭짓점, 돌출부 부분에 배치해서 다가오는 적들에게 최대한 많은 피를 보는 걸 강요했다.
그러다 보니 그냥 파리 전체를 둘러싼 방어선에 돌출부들이 툭툭 튀어나와서 사격을 가하게끔 축성되고, 포대가 그 바로 뒤에 배치된 형국이 되어 있었다.
그걸 빠르게 학습한 프로이센군은 아예 주 화력을 제공하는 돌출부들에 우선적으로 집중포격을 가하는 전술을 펼쳤다. 운용병들이 사상당하지 않더라도 탄약을 날려버리든 포를 파괴하든 해서 돌격하면서 입는 피해를 최대한 줄이겠다는 판단이었고, 우리는 거기에 맞서 포격당하는 방향에 최대한 많은 예비대를 밀어넣는 걸로 대응했다.
그 시점부터 우리 측의 피해도 급증하기 시작했다.
밀어붙이고, 밀어내고, 팽팽한 싸움 끝에 어느 순간 한계가 왔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한계가 온 건 우리 쪽이 더 빨랐고, 프로이센군은 파리 외곽 방어선을 돌파했다.
외곽 방어선의 붕괴를 막을 수 없게 된 프랑스군은 시내로 후퇴했고, 그 다음부터 벌어진 건 시가전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서도 저들은 싸우고, 죽고 있었다.
제대로 훈련받지 못하고 무기도 부족한 국민위병들은 최정예 프로이센군에 맞서 아주 효율적으로 ‘소모’될 예정이었다.
“파리를 벗어나려고 하는 징집 연령대의 남성은 즉결 처분해도 좋다! 시민들은 대피시키더라도 병사들은 마지막까지 싸워야 한다. 짐 역시 이곳에서 마지막을 맞을 것이다!”
“모든 건물에 소규모라도 병력을 배치해라, 모든 병력은 적과 최대한 가까운 거리에서 교전해야 한다, 우리의 포병화력보다 저들의 포병화력이 더 우수하니, 우리는 저들이 그 화력을 잘 사용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중화기만 못 쓰게 하면 보병전에서는 해볼 만 하다. 그렇게 적의 희생을 늘리면서 시간을 번다.
남부에서 병력을 더 모아오라면서 내보낸 루이 녀석이 증원군을 이끌고 올 때까지.
만일 그때까지 전투가 지속된다면, 파리 공격에 눈이 먼 적 병력을 포위해서 섬멸한다. 그 전에 후퇴한다고 해도 초반의 흐름을 완전히 상실한 프로이센군이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환경인 프랑스 본토에서 오래 싸우기는 어려울 터, 알자스-로렌으로 후퇴하는 게 최선일 것이다.
그 전에 파리가 무너진다면 당연히 지는 거고. 반대로 우리 단독으로 프로이센군을 몰아낸다면.... 가능하리라 생각하지 않지만 그게 된다면 최상이다. 전혀 지치지 않아 재정비가 필요없는 후속병력들과 함께 반격을 수행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 할 수 있는 건.....
‘버틴다, 무조건 버틴다.’
그러기 위해서는 탈출할 수도 없다. 저들은 나를 믿고 싸우고 있기에.
내가 파리에서 벗어난다면, 저들도 무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