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보불전쟁(2)
-우리는 알맹이 없는 말의 유희를 버리고 사상의 본질을 탐구하며 비교와 추리로써 사태를 밝혀 보자.....
나는 두꺼운 원고를 바라보았다.
쓴웃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내가 써놓은 글은 빼도 박도 못하는 선동용 글이었다.
시온 의정서.
물론 원 역사의 그것과는 내용이 제법 다르지만 골자는 같다.
‘이건 전부 유대인 탓이다.’
유대인들이 우리 배후에서 칼로 찔렀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는 거다. 혹은 패배한 거다.
그래, 추악한 짓거리다.
우리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는 거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나는 내가 시온 의정서를 직접 썼다는 유일한 증거인 원본 원고를 벽난로에 집어넣었다.
불이 붙은 종이들은 활활 타올랐다.
이 시온 의정서는 영어본으로 영국에서 출판되고 있다. 이미, 익명으로.
제3국의 권위를 빌려 이게 우리가 조작한 문서가 아니라는 눈속임을 시도하는 셈이었고, 엠스 전보 사건에서 비스마르크가 한 짓과 다르지도 않았다.
자괴감이 들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미안하게 됐다.’
나중에 어디 동아프리카에라도 살 공간을 만들어줄 테니 그게 충분한 보상이 되기를.
물론 몇십 년 뒤에 어차피 러시아에서 반황실 여론을 가라앉히고 모든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돌리기 위해 나올 책이니, 내가 조금 먼저 써먹는다고 해서 문제는 없겠지.
“전하, 파리 주변 방어선 구축이 완료되었습니다.”
“국민위병들의 소집은 어찌되었나? 그리고 민병대와 병력 확충은?”
“모두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해군은 이미 북독일 연방 전체의 해운을 봉쇄하고 있다, 원 역사보다 효율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해군의 보고에 따르면 북독일 연방으로 드나들 수 있는 배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모양이다.
그러니 파리만, 파리만 지켜내면 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 역시 파리를 지킬 것이다. 루이는 오를레앙에 도착했나?”
“그렇습니다. 그런데......”
“난 이곳에서 죽거나, 승리자의 관을 쓸 것이다. 아버지께서 스당에서 저항하고 계시지만, 그렇다고 한들 영원히 버틸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나는, 황태자는 군복을 차려입고 발코니로 나아갔다.
창문 밖에 수많은 병사들이 모여 있었다.
“나의 전우들이여!”
발코니에 나가자마자 나는 외쳤다.
“나의 종조부가 그러하셨듯이, 나는 지금 그대들에게 한 가지를 부탁하고자 한다.”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단 한번만 더, 이 나라를 위해 싸워다오! 저 프로이센의 야만인들이 우리 조국을 짓밟지 못하도록!”
나는 외쳤다.
“저들은 우리의 영토를 노린다, 저들은 우리의 문화와 민족을 노리고, 마침내 우리를 무릎꿇리고자 한다! 저들은 그대들의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짓밟고자 한다! 그렇게 놔둬야 하겠는가! 저 전제군주들의 총칼 앞에 그대의 아내와 자식들이 살아가는 것을 원하는가!”
“아닙니다!”
“전우들이여! 형제들이여! 우리는 파리를 지킬 것이다, 설령 배후에서 중상을 입은 나머지 스당이 무너지더라도 파리는! 내가 살아 있는 한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한 명이 쓰러질 때까지 파리를 지킬 것이다, 나 역시 도망치지 않겠다, 나는 귀관들과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할 것이다! 저들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내 시체를 황궁에서 끌어내야 할 것이다, 나, 외젠 보나파르트는 내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프랑스를 지키고, 그 정신을 지켜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신과 우리 가문의 명예 앞에 맹세하건대 누구든지 내가 황궁에서 도망치는 것을 보거든 내 가슴을 쏘아라!”
“황태자 전하 만세!”
“프랑스 만세!”
“프랑스 만세!”
열광적인 환호가 이어졌다.
나는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들었다.
“우리는 결코 패배하지 않으리라! 비바 라 프랑스!”
원 역사에서도 프로이센은 파리에 정면으로 들이박은 적이 없다. 포위해서 굶겨죽였지, 내 예상이 맞아들어가서 프로이센이 원 역사보다 잘 진행된 해상봉쇄 때문에 말라죽어가고 있다면 절대로 그런 전술을 쓸 수가 없다. 군이 지연전을 벌이는 동안 후방이 무너지고 있을 테니까.
그걸 모를 몰트케가 아니니까 파리에 대한 정면 공격을 시도하겠지.
하지만 그 프로이센군조차도 정면 공격을 꺼릴 만큼 파리의 방어선은 결코 취약하지 않았다.
“앙리 대령, 내 권한으로 지금 창고에 쌓여 있는 모든 무기, 스당 방어군에 가야 할 무기까지 전부 국민위병에 분배하시오, 어차피 스당으로 보내지도 못할 테니까.”
포위된 부대에 항공기도 없이 어떻게 보급품을 갖다줘, 게다가 철도 운용 능력이 뒤떨어져서 제때 가져다줄 능력도 없다. 파리 방어나 강화하는 편이 낫지.
“파리 외곽에 있는 철조망도 전부 징발하든 가져오든 해서 참호와 함께 사용해서 파리 외곽 방어선을 추가 보강하고, 지뢰도 구할 수 있는 거 전부 매설하시오.”
기관총은 없지만 참호는 기관총 없다고 못 쓰는 것도 아니다. 특히 포격을 막을 때는 참호가 유용한데, 지금 프로이센군의 화포는 명백히 프랑스군보다 우월하다.
대신 개인화기 화력은 프랑스군이 프로이센보다 나으니, 거기에 희망을 걸어 봐야겠지.
파리 외곽 방어선이 뚫리면 그때는 시가전이고, 시가전도 지면.... 그냥 게임 끝이지 뭐. 2차대전 때도 입증된 사실이지만 프랑스는 파리만 뺏기면 끝이다.
장기전에 대비해 식량도 비축해야겠지만, 파리가 대도시인 이상 한계도 명확하니 어떻게든 상대가 단기결전을 하게 만들어서, 최대한 격렬한 소모전을 벌이게 만들어야 한다.
프로이센군이 공세종말점에 도달하게 될 정도의 피해만 입혀도 우리의 승리다.
물론 원 역사에서는 프로이센의 공세종말점은 파리 정도가 아니었지만, 그건 우리가 얼마나 잘 싸우냐에 따라 달렸을 뿐이다.
***
스당, 프랑스.
프로이센 왕국 육군참모총장 대(大) 몰트케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여러 차례의 기병대 공격은 전부 격퇴되었다. 그런데도 프랑스군은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다.
맹포격을 뒤집어쓰면서도,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도 저들은 견뎌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본국에서 들어온 소식은 좋지 않았다.
“해상봉쇄......”
물론 프로이센이 프랑스의 해상봉쇄 좀 당한다고 모든 수출입이 끊기지는 않는다, 당장 러시아를 비롯해 국경을 마주한 국가들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해상의 수출입이 원활하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프로이센을 동맥경화에 걸리게 하기는 충분했다.
“수상께서는 전쟁을 너무 오래 끌 수는 없다고, 최대한 빨리 스당을 함락시키고 파리로 갈 것을 요구하시고 계십니다.”
“불가능하네.”
몰트케는 한숨을 쉬었다.
“누구는 그걸 몰라서 이러는 줄 아는가? 스당 요새에는 예상보다 비축물자가 많았고, 프랑스군 역시 항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결사항전 중이네, 저런 요새를 떨어트리는 건 쉽지가 않아. 게다가 정보에 따르면 파리에도 별도의 방어선이 구축되고 있다는데,”
“나폴레옹 3세만 잡으면 됩니다. 나폴레옹 3세가 항복하면 파리 방어선과는 정면충돌할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나폴레옹 3세는 지금 스당에 있다. 즉 스당만 뚫어내면 이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몰트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세를 준비하게.”
***
외젠의 편지를 품에 넣은 나폴레옹 3세는 쓴웃음을 지었다.
“맹랑한 녀석.”
보나파르트 왕조를 유지하고 싶다면 항복만은 하지 말라고?
그래, 네 녀석의 바람대로, 항복만은 하지 않겠다.
독하게 버텨주겠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지만.
‘아들아.’
그 녀석의 목소리가 그를 자포자기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없이 조숙한 녀석, 하지만 그렇기에 시대가 너를 부르는 것인지도 모르지.’
만약 그의 역할이 필리포스와 같다면.
자신의 아들 알렉산더의 제국을 위해 그의 왕좌를 예비한 필리포스처럼 그의 제국을 예비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해주마.
-콰아앙! 콰쾅!
이제는 익숙해진 포격이 쏟아졌다, 흙먼지가 황제의 몸을 뒤덮고, 파편 몇 개가 그의 목덜미를 스쳐 피가 베어나오게 만들었다.
“공격준비사격이다. 전 병력 위치로! 움직여! 머저리들아!”
포탄과 초연이 온 땅을 뒤덮었다.
황제는 묵묵히 서서 전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백부는, 그리고 그의 26명의 원수들은, 그를 따랐던 병사들은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도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의 곁에 있는 이들은 그 누구도 두려워하고 있지 않았다. 탈출로를 찾기 위해 분투하다 전멸한 흉갑기병대도, 지금 이 순간에도 총을 들고 참호에서 버티고 있는 병사들도, 장교들도, 그리고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장교들도.
아니, 두려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두려움으로 인해 자포자기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들은 아직 희망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아우스터리츠가 재현되리라고 믿고 있었고,
오직 그만이 그걸 보려 하지 않고, 모든 게 끝났다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물론 그는 그의 백부가 아니다. 그는 전쟁영웅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은 그럴지도 모른다. 그리고, 파리의 모든 이가 그를 믿어주듯 황태자를 믿고 있었다.
그걸 깨닫게 되자, 홀가분했다. 본인의 권력을 위협하는 일이니만큼 예민하게 굴어야 하건만, 본인이 권력에 얼마나 집착했는지를 생각하면 이상할 만한 일이건만.
오히려 기꺼웠다. 누군가의 믿음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짐인지를 알기에,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내며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내고 있는 젊다 못해 어린 아들이 대견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에 그 역시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국민들을 실망시킬 수밖에 없더라도, 부하들에게 실망을 안겨줄 수밖에 없더라도.
자신의 아들에게만은 실망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우린 싸울 것이다, 후방에서 외젠의 지휘 하에 국민위병들이 조직되고 있고, 저들이 파리에서 프로이센 놈들의 공격을 막아낸 뒤에는 스당의 포위를 풀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저들이 계속해서 다급해지고 있는 게 보이지 않는가? 저들이 위기에 빠졌기에 그런 것이다! 이곳에 물자가 부족한가? 식량이 부족한가? 탄약이 부족한가? 오직 부족한 건 용기뿐이다! 프랑스의 건아들이여! 이곳이 우리의 무덤이 되리라는 각오로 싸워라! 그리하여 승리하라!”
나폴레옹 3세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인 연설을 통해 사기를 고양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할 수 없었다. 그 자신도 진심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설득력 있게 말할 자신이 없었기에,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의 아들이 있었으니까. 그 아이가 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프랑스의 건아들은 그들의 황제의 말을 믿고 전선을 지켰다.
어찌되었든, 그는 저들의 황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