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황태자(3)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며 한 소년을 바라보았다.
나보다 4살 어리다는 소년이자, 나와 대등한 위치에 있는 소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루돌프 황태자와 둘이 앉아 있지 기분이 영..... 꿀꿀했다.
루돌프는 황제가 되지 못한다. 사랑의 도피를 떠났다가 자살하고 마니까. 타살 정황도 있기는 하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나폴레옹 3세나 저 북쪽의 콩고의 학살자 같은 놈이 고통스럽게 죽는 건 자업자득이지만, 루돌프 황태자는 아니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것도 없이 주변 어른들이 총체적으로 미친 거나 다름없었다는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지.
황제인 부친은 집안에 전혀 관심이 없고, 할머니는 손자를 7살 때부터 학대에 가깝게 훈육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돌아봐주지 않고 여행이나 다니고 있고, 심지어 막내 여동생‘만’ 편애했다.
루돌프 황태자에게는 3명의 형제자매가 있었는데 첫째 조피는 요절했고, 결국 황태자가 의지할 수 있었던 건 2살 위의 누나 기젤라뿐이었다. 그마저도 어머니 씨시는 전혀 정을 주지 않고 기젤라를 1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결혼시켜버렸다. 그러면서도 막내딸은 원한다면 굴뚝 청소부와 결혼한다고 해도 지지해주겠다면서 일방적인 편애만을 보였다.
이 상황에서 안 삐뚤어지면 기적이지.
‘루돌프 황태자가 즉위한다면 나쁠 건 없지, 원 역사에서도 친프랑스적인 인물이었으니까, 문제는 루돌프 황태자가 즉위하든 자살하든 하기 전에 내가 폐위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일 거라는 거지만.’
입으로는 격식 있는 대화를 나누지만,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해야 빈에서 최대한의 이득을 얻어서 돌아갈 수 있을까?
딱 한 번만, 전쟁 딱 한 번만 이기면 되는데, 그게 어렵다. 시간도 없고. 주변인들은 무능하고. 상대는 전성기 프로이센이고.
아주 환상적이다. 외교적 고립이나 자초하는 망할 나폴레옹 3세 같으니.
***
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는 보고를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외젠 황태자와 루돌프, 그리고 기젤라가 제법 가까워진 것 같다고.”
“예, 그렇습니다. 폐하.”
프란츠 요제프는 객관적으로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가정에 관한 일은 드센 어머니에게 치여 자기 아내, 자기 자식, 자기 가정인데도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고, 시집살이의 스트레스로 인한 아내 씨시의 히스테리를 피해 바람을 피우기도 했다.
황태자의 교육에도 어머니에게 맡긴 채 손을 놓아버리긴 했지만, 그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외젠 황태자는 어린 천재로 소문이 자자하지, 발명가이기도 하고, 동시에 국내외적으로도 많은 지지와 인기를 얻는.”
외모도, 성격도, 프랑스인들이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황태자였다.
나폴레옹 3세의 인기가 폭락하는 것과 빈비례해 외젠의 인기는 높아만 갔으니, 외젠이 성인만 되면 나폴레옹 3세가 잽싸게 퇴위하는 게 프랑스인들이 바라는 그림이지 않을까.
사실 나폴레옹 3세가 외젠이 스물 정도 될 때까지 살 수는 있을지부터가 의문이긴 하지만.
“루돌프가 좋은 자극을 받았으면 좋겠군. 루돌프와는 4살 차이던가?”
“기젤라 황녀님보다는 2살 위, 루돌프 황태자 전하보다는 4살 위이십니다.”
“흐음........”
프란츠 요제프는 나폴레옹 3세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동생을 죽음으로 내몬 사람을 좋아할 수 있을 리가 있는가.
그러나 아버지에게도 알리지 않고 독단적으로 그 사건에 대해, 어떤 책임도 없음에도 자신의 양심을 따라 이곳에 찾아온 그 아들은 마음에 들었다.
‘어떻게 그런 아비에게서 저런 아들이 나왔는지.’
황제는 황태자에게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으며, 황제 스스로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 이 제국을 물려받을 황태자가, 가장 기대받는 다음 세대의 군주라는 프랑스의 황태자와 교류하면서 좋은 영향-그것이 호승심이든 뭐든-을 받기를 바라는 건 아버지로써 당연한 일이리라.
상념은 프로이센에 미쳤다.
빈 코앞까지 프로이센군이 몰려왔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그 굴욕감. 빌헬름 1세는 심지어 빈에서 개선식을 벌이겠다고까지 요구했다. 프로이센 내에서조차 반대가 많아 포기했다지만, 그 소식을 들은 프란츠 요제프는 분노가 하늘을 찌르다 못해 쓰러질 뻔했다.
지금 이 순간도 오스트리아의 밀사들은 러시아와 교류하면서 프로이센에 대한 복수를 준비하고 있다. 러시아 군부는 동의해도 영국과 프랑스를 경계한 정계가 동의하지 않아 일이 잘 진행되고 있지는 않다지만.
‘..... 가능성을 열어둬서 나쁠 건 없겠지.’
아무튼, 여러모로 오스트리아의 신경을 긁어놓은 황제를 보다가 저런 황태자를 보니 다르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직은 많이 이르지만.’
합스부르크의 황제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
빈 체류는 큰 성과를 내지는 못하고 끝났다.
얻은 성과가 있다면 역시 오스트리아의 프로이센에 대한 적개심은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된 정도일까? 사실 이건 이미 알고 있던 정보니 딱히 얻은 게 있다고 하기도 어렵네.
그냥 합스부르크에 내 이미지를 좋게 만드는 계기 정도를 성과로 봐야겠다. 애초에 뭔가 잃어버린 것도 딱히 없으니. 어디서 그랬더라?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공짜는 아니더라도 싼값으로 뭘 먹으려 했으니 입 안에 들어오는 게 별거 아니더라도 감내해야지 뭐.
그래도 루돌프 황태자는 마지막까지 내게 제법 친밀감을 보였으니 그건...... 루돌프 황태자가 황제가 된다면 모를까 그 전까지는 별로 도움 안 되는 카드지, 프란츠 요제프는 1차대전까지도 멀쩡히 살아있었으니...... 진짜 도움 안 되네, 젠장, 왜 뛰어다니면서 긁어모은 게 죄다 부도수표인 거지.
‘3제동맹을 흔들 수만 있다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
음, 확실히, 한 가지는 오산이었던 듯 했다.
루돌프 황..... 그냥 루돌프라 부르겠다.
이 루돌프는 내가 만나고 간 뒤부터 미친 듯이 편지를 적어댔다.
아무리 그래도 황태자의 편지인데 씹을 수는 없어서 읽고 답장을 보내고, 그러다 보니까 이제는 좀 내밀한 사정도 알게 되고, 그렇게 됐다.
쌓이는 스트레스를 다 나한테 편지 보내는 걸로 풀기라도 하는지, 아주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다 나한테 적어서 보내고는 한다.
하긴 사는 게 엿같을 법도 하다. 어머니는 큰누나가 본인이 태어나기 전 2살의 나이로 요절하자 우울증에 걸려 아이들 양육에 관심을 끊어버렸고, 실질적으로 루돌프를 키운 조피 대공비는 누가 봐도 낙제점 할머니였다.
7살 때부터 군대식 생활을 하게 하고, 기상알람은 총소리, 눈밭 걷기, 찬물 끼얹기, 외진 곳에 버려두고 혼자서 길 찾게 하기 등등. 이게 가정교육인지 아동학대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다. 부모의 사랑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못 받으면서 저 꼬라지에 놓여있으니 정신병 안 걸리면 기적 아닐까?
뭐, 일단 나도 황태자인데 루돌프도 황태자니 그나마 대등하게 친구로 사귀어 볼 만한 상대라고 할 수도 있는 데다..... 뭣보다 눈치 안 보고 자기 가족 뒷담화를 할 만한 상대가 몇이나 있겠나.
‘그걸 외국 황태자에게 죄다 떠들어대는 것도 딱히 정상은 아닌 것 같다만.’
나는 이번 편지에 대해서는 또 뭐라고 답장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나한테 편지 쓴다고 하면 할머니가 그 시간만큼은 안 갈구기라도 하나...... 설득력 있는데?
<내 친구 오이겐에게>
<지난번 편지는 고맙게 받았어,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저놈의 지난번 편지가 뭔지 모르겠다. 내가 편지가 올 때마다 거기에 써서 답장을 보내기는 하는데 아무리 시간차를 계산해봐도 저번에 받은 편지를 받고 나서 답장을 보내는 게 아닌 것 같거든.
나한테 편지 보내는 게 본인의 의지가 아니거나 편지를 쓰는 것 자체가 목적일 가능성이 높다는 심증에 한 획이 더해지는 셈이었다.
진지하게 개소리들만 잔뜩 적어서 편지를 보내보고 뭐라고 답장이 오는지 한 번 지켜보고 싶었지만, 그리고 상대가 황태자만 아니었으면 진짜로 보내봤을 거다.
편지 내용의 한 9할은 교관이 자기를 어떻게 굴렸는지, 어머니가 얼마나 자기에게 무관심한지, 누나 기젤라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등이고, 내가 보낸 편지에 대한 답은 별로 없었다.
그게 가장 중요했는데 말이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프랑스 제국의 동맹 가능성. 더 나아가 프랑스 제국-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러시아 제국의 삼각동맹.
사실상의 3제 동맹의 붕괴 가능성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프로이센에 복수하기 위해 발칸을 포기할 의사가 있고, 러시아 제국은 발칸이 갖고는 싶은데 영국과 프랑스가 신경쓰여서 2차 크림전쟁을 우려해서라도 덥석 받기 어려운 상황이다.
여기서 우리 프랑스가 ‘우리는 발칸을 러시아가 갖든 말든 절대 개입하지 않을 것임’이라고 선언해버리면 충분히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 문제라면 난 아직 황제가 아니라는 거다.
그렇기에 루돌프를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비밀동맹 의사를 슬쩍 떠봤는데.... 이놈이 행간에 숨겨진 의미를 눈치 못 챈 모양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이야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때, 글자가 번진 게 눈에 들어왔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싶은 부분은 뇌리에서 지우면서 읽고 있었는데, 눈에 확 들어왔다.
‘운......건가?’
나는 번진 글씨를 바라보았다. 편지지도 약간 훼손되어 있었다.
<..... 기젤라 누님의 생일이 어제였어, 그런데 어머니도, 아버지도 안 계서서 우리 둘이서 축하했어, 누님이 네게 고맙다고 전해 달라더라, 직접 만났으면 더 좋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