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410화 (410/415)

에필로그. 즐겁게(2)

* * *

"그리고 가주님하고 아가씨하고, 둘째 도련님까지 정말 너무하십니다."

"…미안하네, 헤레스."

룬델이 먼저 일어났다.

"나도 노망이 든 건지, 이 속닥거림이 너무 즐거웠네."

잔잔하게 퍼진 룬델의 미소에 헤레스는 금세 마음이 약해졌다.

그동안 바빠 이렇게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걸 왜 모를까.

"나도 미안해, 헤레스. 셋째 무덤을 음, 제작한다는 말에 마음이 좀 앞섰어."

넬시아가 이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면목이 없어. 미안해."

멋쩍은 듯이 목덜미를 만지며 라르웬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자 헤레스의 시선은 하벨에게 향했다.

"도련님."

"…나 진짜 오래 참았어, 헤레스."

하벨은 조용히 일어나 룬델 뒤에 매달렸다.

"모든 인내심을 다 해서 참았는데, 더는 안 되겠더라."

솔직하게 털어놓은 그 말에 헤레스가 웃음이 터졌다.

애처롭게 짓는 저 표정은 꼭 고목에 매달린 새끼 다람쥐 같지 않던가.

하지만 헤레스가 왜 웃는지 모르기에 하벨은 눈동자만 굴렸다.

"괜찮아요. 오늘은 용서해드릴 테니, 어서 오세요."

"진… 짜 화를 안 낸다고?"

하벨은 고개를 조금 더 내밀며 헤레스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그녀는 화가 나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랬고, 오히려 뭔가 더 기뻐하고 있지 않던가.

'오늘 무슨 날인가?'

점점 더 의문으로 물들 때쯤에 갑자기 라르웬이 웃었다.

"…왜 웃으세요, 형님?"

"아. 아무것도 아니야."

라르웬이 괜찮은가 싶을 때, 넬시아가 웃음을 삼키고 있지 않은가.

웃음소리가 이어 룬델에게 들리자 하벨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저, 묶으려고 그러는 거죠?"

하벨은 드디어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생각해보면 저들이 정말 많이 참지 않았는가.

맨날 묶는다는 이야기를 또 얼마나 했던가. 수많은 목소리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이렇게 다 좋아하는 거 맞죠?"

[어……?]

아라가 뭔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

아라는 곧 무언가 알았다는 듯이 꼬리를 흔들자, 루룸과 세렌이 다가와 '쉬잇'하며 작게 말했다.

아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헤헤헤.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깜짝 놀라게 해주는 일이지 않은가.

발소리가 들렸다. 그림자가 길어지고 누군가 서 있었다.

"도련님. 진짜 이러실 겁니까?"

깊은 한숨을 담아 카샬이 하벨을 불렀다.

하벨의 시선이 빠르게 움직였다. 특히 카샬의 손으로 향했다.

"……?"

카샬은 무어라 말하려다 자신의 손을 보는 하벨의 시선에 의문을 가졌다.

"왜 제 손을 보십니까?"

카샬이 손을 뒤로 돌렸다.

"뭘 숨기는 거야?"

의심 어린 하벨의 시선에 카샬은 잠깐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고개를 가로젓고 있지 않던가.

"도련님."

"왜?"

"지금 도련님께서 그렇게 당당하게 나오실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제 말을 잘 들어주기로 약속한 걸로 기억합니다."

카샬이 싱긋 웃자 하벨은 고개를 푹 숙였다.

손을 내밀었다.

"…자, 묶어."

"예?"

"다들 나 잡으러 온 거고, 이번에는 못 나오게 묶을 셈이잖아? 막 여러 가지로 연구도 한다며."

[아니야, 대장! 누가 대장을 묶는다고 그래? 이건 말이야. …읍읍.]

루룸이 다급히 아라의 입을 막았다.

"말을 그렇게 나누기는 했지만, 누가 감히 도련님을 묶겠습니까?"

카샬이 피식 웃으며 내민 건 안대였다.

"이것만 쓰시면 됩니다."

안대를 보자 하벨은 무언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기분이 묘했다.

어렴풋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기억을 잡으며 하벨은 안대를 썼다.

"따라오시죠."

카샬이 안내했다.

어쩐지 눈을 가리니 키득거리는 물의 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려왔고, 정령들이 뭔가 신나 있는 게 느껴졌다.

아니, 다들 신이 나 있었다.

이 발걸음은 과거에서 보았던 것과 닮아있었다.

그때도 안대로 눈을 가리고 류아와 무날과 함께 걷지 않았던가.

―생일 축하합니다, 용왕님!

그 울림이 아직도 귓가에 퍼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잠깐만.'

하벨은 속으로 날짜를 세보았다.

숫자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헛바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카샬의 발걸음이 어쩐지 빨라졌고 점점 코를 유혹하는 달콤한 냄새가 났다.

'어쩐지 오늘따라 물이 조용하다 싶었는데.'

하벨은 벌써 실소가 나 계속 참았다.

왜 오늘따라 그렇게 틈이 많았는지를 알아버렸다.

'미치겠네, 진짜.'

자신의 나이가 몇 살인지 세어보려다가 접었다.

용왕이었을 적 과거는 이미 세계 밖으로 내던지지 않았던가.

그러니 하벨 티에라가 된 후로 센 숫자가 진짜였다.

"짠!"

칼리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경쾌했다.

"아직 아니에요."

속삭이는 레디나의 목소리에 칼리우스가 기겁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짜, 짠, 아니야! 짠, 취소야!"

[맞아, 짠 취소야!]

아라까지 허둥지둥거리자 하벨은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문득 기억이 났다.

―곧 100일이라면서요? 축하합니다.

세상에 모든 빈정이란, 빈정은 다 담은 것처럼 얄미운 류아의 말이.

그 표정도 얼마나 얄미웠던가.

그들이 다른 세계로 가도 외롭지 않았다.

신이 뭘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자신이 다른 세계로 가는 길이 열렸으니 전혀 외롭지 않았다.

이미 몰래 그들을 만나지 않았던가.

계속 웃던 하벨의 안대가 풀렸다.

칼리우스가 긴장한 표정으로 손에 쥔 폭죽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바로 보였다.

폭죽을 든 레디나와 정령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이에요!"

레디나는 활짝 웃었다.

"지, 지금?"

칼리우스가 놀라며 먼저 폭죽을 터트렸다.

뻥!

[으악!]

아라의 온몸이 크게 흔들렸다.

뻥!

레디나가 터트리고.

뻥!

페트리오가 뒤를 이으며 정령들이 힘차게 폭죽을 터트렸다.

자신이 생각하던 일반 폭죽이 아니라 마법이 하늘에서 조그맣게 터졌다.

빨갛고, 파랗고, 노랗고. 여러 색으로 퍼지는 빛깔에 하벨은 시선을 빼앗겼다.

아침임에도 유난히 눈에 띄었다.

이걸 만드느라 다들 그렇게 바빴을까.

"나 진짜, 이걸 진짜로 할 줄은 몰랐어."

하늘을 쳐다보던 하벨은 케이크에 꽂힌 100일이라는 숫자를 보자 또 웃음이 나고 말았다.

100일이라니.

이 겨울에 피어난 꽃을 보자 너무 정성스럽게 준비한 게 웃겼다. 다들 자신을 놀리느라 얼마나 신이 났을까.

"…나도 끌려왔소. 지금 너무 당황스럽소."

얼떨결에 같이 폭죽을 터트린 여하는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이 상황에 적응하지 못했다.

분명 급한 일이라고 했는데.

대체 왜 자신은 폭죽을 쥐고 있는지.

"100일 축하한단다, 하벨아. 네가 우리에게 와준 시간이구나."

룬델이 먼저 말을 꺼냈다.

"100일 축하해. 앞으로 1년, 5년, 쭉 축하할게."

넬시아가 활짝 웃었다.

"100일인데 이렇게 걸어 다니니 너무 훌륭한데? 축하해, 막내야."

놀리려다 살짝 노선을 튼 라르웬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100일 축하해, 대장!]

아라는 어디론가 날아갔다가 나무 위에 살짝 걸친 꽃 화관을 들고 하벨의 머리 위에 놓았다.

[이 몸하고 재미있게, 언제나, 오래오래 있어 줘!]

[그거 아라가 직접 만든 거니까, 영광으로 알라고.]

세렌이 부차적으로 설명했다.

[그리고 추, 추, 축하해.]

곧 고개를 획 돌렸다.

"폭죽은 나랑 헤레스가 만들었다? 도련님. 오래오래 살아야 해."

칼리우스가 배시시 웃으며 하늘을 가리켰다.

"100일이라니. 너무 감격스러운데요? 둘째 도련님 말씀대로 아마 100일인데 이렇게 똑똑하신 분은 도련님밖에 없을 거예요. 축하드려요."

한껏 놀릴 셈으로 말을 꺼낸 레디나는 너무도 행복한 얼굴로 키득거리기 바빴다.

"이제 100일이 되셨으니. 제발 아픈 일 없이, 무탈하게, 더는 어디 뚫려오는 일이 없으셨으면 해요."

헤레스는 축하 대신에 주사기를 꺼냈다.

"아, 이건 아까 맞지 않은 주사예요."

"100일을……."

페트리오가 말을 꺼내다 말고 잠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조만간 1살이시겠군요. 무슨 행사를 할지 벌써 기대가 됩니다."

"…아니."

한 명씩 꺼내는 말에 하벨은 진짜 기가 찼다.

들으면 들을수록 웃기지 않은가. 1살이라니.

"드디어 이날이 왔습니다!"

카샬의 목소리가 한껏 올라갔다.

이제껏 봤던 모습 중 가장 행복해 보였다.

"도련님의 100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제가 도련님을 모신지 100일이라니. 이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100일에 무얼 해야 하는지 조사했는데, 거기까지 하면 화를 내실까 여기서 멈췄습니다."

카샬이 방긋거리며 초에 불을 붙인 케이크를 들고 왔다.

"힘껏 부십시오. 소원 말씀하시는 거 잊지 마시고요."

모두의 기대가 담겨 있었다.

"진짜… 너무들 하네."

투덜거렸지만, 하벨은 웃고 있었다. 뭔가 웃기면서 속이 간지럽지 않은가.

"아라야. 너도 같이 불자."

[이 몸도?]

아라가 눈을 깜박거렸다.

"나랑 같이 태어났잖아."

[맞아! 헤헤!]

3.

2.

1

속으로 숫자를 센 뒤에, 하벨은 아라와 함께 초를 불며 껐다.

후.

"100일 축하드려요!"

하벨은 모두의 축하를 다시 받았다.

초에서 연기가 일렁거렸다.

"있잖아요. 내 소원은 말이에요."

하벨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소원은 속으로 빌어야 한다는 그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그가 갑자기 진지해졌다.

"다 같이 바다 위에서 아침 해를 보는 거예요."

참 소박하다고 빈정거릴지 모르겠지만, 하벨은 그랬다.

아침 해를 보고 싶었다.

다 함께.

"…카샬."

라르웬이 슬쩍 카샬을 바라보았다. 흐뭇해하던 카샬마저 눈을 뜬 채로 당황함을 드러냈다.

"음, 좀 그렇지? 우리가… 뭔가, 나쁜 사람 된 것 같지 않지?"

카샬은 속으로 기겁했다.

반쯤 장난으로 한 건 맞지만, 하벨이 이렇게 진지하게 대응할 줄이야.

"카샬. 얼마를 줘도 되니, 최고급 배로 구해보게."

룬델이 목소리에 힘을 강하게 주었다. 하벨이 아침 해를 보고 싶다는데 봐야지.

"알겠습니다, 가주님. 당장, 배를 빌리겠습니다!"

카샬은 고개를 숙였다.

"…아니. 이건 왜 또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거예요?"

뭔가 속닥거리는 말이 늘어날수록 하벨은 기분이 이상했다.

이건 예상과 다르지 않은가.

그냥 슬쩍, 얄미워 말을 꺼내봤을 뿐인데.

하지만 하벨은 진지한 저들의 모습에 혼자만 웃음을 터트렸다.

* * *

딱딱.

무언가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바안은 졸려오는 눈꺼풀을 비비며 고개를 돌렸다.

"…으헉!"

바안이 그대로 의자와 함께 넘어지려던 차 물이 의자를 잡았다.

"그렇게 간이 작아서야 되겠습니까, 전하?"

하벨의 목소리가 들리자 바안은 기울어진 상태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 무릇 왕이란 지진이 나든, 눈앞이 폭탄이 터져도 어엿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럼, 하벨 공께서는 노크도 모르시고, 문이 어딘지도 모르시고, 하여튼 다시 처음부터 배워야겠습니다."

"오늘은 예외로 해주세요. 몰래 나왔거든요."

하벨이 실실 웃다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켰다.

[안녕, 바안! 밤놀이 왔어! 헤헤헤.]

아라가 방실거리며 하벨의 얼굴에 제 얼굴을 비볐다.

달이 떠 있었다.

아주 어여쁜 달이.

"저 내일 바다 보러 가요."

하벨은 태연하게 의자를 끌고 와 바안 옆에 앉았다.

잠깐 밀린 서류를 쳐다보던 바안은 기가 찬 듯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지금 자랑하러 왔습니까?"

"네."

하벨은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저는 이제 왕 졸업했거든요. 부럽죠? 이거 완전 부러우실 텐데요?"

"…행복한 왕이 되라면서요. 이거 반칙 아닙니까? 막 분노가 꿈틀거리는데요?"

"든든한 제가 있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아, 뒷수습을 정말 잘해주셨어요. 제 정체 숨겨주셨잖아요."

"그러기로 합의했습니다. 작위도 싫다, 관직도 싫다, 이런 하벨 공한테 내가 드릴 수 있는 건 자유죠."

"돈은 좋아요. 많이 주세요."

하벨은 손을 내밀었다.

[응응! 이 몸도 금화가 너무 좋아! 바안, 봐봐. 짜안!]

아라가 꼬리에서 금화를 꺼내 자랑했다.

"…정령왕 님?"

바안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금화가 나와 허공에 둥둥 뜨지 않은가.

하벨은 금화를 가리키며 뿌듯하게 웃었다.

"제가 제작 주문한 금화지요. 아라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예쁘죠?"

"정말 아름다운 분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봤습니다."

바안은 왕실의 위치가 그렇게 좋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그 전투에서 많은 것을 보았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이제 드리려고 했습니다."

"많이 주세요. 저 덕에 많은 걸 얻어갔잖습니까? 절 숨기되, 에른스트 왕국의 백성이라는 걸 확실히 못 박아 힘을 키우셨던데요."

"하벨 공은 내 백성이 아닙니까? 당연한 말을 했을 뿐입니다."

"맞죠."

백성이라는 말이 뭐가 그렇게 기쁜지 하벨은 또 활짝 웃었다.

"그럼 하벨 공. 조만간 돈 받으러 왕실로 오세요. 화려하게 꾸며주죠."

"…그으, 요란한 건 싫어요."

하벨은 내민 손을 다시 내렸다.

"그럼 달님으로 오세요. 내가 양보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마음껏 드실 수 있잖습니까?"

"그건 그렇죠. 저 완전 건강해졌습니다."

"다행입니다. 정말로 다행이에요."

"전하."

하벨이 부르는 목소리가 달라지자 바안은 갑자기 한쪽 눈썹을 올렸다.

"왜 갑자기 진지해지십니까? 불안하게."

"제 옆에 여러 왕이 있습니다. 전하 역시 그중 한 명입니다."

아라도, 칼리우스도, 여하도.

"저는 모든 왕이 행복하길 바랍니다. 그러니 제 마음이 허락하는 선에서 돕겠습니다. 주저하지 말고 고민이 있으면 절 부르세요."

"그러니, 내가 좋은 자리 하나 마련하겠습니다. 어떠십니까?"

"…어흠. 가야 할 시간이에요."

하벨이 자리에서 슬슬 일어났다.

"다음에는 제발 문으로 와주세요."

바안 역시 덩달아 일어나며 웃었다.

"노력해볼게요. 음, 노력이요."

능글맞게 대답하는 그 모양새가 얄미웠지만, 하벨은 어느새 물보라에 싸여 사라졌다.

바안은 책상에 보이는 여우 조각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고맙습니다, 하벨 공."

언제나.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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