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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408화 (완결) (408/415)

408화. 꽃비가 내린다(7)

* * *

투두둑.

멋대로 반영구 정화제의 힘이 풀렸다.

추방됨에 따라 에른스트의 몸이 세계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걸 삼키는 용왕의 힘에서 벗어났을 때, 에른스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차피 다 끝났는데 뭐가 두려울까.

자신이 죽을 거라면.

"너희도 죽어야지이! 죽어어어!"

모든 검은 연기가 에른스트 밖으로 뻗어 나왔다.

자폭할 셈이었다.

세계를 먹을 정도로 거대한 자폭을.

째깍.

"그럴 줄 알았어."

칼리우스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째깍.

"도련님의 말이 맞았어. 넌 끝까지 위험해."

칼리우스는 처음 하벨을 만났을 때, 시간을 멈췄던 그 마법을 하벨에게 적용했다.

"고마워, 용용아."

하벨은 마법이 스며듦과 동시에 자신만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걸 느꼈다.

"네 개수작을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는가?"

하벨이 움직이기에 모든 물이 덩달아 움직였다.

"내가 누구인지 잊었는가? 네놈이 무얼 두려워했는지 잊었는가?"

절망감이 에른스트의 눈동자에 스며들자 하벨은 기꺼이 알려주었다.

"나는 용왕."

세상이 멈췄기에 하벨은 세계에 있는 모든 물을 끌고 왔다.

하벨 주변에 몰려와 끝을 알 수 없는 망토처럼 나풀거렸다.

"모든 물과."

바다 전체가 움직였다.

거대한 해일이 밀려왔다.

"바다의 지배자."

하벨의 눈동자에 푸르렀던 빛이 더욱 짙어졌다.

"그 이름이 결코 단순한 게 아님을 네놈은 알고 있을 거다."

모든 물과 바다의 지배자이기에 얼마든지 세상을 끝낼 수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에른스트를 단번에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물을 끌어오는 건 세상을 파멸시키는 힘이었으니 놈과 무엇이 다를까.

"이 힘을 보는 건 네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니, 영광으로 알거라."

쿠쿠쿠쿠쿠.

세상이 움직였다.

시간이 멈췄음에도 세상이 요동치고 있었다.

"내가 힘을 다 쓰지 않은 건, 내 힘으로 인해 벌어질 상황을 알기에, 이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파사사사사.

모든 물이 얼었다.

세상을 빙하기로 만들어버릴 힘이었다.

"내가 힘을 다 쓰지 않은 건, 이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하늘을 가득 채워버릴 정도의 얼음 덩어리가 에른스트에게 향했다.

"고작 너 따위에게 이 힘을 쓸 만큼, 이 세상은 하찮지 않다."

하벨은 가면을 썼다.

"너무도 사랑스럽고."

에른스트의 눈이 점점 커졌다.

"사랑스러워 어여쁘게, 귀하게 지켜온 세상이었다."

죽음을 앞둔, 아주 지독한 절망감이 놈의 눈에 드리웠다.

"그걸 네놈이 짓밟은 것이다."

끝을 내기에 아주 만족스러운 눈빛이 아닌가.

하벨은 가면 속에서 웃었다.

"그러니 내 분노는 정당하며, 네놈이 죽는 것 역시 정당하다!"

조용히.

그리고 부드러이 하벨은 손을 들었다.

너무도 거대한 힘이었기에 쭉 억누르며 살아왔다.

자신도 제 힘이 두려워 내내 눌러놨던 힘이었다.

"그러니 절망하거라, 에른스트."

열쇠의 수호자이며.

모든 물과 바다의 지배자.

그 진정한 힘이 에른스트를 죽이고자 펼쳐졌다.

사납게 몰아치는 폭풍처럼.

할퀴고.

찢으며.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마저 찢어버릴 정도로 얼어붙은 물은 단숨에 에른스트를 세상 밖으로 추방했다.

하지만 하벨의 분노는 거기서 멈추질 않았다.

다시 흐르려는 시간의 흐름을 열쇠의 힘으로 막았다.

"아직이다! 내 분노는 아직이야!"

그는 덩달아 세계의 밖으로 나와 에른스트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가까운 그곳에서도 물의 힘이 느껴졌다.

할 수만 있다면 끌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하벨은 오로지 에른스트를 바라보았다.

"왜!"

하벨은 소리를 질렀다.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울분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단 몇 번의 공격에 에른스트가 너무도 허망하게 잘게 쪼개졌지만, 그걸로 만족하지 않았다.

에른스트를 가루보다 더 잘게 갈라냈다.

"왜 나를 이리도 괴롭게 만들었는가!"

에른스트의 숨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

아니.

곧.

어쩌면 끊어졌을지도 몰랐다.

느리고,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들려오던 놈의 숨소리가 사라졌으니.

하벨 주변이 얼어 붙어갔다. 세계의 밖마저 얼려버릴 정도로 하벨의 분노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세계의 법칙이 자신을 바라보는 걸 느꼈지만, 하벨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다.

"왜 네놈 때문에……."

하벨의 눈물이 물을 만들었다.

"그토록 많은 이들이 죽어갔는가."

물은 호수만큼 커졌다.

하벨을 보는 세계의 법칙의 시선이 더 짙어졌다.

네 세계로 돌아가라.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하벨은 이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렇게 쉽게 죽어갈 거였다면 왜 이 세계를 건드렸는지.

그 사실이 너무도 원통했다.

나의 아들이여.

하벨 주변에 빛이 퍼져갔다.

이제 돌아가렴. 그 분노를 내게 주고 돌아가야 한다. 나는 네가 사라지는 게 제일 두렵단다.

"…잠깐만요. 정말 잠깐만요."

하벨은 분노를 삼키고 신에게 빌었다.

정말 마지막이었다. 다시는 올 수 없는 순간이기에 포기할 수 없었다.

신의 빛은 사라지지 않고 자신을 따스히 감싸주었다.

마치 세계의 법칙이 더는 자신을 보지 못하게 막아주는 것만 같았다.

"나의 사랑스러운 백성들아. 듣고 있는가?"

하벨은 허공을 바라보았다.

"내 목소리가 들리는가."

모든 이들은 죽으면 세계의 밖으로 갔다 다시 세계로 들어오는 구조를 띤다고 알고 있었다.

"내가 죽였다."

마지막으로.

정말 마지막으로.

"늦었지만, 너무도 늦었지만, 내가 놈을, 너희를 슬픔으로 빠트린 에른스트를 죽였다."

왕으로서 그들 앞에 섰다.

"그러니 부디. 부디, 편히 눈을 감아주거라."

과거에도 수만 번 빌고, 바랐던 그 말을 다시 꺼내보았다.

하벨은 다시 가면을 벗었다.

잔잔한 눈빛이 물결을 쳤다.

"나는 이제 왕이 아니라, 하벨 티에라야."

가면을 흘려보냈다.

왕으로서의 자신을 세계 밖에 던져버렸으니.

"이제 나는 다 털어버릴 거야."

죽어갈 때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손을 꼭 잡으며 한 말로 자신에게 행복을 빌어주었다.

―행복… 하게 살아주세요.

―용왕님, 행복하셔야… 합니다.

―행복을… 제발, 행복을…….

"그러니 너희가 내게 빌어준 그 행복을 꼭 이룰게."

아무것도 없던 세계에서 반짝이는 빛깔이 하나씩 나와 손을 흔드는 것만 같았다.

덩달아 구슬픈 빛깔이 하벨의 눈동자에 퍼졌다.

요동치던 분노가 사라졌다.

이제 끝이 났음을 비로소 자신은 알았으니.

내려가마.

하벨은 신에게 안겨 세계의 밖을 향해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었다.

"…안녕."

하벨이 왕으로서 저들에게 건네는 마지막 인사였다.

* * *

빛에 안겨 하벨이 땅으로 내려왔고, 시간은 멈춰 있었다.

아들이여.

신이 조용히 목소리를 냈다.

이 세계는 본디 두 개였다. 합쳐진 이 세계는 이미 하나의 세계가 되어 다시 뗄 수가 없구나. 그러니 신으로서 이 세계와 똑같은 평행 세계를 만들겠다.

"그러면 틈의 세계에 있는 이들은… 그 세계로 가나요?"

하벨이 물었다.

그렇게… 되겠구나. 미안하구나. 세계의 법칙이 허용한 범위에서 내가 펼칠 수 있는 힘이란다.

"고마워요."

하벨은 울먹이며 신을 안았다.

그들이 다시 살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나는, 그걸로 충분해요."

신은 하벨을 토닥였다.

이제 너의 힘으로 얽매였던 실타래를 풀 수 있을 거다. 고맙구나.

하벨의 눈동자가 또 일렁거렸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게 정말 마지막이라는 걸. 이제 신이 자신을 만지는 것도, 신이 자신을 만지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걸.

신의 행복이란 무엇일지 모르겠지만, 하벨은 밀려드는 슬픔에 마지막으로 그를 꼭 안았다.

신은 자신의 아버지였다.

자신을 만들어준 아버지.

"아버지. 행복… 해야 합니다."

부드럽게 퍼진 그 말에 신은 조용히 흐느꼈다.

뚝뚝 흐르는 눈물이 느껴졌다.

…고맙구나, 나의 사랑스러운 아들이여. 행복… 하렴. 그간 흘린 눈물보다 더 많이 웃으렴.

신은 활짝 웃으며 연기처럼 조용히 사라졌고, 시간이 다시 돌아왔다.

"…쿨럭!"

세계 밖으로 나가려고 했던 부작용이 몸에 들이닥쳤다.

핏덩어리가 짙게 떨어지자 경고를 받는 기분이었다.

자신을 부르는 이름이 들려왔지만, 하벨은 틈의 세계에서 나온 이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물거품이 잦아질 때쯤 몸이 비틀거렸다.

양쪽에서. 아니 등 뒤에서도 손길이 느껴졌다.

"…지금 이 몸으로 또 힘을 썼습니까? 진짜, 제가 확 죽어버리는 꼴을 보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까?"

류아의 목소리가 하벨의 귀를 뚫었다.

"제가 저쪽으로 데려다드릴……."

"류아야. 아주 중요한 이야기야."

하벨은 피를 닦고는 그 이름을 불렀다.

"유렌."

마지막 틈의 세계가 세상에 나왔다.

유렌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고개를 조아렸다.

"…용왕님."

조용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저 말을 흘리며 하벨은 모두를 향해 목소리를 냈다.

"방금 신하고 말을 끝냈어."

"…누구하고요? 예?"

태련이 제 귀를 의심했다.

"틈의 세계에 얽매인 너희는 죽지 않아도 돼."

"정말입니까?"

무날이 주변을 진정시키며 하벨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 하지만."

대답과 함께 몰려오는 불안한 그 말에 모두가 긴장했다.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올 거라는 걸 예상했다.

"이 세계가 아니라 다른 세계로 가야 할 거야. 평행 세계 말이야."

하벨은 태연하게 말을 이으려다 모두의 눈동자가 일렁거리자 또 눈시울이 붉어졌다.

"…가."

밀어내듯이 모두에게 꺼냈다.

"죽지 말고, 거기에서 지내."

설령 영원히 만나지 못하더라도 이들이 살아 있는 게 나았다.

"나는 그게 좋아."

하벨은 손에서 열쇠를 만들어냈다.

"가서 잘 살아. 나 같은 못난 왕 만나서 고생했던 거 거기서 다 떨쳐내고 잘 살아줘. 행복하게 말이야."

"…그게 뭐예요? 왜 여기서 못 사는 거예요?"

태련이 울먹이며 물었다. 그녀는 현실을 부정하며 물었다.

"겨우 만났는데 또 헤어져야 하는 거예요? 또요? 또?"

"그래도 나는 좋아. 너희가 죽지 않았던 것도 좋고, 다시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아."

하벨은 웃었다.

웃다가 서서히 인상이 찌푸려지고, 울먹이다 기어코 울었다.

"…아니, 보내고 싶지 않아. 나도 너희를 보내고 싶지 않은데, 너희가 죽는 게 더 싫어. 나는 그게 너무 무서워. 세상에서 제일 싫어."

"쉬쉬. 자, 갈 테니까, 울지 마요."

류아는 무릎을 꿇고, 하벨을 달랬다.

"여기서 울면 큰일 나요. 정말로요. 용왕님의 몸은 이제 한계니까요."

"죽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압니다. 물을 통해 계속 연락하겠습니다. 그 정도는 해도 되잖습니까?"

무날은 손수건을 꺼내 익숙한 손길로 하벨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잘 울어서야.

"그래. 그렇게 해. 나는 물이니까. 어디든 닿을 수 있어. 어디든 너희의 목소리가 들리고, 너희가 보여."

하벨은 입술을 깨물며 힘겹게 말을 이어나갔다.

어느덧 다 눈물바다가 되어버렸다. 이럴 생각이 없었는데.

"…류아야, 무날아, 태연아."

하벨은 울먹이며 그 이름을 불렀다.

"너희가 내 누나였고, 형님이었어. …알고 있지?"

"드디어 인정하네요."

류아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자신들의 사랑스러운 막내.

"알고 있죠. 당연히 알죠. 제가 용왕님한테 많은 걸 알려줬는데요."

"저랑 같이, 으흑, 모두랑 같이 소풍 갔을 때 정말 즐거웠는데. 또 가고 싶었는데."

태련은 오열하다가 억지로 웃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눈물이 메마르지 않았다.

무날은 경례를 때려치우고, 처음으로 존칭마저 버리며 하벨의 손을 꼭 쥐었다.

"너를 만나서, 너의 형이 되어서 정말로 행복했어."

"나도 너희를 만나서. 행복했어."

그 행복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벨은 해연을 바라보았다.

"유렌은 조금. 조금 뒤에 보내줄 테니까. 너도 거기서 잘 살아야 해."

"연락할게요. 연락… 잘 받아주셔야 해요."

"물론이지.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모든 물과… 으흑, 바다의 지배자이신."

해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유렌을 잠깐 바라보았다.

울고 있는 게 보였다. 보내준다는 말이 무엇일까.

용서해주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걸 알기에 아버지가 오열했다.

해연은 하벨에게 달려들었다.

"고마워요, 용왕님. 또, 용왕님께 구원받았어요."

꼭 어릴 때처럼.

그녀의 행동에 다른 이들 역시 참지 못하고 하벨에게 달려들었다.

"행복하셔야 해요."

"밥 잘 먹고요."

"말도 잘 들어야 합니다."

"다치지 말고요, 제발요."

"재미있을 것 같다고 막 덤벼드는 것도 하지 마세요!"

하벨은 갑자기 쏟아지는 잔소리에 눈물이 그만 멈췄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내가, 어린아이야? 왜 그렇게 말해?"

"다 맞는 말인데요, 뭐어."

류아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눈을 깜박거리는 하벨을 바라보았다.

"용왕님. 캬샬 말 좀 잘 들으세요. 부탁입니다, 용왕님."

"말… 들을게."

류아가 손을 뻗어 하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야 진짜 막내 같네."

처음 만났을 때 그 눈빛으로 류아는 활짝 웃었다.

형님이라며 자신을 구하던 그 눈빛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응."

하벨은 세계가 만들어졌음을 느꼈다.

이들을 보낼 때가 왔음을 느꼈다.

"나 이제 괜찮아. …형."

하벨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들에게 오직, 거대한 문이 보였다.

하벨은 그들을 한 명씩 바라보았다. 가슴을 찌르는 슬픔을 뒤로 한 채 눈물을 삼켰다.

마지막이니 웃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벨은 닫혔던, 굳게 닫혀 있던 삶으로 향하는 저들의 문을 열어주었다.

딸깍.

스르르.

문이 열렸다.

"안녕."

하벨은 살포시 눈을 감았다.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가족들.

문이 닫히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바짝 엎드린 유렌 이외에 그곳에 아무도 없었다.

마치 꿈처럼.

"…으흑."

하벨은 가슴이 미어졌다.

또.

또, 헤어졌다.

천천히 고개가 무너져내렸다.

밀려오는 절망이 마음을 부서트리려고 할 때, 아라의 손길이 하벨에게 닿았다.

말캉했다.

따스한 손길에 하벨은 고개를 올렸다.

아니.

달랐다.

자신은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울지마아, 대장. 이 몸이 대신 울어줄게에.]

아라는 이미 울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보다 더 펑펑 울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 몸은 대장이 이렇게 작을 줄은 몰랐어. 대장이 이렇게 아팠던 것도, 슬펐던 것도 몰랐어어! 이 몸이 바보야아.]

"아직 작은 건 너인데……."

하벨은 웃었다. 아라가 다시 작아졌으니까.

"도련님. 아직 정신을 잃으시면 안 됩니다."

헤레스가 당장 하벨에게 진통제를 놔주며 진찰했다.

무언가를 버티고자 악착같이 견뎌냈으니 이 긴장감이 풀어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하벨의 눈동자가 벌써 흐려지고 있었다.

"어서 옮겨야 합니다. 어서요!"

"내가 업고 가마!"

룬델이 등을 내주었다.

"아니, 내가 더 빨라!"

칼리우스 역시 등을 내주었다.

[아앗! 이, 이 몸이 길을 열게.]

아라가 눈물을 닦아서는 물의 길을 만들었다.

"제가 바로 왕실에 연락할게요."

넬시아가 연락용 아이템을 꺼냈다.

"뭐든 좋으니 수습은 내가 할게. 어서 가."

라르웬이 아예 물의 길로 밀려고 할 때, 하벨이 주먹을 위로 뻗었다.

"우리가… 이겼어요. 외쳐주세요."

하벨은 웃었다.

승리를 축하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술 하나만 주실래요?"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제 한 명에게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미… 미치셨습니까? 진짜 미치셨습니까, 도련님?"

카샬이 옆에서 붕대를 매고 있던 차에 기겁했다.

"저 있습니다."

페트리오가 주머니를 뒤지자 레디나가 덩달아 기겁했다.

"아니, 왜 이래요? 지금 도련님 술 마시면 안 된다는 거 알잖아요? 아주 죽으라고 말하지 그래요?"

레디나는 불안했다.

죽기 전에 마신다는 그런 술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주시오. 귀인이 생각 없이 말했을 리가 없소."

여하는 하벨의 편에 섰다. 꼭 줘야 한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있잖아요. 하벨 티에라하고 술 한잔하기로 했는데, 버티질 못할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필요해요. 승리도 외쳐주시고요."

하벨의 말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칼리우스가 스르르 일어났다.

"어서 가주님한테 업혀, 도련님."

"그래. 내게 업히거라."

"…가요, 아버지."

하벨은 룬델에게 업혔다. 마지막이었다. 정 없는 놈이 치사하게 정말로 사라지고 있었다.

'잠깐만 버텨봐. 잠깐만. 너 이대로 가면 안 돼.'

하벨은 하벨 티에라를 말렸다.

탁.

룬델이 달렸다. 등만 보아도 그의 여러 감정이 보였다.

우는 것 같았고,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슨 모습이든 룬델은 아버지로서 달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갑자기 누군가를 보며 웅성거렸다.

"우리가!"

그들이 바라보는 쪽에 바안이 있었다.

"승리했도다…!"

뭐가 그렇게 급한지 목이 터지라 소리치는 그 외침에 왕의 위엄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기뻤다.

"…들어가 있으라니까, 저기도 말을 안 듣네요."

"그건 너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더냐, 하벨아."

룬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울음을 참는 것처럼 들렸다.

"승리했다아!"

외침은 번져나갔다.

사람과 사람의 목소리를 타고 공기를 찔렀다.

좋은 분위기였다.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이 아닌가.

이게 승리였다.

이게 승리의 모습이었다.

룬델이 뛰고, 정령들은 신이 난 채 꽃을 뿌리고, 사람들은 길을 터 주었다.

하벨은 페트리오에게 받은 작은 병에 담긴 술을 높이 들었다.

이게 비싼 건지, 싸구려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건배."

붉은 노을이 술에 담겨왔다.

하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고, 쓰고 이상한 맛이 입안에 번져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뭐가 좋은지 키득키득 웃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정 없는 놈이 사라졌다.

하벨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동자에서 깊은 눈물이 떨어졌다.

"…갔더냐?"

룬델이 등에 번지는 눈물을 느끼며 물었다.

"네."

하벨이 대답했다.

"고맙구나, 하벨아."

고개를 잠깐 뒤로 돌린 룬델은 홀가분하게 웃고 있었다.

하벨 역시 눈물을 흘리며 웃어 보였다.

여러 발소리가 들려왔다.

왜 길이 만들어졌는지 몰랐는데 모두가 자신의 옆에서 달려주었다.

그 모습에 하벨은 비로소 자신이 무얼 지켰는지 알았다.

옆에 누군가 있었다.

숨을 쉬고 있었다.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내내 바라왔던 풍경이 지금 눈앞에 펼쳐졌는데 이걸 이제야 알았다.

수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 시설과 달랐다.

지켰다. 정말로 저들이 살아 있었다.

꽃이 뿌려졌다. 색색의 아름다운 꽃비가 내려왔다.

부서질 것만 같았던 마음을 채워주었던 그 비가 진짜로 내려왔다.

"다행이에요."

하벨은 룬델의 등에 기댔다.

"이번에는… 지켰어요."

"그래. 네가 지켰단다."

"가족을… 지켰어요."

하벨은 어여쁜 이들을 눈으로 담았다.

"저는 이제 혼자가 아니에요."

그 외로웠던 시간은 이제 끝이 났다. 진짜 승리의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혼자가… 아니에요."

가슴에서 지독하게 불던 겨울바람 역시 멈췄다.

하벨은 오열했다.

눈이 내려왔다.

꽃과 함께 뒤섞여 내려오는 모습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우리, 소풍 가요."

하벨의 눈동자가 노을에 비쳐 반짝거렸다.

"그러자꾸나."

"…바다도 보러 가요."

"몸이 나으면 가자꾸나. 꼭."

자유가 손에 들어왔고, 무거운 짐들이 사라지는 걸 느끼며 하벨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끝이었다.

정말 끝이었다.

[이 몸도 갈래!]

아라가 다가와 하벨의 얼굴에 비비적거렸다. 아직 얼굴에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

"나도!"

칼리우스가 힘껏 외쳤다.

"나도 가도 되는 거지?"

넬시아를 이어 한 명씩 꺼내는 그 목소리에 하벨은 배시시 웃었다.

기뻤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기뻤다.

하벨은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흘러가는 시간 속에 쌓일 어여쁜 기억이 벌써 기대가 됐다.

하벨은 눈을 떠 다시 꽃비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보드라운 바람처럼 찬찬히 행복을 그려나갔다.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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