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407화 (407/415)

407화. 꽃비가 내린다(6)

* * *

―그러면 아픈데. 가슴팍 뚫린 거 아직 너덜너덜한데. 살살 좀 하지?

하벨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하벨 티에라는 오른쪽을 슬쩍 보며 입을 열었다.

"깨어났어요?"

―그럼. 이거 좀 이상하다? 뭔가 되게 재밌어.

낄낄 웃는 소리가 들리자 하벨 티에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와중에도 웃음이 나요?"

비이상적인 행동에 에른스트는 눈을 크게 떴다.

마치 두 사람이 한 몸에 깃든 것만 같지 않은가.

"…미쳤는가, 용왕?"

"너는 입 닥쳐!"

하벨 티에라는 이미 반영구 정화제로 뒤덮인 우산으로 에른스트의 얼굴을 후려쳤다.

팍!

팍팍!

―진작 깨어났는데? 보고 있었어. 아, 그걸로 안 돼. 놈은 찔러야 하…, 됐다. 찌르지 마. 기분만 더러워질 거야.

우산을 휘둘러 에른스트를 패던 하벨 티에라가 문득 드는 물음에 말을 꺼냈다.

"왜 보고 있었어요?"

―내 선물. 마지막 인사 때 방해하면 안 되잖아? 물론, 너 역시 주먹을 휘두를 자격 역시 있으니까. 저놈 때문에 꼬였잖아?

"교체해요."

―왜에? 잘 때리고 있잖아.

능글맞은 하벨의 말에 하벨 티에라는 피식 웃었다.

"사실 무섭네요. 전 역시 전투하고 안 맞아요. 평생 벌레 하나도 못 죽였어요. 아. 아라님이……."

―봤어. 아주 멋진 권능이지 않아? 어쩜 저렇게 예쁜지. 봤지? 난 언제나 아라를 믿고 있어.

목소리가 유난히 밝아지자 하벨 티에라는 그게 참 웃겼다.

"맞아요. 아라 님은 아주 멋졌어요."

―그럼, 그대로 버티고 있어. 네 탓이니, 내 탓이니 하지 말고. 술 한잔해야지.

"네."

하벨 티에라는 실실 웃었다.

"고마워요. 아버지를… 구해주셔서요."

하벨 티에라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하벨이 눈을 떴다.

시선으로 앞으로 당겨지는 기분과 함께 곤죽이 된 에른스트가 눈에 보였다.

"그런 말 필요 없어. 너의 아버지자 내 아버지이기도 하니까."

하벨은 담담한 말을 꺼내며 에른스트를 노려보았다.

한 걸음 나아가려다 비틀거렸다.

'이거… 진짜 아픈데? 이걸 어떻게 휘두른 거야?'

들었는 듯 아닌 듯 가벼웠던 우산이 무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일단 여긴 무대가 아니야. 하나도 멋지지 않잖아?"

"…거래하자, 용왕이여."

"닥쳐 좀! 거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하벨은 죽을 것만 같았다. 욱신거리는 가슴이 너무 아프고, 몸이 무거워 쓰러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괜찮아요, 용왕님?

―두드려 팰까요?

찰싹!

물이 에른스트의 이마를 찰지게 때렸다.

―이렇게요.

"일단 가자."

하벨은 찰진 그 소리에 실실거리며 에른스트의 멱살을 잡고는 물보라에 휘감겼다.

* * *

물보라가 잦아들었을 때, 반영구 정화제를 든 정령들과 모두가 보였다.

그 속에 페트리오까지 보일 줄이야. 하벨은 괜히 흠칫거렸다.

[대자아아앙!]

아라가 가장 먼저 하벨에게 날아왔다. 그는 눈물을 머금은 아라를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이안이이. 대장, 이안이…….]

"네 탓이 아니야, 아라야. 그게 자연이고, 그게 순환이야."

하벨은 훌쩍이는 아라를 토닥거리며 모든 반영구 정화제를 사용했다.

어차피 아라의 권능으로 에른스트가 자연에서 퇴출당했지만, 혹시 모르니 밧줄처럼 얇게 퍼트려 에른스트가 빠져나갈 수 없게 붙잡았다.

하벨은 대신들 쪽으로 바라보다 말고 주저앉았다.

"괜찮으십니까?"

엘라힘이 바로 하벨에게 신의 은총을 사용했다.

그가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그저 치유에 신경 썼다.

하지만 회복이 너무 더뎠다. 겨우 피가 멎은 정도였다.

"…엘라힘 신관님."

그 목소리에 엘라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벨이었다. 순간, 울컥했지만, 엘라힘은 필사적으로 눈물을 삼켰다.

"말씀하십시오."

"저놈한테 신의 은총 좀 사용해주세요. 머리도 굴리고 있을지도 모르니 아예 짓눌려주세요."

91%.

하벨은 계속 긴장했다.

에른스트가 또 어떤 수를 쓸지도 몰랐다. 잃을 게 없는 놈이 가장 무서우니.

아직도.

아직도 에른스트의 눈빛이 죽지 않았다.

"…헤레스."

하벨이 이름을 부르자 헤레스는 흠칫 놀랐다.

"미안한데, 진통제 좀 놔줄 수 있어? 아프네. 좀 많이."

하벨은 가슴팍을 가리켰다. 피를 계속 물이 억눌러주고 있을 뿐, 괜찮다고 말할 수 없었다.

"제일 강한 걸로 놔드릴게요."

헤레스는 하벨이 돌아온 걸 알았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저 마약 진통제를 준비했다.

하벨이 아프다고 말한 건 처음이라 심장이 덜컥 주저앉을 뻔했다.

"…미안해, 헤레스."

"사과하지 마세요. 지금은 제발 사과하지 마세요."

상처가 짐승에게 뜯어먹힌 것처럼 끔찍해 헤레스는 저 사과가 마지막이 될까 무서웠다.

"잘했어, 레디나."

하벨은 레디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가득 찌푸려졌다.

"말하지 말아요."

"네가 아니었으면 이런 모습을 보지 못했을 거야."

내부자가 지금 날뛸 순간이 아닌가.

하지만 조용했다. 뒤통수를 맞지 않았다는 소리라 행복했다.

달랐다.

과거와 정말 달라졌다.

"…형님. 이렇게 나와도 되는 겁니까?"

하벨은 라르웬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너는, 조용히 해."

"곧 일어날 거예요. 마무리를 지어야죠."

손아귀를 잡는 넬시아의 손길에 하벨은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누님."

"내가 늦었어."

"아니에요, 고마워요. 정말 누님이 와줬어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쓰러질 때, 룬델 뒤로 자신에게 달려오는 넬시아를 보았다.

넬시아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내렸다.

"울지 말아요."

하벨의 눈동자가 룬델에게 향했다.

"…아버지도요. 저, 약속 지켰어요."

하벨은 눈을 감았다. 모든 게 너무도 무거웠다.

하지만 기뻤다. 지켰다.

아니. 아직 지켜야만 했다.

"고맙구나. 고맙구나, 하벨아. 버텨주렴."

하벨은 룬델을 향해 미소를 짓다 익숙한 실루엣에 목소리가 절로 나왔다.

"미안, 카샬."

"괜찮습니다. 살아 계신다면, 다 괜찮습니다."

"말… 잘 들을게. 당분간."

하벨은 반쯤 눈을 떠 여하를 보았다.

"고마워. 고마워, 여하야."

"나는… 아무것도 안 했소."

"네 존재 자체가 내게 있어, 아주 큰 도움이야."

여하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게 곧이야."

하벨은 눈을 감은 채 웅얼거리다 칼리우스의 울음소리에 하벨은 눈을 떠 손을 뻗었다.

"나는 괜찮으니까, 울지 마, 용용아. 응?"

"내가 늦었어. 너무 늦었어."

칼리우스는 하벨의 손아귀에 얼굴을 묻으며 펑펑 울었다.

마법 발동이 늦어졌다. 아니, 다가갔어야 했을까.

"내가 빨라서 그런 거야. 이제……."

"93%이야. 빨라져. 점점."

칼리우스는 책을 잡고는 부르르 떨었다.

"도련님."

페트리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하벨을 불렀다.

"화내지 마."

"조금 있다, 일으켜드리……."

"제가, 일으켜드리겠습니다."

카샬이 페트리오의 말을 잘랐다. 페트리오의 얼굴이 구겨졌다.

"너는 진짜……."

"고마워."

하벨은 실실 웃음이 났다.

자신의 품에서 꼬물거리는 아라의 따스함에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자아, 이제 마지막을… 준비하자."

마지막이었다.

"저쪽도 끝이 난 모양이야."

틈의 세계가 닫히고 있었다. 하벨의 시선이 칼리우스에게 향했다.

"내가 닫은 거 아니야. 나는 막고 있었어. 더 나오지 못하게. 여기에 오지 못하게."

"그럼 끝이 난 게 맞네."

어인족과 자신의 맹약을 따라 자신을 해친 저들을 벌할 수 있었다.

그 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에른스트에게 세뇌된 저들이 죽지 않아 둔해질 대로 둔해진 몸을 이끌고 싸워봤자 얼마나 강할까.

저들이 무서웠던 건 죽지 않기 때문이었을 뿐이었다.

하벨은 손을 뻗었다. 룬델이 가면을 건넸다.

"고마워요, 아버지."

하벨은 창백한 제 얼굴을 가리려다 곧 꿈틀거리는 힘을 느꼈다.

"아니. 너는 나오지 마."

유렌.

놈을 이 영광의 자리에 낄 게 할 생각은 없었다.

놈은 이 자리를 밟을 자격조차 없으니까.

"거기서 봐. 그게 네 자리야."

다시 유렌에게 경고하며 하벨은 에른스트를 바라보았다.

이대로 그냥 마무리 짓기엔 아쉽지 않은가.

"용용아. 마나를 잠깐 허락해줄래?"

"알았어. 어, …됐다!"

"무날아."

하벨은 칼리우스의 눈물을 닦아주며 무날을 불렀다.

"예, 용왕님."

틈의 세계가 열리며 무날이 걸어 나왔다.

"다들 모아봐. 이제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를 하벨이 짓자 모두가 그를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뭘, 하시려는 겁니까?"

무날이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그냥. 나만 두드려 팼다는 느낌이 들어서. 한 명씩 시원하게 패면 좋겠다 싶어서. 너희는 안타깝지만, 주먹은 안 돼. 무기를 들고 때려 알겠지?"

"그러면 저희는 주먹질해도 된다는 거예요?"

레디나가 해맑게 물었다.

"물론이야. 얼른 때려도 돼."

"…진심이더냐?"

룬델이 제일 먼저 달려가 에른스트를 걷어차는 레디나의 모습에 불안함을 드러냈다.

"아. 처음을 뺏겼네요. 두 번째는 차지하셔야죠."

"하벨아."

"아버지. 지금 저놈은 말도 못 하고, 지금 아니면 못해요. 어차피 쟤는 안 죽어요. 쓸고 베고, 때려도 다시 살아요. 그러니 실컷, 아주 실컷 죽여도 됩니다."

[그럼 대장은 잠깐 누워있어!]

아라가 나무로 된 침대를 만들려고 하자 하벨이 아라를 말렸다.

"아라야. 나중에 누울게. 나 지금 누우면 못 일어날 것 같아."

진통제가 계속 들어가고, 이렇게 신의 은총이 쏟아짐에도 너무 아팠다.

하벨은 고개를 끄덕인 뒤 당장 달려가 에른스트를 힘껏 걷어차는 룬델의 그 모습이 너무도 웃겼다.

'…아, 웃으면 안 되는데.'

95%.

틈의 세계에 있던 이들이 나타나 모두가 쥔 무기를 하늘로 올렸다.

"짐승 새끼를 잡아라!"

무날의 명령에 모두가 똑같은 소리로 힘껏 외쳤다.

[맞아! 에른스트는 짐승…….]

하벨은 아라의 입을 막았다.

그건 무슨 일이 있어도 허락할 수 없었다.

타탁!

매타작이 시작됐다.

돌아가며 무언가를 때리는 소리가 그렇게 좋게 들릴지는 몰랐다.

97%.

하벨은 음악을 감상하듯 끊이질 않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왠지 가슴이 촉촉하게 젖어가는 것 같았다.

'아직이다.'

하벨은 멋대로 풀어질 것 같은 긴장감을 다시 잡으며 이어지는 칼리우스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99%야."

카샬과 페트리오가 하벨을 일으켜주었다.

"아라야."

[응응.]

"실체화해서 날 이끌어줄래?"

하벨의 부드러운 제안에 아라는 눈동자를 반짝거렸다.

[이 몸은 좋아! 맨날 해도 좋아!]

아라가 만들어낸 물이 들어오자 아주 손쉽게 연결이 되었다.

무한한 바다를 만난 즐거운 아라 주변에 물이 일어나 물결쳤다.

휘몰아치는 물과 함께 다리가 길게 뻗은 하얀 여우가 수많은 꼬리를 흔든 채 나타났다.

푸른 리본과 망토를 두른 여우의 머리에 꽃 왕관이 얹어져 있었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아라의 모습에 하벨은 아주 활짝 웃었다.

이게 아라의 진짜 모습이었다. 아주 아름답고, 누구보다 용맹하지 않은가.

하벨은 아라에게 기댔다.

"성장했구나, 아라야. 축하해."

[응응. 이 몸은 이제 죽음이 뭔지 알아. 이 몸은 이제 어른이 됐어.]

아라의 눈이 휘었다.

하지만 하벨 자신이 본 아라는 아직 아이였다.

[이 몸은 이제 대장을 태울 수 있다? 이 몸은 이제 조금만 슬퍼.]

"많이 슬퍼해도 괜찮아. 내가 옆에서 다독거려줄게."

[아니야. 이안은 여기에 있어. 이 몸은 알아. 대장이 말한 순환이라는 것도 뭔지 알아.]

아라는 자신의 머리 위에 또르르 회전하는 꽃 왕관을 가리켰다.

[가자, 대장. 이 몸은 언제든지 준비가 됐어.]

아라의 수많은 꼬리가 흔들리고 자연이 기쁨의 노래를 불렀다.

"…됐어! 됐어, 도련님!"

아주 아름다운 아라의 모습에 넋을 잃고 바라보던 칼리우스가 당장 기뻐하며 책을 하벨에게 보여줬다.

100%.

책이 반짝반짝 빛났다.

하벨은 손을 뻗어 열쇠를 쥐었다. 책이 알려주지 않아도 무얼 해야 하는지 알았다.

딸깍.

열쇠를 열었다.

책이 움직이더니 안건이 된 글자를 토해냈다. 빛깔을 따라 칼리우스의 손목에 온갖 보석들로 치장한 것 같은 글자가 휘감겼다.

그게 권능이었다.

"잠깐만 기다려봐."

하벨은 카샬과 페트리오에게 부축받아서는 에른스트에게 향했다.

모두가 하벨이 가는 길을 터주었다.

찌이익.

하벨은 에른스트의 입을 가린 반영구 정화제를 떼었다.

"쳐 죽여버릴 거다아아, 용와아앙! 네놈을 죽여버리겠어!"

곧바로 괴성에 가까운 소리가 흘러왔다.

에른스트는 신이었던 기억을 잃어버린 것처럼 한 마리의 짐승이 되어 날뛰었다.

"아니. 죽는 건 내가 아니야. 그 정도 머리는 돌아가잖아?"

"닥쳐어어어!"

"네가 절망한 게 보여. 드디어 내 눈에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어."

하벨은 웃었다. 어여쁜 미소였다.

그런 에른스트에게 하벨은 기꺼이 선물을 주었다.

"수많은 문을 내게 보여라."

"……!"

에른스트의 눈이 커졌다. 문이라고 하면 무얼 말하겠는가.

아니, 그건 불가능했다.

열쇠는 자신이 빼앗지 않았는가. 이 땅에 있어 가장 무서운 존재는 바로 열쇠의 수호자였다.

자신이 이 세계에 속하게 된다면 열쇠의 수호자가 권능으로 무얼 할지 뻔하지 않은가.

"너, 네놈, 네, 네놈이……."

"그래. 나는 열쇠의 수호자. 네놈이 내게 뺏은 열쇠를 기억하는가?"

하벨의 손아귀에 열쇠가 반짝거렸다.

"내 힘을 두려워했지? 넌 처음부터 나를 두려워했어. 그래서 날 '균형의 수호자'라 격하하며 불렀다."

"개소리… 지껄이지 마."

"유렌과 이어져 있는 너는 지금 이 세계에 속해 있기에 내 힘을 피할 수 없다. 네 꾀에 네가 넘어가는 꼴을 보아라."

에른스트가 가진 수많은 문이 보였다.

그중 하벨 자신이 닫을 문은 하나였다.

"…잠깐만!"

에른스트가 다급히 외쳤다.

"마, 맞아! 너를 두려워했다!"

사실대로 털어냈다.

"네가 제일 두려웠다! 인정하마!"

"열쇠의 수호자로서 명하노라."

쿠우우우웅!

하벨의 심판에 모든 공기와 땅이 울렸다.

세계의 법칙이 이곳을 향해 시선을 들이미는 게 느껴졌다.

그만큼 신성한 자리로 바뀌었기에 모두가 밀려오는 힘에 저절로 숨을 참았다.

"그러지 마! 그것만큼은 제발……!"

에른스트가 빌었다.

그 콧대 높은 저놈이 빌 정도였다.

하지만 하벨은 말을 꺼냈다.

"신이 아님에도 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 세계의 법칙을 위반한 저자의 힘을 닫겠노라."

순환의 고리를 벗어났으니 이를 바로 잡겠다는 말이 얼마나 정당한가.

하벨은 잠깐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그시 바라보던 세계의 법칙이 스치듯 지나갔다. 마음대로 하라는 의미에 가까웠다.

"안 돼에에! 그건 안 돼에!"

에른스트가 다급해졌다. 세계의 법칙이 허락하고 말았다.

"뭐든 하마! 내 약속하지! 네가 하라는 대로 하마!"

이 힘만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 긴 세월을 버틸 수 있었던가. 죽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시 신이 될 기회를 노렸다.

"그러니 제발, 제발 그 힘만은 빼앗지 말아줘어! 나는 신이 되어서 다시, 내 아이들의 행복한 미소를 보고 싶다고! 그것뿐이야! 단지… 단지 그것뿐이었다고……!"

절박함으로 물들어가는 에른스트의 표정을 보자 하벨은 그를 한껏 비웃었다.

"행복한 미소라. 참 이상해. 네가 이 세계에 준 거라고는 절망뿐인데."

절망만을 아는 존재가 행복이란 존재를 알고 있을까.

"너는 나에게 많은 걸 앗아가지 않았는가."

하벨은 손을 부드러이 펼쳤다.

"이 세계도, 내 가족도, 나의 백성들도."

아직도 눈을 감으면 아찔했다.

모든 게 사라지는 그 순간이 얼마나 비참한지, 얼마나 서글픈지, 놈에게 가슴을 쥐어뜯기는 고통보다 더 아팠다.

"내 모든 걸 앗아갔으면서 이제 와 빌면 무얼 할까."

에른스트를 내려다보는 하벨의 시선은 서늘해졌다.

"유렌! 유레에엔! 나와! 내가 죽는다! 내가 죽으면 너도 죽는 거야!"

"과연 내가 어떻게 돌아올 수 있었을까?"

병.

신.

아.

에른스트가 그대로 멈췄고, 사색이 된 채로 하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금기에… 손을 댔다고? 하지만 그건……."

혼란스러운 놈의 눈동자에 곧 이해가 어렸다.

틈의 세계.

이제껏 없던 존재이기에 세계의 법칙을 피할 수 있었던 건 에른스트만이 아니었다.

하벨은 키득거리며 보란 듯이 손을 돌렸다.

"이제 내 차례야. 내가 네가 가진 모든 걸 빼앗을 차례잖아?"

딸깍.

하벨은 에른스트의 문에 열쇠를 꽂아 돌렸다.

"너의 힘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

"안 돼에에에! 안 된다고오!"

에른스트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절망이 스며들었다. 피부와 숨결과 그리고 모든 곳에 물들어가자 하벨의 눈이 휘었다.

끼이이익.

문이 닫혔다.

놈은 이제 죽지 않는 자가 아니었다.

"절망했는가, 에른스트?"

하벨이 열쇠를 쥔 채 묻자 에른스트가 추욱 늘어졌다. 실이 끊어진 인형 같았다.

키득키득.

하벨의 웃음이 이어졌다. 이런 모습을 볼 줄이야.

"이걸 왜 진작 안 썼냐고?"

에른스트가 묻지도 않았음에도 하벨은 멋대로 말을 만들어나갔다.

"내가 여기서 멈출 거라 생각했어?"

짙은 살기가 단번에 피어나 에른스트에게 쏘았다.

온몸을 짓밟고, 찌르고, 꿰뚫는 그 거대한 힘에 에른스트가 몸을 벌벌 떨었고, 주변이 단숨에 얼어붙었다.

"용의 권능으로 널 추방할 거다."

에른스트의 눈이 커졌다.

자신이 없앴던 것들이 하나씩 자신에게 몰려왔다. 목을 조르고, 숨을 막는 그 손길이 느껴졌다.

"다시는. 어디에서도 네놈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내가 널 막을 거다."

하벨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다시는!"

목소리가 이어 커졌다.

"다시는… 네놈 때문에 이토록 아픈 이들이 나오지 않게 널 죽여버릴 거니까!"

강한 의지와 함께 하벨의 눈동자가 푸르게 물들었다.

강렬하고 아름다운 빛깔이었다.

하벨은 물로 반영구 정화제의 힘에 묶인 놈을 들어 올렸다.

또 놈이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니 최대한 피해가 없게 허공에서 끝을 내야 했다.

"아라야. 날 태워다줄래?"

하벨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아라는 하벨을 덥석 안았다.

하벨이 자신의 품에 가득 들어왔다.

[우오오오옵!]

아라의 눈이 반짝거렸다. 하벨이 너무 작았다.

[대장이 작아아. 이 몸은 너무 신기해.]

이대로 매일매일 하벨을 꼬옥 안아주고 싶었다.

곧 아라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그동안 이렇게 작았던 대장이 짊어졌어야 할 짐이 얼마나 컸던가.

하지만 지금은 울 때가 아니었다.

아라는 땅을 일으켜 하벨을 자신의 등에 태웠다.

"가자, 용용아."

"응!"

칼리우스가 힘껏 대답하며 날개를 펼쳤다.

검고 아름다운 날개가 뻗어져 나왔다.

"다녀올게요."

하벨은 모두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녀오거라."

룬델이 손을 뻗어 하벨의 손을 쥐었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이 손바닥에 뭐 그렇게 많은 걸 담았는지.

"무사히. 다녀오거라……."

룬델은 솟구치려던 눈물을 참았다.

아직 다 지워지지 않은 룬델의 눈물 자국에 하벨은 손을 뻗어 닦아주었다.

"약속했잖아요, 아버지?"

하벨은 손을 뗐고, 에른스트를 바라보며 눈빛을 바꿨다.

지독한 증오밖에 보이질 않았다.

"가자."

아라가 바람을 타고 하늘로 날았다.

"더 높이."

하벨의 지시를 받아 아라는 공기를 밟으며 하늘로 쭈우욱 날아갔다.

"용용아."

하벨은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검은 용이 옆에서 같이 날고 있었다.

얼마나 용기를 냈을까. 그 마음이 어여뻤다.

"예쁜 날개네."

"응. 나도 내 날개가 좋아."

칼리우스는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너무도 좋았다.

"나는 오늘, 이 세계를 지키는 수호자로서 섰어."

에른스트를 바라본 칼리우스는 용으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네… 놈을 죽였어야 했다. 덜떨어진 용 주제에. 네놈이 세계를 지켜봤자 인간들은 이제 네놈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에른스트는 저주를 퍼부었다.

지독하게 다가가 칼리우스의 마음을 후벼 파려고 했다.

"그 두려움은 곧 네놈에게 검을 겨누게 되겠지."

무조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저주를. 겨우 혼자 남은 용이 무슨 힘이 있을까.

"그래도 괜찮아."

칼리우스의 눈빛도 목소리도 차가웠다.

에른스트 따위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굳셌다.

"나는 용이니까. 그 두려움을 해결하는 것도 내 몫이야."

펄럭!

칼리우스의 날개가 더 커졌다.

"신이었음에도 세계를 짓밟으려고 하는 너보다 내가 나아. 내가 더 잘났어."

"물론이지. 애초에 비교할 수도 없는데?"

하벨은 아라의 등에 기대 키득거렸다.

[맞아! 용용이가 최고야!]

아라의 꼬리가 흔들리자 칼리우스는 살짝 웃으며 숨을 가다듬었다.

이 앞에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괜찮았다.

달님이 있고.

친구가 있고.

가족이 있으니까.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이들이여, 듣거라!"

칼리우스의 목소리가 세상에 울려 퍼졌다.

"나는 이 세계를 지키는 유일한 용으로서 모든 종족이 이 세계에 에른스트를 추방하는 안건을 동의해 통과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알리노라!"

절차에 따라 안건이 통과되었음을 알렸다.

칼리우스의 팔에 천천히 회전하고 있는 권능에서 빛이 났다.

"하여 나는 수호자로서 권능을 발휘함을 알리노라!"

그리고 칼리우스는 선언했다.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벅찼다.

따스함이 손바닥으로 스며들었다. 모든 이들의 바람이 손에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아라를 바라보았다.

[용용이 너는 할 수 있어. 이 몸이 알아. 이 몸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걸.]

아라가 다정하게 웃었다.

사랑스러운 자신의 친구.

칼리우스의 눈동자가 하벨에게 향했다.

제 몸도 가누지 못하던 하벨이 어느새 꼿꼿하게 서 있었다.

"지금 모든 용이 너를 지켜보고 있을 거야. 너는 누가 뭐라고 해도 훌륭한 수호자니까."

자신의 달님.

자신의 희망이자 모든 것인 하벨이 상냥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칼리우스는 손을 움켜쥐고는 펼쳤다.

"너를."

글자가 검으로 모습을 바꿨다.

"…안 돼."

에른스트는 저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심판의 검이었다.

"안 돼에! 안 돼에에……!"

할 수 있는 고작 소리를 지르는 것뿐이었다.

"이 세계에서 추방한다, 에른스트!"

푸우욱!

칼리우스의 명령에 따라 심판의 검이 에른스트의 가슴을 뚫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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