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406화 (406/415)

406화. 꽃비가 내린다(5)

* * *

목이 터져나가도록 울부짖고, 토악질하듯 오열했다.

"약… 속, 약속하지 않았더냐."

룬델은 하벨을 꽉 안았다.

랜턴에서 빛이 깃들었다.

하지만 하벨은 눈을 뜨지 않았다.

반짝.

랜턴에서 또 빛이 번쩍였다.

"…하벨아. 하벨아, 제바알. 제발……!"

죽도록 고생만 한 아이였다. 휘말리고, 또 휘말리면서도 다치고 구르면서도 나아가던 아이였다.

"푸하하하."

그런 아이를 누군가 비웃었다.

사아아아.

주변이 얼어붙었다.

룬델은 하벨을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그가 떨어트린 피가 묻은 반영구 정화제를 손에 쥐었다.

콰콰콰콱!

땅이 에른스트를 향해 날을 가시를 드러냈다.

그런 땅을 타고서 넬시아가 에른스트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콰앙!

놈이 몇 번을 굴렀는지 몰랐다.

부딪힌 자리가 굳어가자 에른스트는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또 그 힘이었다.

"또!"

"내 동생으을! 감히!"

넬시아가 증오를 토해내며 날아오다시피 달려와 에른스트에게 다시 주먹을 먹였다.

검은 연기가 에른스트 주변에 퍼졌다.

"죽여달라고 오는데 죽여줘야지."

에른스트는 비웃었다.

이제 달랐다. 저렇게나 흡수할 게 넘치질 않았는가.

"비키거라, 넬시아."

지독한 분노가 뒤에서 서늘하게 올라왔다.

룬델은 칼을 깔끔하게 내밀며 그의 뒤에 거대한 새가 날갯짓하자 검은 연기가 얼어 붙어갔다.

"또 그 힘이라고?"

에른스트는 잡아먹지 못한 힘에 경멸을 일으켰다.

용왕의 약점을 공격하면 모든 게 풀릴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왜……!"

에른스트는 미칠 것만 같았다.

사라지지 않았다.

용왕이.

그가 남긴 것들이 사라지지 않았다.

룬델이 순간 가속해서 에른스트를 향해 복부를 걷어찼다.

검은 연기가 휘감자 룬델은 발끝에 얼음을 퍼트렸다.

[죽여, 룬델! 저 새끼, 죽여버리라고!]

세렌이 식물을 일으켜 에른스트를 잡자 룬델은 에른스트의 목을 뚫었다.

에른스트의 눈이 휘었다.

"어차피 네 새끼도 아닌데 왜 그렇게 요란을 떠는지 모르겠네. 참 이상해."

"내 아들이다!"

룬델은 아버지의 눈으로 에른스트에게 증오를 퍼부었다.

"네놈이 무어라 하든, 하벨은 내 아들이다!"

룬델의 검이 옆으로 사납게 움직였다.

"아주 소중한 내 아들이라고……!"

울분을 토하며 룬델은 에른스트의 목을 베어냈다.

휘익!

타타타!

무언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수십 개의 검이 날아와 에른스트를 꿰뚫었다.

"씹새끼아아!"

카샬이 눈을 부릅뜨며 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하벨이 에른스트 근처로 오지 말라며 명령을 내렸다.

―후방에서도 나를 도울 수 있어. 그러니 거기 있어 줘.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야.

너무도 단호한 그 말에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리를 지켰다.

'아니!'

카샬은 울분을 터트렸다.

'제 자리는 도련님 옆이잖습니까!'

괜찮을 거라며.

다치지 않을 거라며.

그렇게 말했는데.

잠깐 하벨이 거짓말쟁이라는 걸 잊고야 말았다.

수십 개의 검날이 노여움을 터트리듯 춤을 췄다.

휘두를 때마다 자상이 남았다.

곧 다시 회복되어 소용없다는 걸 알지만, 카샬은 움직였다.

바람이 일어났다.

검은 무언가가 날아와 에른스트의 목덜미를 물고는 바닥에 내팽개쳤다.

콰앙!

하지만 분노는 식을지 몰랐기에 또 에른스트를 내팽개치며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몰랐다.

콰아앙!

바닥이 쪼개졌다.

"감히……."

칼리우스가 위대한 용의 모습을 드러내며 살기를 짙게 내뿜었다. 에른스트마저 움찔거릴 정도였다.

"감히 도련님을!"

칼리우스는 포효했다.

이 들끓는 증오를 어떻게 가라앉힐지 몰랐다.

커다란 손으로 에른스트의 몸뚱어리를 잡고 그대로 마법으로 몸을 터트렸다.

하지만 조각난 에른스트의 몸이 얄밉게도 다시 붙었다.

"…용이 살아 있었다고?"

에른스트는 바닥에서 위를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덜떨어진 용이었다. 제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완벽히 성장하지 못한 용.

'그것보다 뭐가 이렇게 다 우르르 나오는 건지.'

번쩍!

빛이 쏟아졌다.

증오스러운 신의 은총이 아닌가.

그 빛에 에른스트가 멈췄을 때 이안이 에른스트를 덮쳤다.

[네놈은 대체! 대체 어디까지 세계를, 사람들을 망가뜨려야 속이 후련한가!]

하지만 공격은 맞지 않았다. 이안은 허탕을 치며 사라진 에른스트의 검은 연기을 바라보았다.

에른스트는 하벨 앞에 섰다.

헤레스가 하벨을 꽉 안았고, 여하가 에른스트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꺼져라, 추악한 괴물아!"

콰앙!

에른스트의 머리가 으깨졌다. 하지만 곧바로 회복됐다.

[안 돼에! 대장에게 다가오는 걸 허락할 수 없어! 이 몸은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구!]

아라가 하벨 앞에서 양팔을 벌렸다. 어느새 실체화가 풀려 너무도 작은 모습이었다.

잠깐, 하벨의 숨소리가 더 약해지자 아라가 고개를 돌렸다.

[…죽으면 안 돼에, 대장. 이 몸은, 이 몸은 그런 거 싫어.]

[꺼지거라, 에른스트!]

이안이 바람과 함께 나타나 에른스트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꺼져!]

[넌 하벨한테 손가락 하나 건드릴 수 없어!]

[죽어! 제발, 죽으라고!]

[널 증오해, 에른스트!]

[하벨을, 하벨을 어떻게 이렇게 할 수가 있어?]

정령들마저 내지르는 소리에 에른스트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지 모르겠네. 봐, 너희의 용왕은 죽어가잖아. 너희를 지키고 또 죽어가네?"

에른스트는 삐꺽거리는 몸을 움직였다.

마지막 기회마저 썼다. 그러니 이게 진짜 마지막이었다.

회복이 더 더뎌졌다. 사실 걷는 것도 어려웠다.

하지만 용왕이 없다면 저들을 죽이는 건 얼마나 쉬울까.

콰앙!

에른스트의 손아귀에 나온 검은 연기가 헤레스와 여하를 덮쳤고, 이어 정령들을 향하자 이안이 정령들을 보호하며 검은 연기를 맞고는 나가떨어졌다.

모든 게 조용해졌다.

추악하게 올라온 검은 연기가 이안을 먹고 있었다.

힘의 차이가 느껴지는 그 자리에서 오직 아라만이 양팔을 벌리며 있었다.

아라는 벌벌 떨었지만, 이안이 걱정됐지만, 꾹 참았다.

"아무도!"

에른스트는 용이 오는 걸 보며 죽음의 바람을 일으켜 다가온 모두를 밀쳐냈다.

닿는 것만으로도 상처를 냈고, 땅이 썩어갔다.

"닥쳐어!"

칼리우스가 이빨을 드러내며 에른스트의 힘을 파괴하려고 했다.

하지만 에른스트는 칼리우스가 쏟아내는 방대한 마나를 먹으며 씩 웃었다.

"……?"

칼리우스의 눈동자에 좌절이 깃들어 흔들렸다.

왜.

왜 닿지 않는가.

칼리우스의 절망감을 비웃듯 에른스트는 여유롭게 명령을 내렸다.

"내게 접근할 수 없도다."

휘이이익!

에른스트가 손을 휘젓자 검은 연기가 불길처럼 치솟았다.

밖에서 정령들이 반영구 정화제를 들고 달려와도 물이 점점 약해지는 지금, 오히려 검은 연기에 압도될 뿐이었다.

[넌, 나빠!]

아라가 밖에 있는 모두를 보며 아랫입술을 올렸다.

다 저 불길한 힘에 다치고 있었다.

"겨우 정령 주제에."

에른스트가 용케도 남은 아라를 비웃으며 채찍으로 된 검은 연기를 휘둘렀다.

팅!

하지만 튕겨 나간 건 검은 연기였다.

"…뭐어?"

[겨우 정령이든 뭐든 이 몸은 너를 용서할 수 없어!]

아라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망토가 나풀거렸다.

[대장한테 오지 마! 아무도 다치게 하지 마! 그럼, 이 몸이 용서하지 않을 거야!]

쩌어어억.

그 소리가 또 들려왔다.

제발.

아라는 빌었다.

"너, 대체 뭐야?"

에른스트는 자신의 힘을 튕긴 저 정령의 존재를 의심했다.

그저 어디에 있는 정령이 아니었다. 신의 힘이 느껴지지 않던가. 대체 왜 저 정령에게.

[이 몸은!]

아라는 에른스트를 빤히 보았다.

그 누구보다 당당하게, 반짝거리는 하벨이 되고 싶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제 숨기는 건 끝이었다.

[정령왕이야아!]

아라가 소리쳤다. 자신은 왕이었다.

"…네가?"

에른스트가 아라를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성장도 못 한 버러지가? 덜떨어진 네놈이?"

에른스트는 천천히 웃음을 지워나갔다.

"밟으면 꿈틀거리는 것도 못 할 주제에 감히 내게……."

[이 몸을 비웃지 마!]

아라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 몸이 다 지켜! 지킬 거야!]

왕은 백성을 지켜야 했다.

자신이 지켜야 할 존재는 누구인가.

지금은 하벨이었다. 하벨 역시 자연에 속한 존재가 아닌가.

아라는 아랫입술을 더 세게 깨물었다.

쩌어어어억.

무언가가 벗겨지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왕은 완벽하지 않아도 돼. 나도 그랬는걸?

하벨이 말하지 않았던가.

매일, 매일 작아서 슬픈 자신을 향해 언제나 자라고 있다고 말해주지 않았던가.

―아주 멋진 권능이네.

아라는 앞발에 힘을 더 꽉 주었다.

―자연을 더 믿어봐. 물론, 여기에서 아라 널 믿는 게 꼭 포함된 걸 잊으면 안 돼.

쩌어억!

아라의 몸에서 껍질이 벗겨지며 빛이 퍼졌다. 달콤한 냄새가 퍼지며 꽃이 피었다.

에른스트는 갑작스러운 빛줄기에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빛이 빙글빙글 돌며 아라의 머리 위를 향했다.

자연이 경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왕이시여!

검은 연기가 아른거리는 와중에 이안이 너무도 또렷하게 보였다.

아라는 눈을 크게 떴다. 이안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힘이 들어오며 이안이 사라지고 있었다.

[싫어어! 이 몸은 싫어! 그러지 마, 이아안!]

…그렇게 왕이 되는 겁니다. 슬픔을 떠안고 나아가는 겁니다.

이안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려왔다. 그는 활짝 웃다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다음 왕이시여. 지금처럼 자연을, 정령을 어여쁘게 보살펴주세요.

이안은 스르르 무너져내리며 꽃잎이 되었다. 그 꽃잎이 검은 연기마저 뚫고 날아와 아라 머리 위에 왕관을 만들어주었다.

용왕님을 부탁합니다.

마지막 바람이 들렸기에 아라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눈물이 떨어진 그 자리에서 꽃이 피어났다.

[이안이… 죽었어.]

바람이 아라의 주변에 맴돌며 아라를 쓰다듬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죽음이라는 게,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게 이토록 무서울 줄은 몰랐다.

"그렇게 슬프면 너도 죽으면 되는 거네?"

에른스트가 히쭉 웃었다.

사납게 날아온 검은 연기가 아라를 힘껏 후려쳤다.

하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웅웅.

바람이 아라를 보호했다.

"…뭐어?"

에른스트는 입을 살짝 벌렸다. 자연이 흡수되지 않았다.

[아니야. 이안은… 여기에 있어.]

아라는 머리 위에 꽃으로 만들어진 왕관을 잠깐 바라보았다.

훌쩍.

아라는 눈물을 닦아내서는 에른스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자연은 약하지 않아!]

아라가 에른스트에게 걸어갔다.

꽃길이 만들어졌다.

진정한 정령왕이 되는 순간 아라는 신이 허락한 권능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았다.

[이 몸이 명령하노라!]

이 힘은 정령왕으로서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내릴 수 있는 가장 큰 힘이자 무서운 힘이었다.

"…뭐어?"

에른스트는 자신의 몸이 이상한 걸 느꼈다.

방금 모든 게 자신을 할퀴듯 아프면서도 따끔거리지 않았는가.

[너를 영원히 자연에서 퇴출한다!]

아라는 정령왕의 권능을 펼쳤다.

눈동자에 초록빛이 피어나 번져갔다.

스으으윽.

선이 에른스트에게 그려졌다.

가위로 오려내듯 에른스트의 주변에 닿는 모든 자연과 흐름이 멋대로 잘려나갔다.

[너는 두 번 다시는!]

아라는 소리쳤다. 눈동자에서 그려진 빛깔이 더 강대해졌다.

모든 자연이 움직이며 같이 분노를 토했다.

"네노오옴! 지금 뭐 하는 거야?"

에른스트는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이 현상에 온몸을 부들거렸다.

멀어지고 있었다.

무언가가 사라지고 있었다.

[자연에게 닿을 수 없다!]

아라의 선고가 내려졌다.

따앙!

머리를 치는 듯한 강한 충격과 함께 연기가 바람 앞에 놓인 촛불처럼 사라졌다.

스걱!

동시에 에른스트의 목이 잘려나갔다.

"이 새끼가아!"

레디나가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다시 방향을 뒤틀어 에른스트의 다리를 잘랐다.

꿈틀거리며 검은 연기가 나오자 레디나는 모습을 감췄다.

그녀가 다시 나왔을 때, 바람을 싣고 놈의 몸통을 길게 베어냈다.

그녀의 눈동자 근처에 핏줄이 곤두섰다.

다 죽였다.

에른스트와 얽힌 이들을 죽이고 이제 왔는데.

"…왜 그러고 있어요, 도련님?"

레디나는 무서워졌다.

헤레스가 울고 있었다.

엘라힘이, 다른 신관들이 다가와 빛의 은총을 쏟아붓건만, 하벨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왜 하벨이 피를 쏟고 있는지 모든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이잖아요? 일어나셔야죠."

레디나의 시선도 눈가에 치솟는 뜨거움 때문에 흐릿해지려고 했다.

"제가 왔잖아요? 놀라게 해주려고… 그랬는데, 저를 놀라게 하면 어떡해요?"

"…허억."

에른스트는 몸이 회복되는 걸 느끼며 숨을 헐떡였다.

아무리 해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폐가 쪼그라졌다.

그의 시선에 아라 있었다.

증오스러운 용왕.

증오스러운 정령왕.

"이 개새끼들이이!"

에른스트는 자신의 힘으로 목소리를 냈다.

자연에 깃든 그 무엇도 닿을 수가 없었다. 바닥이 없고, 공기가 없고, 그 무엇도 없어 이대로 힘을 놓아버린다면 세계 밖으로 튕겨 나갈 게 분명했다.

자연이 닿지 않는 곳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사실상 퇴출명령이나 다름없었다.

그때, 하벨이 손을 들었다.

땅에 솟구친 물이 커다란 입을 벌리며 연기를 삼켜버렸다.

"…에른스트!"

하벨이 눈을 떴다.

그 시선에 에른스트는 물러섰다.

"어떻게……."

모든 한 방을 쏟아부었건만, 어떻게 하벨이 살아 있단 말인가.

에른스트는 검은 연기로 자리를 벗어났다.

도망쳐야 했다.

어디든.

저 물이 닿지 않는 곳으로.

하벨은 사라져버린 에른스트를 보다 시선을 내려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 느낌이었구나.'

세상에 모든 물이 제 손과 발이 되는 느낌이.

이게 용왕이었다.

'미안해요, 용왕님. 역시 이건… 무겁고, 무서워요.'

겨우 일부만 느끼고 있건만 너무도 버거웠다. 세상이 속삭이는 말이 계속 밀려와 머리가 아팠다.

세상이 죽어가는 소리에 묻힌 그 슬픔이 아득해 마음이 너무 쓰라렸다.

등에 산을 지고 있는 이 느낌이 하벨이 매번 느끼던 감각이었다.

그야말로 세상을 떠안고 있지 않은가. 당장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숨이 막혔다. 괴로웠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무거운 짐을 안고 웃었던 거예요?'

눈물이 자신도 모르게 흘렀다.

안쓰러워서.

미안해서.

"도련님?"

헤레스가 눈물을 멈췄다.

하지만 그녀의 눈이 커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하벨의 시선이 달랐다.

하벨이 아니었다.

하벨 티에라였다.

"…도련님?"

"오랜만이야, 헤레스."

장난기가 가득한 목소리였으나, 분위기가 달라졌다.

"…왜 그래요?"

레디나가 조심스레 묻자 하벨 티에라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휘청거리며 다시 주저앉았다.

"진짜 너무 막 썼네. 어떻게 이 몸으로 돌아다닌 거래? 안 아픈 구석이 없어. 너무 아파."

하벨 티에라는 기가 찼다. 하벨은 괴물인가 싶기도 했다.

자신의 영혼이 흐릿해 감각의 극히 일부만 느끼고 있건만, 아파서 멈췄던 눈물이 다 날 것만 같았다.

"왜 헤레스 네가 그렇게 잔소리를 하는지 알겠어. 이 몸 상태라면 거의 초 단위로 잔소리를 들어야겠는데?"

[…대장?]

아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미안해요, 아라 님. 나는 대장이 아니에요. 처음 뵙겠습니다. 하벨 티에라입니다."

실제로 본 아라는 너무도 예뻤다. 하벨이 아끼고 사랑할만했다. 이렇게나 예쁜데 왜 사랑스럽지 않을까.

[대장은… 없어? 대장이 사라졌어?]

아라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모든 게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아, 아니요. 그건 절대 아니에요! 잠깐 충격이 심해서 깨어나질 못해서 너무 급해서 내가 온 거예요."

마지막으로.

이 사태가 끔찍하게도 무너지는 걸 막으러.

"이게… 될까 싶었는데 되네요."

하벨 티에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만큼 하벨이 약해졌다. 아마 에른스트의 공격 때문이겠지.

하벨 티에라는 시선을 돌렸다.

정령들이 보였다. 모두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모두가 자신을 걱정하며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용왕님이 계속 느끼던 시선이 이랬네요.'

누구도 용왕을 걱정하지 않는 이들이 없었다.

저들이 사라질 때 용왕이 느낄 그 아픔이 얼마나 클지 이해했다.

왜 그렇게 이 세계를 지키려 애를 쓰는지 이해했다.

세계가 용왕을 이토록 사랑하니 어쩌겠는가.

"…하벨아?"

룬델의 목소리가 들리자 하벨 티에라는 왈칵 올라온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아버지, 누님, 카샬."

하벨 티에라는 자신에게 다가온 이들을 한 명씩 바라보았다.

"…그리고 형님."

숨을 몰아쉬며 달려오던 라르웬이 그대로 멈췄다.

달랐다.

하벨이 아니었다.

"오랜만이죠?"

하벨 티에라는 눈물 역시 막지 못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너무 아팠다.

가슴이 아프고, 상처가 아팠다. 자신이 멋대로 벌인 일에 저들이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하… 벨아."

룬델이 하벨 티에라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저를… 용서해주세요."

"사랑한단다."

마지막이라는 걸 예감하듯 룬델이 꺼낸 말에 하벨 티에라는 자신 역시 마지막으로 해야 하는 말을 꺼냈다.

"저도 사랑해요, 아버지. 사랑해요, 형님. 사랑해요… 누나."

그 말 이외에 무얼 할 수 있을까.

'……아.'

하벨 티에라는 해야 할 말을 떠올리며 카샬을 바라보았다.

"카샬."

"…예, 도련님."

카샬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가 울고 있었다. 그렇게 옆에 오래 있었음에도 저 모습은 처음 보았다.

"넌 내게 가장 소중한 집사였고."

카샬은 자신의 옆에서 자신을 구하고 죽었다.

끝까지 자신을 걱정했으며 끝까지 검을 놓지 않았다.

"형이었고… 친우였어. 끝까지 고생만 시켜서 미안해, 카샬."

"아닙니다. 부디… 가시는 길이 평온하길 바라겠습니다. 저를… 저에게 또 다른 삶을 주셔서 언제나 고마웠습니다."

눈이 빨갛게 변한 카샬은 마지막으로 하벨 티에라에게 인사했다.

"축하해, 카샬. 너도 이제 정령사네."

하벨 티에라는 쭉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샬이 울음을 터트렸다.

"이제 에른스트를 잡아 올게요. 다들 준비하고 계세요."

처음이자 마지막 전투였다.

"모두, 제 가족이 되어줘서 고마워요."

하벨 티에라는 잔잔히 웃으며 물보라에 휩싸였다.

지금은 용왕이기에 숨을 쉬듯 자연스러웠다.

눈을 떴을 때, 에른스트가 꺼내는 매서운 검은 연기가 눈을 찌르듯 다가왔다.

하지만 느렸다.

'지금까지 용왕님의 공격이 헛된 게 아니었다.'

터무니없을 만큼 느려진 공격에 물이 이를 가볍게 쳐내며 하벨 티에라는 에른스트의 멱살을 단숨에 쥐었다.

"너는, 모든 걸 망친 존재야!"

하벨 티에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세상이 멸망하는 날, 그때 밀려오는 암담함을 어떻게 표현할까.

"네가 세상에 모든 행복을 짓밟았어! 겨우 신이 되고자 한 너의 욕심 때문에!"

"…너는, 누구지?"

에른스트는 하벨 티에라를 보며 물었다.

용왕이 아니었다.

달랐다.

"네가 죽인 용왕을 이은 2대 용왕, 하벨 티에라다!"

하벨 티에라는 에른스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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