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화. 꽃비가 내린다(2)
* * *
"이제… 이제 곧이었다."
에른스트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우산에 꽂힌 채 꺼내는 말이었기에 우스웠다.
"나는 네놈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을 버텨냈다."
감정을 호소하는 에른스트의 얼굴마저 와락 구겨졌다. 그의 눈동자 끝에 눈물마저 맺혀갔다.
그게 너무 역겨워 하벨은 물었다.
"너는 내게 무얼 빼앗았는지는 알고 있어?"
"너는, 네놈으은!"
에른스트는 피를 토하며 소리쳤다.
하벨은 그 피마저 역으로 움직여 놈의 몸속에 다시 쑤셔 넣었다. 에른스트의 눈가에 핏대가 가득 섰다.
"대체 어디까지 나를 방해해야 속이 후련한 것인가?"
"그건 오히려 내가 알고 싶은 말인데? 네놈은 처음부터 내게 걸림돌이었다. 내가 태어나 보았던 세상은 끔찍했으니까."
수족은 정말 괴물이었다.
심심해서 제 자식과 제 부모와 형제를 쥐어패서 죽이거나 뜯어먹는 놈들이었다.
재생도 지금 인어족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며 힘 역시 무척이나 강했다.
괴물이 세계를 지배한 그곳에서 인간과 어인족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그 괴물 밑에서 어떤 삶을 살았겠는가.
살아 있는 식량이었다.
"그 괴물에게 네놈은 결코 쥐여주어서는 안 될 걸 주고 말았다."
하벨은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눈 떠서부터 눈 감을 때까지 살육을 즐기는 악몽 같던 그 괴물에게 놈은 무기를 건네주었다.
더 잘 싸우는 법을 알려주었다.
더 효과적으로 죽이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 세계는 어떻게 흘러갔겠는가. 왜 자신이 다 떠안았어야만 했겠는가.
"네놈은. 신이 되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의 목숨을 앗아가고, 현재를 앗아가고, 미래를 앗아갔다."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지? 내가 잘 누려주면 되는 거잖아! 다시 세상이 재조립될 때 원하던 걸 이뤄주겠다는데 뭐가 불만인 거냐고!"
궤변을 늘어놓는 저 입을 하벨은 찢어버렸다.
찌이익!
"그럼 내가 네 계획을 망친 게 뭐가 어쨌다는 거지? 지금 신이 이 세상을 더 잘 가꾸도록 도우면 되는 거잖아. 네놈은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
그리고 하벨은 한껏 빈정거렸다.
에른스트가 이를 악물었다.
까드득.
까드드득!
"봐. 네 논리에 따르면 이 세상을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돕지 않았던 건 너고, 망친 것도 너이며, 네가 제일 쓰레기인 거잖아?"
"으아아아아악!"
반박할 수 없자 에른스트는 울분에 찬 소리를 내질렀다.
모든 게 괴로웠다.
"내가… 내가 신이 되어야 했다! 내가 이곳을 더 잘 다스릴 수 있어! 내가, 나여야만 했다고! 내가……."
"아니. 넌 신이 될 수 없어."
천천히 비웃는 소리가 에른스트의 귓가에 울렸다.
"이제 절망했는가?"
하벨이 또 물었다.
까드드득!
에른스트가 이빨을 갈다 못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경고했어. 분명히 경고한 걸 잊지 않았겠지?"
그가 발을 내디뎠다. 발에서 퍼진 검은 연기가 꿈틀거리며 사방으로 퍼졌다.
"글쎄. 먹어치워라."
하벨의 손길을 따라 뱀의 형상을 띤 물이 나타나 에른스트의 연기를 집어삼켰다.
"하하하하!"
사라지는 자신의 연기를 보며 에른스트가 비명을 내지르다시피 웃었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직 용왕에게 저주가 남아 있었다. 풀리지 않은 게 느껴졌다.
"죽여주마! 너를! 또! 이번에는 흔적도 없이 지워주지!"
또 껍데기가 바닥에 내려왔다.
―느꼈어요, 용왕님?
물이 물었다.
"느꼈어."
하벨은 기다렸다.
신체를 대체 어떻게 벗는 건지.
놈이 저 육체에 나가면서 어떻게 되는 건지.
방금 놈이 이 육신에서 나가면서 푸른 돌이라 생각했던 것 중 하나의 색이 짙어졌다.
"그게 본체네."
하벨은 이제야 알았다.
―맞아요! 그거에요! 그 이상한 게 갑자기 사라졌어요.
"형님한테 전해. 이제 틈의 세계가 나타날 거라고."
―알았어요!
"류아야."
하벨은 허공을 보며 말했다.
"준비해."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하벨의 귀에는 '알겠습니다.'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우리도 준비하자."
하벨은 물을 재촉했다. 사람의 몸에 무엇이 있는가.
―네?
―자, 잠깐만요. 그건, 그건 많이 아파요!
―맞아요! 저희와 다르다고요. 사람 속에 있는 물은 저희가 아니에요. 다른 물이에요.
아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에른스트가 어디에 있는지 보였다.
"알아. 그러니 서두르자. 놈이 계속 움직이는 꼴이 불안하니까. 일단, 먼저 가서 막아줘. 곧 쫓아갈게."
하벨은 가기 싫다고 망설이던 물을 먼저 보냈다.
부서진 교황청으로 쏟아지는 노을빛을 보며 하벨은 힘을 끌어왔다.
가면 너머로 푸른빛이 세차게 퍼졌다.
조금 전 에른스트가 껍데기를 버리고 도망칠 때, 신체 속에 있는 낯선 물의 파동을 읽었다.
하벨은 전역에 퍼진 물의 파동 중 그 파동만을 읽어냈다.
그들 전부가 물의 저주에 걸린 자이기에 에른스트가 도망칠 구석을 지워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물이여!"
하벨이 파동에 얽힌 물을 전부 흔들었다.
쿠우웅!
강한 압력이 밀려왔다.
"나를 허락하거라!"
수천, 아니, 수만에 가까운 물줄기가 자신의 가슴을 찔러왔다.
―마법사들이 보름달을 준비했어요.
―클로저들이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어요.
―틈의 세계 안에서 유렌이 움직이고 있어요.
―에른스트가 연기를 퍼트려요. 많이요. 비가 지워주고 있어도 모자라요.
그리고 물의 보고가 이어졌다.
―각 나라에 있는 왕들은 곧 준비가 끝날 것 같아요. 오면 보름달을 넘기라고 할게요.
―신관들은 아직 숨을 죽이고 있어요. 혹시 몰라 용용이와 정령들한테 그들 속으로 들어가라고 말해뒀어요.
기특한 일도 하며 자신의 눈과 입과 발이 되어주었다.
'…이러니 내가 멈출 수가 없지.'
―멈춰요!
'아니.'
―위험해요!
'지금 뭐가 더 위험한지 알고 있잖아?'
하벨은 자신을 말리는 물의 소리를 들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행동하지 않았기에 벌어지는 일들을 속이 뒤틀릴 만큼 보지 않았는가.
달라지겠다고 했다.
그러니 더.
그러니 더 빨리!
갈기갈기 찢긴 영혼은 하나가 되었지만, 아직 몸에 안착하지 못했다.
'그래서 뭐?'
그 사실이 우습긴 하나,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다.
'나는 가능하다.'
자신이 누구인가.
주르륵.
입가에 피가 흘렀지만, 수만에 가까운 물이 자신에게 응답했다.
"너희를 갉아먹는 것들을 지워주마. 그러니 나를 허락하거라!"
세차게 찔러온 물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보드랍게 자신을 쓰다듬어주었다.
허락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고맙구나."
하벨은 자신의 눈이 살포시 감기는 걸 느꼈다.
자신을 믿어준 물에게 보답을 해야 할 순간이었다.
하벨 주변에 물이 자연스럽게 일어나 면사포처럼 너풀거렸다.
물과 물을 통해 수만에 가까운 존재의 몸에 자신의 물을 일으켰다.
더럽게 붙어 있는 푸른 돌과 에른스트의 몸뚱어리를 물로써 녹아냈다.
치이이익.
지워지는 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한 명씩 자신의 힘을 남겼다.
가면을 뚫고 나왔던 푸른빛이 멈췄다.
"…하."
하벨은 숨을 몰아쉬며 입가에 묻은 피를 지워버렸다.
'결전지는 에르티안 왕국이어야 한다. 놈을 그쪽으로 데려와야만 한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지만, 바닥에 남은 껍데기를 보며 묵념의 의미로 고개를 잠깐 숙이다 물보라에 휩싸였다.
* * *
보글보글.
눈 앞에 펼쳐진 물보라가 사라질 때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에른스트는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미친."
여유롭게 웃는 에른스트의 모습과 달리 하벨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곳이 어디인지 몰라도 슬퍼하는 목소리마저 끊어졌다.
모든 생명이 다 죽어 비가 내려옴에도 조용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에른스트가 태연하게 꼰 다리를 흔들며 물었다.
분위기가 바뀌었다.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죄송해요, 용왕님.
―연기가, 갑자기 커졌어요. 우리 힘으로는 부족했어요.
―에른스트가 바뀌었어요! 갑자기 존재가 달라진 것만 같아요!
하벨 역시 물의 말에 공감했다. 에른스트를 본 순간 느껴졌던 모든 것이었으니.
"네가 늦게 와서 심심한 나머지 다 죽여버렸잖아."
에른스트가 입가를 핥았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어떤 신인지 말을 하지 못했네."
에른스트는 스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껍데기를 벗겨냈다.
그 속에 검은 존재라 생각할 만큼 서늘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름답지만, 아름답지 않았다.
그저 가시가 가득 돋아난 식물처럼 아찔하며 날카로웠다.
이 땅에 있던 생을 먹어 본래의 몸을 되찾은 것일까.
"나는 삶을 먹는 자."
에른스트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죽음을 내리는 자."
하벨을 가리켰다.
"너에게 죽음을 고하노라."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쿠우웅!
갑자기 형체도 없는 힘이 하벨을 짓눌렀다.
무릎의 힘이 순간 풀릴 뻔했다.
쿵쿵.
심장이 터질 것처럼 멋대로 움직였다.
'웃기지 마.'
하벨이 저항하나, 처음 맞닥뜨린 이 힘은 아주 강한 세뇌를 담고 있었다.
꼭 몸이 멋대로 죽을 준비를 하는 것만 같았다.
'웃기지 마! 내가…….'
푸욱!
어깻죽지에 강렬한 뜨거움이 일어났다.
피가 튀었다.
뽀글뽀글.
―안 돼에!
뒤늦게 물이 방어작용을 하며 제 어깻죽지를 관통한 검은 연기를 씹어 삼켰다.
"푸하하핫!"
에른스트가 배를 잡고 웃었다.
"영혼이 흔들리지? 이건 너라도 손쉽게 저항할 수 없을 거다."
주르륵 흐르는 하벨의 피를 에른스트는 행복하게 바라보았다.
하벨은 비틀거리다 결국, 무릎을 꿇었다.
피는 막았지만, 독이라도 있는지 눈앞이 핑그르르 돌아 금방 목구멍이 뜨거웠다.
"아프지? 아니. 아파야지. 너의 생명이 삼켜지는데 왜 아프지 않을까."
에른스트가 하벨에게 다가왔다.
'독이 아니었다니. 생명이 빨려드는 건가. 그래서…….'
저절로 내려간 하벨의 시선이 에른스트의 옷자락을 향했다.
바닥을 끌만큼 길었던 옷자락이 짧아진 게 보였다.
'…대가다. 놈의 힘은 완전하지 않아. 놈은 완전하지 않아.'
하벨은 그 사실이 참 웃겼다.
신이라 주장하건만, 이마저도 완전하지 못하다니.
57%.
절반은 이미 넘었다.
'에른스트는 죽음을 대가로 사용한다.'
―용왕니이임! 정신 차리세요!
―놈이 다가와요!
물의 재촉에도 하벨은 흐릿한 눈으로 생각했다.
'놈이 생명을 빨아들이는 걸 막아야 한다.'
어떤 방법으로?
'모르겠다.'
하벨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오지 않는가.
"원래라면 죽어야 했거늘, 너도 참 끈질기구나."
에른스트가 찌푸리는 표정보다 하벨은 누군가의 울음소리에 더 이끌렸다.
[…으흑.]
정령이었다. 토끼를 닮은 정령이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왜 저기에.
'왜 도망치지 않았어?'
[죽지 마아.]
'도망쳐.'
에른스트가 잠깐 걸음을 멈춰 시선을 돌렸다.
"…하. 너는 진짜, 과거나 지금이나 이렇게 멍청해서야."
저 정령이 무엇이길래.
저 정령이 뭐라고.
에른스트는 하벨의 멱살을 쥐었다.
물이 일어나 하벨을 감쌌다. 물은 꼭 날을 세운 쥐새끼 같았다.
"이거 어쩌나. 네 주인은 지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데. 이게 보기에는 좀 그래도 엄청 세거든."
암. 엄청 강한 힘이었다.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아주 크게.
생을 잡아먹는 이 힘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가 없었다. 설령, 용왕일지라도.
앞으로 이 힘은 한 번.
그것뿐이었다.
그러니 지금 용왕을 죽여만 했다. 놈이 도망칠 구멍을 다 막아버렸으니.
'놈이… 과거와 달라졌다.'
무엇이 달라졌는지 몰라도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더 위험해졌을지도 몰랐다.
에른스트는 물로 손을 뻗었다.
콰드드득.
물이 얼었다.
치이이익.
자신의 손이 얼고, 녹아도 에른스트는 하벨의 멱살을 쥐었다. 흐느적거리는 모양새가 우습다 싶었다.
놈이 쓴 가면 사이로 피가 흘렀다.
"그래 이 가면이다."
거슬리는 가면 속에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웃고 있을까. 아니면 절망하고 있을까.
무엇이든 기대가 됐다.
―도망쳐!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물이 하벨의 시선을 뺏은 정령을 쫓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죽어가잖아! 이걸 어떻게 볼 수가 있어? 땅아, 바람아, 죽으면 안 돼에! 비가 내리잖아? 아주 깨끗한 비가 내리잖아? 응?]
정령이 울고 있었다.
오염이 지워진 비가 내리는데 자연이 죽어가다니.
[내가 도와줄게.]
정령이 땅을 토닥거렸다.
그 부드러운 손길에 숨어 있던 정령들이 하나둘 나와 땅을 두드렸다.
[우리도 도와줄게. 피어나! 자라나!]
하벨의 눈이 커졌다.
얼굴에 있는 가면으로 에른스트가 손을 뻗음에도 하벨은 그 기적 같은 상황에서 눈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싹이 폈다.
물을 맞고, 싹이 자라났다.
놈의 힘이 퍼진 이곳에서. 분명히 놈의 힘에 잡아먹히는 걸 봤는데, 지금은 달랐다.
검은 연기가 오히려 옅어지고 있지 않은가.
"…나를."
하벨이 입을 벌벌 떨며 움직였다.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그랬다.
놈은 삶을 먹고 죽음을 토했다.
그럼,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삶이다.'
그래서 모든 생명의 힘이 담긴 물에 놈이 녹아내렸던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야만 했다.
물이 준 자연과 생명의 힘을 피울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누구겠는가.
'…정령들이다. 그리고 반영구 정화제였다.'
정령들과 자신의 힘이 합쳐진 반영구 정화제야말로 놈에게 있어 최악의 상성이었을 줄이야.
"도와… 줘, 아라야."
"도와달라니?"
푸하하핫.
에른스트가 웃었다.
"이곳에서 너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망자여."
가면이 벗겨지고 있었다.
툭.
가면이 땅에 떨어지자마자 물이 갑자기 움직였다.
[용왕이시여!]
[대자아앙!]
반짝거리는 두 존재가 물속에서 나타났다.
아라가 하벨을 힘껏 안았다.
[이 몸이 들었어! 이 몸이 듣고 있었어!]
아라의 정령수가 들어오자 하벨을 좀먹어가던 힘이 그의 물과 뒤섞여 녹아내렸다.
[대장, 많이 아파? 괜찮아?]
아라가 에른스트를 사납게 노려보며 물었다.
"…고마워."
하벨은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비틀거렸지만, 하벨은 웃었다.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자신을 보는 에른스트를 향해 손아귀에 단숨에 반영구 정화제를 만들었다.
파사사삭.
반영구 정화제는 그대로 얼어붙어서는 얼음의 힘을 안았다.
하벨은 나아갔다.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에른스트의 가슴팍을 뚫었다.
푸욱!
반영구 정화제에 닿았던 부분이 오미너스처럼 굳어갔다.
파스스스.
'…가설이 맞았다!'
에른스트는 죽음이었다.
이 죽음과 적대적인 건 빛이 아니라 자신과 정령의 힘이었다.
모든 생명을 피우는 힘.
에른스트를 삼킬 유일한 힘.
"…네가."
에른스트가 뒷걸음을 쳤다.
이곳에 정령왕이 나타났다는 사실보다, 뚫린 배가 더디게 낫는다는 사실보다.
"네, 네가아……."
손을 부르르 떨며 하벨을 가리켰다.
"네가아……!"
에른스트는 믿을 수가 없었다.
가슴이 찢기는 이 고통보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더 거대했다.
"하벨 티에라, 네가… 네가……."
참을 수가 없었다.
이 믿기지 않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절망했는가?"
하벨은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절망이 에른스트의 입가까지 다가왔다.
에른스트는 숨을 헐떡였다.
그의 모든 계획에 중심에 있던 하벨 티에라가.
그렇게 손에 쥐고 싶었던 하벨 티에라가.
"…용왕이었다고?"
절망이 에른스트의 눈가를 스치고 가자 하벨은 환하게 웃었다.
"그래. 나였어."
콰드드득.
하벨 주변이 얼어붙으며 에른스트가 얼어갔다.
"그건 말도 안 된다! 이치에 어긋나는 짓이다!"
에른스트의 온몸이 떨려왔다.
자신이.
위대한 자신이 그런 멍청한 짓거리를 했단 말인가.
그건 말이 되지 않았다.
"너는 죽었다! 죽은 자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아!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망자는 기억을 잃어!"
에른스트는 자신이 아는 세상의 섭리를 말하다가 세상의 법칙이 나지막하게 건네는 경고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이건 신마저도 잡아먹을 수 있었으니.
"내가… 네 육신을 조각냈다."
"알아."
"내가 네놈의 육체에 영혼을 쪼개 넣었다!"
"다시 얻느라 고생 좀 했지."
"내가……."
하벨은 에른스트의 뒷말을 들어주지 않고 그대로 물을 일으켰다.
"네가 날 멍청하게 바라볼 때 나는 뒤에서 네 등에 칼을 꽂았어."
하벨의 눈이 휘었다.
"이날을 기다렸다, 에른스트."
다른 손으로 물이 전해준 가면을 다시 썼다.
"네놈이 날 죽인 그날부터. 아주 오랫동안."
물보라를 일으켜 모두를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