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화. 드디어, 드디어!(2)
* * *
모든 걸 내가 했다.
그 말처럼 들렸기에 에른스트는 목에 힘이 들어갔다.
"절망감은 내가 아니라 네놈이 느껴야 맞는 거지."
하벨은 칼리우스의 권능이 발동되기까지 숫자가 점점 올라가는 게 들렸다.
자신이 들을 수 있게 칼리우스가 직접 말해주고 있었다.
'아직 10%라니. 더럽게도 느리네.'
하벨은 일그러진 에른스트의 저 표정에 속지 않았다.
놀람 뒤에 간악한 수가 숨어 있는 게 보였으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에른스트가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오미너스가 에른스트의 지시에 따라 굳어진 부분을 버리고 움직였다.
에른스트가 숨긴 가면이 벗겨지고, 수가 읽히는 순간, 하벨은 웃었다.
'오미너스의 최종 목적지가 바다였다.'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하벨도 조금은 어울려주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이나 에른스트나 아직 가진 패를 까지 않았으니.
지금 자신은 시간을 채우는 게 먼저였다.
아라가 주는 정령수가 저 멀리서 밀려들었다.
하벨은 하늘로 번개를 쏘았다.
첫 번째 신호를 제외하면 사실 이건 신호가 아니었다.
―아라한테 전할게요. 정령들이 쓰는 땅의 힘에 맞춰 보름달을 넣으라고요.
진짜 신호는 물이 아라나 인어족들에게 전해주고, 그들이 주변인에게 전하며 이어지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노골적인 신호는 에른스트에게 얼른 다음 수를 생각해달라고 부탁하는 꼴이 아닌가.
마법사들 앞에 인어족들을 포진시켰기에 자신의 목소리는 그들에게 빠르게 닿았다.
우르르르.
하벨은 땅을 일으켰다.
이어 아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땅이야.
힘찬 그 목소리를 따라 정령들이, 정령 기사들이 룬델의 박자에 맞춰 힘을 사용했다.
땅에서 흙더미로 된 거대한 해일이 일어나 오미너스를 덮쳤다.
마법이 그 속에 섞였다.
"또, 그 마법인가?"
에른스트는 금세 알아차렸다.
'하나 더.'
하지만 하벨은 물에게 하나를 더 지시했다.
―알겠어요!
―에헴, 보름달 추가요!
물이 신난 채로 하벨이 이어준 힘을 통해 그의 말을 전달했다.
곧 허공에서 마법으로 된 화살이 쏟아졌다.
여러 힘이 담겼기에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올 때 꼬리가 길게 이어졌다.
피슈우우웅!
마법과 진짜 화살이 뒤섞인 모양새에 에른스트는 땅에서 오는 공격과 하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오미너스를 바다에 넣으려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하지만 알아봤자지.'
오미너스가 무엇인가.
본바탕은 물이었다. 물이기에 어디든지 갈 수 있었다.
이미 땅으로 파고들어서 바다로 가라는 자신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저 흙더미로 된 해일이 몹시 반가울 정도였다.
저 속에 파고든다면 들킬 염려가 없을 테니까.
에른스트가 더 절박한 표정을 지었고, 하벨은 가면 속에서 입꼬리를 올렸다.
'날 두고 감히 바다로 간다니.'
하벨은 땅에 발을 굴리며 무언가를 사용하는 척했다.
"왜 그렇게 가만히 있어, 에른스트? 혹시 무서워? 네가 그렇게 소중히 생각하던 오미너스가 사라질까 봐?"
"무서울 것 같은가?"
에른스트는 코웃음을 쳤다.
"곧 그렇게 될 텐데?"
하벨은 땅을 일으키는 척하며 모든 물을 향해 명령했다.
'지금부터 누구든 내 뒤를 넘을 수 없다.'
명령이 내려지며 모든 물에게 강한 압박이 몰아쳤다.
쿠쿠쿠쿵!
이는 물인 오미너스도 마찬가지였다.
영혼을 다 모은 자신은 이제 열쇠의 수호자이자 용왕이기에 이 정도 명령은 간단했다.
아니, 아주 작은 명령에 불과했다.
―…어?
오미너스가 어리둥절한 모습이 보였다.
―이거 뭐야? 저길… 넘을 수가 없어. 왜 이러지?
―나도 그래. 몸이 거부하고 있어. 절대로 저길 넘으면 안 돼.
물에 새겨진 명령을 모르는 오미너스의 모습을 보며 하벨은 시간이나 때울 겸 눈속임으로 대충 흙이나 이리저리 옮겼다.
초조함을 드러내며 연기하던 에른스트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차차 알아챘다.
오미너스가 흙을 뚫고 바다로 갔을 시간이 충분했음에도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15%.'
하벨은 칼리우스가 알려주는 퍼센티지를 귀에 담았다.
'아직이다.'
달라지고 있는 에른스트의 변화에 하벨은 계속 긴장했다.
에른스트가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여전히 신이 될 가능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지, 결코 일부러 가만히 있는 게 아니었다.
하벨은 마법이 내려오는 순간을 기다려 오미너스 전체의 목덜미를 정령수로 만든 물로 잡았다.
―이거 놔아! 온다고! 저 이상한 게 와!
마치 지금까지 자신이 막고 있었다고 보이게끔 밖으로 잡아당겼다.
물에 휘감겨 흔들리는 모습은 꼭 실에 매달려 격렬하게 저항하는 연을 보는 것만 같았다.
'20%까지만 가자.'
하벨은 어차피 이 행동이 시간을 많이 끌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놈에게도 머리라는 게 달려 있으니까.
"이제 사라져라!"
하벨은 해일이 오미너스를 휩쓸고, 마법으로 만든 화살이 오미너스를 관통할 때까지 놈들을 잡고 있었다.
공격이 거세진 만큼 단숨에 보름달이 퍼지자 정통으로 이를 맞아버린 오미너스 중 하나는 몸 전체가 돌처럼 굳어져 버렸다.
―안 돼……. 만나야 하는데.
누굴?
오미너스는 사라지며 어렴풋이 스쳐 지나가는 누군가를 그리워했다.
―아아아악!
그 모습을 본 오미너스가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몸을 보호했다.
―이건 싫어어!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생겨버리자 오미너스는 감히 공격성을 드러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저 공격은 지금까지 없었던 공격이었기에 오미너스들은 모든 게 두려워졌다.
신체 일부를 포기해 뒤로 물러났다.
자신들끼리 안으며 정령들처럼 행동하는 모습에 하벨은 너무도 역겨웠다.
저 속에 정령들이 얼마나 있을지 상상이 되질 않았다.
아직 살아 있는 건지.
살릴 수 있는 건지.
하벨은 또 선택에 놓인 기분을 느꼈다.
입가를 핥았다.
"하……."
에른스트는 오미너스의 꼴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게 뭐야?'
머릿속으로 단 한 번도 그려본 적이 없는 모습이 펼쳐졌다.
오미너스가.
가장 자랑스러워야 할 오미너스가, 저딴 공격에 당해서 부서진다니.
'뭔가 이상하다.'
에른스트는 본능적으로 올라오는 이상함에 상황을 주시했다.
세계를 간섭했다고 찍힌다면 두 번은 없기에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한의 이득을 얻어야만 했다.
'방금 오미너스로 저놈을 죽였어야 했는데.'
직접 죽일 수 없는 게 아쉬워 에른스트는 짧게나마 입술을 깨물었다.
오미너스가 부족하면 더 불러오면 그뿐이었다.
아직 많았다.
'아니, 다음번에는 다를 거다.'
지금 계속 경고 단계인 걸 확인한 뒤에 에른스트는 느긋하게 마음을 먹었다.
시간은 자신의 편이었다.
"네놈이 내 앞길을 막는다면야 어쩔 수 없지."
이곳에만 바다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오미너스에게 명령하면 그뿐이었다.
바다로 뛰어들라고.
"이상하네. 난 막은 적 없는데? 원래 네 미래는 막혀 있잖아. 개소리를 참 재미있게 하네?"
하벨은 잠깐 웃음을 터트렸다.
오미너스가 노골적으로 움직이는 게 보였기에 오미너스를 사냥하러 떠난 가면단과 마법사들한테 엄청난 기회가 들어온 게 아닌가.
자신의 지시를 전달할 통역병으로 붙인 인어족에게 얼른 이 사실을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얼른 전하고 올게요!
―위험하고, 아슬아슬한데요. 그래서 되게 정신없는데요, 너무 좋아요!
―나도 좋아요. 행복해요.
실실 웃는 물의 소리가 들려왔다.
하루하루가 이런 분위기였기에 꼭 과거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었다.
물의 기분을 하벨 역시 이해했다.
평소와 달리 냄새부터가 달라지지 않았는가. 이 냄새에 부디 피 냄새가 뒤섞이지 않길.
하벨은 그렇게 바라며 에른스트의 행동을 주목했다.
"좋아. 어차피 이렇게 된 김에 잠깐 말 좀 하자고."
에른스트가 시간을 끌고자 먼저 제안을 꺼냈다.
이는 하벨에게도 몹시 반가운 일이었다.
오미너스를 진화시키려는 에른스트와 권능이 발동될 때까지 버텨야 하는 하벨.
둘에게 시간이 필요했다.
'18%.'
하벨은 숨을 짧게 가다듬었다.
2%만 채우면 1차 목표치를 채우는 게 아닌가.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레 하벨은 공기 중에 떠도는 물을 움직였다.
이곳이 결전지라는 걸 놈이 알게 된다면 반드시 이곳을 벗어나 다른 존재들부터 삼키려 들 테지.
절망이라는 건 무릇 저항할 수 없는 자부터 공략해야 더욱 커지는 법이었다.
"대화라. 이상하네. 애초에 너와 나 사이에 나눌 말이 있긴 한가?"
하벨은 태연하게 물었다.
"내가 너무 흥분했어. 그건 인정해."
에른스트가 오미너스를 뒤로 물리며 손을 들었다.
"그래서?"
"이성적으로 하자고. 이렇게 일을 벌여봤자 남는 게 뭐가 있을까 싶잖아."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지금 너한테 시간을 뺏기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불쾌하니까."
"제안을 하나 할까 해."
"그럼 그 전에 빌어."
"빌라니?"
"이성적으로 하자며? 그럼 네놈이 저지른 잘못부터 시인하고 가야지. 우리한테 지껄였던 말부터 사과하고 출발하자."
자신이 계속 물 마법사라고 지칭했고, 놈이 자신을 물 마법사라 알고 있으니 이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벨은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꿇어."
"…하."
에른스트는 기가 찬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당장 터트려도 시원찮을 놈 주제에.
"충고하지. 자만은 좋지 않을 텐데?"
"자만하게 안 생겼나 모르겠네. 내가 널 여기로 끌고 왔어. 가증스러운 힘으로 레놀드 왕국에 숨어든, 쥐새끼인 널 내가 다 벗겨놨잖아?"
여유가 줄줄 흐른 하벨의 말에 에른스트는 신경이 긁히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가볍게 넘겨도 되는 말일 테지만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 몰랐다.
"후회할 텐데?"
"후회할 짓이라는 걸 알았으면 안 했지. 하지만 후회할 짓을 한 건 너야."
"…후."
에른스트는 이성의 끈을 잡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저 골치 아픈 존재 때문에 계획을 망칠 수 없으니 방법을 이뿐이었다.
"좋다. 다시 되살려주마. 내 넓은 아량을 베풀어."
"누굴?"
"물 마법사를."
"네놈이 죽인 물 마법사 전부를?"
"그래."
에른스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하벨은 웃음을 터트렸다.
어쩜 저렇게 과거와 달라지지 않았는지.
"이걸 세간에서는 '농락'이라고 한다는 걸 못 들어봤나 모르겠네."
하벨은 빈정거리고 또 빈정거리며 에른스트를 할퀴었다.
"아.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내가 하는 일이 지금 너한테 몹시 부담이 되나 봐. 왜 부담이 될까?"
마치 큰 비밀을 알았다는 것처럼 접근하며 말을 끌던 하벨이 곧 떠오르는 생각에 웃음을 삼켰다.
'지시를 변경하자. 모두 물러나라고 전해줘.'
―…정말요?
―그러면 위험한데요?
'괜찮아. 이미 명령도 해제했어.'
오미너스가 계속 바다로 향하는 걸 보자 하벨은 에른스트에게 안겨줄 절망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주 처절하게 절망하며 무너질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나는 그게 너무 궁금한데. 알려줄래?"
하벨이 싱긋 웃자 에른스트 역시 웃는 얼굴을 드러냈다.
"진실은 때론 모르는 게 좋아. 그건 아주 위험할 때가 많단다, 아가야."
"과연 너보다 위험할까? 죽었던 물 마법사들을 모조리 살린다라. 사실 이건 신도 할 수 없을 만한 일처럼 들려서 말이야. 오만한 건 내가 아니라 네가 아닐까 싶어."
"나는 오만해도 되니까."
"왜?"
"궁금하면 기다려봐."
"얼마나? 30분? 1시간 정도면 내어줄 수 있어. 사실 나 오늘 한가해. 아, 이참에 밥이라도 먹고 올까?"
"내 제안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후회할 짓을 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와아. 지금도 내 행동이 널 자극하나 봐? 그게 뭔지 너무 궁금한데. 이참에 사과한 뒤에 알려줄래? 그럼 네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해볼게."
자신이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저 행동이 에른스트에게 너무도 거슬렸다.
모가지를 비틀고 꺾으면 사라질 주제에.
절망감.
그걸 위해 바닷속으로 들어가 그 오염을 먹고 자라난 오미너스로 이곳을 부서트리고, 레놀드도 지워버린 뒤 이제 시엘느로 가서 준비하면 그뿐이었다.
'그럼, 강한 절망감은……?'
에른스트는 생각하다가 가면을 쓴 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없으면 만들면 그뿐이지 않은가.
저놈은 대역으로도 적당하다고 보였다.
"착각하지 마라, 에른스트."
그때, 저놈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정말 왜 이렇게 싫은지 몰랐다. 그냥 저놈에게서 흘러들어오는 모든 게 싫었다.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역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지만, 에른스트는 머릿속에 맴도는 좋은 소식에 즐거웠다.
지금쯤 오미너스가 모두 바닷속으로 파고들었을 테니.
"내가 이번에는 네놈 위에 있다."
하벨은 친절하게 경고했다.
하지만 에른스트는 이를 비웃었다.
무너졌을 거라 생각한 계획이 오미너스 덕에 다시 진행될 테고, 앞으로 밟아야 할 계단이 이렇게 착착 보이는데.
"아가야. 위는 생각보다 높단다."
"이제 됐어."
하벨은 물들에게 작게 속삭였다.
―진짜 됐어요?
―오미너스가 바다로 들어왔는데요? 으, 기분 나빠.
―이제 막는 거 그만 해요? 진짜로요?
하벨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 땅에 에른스트를 위해 만든 벽 역시 준비가 됐으니.
―좋아요. 갑니다!
기대가 가득 묻어난 물의 목소리가 들리고 얼마 안 가 바닷속에서 있던 에른스트의 신체가 자신의 힘에 갈기갈기 찢기다 못해 잡아먹히는 게 느껴졌다.
마지막 한 조각마저 사라지자 바다,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새로운 물이 뻗어 나갔다.
오염된 부분을 모조리 지워버리며 저 수평선까지 재빠르게 뻗었다.
'보름달을 다시 쏟아부으라고 말해줘.'
―알겠어요!
물이 대답하며 마법사들에게 전달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제 지긋지긋한 오미너스는 끝이다.'
바닷속에 있는 오미너스에게, 바닷물을 먹고 자랐던 부분보다 더 많은 양이 덮쳐지자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씹어 삼켜갔다.
절망하는 오미너스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살려달라.
죽고 싶지 않다고.
에른스트가 웃었다.
자신의 절망을 예고하는 웃음처럼 보였다.
그렇기에 하벨 역시 웃었다.
놈의 손아귀를 따라 검은 연기가 그려질 때쯤 헤레스의 마법이 움직였다.
모든 보름달이 칼리우스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칼리우스의 마법이 움직였다.
'지금이다!'
하벨이 칼리우스와 신관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검은 연기를 뚫고 등장한 오미너스를 반기듯 하늘에서 빛줄기가 쏟아졌다.
노을이 진 하늘을 새하얗게 물들이며 신의 은총이 오미너스를 굳혔다.
그 위로 보름달들을 가득 나타나 떨어져 내렸다.
쿵!
그리고 하벨은 오미너스가 나가지 못하게 물로 만든 벽을 닫았다.
탁!
보름달에 중력이 합쳐지자 마치 우박처럼 무차별적으로 이미 다 쪼개지고, 굳어 있던 오미너스를 가격했다.
콰콰콰콰콰!
그리고 사납게 울어댔다.
'헤레스!'
하벨은 웃었다.
보름달이 오미너스를 이 땅에 지워버리고 싶었던 헤레스의 분노와 설움을 토하는 것만 같지 않은가.
'보고 있는가?'
에른스트의 얼굴에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건 절망감이었다.
놈이 무얼 하기도 전에 이미 팔랑거리던 오미너스가 일방적으로 보름달에 두들겨 맞았으니.
'네가 해낸 거다! 네가!'
―이러지 말아요…….
파파파파팟!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자신의 물에 녹아내린 오미너스는 마법을 저항할 힘이 없었다.
―당신이, 당신이… 누군지 이제 알아요.
굳어지고.
파파팟!
또 굳어져 그 끝이 드디어 보였다.
―우리도 계속 기다렸어요. 이 허덕이는 배고픔에 미쳤지만, 쭉. 쭈욱, 기다렸어요.
오미너스의 목소리에 슬픔이 가득했다.
파파파팟!
―…용왕님. 우리의 유일한 분이시여.
그 이름에 하벨은 오미너스를 지켜보았다.
풀 한 포기처럼 여리고 작은 모습이 되었을 때까지 보름달은 계속 내려와 오미너스를 삼켜버렸다.
―그러니 우리를, 우리도.
작은 손이 하벨을 향해 뻗어갔다. 손가락 끝에 애달픔이 보였다.
―사랑해주세요. 한 번이라도 좋으니 쓰다듬어주세요. …네?
간절한 바람을 담았지만, 하벨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오미너스는 딱딱하게 변했다.
바람이 하벨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적어도 이렇게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벨은 눈을 깊이 감았다. 오미너스가 저지른 행동만큼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손을 뻗지 않았다.
하벨이 눈을 떴다.
모든 보름달이 떨어졌을 때.
땅을 적셨을 때.
하벨은 거센 바람을 일으켰다.
바스스스.
에른스트가 사용하려고 했던 최고의 수가 가루가 되어 훨훨 날아갔다.
에른스트의 눈이 커졌다.
천천히 시선을 옮긴 하벨이 에른스트를 보았다.
"절망했나?"
하벨이 물었다.
"절망했는가, 에른스트?"
또 물으며 웃었다.
나풀거리는 바람에 하벨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