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99화 (399/415)

399화. 드디어, 드디어!

* * *

* * *

귀가 쫑긋거렸다.

조금 떨어졌을 뿐이지만, 아라는 하벨이 너무도 보고 싶었다.

물보라가 일어나며 등장한 하벨을 향해 아라가 달려들었다.

[대자아아앙!]

아라가 하벨의 목을 꽉 쥐며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이 몸은 대장이 너무 보고 싶었어!]

"나도 그래, 아라야. 이제 괜찮아?"

[응응! 정령들이 이 몸한테 힘을 나눠줘서 이 몸은 이제 괜찮아!]

아라는 배시시 웃으며 하벨의 체온을 더 오래 느꼈다.

"잘했어, 아라야."

[이 몸이 뭘 했는지 대장이 보고 있다고 물이 알려줬어. 진짜 보고 있었어?]

"보고 있었어."

[우와아아.]

잠깐 상체를 세운 아라가 눈을 반짝거렸다.

[있지, 대장. 이안도 왔다? 대장이 그곳에서 이안을 꺼내줬다는 말을 들었어! 이 몸은 그 이야기를 듣는데 막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대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하벨은 아라를 칭찬을 이어 정령들과 함께 둘러싸인 이안을 바라보았다.

정령들을 하나씩 안아주는 이안의 눈동자에는 행복함밖에 없었다.

얼마나 좋으면 저럴까 싶어 하벨은 마음이 짠했다.

"내가 너를 더 빨리 풀어줬어야 했어."

이안에게는 이제 시간이 없었다.

원래라면 아라에게 힘을 넘겨준 뒤에 사라져야 하는 게 맞지만, 아라가 불안하게 태어난 바람에 이안은 기약 없는 기다림을 이어나가야 했다.

하벨을 바라보자마자 활짝 웃던 이안이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울지 마."

하벨이 손을 뻗자 이안은 고개를 숙여 하벨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저는… 지금도 너무 행복합니다. 햇살을 보았습니다. 바람을 느꼈습니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만나고 껴안고 바라보았습니다. 이미 이렇게 기쁜데 왜 미안해하십니까?]

이안의 갈기가 바람을 따라 흔들렸다.

에른스트가 자신을 가둔 그곳에서 계속 죽어갈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저 죽기 전에 아이들을 봤으면 했다.

그걸 이뤘는데, 이렇게도 고마운데. 이분은 뭘 그렇게 미안해하고 있는 걸까.

"이안. 미안한데."

[미안해하지 마십시오. 저한테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기 서명 좀 해줄래?"

하벨은 칼리우스가 펼친 책을 가리켰다.

[…저건 뭡니까?]

[이 몸은 알아! 용용이의 권능이야!]

아라가 앞발을 높이 올렸다.

이안의 시선이 칼리우스에게 향했다.

[용용이, 그러니까… 용의 권능이란 말이죠?]

"맞아. 에른스트를 이 세계에서 쫓아내려면 정령왕의 서명이 필요해. 이안과 아라. 너희 둘이 합쳐서 하나니까."

하벨의 제안에 이안이 멈칫거렸다.

[그걸 제가 서명해도 되는 겁니까?]

"세게 휘갈겨. 사인 말고 에른스트 욕 써놔도 돼. 넌 그래도 되니까."

기껏 멈췄던 이안의 눈에서 또 눈물이 떨어졌다.

"왜 울어? 욕을 쓰는 게 그렇게 좋았어?"

하벨의 시선이 조심스러워졌다.

[그저. 그저… 제 흔적이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습니다.]

[그럼 이안이 먼저 해. 이 몸은 조금 기다릴 수 있어.]

책으로 다가갔던 아라가 뒤로 물러나 책을 가리켰다.

[그런데… 제가 쥐기에 펜이 작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안은 앞에 둥둥 뜬 펜을 바라보았다. 손톱으로 잡아야 할까.

[…아. 너희가 있었구나.]

곧 땅과 바람이 속삭이는 말에 이안은 기분 좋게 웃었다.

땅이 일어나 긴 막대기처럼 이안 앞에 만들어졌다.

그 막내기는 펜을 쥐었고, 이안은 두껍고 긴 막대기를 쥐었다.

에른스트 쳐죽일 새―

책에 신나게 서명하다가 이안은 멈칫거리며 아라를 바라보았다.

반짝반짝한 눈빛을 보니 차마 다음 말이 써지질 않았다.

"왜 그래? 화끈하게 적어."

[아라가… 따라 쓰면 어쩌죠?]

이안이 하벨에게 속닥거렸다. 그제야 하벨은 멈칫거리더니 덩달아 아라를 바라보았다.

[…응?]

솜구름 같은 아라를 보자 하벨은 잠깐 눈을 감고 집중했다.

이건 심각한 문제인 게 분명했다.

"새대가리라고 이어 쓰면 어때?"

[좋습니다. 아주 명쾌한 답입니다. 역시 용왕님입니다.]

이안은 밝게 웃으며 새대가리를 이어 썼다.

에른스트 쳐죽일 새대가리.

제법 그럴듯한 말이 완성되어 이안이 뒤로 물러서자 아라가 손에 꼭 쥐고 있던 펜을 흔들며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이 몸이 하면 되는 거지?]

아라가 배시시 웃었다.

"그래. 아라 네 차례야. 네 이름을 써도 되고, 이안처럼 말을 써도 돼."

[그럼 이 몸은.]

아라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모두가.

한 자 한 자 꽉꽉 눌러 담으며 써 내려가다 아라는 어쩐지 슬픔이 몰려왔다.

행복하게!

책에다가 행복을 썼지만, 아라는 울상을 지었다.

[이 몸은… 아무도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잠깐 미뤄왔던 현실이 화악 밀려왔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이건 전쟁이 아닌가.

아라는 알고 있었다.

그 전쟁의 중심에 서려고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하벨이라는 걸.

[이 몸은,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아라는 하벨을 안았다.

토닥토닥.

하벨은 아라를 쓰다듬었다.

『정령왕임을 인증.

용이 제시한 '신이었던 자, 신이 되고자 했던 자, 에른트스의 영원한 추방을 명한다'라는 제안에 서명해 동의함.

권능을 발동.

.

.

.

실패.

열쇠의 수호자의 ####이 필요합니다.』

여전히 저 글자가 마음에 걸렸지만, 하벨은 일단 진행하기로 했다.

"용용아."

하벨은 자신을 가리켰다.

"이제 내 저주를 풀어줘도 돼."

뭘 더 숨기겠는가. 에른스트를 건드렸으니 이제 모든 게 시작이었다.

"응. 알았어."

칼리우스는 손아귀에 모든 마나를 꾸욱 찍어서는 하벨의 저주를 지키고 있던, 에른스트가 건 마지막 글자를 지워버렸다.

이미 거의 다 풀린 저주였기에 조금 더 홀가분해진 것 이외에는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아직 영혼이 몸에 적응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었다.

이 몸은 용왕이되, 용왕이 아니며 기존에 전혀 다른 영혼이 깃들었던 몸이었으니.

스윽.

칼리우스의 손이 계속 움직였다.

"왜 계속 움직이는 거야?"

하벨이 묻자 칼리우스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를 꺼냈다.

"저주는 없는데, 있는 척할 거야. 이거 얼마 안 가. 그래도 눈속임이 있으면 좋잖아?"

"아주 좋은데?"

하벨의 칭찬에 칼리우스는 해맑게 웃었다.

하벨은 펜을 쥐었다.

서명하려고 하던 차에 책에서 글자가 떠올랐다.

『열쇠의 수호자는 서명이 아니라 열쇠를 열어 허락해주십시오.』

하벨은 얼굴을 찌푸렸다.

####로 된 글자가 고쳐졌지만, 뭔가가 더 남아 있었다.

'무슨 절차가 이래?'

칼리우스의 말을 따르자면 이미 신한테 권능을 허락받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또 자신이 가진 열쇠의 힘까지 사용해야 한다니.

'망할……. 권능만 믿고 설쳤으면 큰일 날 뻔했잖아.'

권능이라는 게 생각한 것보다 복잡한 힘이라는 걸 알았다.

자신이 가진 권능보다.

하벨은 열쇠를 떠올리며 손에 무언가를 쥐는 형상을 했다.

'열쇠가 사용되면 다른 열쇠를 꺼낼 수 없다는 게 걸리는데.'

반짝이며 나온 열쇠에 정령들은 물론 칼리우스와 아라 역시 먹이를 바라는 귀여운 동물처럼 바라보았다.

하벨이 열쇠를 손아귀에 쥐는 순간, 책에 조그마한 문이 보였다.

열쇠 구멍을 향해 찔러넣자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딸깍.

『열쇠의 수호자가 이 제안을 허락했습니다.

문이 열리기 전까지 열쇠를 넣어주십시오.

문이 열리기 전까지 1%.

.

.』

"뭐어……?"

하벨이 얼굴을 구겼다.

딱 보아도 혹시나 잘못된 제안을 했을 경우를 대비해 시간을 많이 설정한 모양인데 지금 상태에서는 좋지 않았다.

'가뜩이나 바빠서 …없다.'

하벨은 생각하다 말고 멈췄다.

'…놈이 없다.'

순간 소름이 돋아났다.

계속 지켜보고 있었지만, 에른스트가 사라졌다.

하벨은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물의 시선을 따라갔다.

'미친.'

하벨은 말을 꺼내기보다는 힘을 사용했다.

다급하게 일어난 물보라가 모두를 삼켜버렸다.

[…대장?]

놀란 아라의 표정을 외면하며 하벨은 가면을 썼다.

모두가 사라진 그곳에 검은 연기와 함께 손아귀가 튀어나왔다.

파스스스스.

놈의 등장에 모든 게 죽어갔다.

나무도, 풀도, 땅도.

이 행동이 세계의 간섭에 걸릴 걸 알면서도 에른스트가 힘을 사용하는 모습이 웃겼다.

일부러 딴 길 새지 말고 자신의 힘을 뿌렸긴 했어도 진짜 따라올 줄이야.

그것도 이렇게 빨리.

"감히……."

에른스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네놈이!"

하벨은 에른스트의 손아귀를 피하며 놈의 멱살을 쥐었다.

단숨에 같이 물보라에 휩싸이더니 레놀드 왕국 마법사의 탑이 보였다.

어차피 여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이곳에 있던 모든 마법사가 에르티안 왕국에 왔으니까.

하지만 여기에 클로저가 있었다. 라르웬이 있었다.

'보세요, 형님. 놈이 왔습니다.'

그대로 멱살을 잡은 채로 내리쳤다.

'보거라, 레놀드 왕국의 백성들이여. 네놈들의 적이 왔다.'

콰과과과광!

물의 힘을 가득 실었기에 에른스트가 마법사의 탑에 부딪혔다.

'미안하다, 헤일리스.'

하벨은 마법사의 탑이 와장창 부서지는 모습을 보며 그대로 물을 일으켜 힘껏 발길질하듯 눌러버렸다.

쿠우우우우웅!

거대한 소리를 들으며 에르티안 왕국으로 돌아온 하벨은 정령수를 이용해 번개를 내리쳤다.

우르르 쾅쾅!

마른하늘의 번개같이 신호로 사용하기에 좋은 게 어디 있을까.

자신의 신호가 떨어지자 모두가 분주히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칼리우스가 당황하지 않고 마법부터 펼치며 마나를 움직이는 게 보였다.

아라와 이안은 서로 말을 나눴고, 클로저와 라르웬이 신호를 알아채 서둘렀으며, 넬시아는 당황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반영구 정화제를 옮기는 작업을 이어나갔다.

'가면단과 마법사들도 준비가 됐고, 신관들 역시 뒤에서 대기 중이다.'

준비는 급한 대로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벨은 뒤를 돌았다.

―떨리세요?

"그래."

―이번에는 달라요. 아시죠?

"알아."

하벨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자신의 뒤에 넘실거리는 바다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달라야지.'

무조건.

여기에 어떤 이유도 덧붙일 수 없었다.

그래서 바다를 선택했다.

자신이 처음 에른스트를 목격한 곳도, 죽었던 곳도 모두 바다였으니까.

검은 연기에 휩싸여 놈이 나타났다.

쿵쿵.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겉가죽은 덮고 온 걸 보니까, 다 들통이 났나 봐."

능글맞은 하벨의 목소리가 에른스트의 귀를 찔렀다.

놈이 얼굴을 일그러트리자 하벨은 더 놀리고 싶었다.

"왕자님이 이래도 돼? 먼지투성이나 다름없네."

"네놈이었나?"

에른스트가 으르렁거렸다.

"내 힘을 좇아오라고 대놓고 뿌렸지만, 진짜 찾아올 줄은 몰랐네. 멍멍아."

하벨이 이리 오라는 듯이 손짓했다. 에른스트의 얼굴이 더 구겨졌다.

"네놈한테서… 물의 냄새가 난다."

"역시 개였네. 혹시 다른 냄새는 안 나? 너 만난다고 꾸미느라 이것저것 뿌렸는데."

"물 마법사가… 또 나왔다는 건가?"

"글쎄. 내가 왜 알려줘야 하나 싶은데."

"그래. 이제야 알겠네."

에른스트는 웃었다.

모든 게 다 해결이 됐다.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자신에게 증오를 퍼부을 놈이 누가 있겠는가.

"생존자가 있었던 거야. 치우고, 치워도 목숨줄 하나 더럽게 질긴 물 마법사가!"

처음에 하벨 티에라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틈의 세계에 빨려 들어가지 않았는가.

그 누구도 자력으로 탈출하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저놈은 물 마법사가 아니었다. 정령사인이 마법사인지 헷갈렸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마법사가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래. 그걸 이제야 알았어?"

적당히 맞장구쳐준 하벨의 반응에 에른스트가 웃었고, 하벨은 진짜 화가 났다.

물 마법사의 후손이 아직 살아 있었다.

이 땅, 에르티안에 물 마법사의 후손인, 마법사 협회장, 헤일리스가 살아 있었다.

―저는 늘 감사드리고 있어요. 사라진 그 이름을 도련님께서 이어주셨으니까요. 그것만으로 만족합니다.

헤일리스가 자신에게 본인이 물 마법사의 후손이라고 말했을 때,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 몰랐다.

애초에 물 마법사가 왜 사라졌겠는가.

모두 에른스트 때문이었다. 놈이 물을 더럽혔기에 물이 응답할 힘조차 없었겠지.

"이 더러운 족속들! 하지만 이거 어쩌나. 너희의 용왕은 이미 죽었다! 내가 죽였지!"

에른스트는 분노를 터트렸다.

지긋지긋한 놈들.

죽기 전까지 자신을 그렇게 저주하더니. 여기 이렇게 쫓아올 줄이야.

세계의 간섭에 벌써 노란불이 켜졌다.

하지만 마차에 가만히 갇혀 있을 순 없었다.

계획은 이미 자신이 마차에 갇혔을 때부터 뒤틀렸다는 걸 알았다.

이유가 무엇이든 이 세계에 절망감을 주기만 하면 되기에 다른 계획을 들고 오면 그만이었다.

자신에게는 그 해답이 손에 쥐어져 있었고.

"알아."

분명 자극하면 화를 낼 거라 생각한 것과 달리 달 무늬 가면을 쓴 저놈은 평온했다.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런 말 하지 않아도 돼."

"절망감을 느껴보았나?"

에른스트가 낄낄 웃었다.

"느껴봤지."

"아니. 네가 아는 절망감과 다를걸?"

에른스트는 양손을 들었다.

쭉 펼친 손가락이 부드럽게 접어지자 땅이 흔들렸다.

"네가 물 마법사라 바다를 등에 업겠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넌 장소를 잘못 골랐단다, 아가야."

검은 연기가 주변을 휩쓸자 생명을 빨린 것처럼 모든 게 바스러졌다.

그리고 오미너스가 검은 연기에 휩싸여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도 없앴건만, 남아 있는 오미너스는 에른스트의 졸병이 된 것처럼 인간의 모습을 해서는 하나씩 걸어 나왔다.

하벨의 두 손에 번개가 어렸다.

"그래. 전기가 본디 물에도 통하니. 좋은 생각이야."

에른스트는 키득거렸다.

하지만 이건 보통 물과 달랐다. 오미너스는 시렌이 만든 걸작이었다.

자신의 힘을 흉내를 내 만들었다고 하는데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오미너스는 그저 자신의 계획을 아름답게 꾸며줄 모든 것이었다.

'멍청한 놈.'

에른스트는 주변에 숨은 놈들의 기척을 느꼈다.

몇인지 몰라도 기습할 게 분명했다.

'틀렸다.'

웃음이 났다.

'너는 틀렸다.'

오미너스가 향할 마지막 방향은 저 물 마법사가 아니라 바다였다.

오염된 물이 가장 많은 곳은 바로 바다였고, 오미너스가 저 바다를 흡수할 만큼 정령들을 먹이며 자라나게 했다.

이제 충분히 자라나지 않았는가.

'절망하거라.'

에른스트의 손가락이 앞을 가리켰다.

파지지직.

하지만 하벨의 손은 하늘을 향했다.

에른스트는 이 미묘한 움직임에 잠깐 시선을 주변으로 돌렸다.

대체 뭘 하려는 건지 몰라도 오미너스를 없앨 수 있는 건 없었다.

애초에 오미너스를 아는 존재는 소수였고, 설령 마법사 협회에서 이를 밝혔다고 한들, 이걸 바로잡을 수 있는 건 오직 시렌뿐이었다.

그리고 시렌은 자신을 흠모했다는 걸 왜 모를까.

설령 자신에게 등을 돌렸다고 해도 오미너스를 파훼할 방법을 찾을 시간 자체가 턱없이 모자랐다.

"발버둥 치지 마라."

가소로운 듯 에른스트의 입꼬리가 뒤틀렸다. 하벨을 보는 에른스트의 눈빛에 즐거움이 가득했다.

"네놈이 느낄 건 감히 내게 도전한 후회뿐일 테니."

"도전이라."

하벨은 우스웠다.

자신의 신호에 마법사들이 마법을 시전했고, 이걸 칼리우스가 모조리 차단했다.

"모든 질서를 바로잡는 걸 왜 도전이라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네."

딱딱.

하벨 주변에 바람이 일어났다.

아라와 이안이 정령들을 다독이며 바람을 일으키는 게 눈에 보였다.

마법이 날아왔고, 정령들의 바람이 마법에 실렸다.

마지막으로 에른스트와 자신 사이에 얇게 펼친 하벨의 물이 사라지자 에른스트는 뒤늦게 반응했다.

"……?"

피슈우웅!

바람을 실은 마법이 땅을 씹을 먹을 기세로 떠내려왔다.

에른스트가 이를 갈았다.

진작 죽였어야 했는데. 망할 마법사.

"씹어먹어."

에른스트가 오미너스에게 명령했다.

―싫은데.

―맞아. 얘 되게 싫어. 뭔가 짜증 나.

오미너스는 서로를 바라보며 숙덕거렸다. 그들이 움직이지 않자 에른스트는 다시 재촉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뭐가 잘 안 된 모양이야?"

하벨조차 예상치도 못한 오미너스의 반항에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오미너스가 순순히 말을 들을 거라 생각한 것부터 우스웠다.

하지만 하벨은 다가오는 마법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에른스트라면 분명히 무슨 수법을 썼을 테니까.

―배불리 먹게 해준 건 좋은데, 역시 싫네. 기분 나빠.

오미너스가 에른스트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우리 말도 못 듣는 주제에.

―나는 차라리 저 인간이 좋아.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뭔가 좋아. 너무 좋아. 가지고 싶어.

"명령이다."

에른스트가 검은 연기를 뿌리자 오미너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싫어어! 그 힘이야!

―역겨워! 토악질 나올 것만 같다고!

―죽여버릴 거야!

오미너스를 감싼 저 힘은 아무래도 레놀드 왕국에서 보였던 세뇌의 힘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잘못된 판단이다.'

세뇌의 힘으로 뛰쳐 올라간 오미너스가 공중에 퍼져 저 공격들을 삼키려고 했다.

폭격기처럼 땅에 떨어지는 마법들이 오미너스에게 닿았다.

소리가 물에 잠겼다.

와구와구.

마법을 씹어 삼키는 것처럼 보였지만, 저 마법 속에 보름달이 숨어 있었다.

파드드드득!

보름달이 퍼져나가며 오미너스의 속에서부터 굳어버렸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보름달이 오미너스 속에 퍼지자 마치 석영이 생겨나는 모습을 빠르게 보는 것처럼 돌같이 무언가 생겨났다.

―끄아아아악!

오미너스들이 비명을 질렀다.

에른스트의 눈동자가 조금 길게 머물렀다.

저게 뭐냐는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하벨은 웃고 싶었지만 참았다.

다음 수를 생각해야만 했다.

놈은 자신의 뒤에 있는 바다를 보고도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됐다는 그 표정을 짓지 않았던가.

"이게 대체 뭐야?"

에른스트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렸다.

오미너스가 저 마법에 닿자 돌이 되고 있었다.

뒤이어 몰려온 바람에 바스러지기까지 하자 에른스트는 사태를 우습게 보지 않았다.

오미너스가 죽어가고 있었으니까.

이는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와. 바스러지는 모습이 참 예쁘네. 그렇지, 에른스트?"

그때, 하벨의 말이 에른스트의 귀를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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