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98화 (398/415)

398화. 회의(3)

* * *

왕이, 에르티안 왕이 고개를 조아린 그 사실에 다른 왕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고개를 올린 바안은 하벨을 보자 올라온 웃음을 꾹 참았다.

자신이 회의장으로 가기 전에 깜박했다며 물보라와 함께 나타난 하벨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인사를 나눈다고 좀 바빠져서 까먹었는데 놀라실까 봐 미리 말씀드릴게요.

이미 이렇게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랐는데 또 놀랄 일이 설마 있을까 싶었다.

―여하 있잖아요. 제 호위 기사요.

좀 무뚝뚝하게 보였지만, 일단 호위 기사였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여하는 인어족의 왕이에요.

짜잔.

그런 효과음이 뒤에서 들리는 것만 같지 않은가.

왕이 호위 기사라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그리고 칼리우스 말이에요.

이때 마음을 졸였다.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 긴장했다.

―용이에요. 마지막 남은 용이자 세상의 수호자예요.

배시시 웃으면서 꺼낸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진짜 등이라도 때려주고 싶었다.

"고마워, 바안."

칼리우스가 앞으로 걸어왔다.

"나는 용이야. 용이기에 이 세상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

칼리우스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얼굴을 덮은 이 가면이 정말로 하벨 말대로 자신을 지켜주는 것만 같았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아도 괜찮아. 그런다고 너의 절실함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야. 부담스럽다고 생각하면 그럴 필요 없어. 가면이 널 지켜줄 거야.

"내 권능을 쓰기 위해서는……."

"아니. 다들 진짜 용이라고 믿는 겁니까?"

드란트는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이 회의 자체가 마치 누군가의 손에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바로 저 달님의 손에서.

"얼굴도 드러내지 않는 저 겁쟁이가… 허억."

드란트는 갑자기 자신을 누르는 힘에 질겁했다.

거대한 존재 앞에 선 느낌이었다.

"나는 용이야."

칼리우스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저 말을 그냥 흘려듣지 않았다.

자신이 용이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던가.

그 소중한 시간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고 싶지 않았다.

마나로 드란트를 억압했다.

"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용. 내가 용이라는 걸 증명해야 한다면 힘으로 증명해줘야겠어?"

툭툭.

하벨이 가볍게 칼리우스의 손을 쳤다.

"괜찮아. 그 정도만 해도 됐어."

"응."

칼리우스는 마나를 거뒀다.

하지만 살짝 올라온 화는 식지 않았다.

"드란트. 나를 부정하지 마. 그러면 나는 화가 날지도 몰라. 내 화가 어디까지 미칠지 시험하지 마."

드란트는 섬뜩함과 동시에 피부를 자꾸만 스치는 어떤 손길마저 느껴져 웅크린 쥐처럼 칼리우스를 바라보아야 했다.

자신이 건드리면 안 될 존재를 잘못 건드렸다는 게 느껴졌다.

"드란트 전하. 괜히 저 때문에 날 세우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애초에 레놀드 왕국을 세뇌한 이유가 용을 죽이기 위해서였으니까요."

까드득.

하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레놀드의 왕 샤르비에가 이를 갈았다.

본디 용의 나라라 불리던 곳이었음에도 이 꼴이 되어버린 건 에른스트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지금 저 용이 달님 옆에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옆에 서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미친 듯이 늘어났다.

"내 권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지상에 사는 너희들의 대표가 필요해. 바닷속에 사는 여하는 이미 자동으로 대표야."

칼리우스가 양손을 펼치자 왕들 앞에 종이와 펜이 나타났다.

"이 자리는 달님이 나를 위해 만들어줬어. 지상에 있는 사람들의 대표를 뽑으려면 이미 사람들의 대표인 왕이 뽑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

"대표를 뽑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바안이 묻자 칼리우스는 떨림을 숨기려 숨을 조금 더 깊게 들이마셨다.

"내가 내민 제안에 서명하면 끝이야."

"그럼 그 전에 어떤 제안을 내미실지 말씀하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샤르비에가 조심스레 제안하자 칼리우스는 저번에 하벨한테 보여주었던 책을 꺼냈다.

칼리우스의 마나가 그의 손바닥 안에서 반짝거리며 춤을 추자 날을 세웠던 드란트마저 시선을 빼앗겼다.

"이건 마나야."

칼리우스가 꺼낸 말에 여하는 흥미를 드러내며 지켜보았다.

마나가 모여 모형을 이루고 글자를 만들어나갔다.

―신이었던 자, 신이 되고자 했던 자, 에른트스의 영원한 추방을 명한다.―

칼리우스가 마지막으로 손바닥을 뻗자 글자가 책에 스며들었다.

"내가 너희에게 꺼낼 제안은 이거야."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제안이었기에 회의장에 깔렸던 차가움이 조금은 덜어졌다.

"저들이 대표를 뽑을 사이에 내가 먼저 서명하겠소."

여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내 살얼음판 같은 이곳에서 얼른 일어나고 싶었으니까.

게다가 자신은 이미 바닷속에 사는 인간들의 대표였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용이시여."

샤르비에는 펜을 놀리려다 말고 조용히 입을 뗐다.

"그 대표가 꼭 우리 중에 있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응. 그래도 돼."

"이름을 몰라도 되는 겁니까?"

또 꺼낸 샤르비에의 질문에 하벨은 저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기분이 싸했다.

여기서 이름을 모르는 자라면 칼리우스와 자신밖에 더 있는가.

'…에이, 설마.'

하벨은 괜히 옷자락을 쥐었다.

싱긋 웃는 룬델의 표정이 보였기에, 바안하고 눈이 맞았기에 서늘한 감각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애초에 나를 왜 대표로 삼겠어?'

하벨은 칼리우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름은 몰라도 돼. 그냥 내가 아는 사람이면 돼."

칼리우스가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샤르비에의 깍듯한 태도에 드란트는 그저 황당했다.

헤스트리아 왕은 무슨 협박이라도 당한 것처럼 허공을 보며 덜덜 떨고, 교황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만큼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하고, 애송이라 생각한 에르티안의 왕은 여우였다.

자꾸 아까부터 눈을 마주치면 옅은 미소를 보내는 바안의 모양새에 목이 탔다.

'내 약점을 쥐고 있다는 건가. 아니면 어떤 의미지?'

일단은 동맹이 아닌가.

의심을 거두려고 했으나, 드란트는 술술 써 내려가는 이들의 손길에 또 다른 의심이 감돌았다.

'나만 빼고 단체로 짠 거 아니야?'

의심이 들 만큼 펜을 놀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대표를 지금 여기서 어떻게 뽑겠냐는 소리는 이미 물 건너간 듯 보여 드란트는 그냥 자신을 뽑았다.

'다 마음에 들질 않아.'

솔직히 코스모피안 왕국이 지금까지 억울하게 당해왔던 걸 생각한다면 지금 이 자리는 무척이나 훌륭한 자리였다.

하지만 당해왔기에 자신이 거슬리는 건 지금도 저들 손에 당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또 다른 의심을 피우게 되었다.

사각사각.

여하가 자신의 이름을 정직하게 쓰고는 손을 뗐다.

종이가 멋대로 글을 써 내려갔다.

『바닷속 인간들의 왕임을 인증.

바닷속 인간들의 대표임을 인증.

용이 제시한 '신이었던 자, 신이 되고자 했던 자, 에른트스의 영원한 추방을 명한다'라는 제안에 서명해 동의함.』

'오. 뭔가 컴퓨터 같아.'

하벨은 신기함을 드러내며 책을 바라보았다.

실시간으로 인증한 기분이었다.

"다 썼으면 종이를 접고 앞에 내려놔 줘. 내가 가져갈게."

대표가 누가 될지 모르고, 그래서인지 몰라도 칼리우스는 간단한 이 행동마저 긴장됐다.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칼리우스는 땀을 닦은 뒤에 종이를 마법으로 가져와 책에다가 두었다.

책에는 조금 전처럼 글자가 떠올랐다.

『지상 인간들의 왕임을 인증.

지상 인간들의 왕이 임명한 대표 투표 결과.

달님 4표.』

"…뭐?"

하벨은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드란트 1표.

대표는 달님으로 임명.』

"뭐어……?"

하벨은 어이가 없었다.

"자, 잠깐만요. 이거……."

황당함을 이어나가려던 차 하벨은 물의 다급한 연락을 듣게 되었다.

―에른스트가 지금 결계를 먹고 있어요! 이러다가 풀려요.

―2분 안에 풀릴 거예요.

하벨은 물의 눈을 빌려 에른스트를 바라보았다.

일부러 땅에서 물을 일으켜 마차가 딱 들어갈 크기만큼의 물보라를 일으켰다.

"단체로 다들 짠 겁니까?"

드란트가 투표 결과를 보자 더는 참지 못했다.

"드란트. 내 그대의 나라에 잘못한 게 있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네."

회의장이었기에 일부러 꺼낸 존칭도 생략하며 샤르비에는 드란트를 쏘아봤다.

"받아들인다고? 이거 지금 또 우리 코스모피안 왕국만 따로……."

드란트는 하벨에게 고개를 돌렸다.

방금 뭔가 싸한 게 그에게서 느껴졌다. 지금 뭘 하는 건지 몰랐기에 드란트는 더욱 공격적이게 되었다.

"이봐, 너……."

"에른스트가 풀릴 겁니다."

하벨은 에른스트가 탄 마차 자체를 더 멀리 이동시킨 후에야 목소리를 냈다.

"…벌써 풀린단 말인가?"

샤르비에가 기겁했다.

자신이 마지막에 봤을 때 마법사들이 결계를 얼마나 둘렀던가.

따악!

하벨의 손을 따라 물보라가 일어났다. 지금 뭘 꾸미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다들 돌아가세요. 준비되면 그저 준비됐다고 말해주시면 됩니다. 다시 이곳으로 부르겠습니다."

"…그러니까 회의장을 여기로 선택한 이유도, 네가 이곳에 온 이유도 여기가 이제 전쟁터가 된다는 거였나?"

드란트는 그제야 눈빛을 온순하게 만들며 바안을 쳐다보았다.

저 달님이 물을 사용했다는 점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왜 바안이 의회장이 된 건지, 왜 달님이 바안한테 고마움을 드러낸 건지 이제야 알아버렸다.

"맞아요. 에른스트는 이곳 에르티안 왕국에 올 겁니다. 달님이 유인하기로 했습니다."

"그런… 미친 짓을 한 겁니까?"

바안의 대답에 드란트는 실례라는 걸 알지만, 그만 말이 나와버렸다.

"기억해주십시오. 그리고 도우러 와줘야 합니다. 지체할수록 이 땅에 있는 존재들이 죽어갈 테니까요."

두려움이 보이는 바안의 눈빛에 드란트는 이가 갈렸다.

애송이 주제에 미친 짓을 넘어 엄청난 짓을 하지 않았던가.

"코스모피안 왕국은 반드시 돌아옵니다. 반드시!"

왕이기에 백성들을 생각해야 했지만, 모두가 위기인 상황에 가장 큰 희생을 떠안겠다는데 이걸 어떻게 보고만 있을까.

드란트가 가장 먼저 물보라 안으로 들어갔다.

"레놀드 왕국 역시 이 희생을 기억할 겁니다."

샤르비에는 바안에게 존경의 의미로 고개를 살짝 숙인 뒤 자연스럽게 하벨을 바라보았다.

지금 물 마법사는 하벨 티에라 이외에 누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틈의 세계에 빨려 들어갔다고 했다.

틈의 세계에 빨려 들어가 살아 돌아온 사람은 없었으니.

샤르비에 역시 안으로 들어갔다.

하벨은 그사이 지상의 인간들 대표로 저 제안에 서명했다.

달님.

가짜 이름을 써도 되는 건지 책이 반응했다.

『두 종족의 동의로 제안이 통과됐습니다.

이 제안을 검토 결과 두 종족의 동의만으로 부족하다고 판단.

정령왕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열쇠의 수호자의 ####이 필요합니다.』

"…어, 어? 글자가 왜 이렇게 변한 거야?"

칼리우스가 당황하며 하벨을 바라보았다.

"오류가 나타난 모양이니까 당황해하지 마."

하벨은 세르노스에게 다가갔다.

"넌 이제 꺼져. 네 역할은 다 했으니 돌아가 잠이나 쳐 자든지."

제 발로 돌아가기 전에 하벨이 세르노스를 물보라 쪽으로 발로 걷어찼다.

"에티르."

하벨이 가면을 벗어서는 그를 바라보았다.

단호함이 가득했다.

"지금 신관들이 이곳에 도착했어."

아라와 함께 신관들이 자신의 힘을 타고 왔다는 사실을 물을 통해 들었다.

"내가 방금 에른스트가 탄 마차 자체를 저 멀리 옮겼어. 하지만 이건 아주 조금의 시간만 번 셈이니까, 서둘러줘."

"알겠습니다, 하벨 님."

에티르는 자리에서 금방 일어났다.

신의 은총으로 오미너스를 없앴을 수 있다는 사실과 에른스트에게 불쾌한 힘이기에 움직임을 아주 잠깐 멈출 수 있다는 걸 들었다.

"알고 있지, 에티르? 너희의 힘은 통하지 않아. 그러니 어디까지나 후발주자야. 이걸 잊으면 안 돼."

하벨은 말을 마친 후에 신관들이 도착한 곳과 연결된 물보라를 가리켰다.

"기억해주십시오. 당신 뒤에 저희가 있습니다."

신의 아들을 무조건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기에 에티르는 의지를 다져서는 하벨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니. 우선으로 둬야 하는 건 사람들의 생명이야. 신의 은총을 쏟아부어."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바안 전하, 행운을 빌겠습니다."

에티르는 이어 바안에게 고개를 숙인 뒤 물보라로 들어갔다.

상황이 급변하자 바안은 눈동자를 굴려 하벨을 바라보았다.

"…하벨 공."

"전하. 아시죠? 왕은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됩니다. 가장 안전한 곳에 계십시오. 제가 만들어 드린 그곳에 계셔야 합니다. 어서 움직이십시오."

"내가 너무 무능해 보이잖습니까."

"무슨 소리입니까? 누가 거기 가만히 있으라고 그랬습니까? 아마 굉장히 바쁘실 겁니다. 동선과 물자가 꼬이지 않게 관리하셔야 할 테니까요."

"전쟁하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말하더니……."

"이걸 전쟁이라 치시면 안 됩니다. 토벌입니다. 짐승 새끼를 도륙 내는 행동 말입니다."

"지휘 자격을 하벨 공에게 괜히 줬나 후회가 몰려옵니다."

금세 바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상황이 이렇게 빨리 변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제가 가장 듬직하잖습니까? 물론, 사실이기도 하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중에 제일 전쟁 경험이 많은 건 저라서요."

말을 끝낸 하벨은 자신만만하게 웃은 뒤, 자신을 가리켰다.

"달님으로 참전할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끝까지 숨겨드리겠습니다."

"이제 가십시오. 연락 잘 받으시고요."

하벨은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었을 때, 바안은 사라져 있었고 하벨은 룬델을 바라보았다.

"정신이… 없을 겁니다, 아버지. 하지만 부디 정령 기사들을 잘 이끌어주세요. 절대로 붙으면 안 됩니다. 멀리서. 멀리서 공격하셔야 합니다."

에른스트의 힘은 뭐든 빨아들이는 힘이었다.

그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 모르는 이상 불확실한 사실에 정령사와 정령기사들을 내몰 수 없었다.

"전부 저 이외에 가까이 오는 건 안 됩니다. 다 말려주셔야 합니다. 아셨죠, 아버지?"

"…그럼 나랑 아라도?"

칼리우스가 묻자 하벨은 주춤거렸다.

아라라면 망토의 힘으로 될지도 모르겠지만, 칼리우스는 애매했다.

"용용아. 너는 에른스트한테 세상에 있는 마나를 빼앗기면 안 돼. 네가 마법사들을 지휘해야 하고, 틈의 세계를 여닫는 걸 허락해야 해."

이미 그것만으로도 바빴는데 여기서 더 할 수 있을까.

하벨은 그게 의문이 들어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용용이 네 권능 말이야."

"응."

"발동되고 난 후에 어때? 시간이 필요한 거야? 어떤 식으로 발동이 되는지 알아?"

"그건… 음, 몰라."

칼리우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좋아, 용용아. 일단 아라와 이안의 서명부터 받자. 어때?"

"나는 괜찮아. 그런데 가주님은 안 괜찮아 보여."

칼리우스의 시선이 룬델을 향하자 하벨은 어깨를 늘어트렸다.

"아버지. 저와 한 약속 기억하시죠?"

"기억한단다."

"계속 지켜볼게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어서 가렴."

룬델은 하벨을 재촉하며 손을 흔들었다.

"갔다 올게요, 아버지."

이 싸움이 어떻게 흐를지 모르기에 하벨은 활짝 웃으며 룬델에게 손을 흔들었다.

하벨이 눈앞에서 물보라에서 삼켜지자 룬델은 숨을 내쉬었다.

적막함이 몰려왔다.

두려움이 넘실거렸다.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이번에는 제발.'

모든 게 아득하게 느껴져 무서웠다.

'제발, 제 목숨을 바칠 테니 그 누구도 앗아가지 마십시오. 사랑스러운 제 아이들을 빼앗지 마십시오.'

밀려오는 슬픔에 룬델의 몸이 점점 무너져 내려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제발. 모두가 무사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전쟁은 언제나 잔혹한 법이니 룬델은 신에게 빌고, 또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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