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화. 이거 어쩌나(2)
* * *
* * *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이어 하벨이 모습을 드러내자 넬시아는 깜짝 놀랐다.
"깜짝 놀랐죠, 누……."
넬시아가 다가와 부드럽게 자신을 안자 하벨의 눈이 커졌다.
그간 감정을 꾹 누른 것처럼 그녀의 몸이 떨려왔다.
평소 감정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 터라 하벨은 미안함이 밀려왔다.
"누님이 보고 싶어서, 바쁜 걸 알지만 이렇게 왔어요."
"…걸어도 되는 거야?"
눈물이 가득 고인 그 말에 하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조금 멈칫거렸다.
"힘들긴 해요. 그래도 누님을 보니까 좋네요."
자신이 움직이는 그동안에 때론 보고서 서식으로, 때론 편지 서식으로 처리해야 하는 서류 작업을 넬시아가 맡아주고 있었다.
사람이 움직이면 언제나 서류가 딸려오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나요, 이제 더 움직여야 할지도 몰라요. 그런데 혼내지 마세요. 너무 많이 혼났어요. 카샬도 크와앙, 형님도 캬아아악, 헤레스도 왕왕. 귀가 다 아파요."
몸에 힘이 없이 천천히 하벨은 땅에 주저앉았고, 넬시아 역시 덩달아 내려왔다.
"얼마나……?"
"많이요. 정말 많이요. 내가 얼마나 갈려 나갈지 모르겠어요."
넬시아가 그 말에 몸을 뒤로 빼냈다.
"이미… 이렇게나 갈려 버렸는데?"
구슬픈 눈이 하벨을 응시하며 보드라운 손이 그의 뺨을 쓸었다.
"이미 이렇게나 아픈데?"
"네."
"네가 이렇게나 슬픈데?"
"네. 그래도 해야 해요."
담담한 하벨의 모습에 넬시아의 얼굴이 구겨졌다. 마치 자신의 슬픔을 다 가져가려는 것만 같았다.
"…아, 큰일이에요."
하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큰일이라니?"
"왠지 울고 싶어져요."
"울어도 괜찮아. 내가 토닥여줄 테니까."
"저 알아요. 바닷속에서 돌아와서 의식이 들었다가 사라졌다가 반복할 때, 누님이 내 손을 꼭 잡고 토닥여줬잖아요."
"네가 무서워했거든. 너무 두려워서 몸을 덜덜 떨었어. 그래서 손을 잡아주니까 거짓말까지 평온해지더라고."
넬시아의 손이 또 하벨의 뺨을 쓸었다.
"바닷속은… 무서웠어요."
하벨의 표정이 여려졌다.
비로소 제 나이를 찾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요, 침묵이 무서워요. 나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게 무서워요."
"그래. 그래, 이제 괜찮아."
"누님."
하벨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뭐가?"
"날 위해 반영구 정화제를 옮기고 있는 거 알아요."
"봤어?"
"네. 다 봤죠. 누님이 빨간 곰돌이랑 분홍 곰돌이 중에 뭐가 좋은지 고민하는 모습도……."
"어떤 게 좋아?"
"네?"
"너한테 선물해주고 싶어서 계속 고민했어."
넬시아가 환하게 웃었다.
"나한테 주려고 고민한 거예요?"
하벨의 입꼬리가 살며시 떨렸다.
"곰돌이가 밤에 악몽을 물리쳐주는 거 몰라?"
넬시아가 무척이나 진지했기에 하벨은 웃음이 터졌다.
카샬도 그렇고 대체 왜 이렇게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마음이 간질거려서 좋았다.
"둘 다 주세요. 하나는 내가 안고, 하나는 아라한테 줄래요."
하벨은 두 손을 내밀며 눈을 반짝거렸다.
"그래. 그러자."
넬시아는 그제야 웃음을 터트렸다.
고삐가 필요한 귀여운 망아지가 둘 다 필요하다는데 뭐가 그렇게 아까울까.
* * *
"…음."
라르웬이 잠깐 고민하자 하벨은 그를 재촉했다.
어서 말해요. 빨리요.
라르웬은 정말 이래도 될지 고민하며 손에 쥔 연락용 아이템을 만지작거렸다.
"범인은 샤넬리움 레놀드입니다."
<…예?>
"그, 달님 씨가 말하길. 음. 만약 이런 반응을 보이면 꼭 말해달라고 그래서 적은 대로 읽겠습니다."
라르웬은 또 다른 손에 쥔 쪽지를 보며 한숨부터 내쉬었다.
크로니안이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상하다면서요. 뭔가 이질적이고, 알 수 없는 힘이 늘어나고, 틈의 세계까지 벌어지고 하여튼 이상하고 이상해서 정체를 알려달라고 나한테 말한 거 아니에요? 그런데 이걸 못 믿다니. …그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그렇긴 한데 음. 이걸…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솔직히 장난 같습니다. 샤넬리움 레놀드가 범인이라니.>
"그때는 이걸 말해달라고 그랬습니다."
<혹시 옆에 있나요? 무슨 쪽지가 그렇게 바로 나올 수 있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라르웬은 다른 쪽지를 손에 쥔 채로 바로 옆에 침대에 누워서 즐거워하는 하벨을 바라보았다.
진짜 딱밤 세 대만 때려봤으면 했다.
어서 읽어줘요, 형님.
하벨이 입 모양으로 말하자 아라가 키득거리며 꼬리로 날아갈 것처럼 움직였다.
[이 몸도 지금 너무 두근두근해. 라르웬이 어서 말해줬으면 좋겠어!]
아라까지 눈을 반짝거리자 라르웬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둘이 똑같았다.
"내가 상황도 모르고 장난을 칠 것처럼 보이나요? 저는 알려드렸습니다. 나중에 다른 소리 하시면 안 됩니다. …쪽지에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음.>
크로니안은 말꼬리를 늘였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들리더니 곧 크게 웃었다.
<이거… 진짜 미쳤네요.>
"잠깐만요. 여기 더 있습니다."
<아니. 이쯤 되면 그냥 말로 하는 게 편하지 않습니까?>
하벨은 굳어진 라르웬의 표정을 보더니 손바닥을 내보였다.
어차피 크로니안은 내 손바닥 안이다. 뭐 그런 걸 표현하려는 듯 보였기에 더 얄미웠다.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합니까? 정말요? 미리 말씀드리죠. 아닙니다. 적은 더 큽니다. 훨씬 더요. …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진짜 옆에 있는 것 같은데…….>
"없습니다."
<뭐, 어쨌든 그래서 달님 씨가 제게 바라는 게 뭐라고 합니까?>
"잠시만요."
라르웬은 크로니안의 반응을 예상해 쪽지를 쓴 하벨이 참 기가 찼다.
무슨 독심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숨을 내쉰 뒤 라르웬은 쪽지를 읽어나갔다.
"조만간 샤넬리움이 외출을 하게 될 텐데, 그때 틈의 세계가 열릴 거라고 합니다. 샤넬리움을 붙잡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
크로니안이 헛바람을 크게 내쉬자 라르웬 역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뭘 또 적는지 옆에서 펜을 놀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각. 사각.
<진짜 미치겠네요. 원래 정체를 모르는 게 좋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궁금해졌습니다. 만약에 정말 틈의 세계가 나타난다면 정체를 밝혀달라고 전해주세요.>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달님 씨가 참… 사람을 환장하게 만드네요. 일단, 준비하도록 하죠. 저는 생각을 좀 해야겠어요.>
크로니안이 슬슬 마무리를 지으려는 분위기를 내보이자 하벨이 얼른 쪽지를 라르웬한테 내밀었다.
부탁해요, 형님.
하벨이 배시시 웃자 라르웬은 솟구치는 화를 억눌렀다.
진짜 얄미운데 딱밤을 때릴 수도 없고.
"잠시만요. 마지막 쪽지가 있습니다."
<아니. 라르웬 씨. 달님 씨랑 연락할 때 혹시 받아쓰기 한 거예요?>
"예. 맞춤법이 꽤 틀렸을지도 모르죠."
라르웬이 능청스럽게 던진 말에 크로니안은 웃음이 터진 건지 말을 하지 않았다.
라르웬은 화를 참으며 하벨이 건넨 마지막 쪽지를 읽어나갔다.
"아마 들어주기 어려운 부탁이었을 텐데, 고마워요. 조만간 만나 틈의 세계와 관련된 진실을 알려드릴게요."
<틈의… 틈의 세계와 관련된 진실이라고요? 저 진짜 농담이 아니라… 뭔가에 홀린 기분입니다.>
"제가 그 느낌을 먼저 느꼈습니다."
라르웬은 웃음을 참았다.
하벨하고 대화하면 무언가에 홀린 느낌을 연거푸 느끼지 않았는가.
<먼저… 끊겠습니다.>
크로니안은 얼떨떨한 목소리를 끝으로 연락을 끊었다.
"고마워요, 형님."
하벨이 얼른 목소리를 냈다.
라르웬의 얼굴이 바짝 구겨지며 딱밤 백 대라도 때리고 싶은 눈빛을 지었다.
"너는……."
"가만히 있었어요."
"그런데 진짜 알려줄 거야?"
"네. 이제 끝인데 뭐가 아쉽겠어요? 더 열심히 해달라고 부탁해도 모자랄 판인데 이게 뭐라고요."
하벨이 싱긋 웃자 라르웬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슬쩍 말을 꺼냈다.
"이걸 보통 사기라고 부르지 않아?"
"에이, 사기가 아니죠. 궁금증을 해결해준다고 제안을 했고, 이를 허락한 건 크로니안이잖……."
하벨은 문이 갑자기 열리는 소리에 말을 멈췄다.
똑똑.
뒤늦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하벨은 용용이라는 걸 알았다.
마나가 저주를 풀 방법을 알려줬다며 한동안 모습도 보이지 않았는데.
[용용아아!]
아라가 제일 먼저 날아가 칼리우스를 안아주었다.
"아라야. 많이 기다렸어?"
[이 몸은 용용이가 없어서 엄청 심심하고 외로웠다? 그런데 용용이를 위해서라면 참을 수 있어.]
배시시 웃는 아라의 미소에 칼리우스 역시 덩달아 환하게 웃었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가.
아라를 몇 번이나 쓰다듬던 칼리우스의 시선이 하벨에게 향했다.
"…도련님. 나. 나 있잖아."
칼리우스의 눈동자가 더 없는 깨달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도련님의 저주를 풀어주는 마법을 파고들다가 여러 가지를 알게 됐다?"
[알게 됐다고? 뭘?]
루룸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내 권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았어."
짝짝.
칼리우스가 손뼉을 마주치며 말했다.
"이리 나와줘."
거대한 책이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책이었다.
"이게 서약을 적고 서명을 받는 책이야. 조금 전에 내 피와 마나로 만들었어."
칼리우스가 웃는 얼굴로 손을 뻗더니 반짝거림이 그의 손바닥에서 퍼져갔다.
[우와아아. 예쁘다아.]
아라의 꼬리가 흔들렸다.
"이건 마나야."
반짝거림이 뭉치더니 하나의 모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 모형은 곧 글자가 되었고, '아라'라는 단어로 바뀌었다.
칼리우스는 그 글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글자가 날아가더니 도장이 찍히듯 책에 박혔다.
[이 몸의 이름이 여기 있어!]
아라가 책에 얼굴을 비볐다.
"이렇게 하는 거야, 도련님."
칼리우스는 하벨을 바라보았다.
"아주 쉬운데? 그럼 여기에 서명하는 펜은?"
책이 있고, 서약서를 적을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당연히 이를 서명할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것도 만들 수 있어. 하지만 펜은 무거워. 마나의 파동이 빨라서 지금 에른스트가 알지도 몰라."
칼리우스가 대답과 함께 책을 없앴다.
글자를 바라보던 아라가 실망하며 아랫입술을 올렸다.
"아라야. 이 글자는 나중에 보여줄게. 지금은 이게 더 급해."
[뭐가 급한데?]
아라는 아랫입술을 올린 채로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도련님을 계속 괴롭히던 저주를 풀 차례야."
"용용아. 저주는……."
"알아. 도련님이 뭘 걱정하는지. 에른스트한테 들키면 안 돼. 나도 알아. 그러니까 딱 한 글자만 남기고, 환상 마법도 걸고 그럴게. 그러면 들키지 않을 거야."
자신감이 가득한 칼리우스의 면모에 하벨은 씩 웃었다.
"고생 많았어, 용용아. 지금 바로 하자."
"도련님. 있잖아."
"응?"
"…많이 무서웠어?"
마법을 사용하고자 두 손을 살짝 뻗었지만, 칼리우스의 시선은 바닥으로 향했다.
왜 그걸 몰랐을까.
그렇게 튼튼하게 걸어놓은, 저주를 반쯤 해제한 마법이 풀릴 동안 하벨이 저 바닷속에서 있었다.
얼마나 끔찍한 고통과 외로움에 시달렸을까.
칼리우스는 그 생각에 당장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괜찮……."
"괜찮지 않아! 도련님은 괜찮지 않다고!"
칼리우스가 소리치자 하벨의 눈동자가 커졌다.
칼리우스가 정말로 화를 내다니.
동그랗게 커진 아라의 눈동자마저 흔들렸다.
"왜 자꾸 감추는 건데? 도련님은 왜 자꾸 괜찮다고 하는 건데? 용인데, 카르밀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나는 바보야. 알아. 알지만, 괜찮지 않은 건 내 눈에도 보여! 나도 아는 걸 왜 도련님만 몰라?"
칼리우스가 꺼내는 간절한 말에 라르웬마저 미간을 찌푸렸다.
하벨의 몸에 가라앉지 않은 푸른 기가 아직 가득하다고 헤레스가 말해주지 않았던가.
처절한 흔적이었다.
그 상처를 다시 긁을까 봐 세게 나가지도 못했는데 칼리우스가 이렇게 나올 줄이야.
"…알아, 용용아."
"그런데 왜 그렇게 말하는 거야? 나는 속상해."
"내가 무섭다고 말하면 누님과 형님, 너희가 죄책감에 휩싸일 테니까. 나는 그게 싫어."
하벨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무섭냐고 물어보면 무서웠다.
넬시아에게 말했듯 과거의 그 침묵이 자신을 덮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내가 우겨서 벌인 일이니 내가 감당하는 게 맞아. 그리고 나는 너무 기뻤는데?"
"기뻤다고?"
라르웬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라가 그 바닷속에서 나를 데리러 왔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하벨의 말에 아라가 그렁그렁하더니 아랫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이 몸은… 다시는 대장을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어! 그래서… 그래서 대장을 저 깊은 바닷속에 혼자 두고 싶지 않았어!]
하벨이 저 높은 마법사의 탑에 떨어졌을 때, 그가 죽는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아라는 절망했다.
너무 슬퍼 얼마나 울었는지 몰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하벨을 그 바닷속에서 데려왔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아라는 모든 걸 다 가진 기분이었다.
"이래서 기쁘다는 거예요. 돌아올 곳이 있잖아요? 모두가 나를 지켜줬잖아요?"
하벨은 이어 라르웬을 바라보았고, 마지막으로 칼리우스에게 멈췄다.
"그리고 이렇게 나를 걱정해주니까. 그래서 나는 기뻐. 정말로 이게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천천히 휘어가는 눈웃음은 오직 기쁨만이 섞여 있어 칼리우스는 마음이 미어졌다.
"용용아. 냉정하게 말하자면 저 바닷속은 달랐어. 뭐든 잡아먹는 힘이 존재했고, 네가 갔다면 뜯어 먹혔을지도 몰라. 만약 다음이 있다면 그때도 나는 혼자 갈 셈이야."
하벨은 그 끔찍한 힘을 기억했다.
모든 걸 잡아먹었다. 그곳에 있는 모든 힘을 잡아먹고 증식하고 있었다.
저들이 이곳에 있기에, 아라가 자신을 데려다주었기에 자신의 답은 하나였다.
"계속할까?"
하벨은 칼리우스를 재촉했다.
"응."
칼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이다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소리쳐서… 미안해."
"충격이긴 한데, 그 정도 각오는 했어. 계속하자."
칼리우스의 손아귀에 조금 전처럼 빛이 나왔다.
칼리우스는 손가락에 그 빛을 묻히는 것처럼 그대로 점을 찍었다.
제 몸에 걸린 저주가 나타나는 게 하벨의 눈에도 어렴풋이 보였다.
보통 마법처럼 또렷하지 않았고, 뭔가 흐릿하면서 적힌 문자가 무슨 말인지 모를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칼리우스는 손가락을 그대로 움직여 허공에 무언가를 그려나갔다.
"이건 주술하고 마법하고 합쳐진 거라 푸는 방법이 달라. 마법이 전반적으로 깔리되, 부적을 만드는 방법도 함께 해야만 했어."
"아주 거지같이 만들어놨네."
라르웬이 혀를 내둘렀다.
얼마나 지독한가.
아예 풀지 말라는 게 아닌가.
"류아가 엄청 큰 방법을 줬어. 정말 엄청 커. 류아가 아니었으면 나는 여기까지……."
"아니, 용용아. 네가 해낸 거야."
하벨은 칼리우스에게 확실히 알려줬다.
"류아가 방법을 알려줬어도 여기까지 온 건 너야. 네가 포기하지 않아서 마법을 완성한 거야."
칼리우스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혀갔다.
하지만 손가락은 멈추질 않았다.
그가 마나를 찍은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일그러진, 마법을 유지하는 글자가 사라지는 게 하벨의 눈에 보였다.
마냥 틀어막기만 했던 방법과 달랐다.
칼리우스의 손가락은 붓이었고, 먹이 가득한 그림을 그려가듯 반짝거림이 허공에 남아 어여쁘게 보였다.
지워지고.
또 지워지는 게 보일수록 하벨은 비로소 저 바닷속에 계속 붙잡힌 느낌에서 서서히 발로 헤엄쳐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기분을 느꼈다.
소곤거리는 물의 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려왔다.
이 왕국에 물이 어디에 있는지 선명하게 느껴졌다.
거의 모든 글자와 문자가 칼리우스의 손길을 따라 사라지자 하벨의 눈동자에 이채가 쏟아졌다.
꼭 유성우가 쏟아지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칼리우스는 딱 한 개의 글자를 남기고 손을 멈췄다.
"이 한 글자는 도련님이 마지막 영혼을 얻으면 풀게. 그러면……."
"지워… 졌어."
하벨은 수면 위에서 햇살을 바라보는 느낌에 휩싸였다.
그리운 느낌이 온몸을 감쌌다.
눈물이 말없이 흘러내렸다.
가만히 있어도 물과 함께 숨을 쉬는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아, 아팠어? 많이 아팠어?"
칼리우스가 당황했다.
"용용아."
하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 응."
칼리우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벨이 뭔가 달라 보였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신성하다는 느낌이 몰려왔다.
하벨은 칼리우스를 안았다.
"고마워."
목이 멘 소리가 하벨에게 들려왔다.
절박함이 가득한 말이 쏟아지자 칼리우스는 갑자기 흘러내린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그간 하벨이 꾹 눌러온 슬픔과 고통이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내… 고통을 네가 해방해줬어."
"내가… 해낸 거야?"
"그래. 네가 해낸 거야. 네가 내 저주를… 풀어줬어."
이 끔찍한 족쇄에서 풀려나길 얼마나 기다렸던가.
하벨은 칼리우스를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칼리우스가 허공을 바라보았다.
"내가 해냈어."
부르르 떨리던 칼리우스의 손가락에도 힘이 가득 들어갔다.
"나도… 할 수 있어."
으흑.
칼리우스는 기쁨과 함께 몰려오는 벅찬 성취감에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이 정말 용이 된 것이었다.
멍청하고 덜떨어진 자신이 마법의 정점인 용이 되어 자신의 달님을 제 손으로 구했다.
드디어.
드디어.
* * *
'…으흠.'
하벨은 마차 안에서 따분하게 밖을 쳐다보았다.
정말 얼마나 신났는지 에른스트는 바로 다음 날 마법사 협회로 출발하는 여정을 꾸렸다.
핑곗거리는 우습게도 관광이었다.
마법사 협회에 도착하기 전까지 같은 마차에 같은 공기를 맡는 것조차 몹시 괴로웠고, 짜증 날 정도로 자신을 상석처럼 대하기에 얼굴을 발로 걷어차고 싶을 정도였다.
이 말도 안 되는 행렬에 정령 기사들이 따라왔고, 그 속에 아라가 섞여 있었다.
"와아, 뭐가 잘 안 풀리나 봐?"
라르웬이 웃음기를 꽉 잡으며 마법사 협회를 바라보았다.
구겨진 에른스트의 표정이 노골적으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