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88화 (388/415)

388화. 부탁할게(2)

* * *

하벨은 온몸이 부서지는 통증을 느끼며 신음하다 겨우 잡게 된 의식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고맙다, 하벨 티에라.'

하벨 티에라를 만났고, 또 만나야 하지만, 그래도 하벨은 한시라도 빨리 말해야 했다.

[대장?]

아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도 하벨은 아라에게 무어라 말할 시간이 없어 흘릴 수밖에 없었다.

"…회담을, 준비해줘. 더 서둘러서."

목소리가 다 갈라지고 바람 소리가 가득했다.

"회담이라뇨?"

헤레스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용용이… 가."

하벨의 눈이 잠깐 잠겼다가 다시 겨우 떴다.

"권능을 발휘하려면 회담이 열려야 해. 누님한테… 말해줘. 그러면 아버지한테……."

하벨은 손가락 하나 까닥거리지 못했다.

모든 게 계속 자신을 눌러왔다. 저기 깊은 땅으로 꺼지는 느낌에 모든 게 잡아먹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틈의 세계는… 내가 부탁해서 열린 거야."

"압니다. 여하가 다 말해줬습니다. 덕분에 이전에 열린 회의에서 '누군가가 틈의 세계를 불렀다'라는 클로저의 발언이 강해졌습니다. 틈의 세계 때문에 레놀드 왕국에 병력이 모이고 있는 상태고요."

카샬은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잘됐다.'

아주 좋은 소식에 하벨은 웃으려고 했지만, 입꼬리가 도무지 올라가지 않았다.

"회담에… 레놀드는 포함해야 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일단, 빼고 조용히 움직여. 준비만 해도……."

"압니다. 시간이 걸린다는 걸요."

카샬이 하벨을 대신해 대답해주었다.

"놈은… 안 죽어. 그래서 용용이의 권능이 필요해. 놈이 용을 죽이려던 이유가 바로……."

하벨은 마치 연료가 다 떨어진 것처럼 그대로 쓰러졌다.

'…바로 죽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하벨의 눈이 감기며 랜턴의 빛이 꺼졌다.

[헤, 헤, 헤레스!]

아라가 당황해하며 헤레스를 불렀다.

"…괜찮습니다. 그냥 잠이 드셨습니다."

모두가 당황한 걸 알기에 헤레스는 그들을 진정시켰다.

하벨은 정말로 잠이 들었을 뿐이니까.

"제가 움직이겠습니다."

카샬은 뒤늦게 말문을 열며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망할, 도련님!'

설마하니 꿈에서도 다음 수를 생각하고 있을 줄이야.

진짜 지독했다.

대체 누굴 닮았는지.

카샬의 걸음걸이가 거칠어지다가 잠깐 멈췄다.

누구긴 누구겠는가.

바로 신이었다.

'신의 아들은 다 저런지 모르겠네.'

카샬은 구시렁거리며 넬시아의 방으로 찾아가며 정령 기사들을 쳐다보았다.

분위기가 바짝 날이 서 있었다.

얼마 전에 일어난 틈의 세계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전에 하벨이 습격을 받은 후였기에 정령 기사들의 기합이 더 들어갔다.

'…뭐어, 다 정령님들 때문이지만.'

슬쩍 나왔던 아코 덕에 정령들이 정령 기사들을 얼마나 닦달했는지 정말 많이 들었다.

그 모습은 하벨이 하벨 티에라의 몸에 들어가기 전에도, 들어간 후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라 카샬은 기분이 참 이상하다 싶었다.

이렇게 놀라운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건만, 망할 도련님만 모르고 있었다.

이젠 제발,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줬으면 하는데.

똑똑.

숨을 다듬고, 감정을 억누른 뒤, 카샬은 노크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카샬입니다, 아가씨."

똑똑.

안에 있는 또 다른 문을 두드리자 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샬은 넬시아에게 인사를 한 뒤 그녀에게 다가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다 설명했다.

"…고마워."

넬시아는 힘껏 올라간 어깨가 아래까지 내려갈 정도로 안도하며 고마움부터 표했다.

하벨이 무사히 깨어났다니.

당장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많이… 답답하시다는 거 압니다."

카샬이 조심스레 손수건을 건네며 말을 건넸다.

에른스트 때문에 연극을 펼쳤고, 지금 하벨이 나아가는 중이라 설정되어 마음대로 보러 올 수도 없으니 얼마나 화가 날까.

"괜찮아, 카샬. 지금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어. 솔직히 나보다 라르웬이 더 힘들 거야."

넬시아는 오히려 라르웬이 한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벨 소식을 들으면 더 힘들지 않을까.

"그것보다 하벨이 회담을 꺼냈다는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회담이라……."

넬시아는 지금은 다른 생각을 꺼내며 책상을 두드렸다.

"하벨이 클로저들을 레놀드 왕국으로 부른 건 에른스트의 시선을 분산시켜야 하기 때문이었어."

"예. 거기서 나아가 틈의 세계라는 공동의 적이 등장해 지금 병력이 집중된 상태입니다."

카샬이 뒤이어 대답했다.

"하벨이 지금 회담이라는 형식을 내게 부탁한 걸 보면 뭘 원하는지 알겠어."

넬시아는 잠깐 웃자 카샬이 물었다.

"도련님께서 무얼 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병력을 소집하는 자는 우습게도 에른스트야. 즉, 세뇌를 풀어버리면 에른스트는 제 손으로 자신을 공격할 수단을 둔 셈이니 하벨이 얼마나 즐거워할까?"

넬시아의 미소가 더 길어졌다.

마치 하벨처럼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렇습니다.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벨은 이제 마지막을 보고 있어. 카샬, 너는 지금 라르웬한테 가서 이 소식을 전해줄래? 나는 바로 아버지께 연락할게."

회담이 이렇게 쓰일지 몰랐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칼리우스의 권능을 위해 쓰인다는 것부터가 넬시아는 기분이 좋았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카샬이 고개를 숙였다.

"아, 카샬."

"예, 아가씨."

"너무 분해하지 마. 나도 하벨을 말리지 못했잖아? 충분히 설득했다고 생각했지만, 하벨이 본인 이외에 누가 할 수 있냐는 말에 막혀버렸지 뭐야."

넬시아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참 씁쓸해 보였다.

"사실 맞는 말이기도 해. 하벨 말대로 하벨 이외에 할 수 없었어. 그래서 나는 다른 걸 하고 있었거든."

"다른 거라뇨?"

카샬의 물음에 넬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샬에게 다가갔다.

"옮겨진 반영구 정화제를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배치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어. 아버지하고 머리를 맞대고 있고. 애초에 이 힘을 배치한 이유는 하벨이 사용하기 위해서잖아? 미약하나 도움이 되고 싶었어."

넬시아는 손을 올려 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네가 앞으로 더 고생이 많을 거야. 그러니 이번 실수도, 그다음 이어질 실수도 내가 가져갈게. 내가 하벨의 누나니까."

고삐가 필요한 귀여운 망아지를 어쩌면 좋을까.

"그리고 헤레스한테 정말 고맙다고 전해줬으면 해."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카샬이 허리를 숙여 밖으로 나갔고, 넬시아는 순식간에 눈시울을 붉혔다.

꾹 참았다.

내내 참았지만, 이제 참을 수가 없었다.

"하벨이 무사하대."

넬시아의 시선에 톰톰이 있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그 넓은 바닷속에 얼마나 외로웠을까.

넬시아는 두 손을 꼭 쥐었다.

부디, 꿈이라도 행복한 꿈을 꾸길.

* * *

"…진짜 하……."

하벨 티에라가 말을 잇지 못하자 하벨은 키득거렸다.

바닷속에서 죽을 뻔했기에 당연하게도 하벨 티에라를 조금 전에 만났다.

티에라 아니랄까 봐, 쏟아지는 잔소리를 듣던 중에 하벨 자신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하벨 티에라에게 밖의 상황을 물어보았다.

자신과 달리 밖의 상황을 알고 있자, 류아와 아라도 모르는 사실을 그들에게 어떻게 전달하면 좋을지 말을 나눴는데, 그때 하벨 티에라가 이렇게 말해주었다.

―잠깐이라면 할 수 있어요. 진짜… 잠깐이요. 그러니까… 음, 의식을 깨우는 일이요. 어쨌든 제… 몸이니, 깨우는 정도는 돼요. 저번에 저주를 처음 알았을 때 제가 깨워… 드렸잖아요?

우물쭈물하면서 살짝 간을 보는 듯한 표정이 이어 떠올랐다.

"정말 이게 되네?"

하벨은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에 하벨 티에라는 더 큰 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정신이 돌아오지 못했는데 이렇게 억지로 깨우면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요? 진짜 미친 겁니까? 왜 다들 환장하는지 알겠네요. 진짜… 류아 씨가 꺼낸 말이……."

"고마워."

툭 치고 들어온 하벨의 말에 하벨 티에라는 괴로워 죽을 것처럼 팔을 흔들었다.

고마움이 저렇게 깊게 느껴지는데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으으……. 솔직히 말해봐요. 일부러 이러는 거죠?"

"뭘 일부러 한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좋은 기능이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 사용하셨겠죠. 그래서 말씀 안 드렸어요."

하벨 티에라는 당장 하벨의 멱살을 쥐면서 흔들고 싶은 마음을 힘겹게 눌렀다.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용왕님이 여기저기 사고 치는 거 보고 진짜, 엄청, 많이, 되게 기겁했잖아요. 말할 의욕이 아주 뚝 떨어졌습니다."

"아니, 진짜 이건 내가 확실히 말할게."

하벨은 내내 말하고 싶었던 사실을 하벨 티에라에게 언급했다.

"대부분 내가 한 거 아니야. 내가 사고 치겠다고 말하고 사고 친 건 한두 번밖에 없고, 나머지는 다 날 건드린 거라니까? 난 억울해."

정말로 억울함이 가득 담겨 있지만, 하벨 티에라는 오히려 기가 찼다.

"글쎄요. 매번 아주 신나 보이던데요?"

"그거랑 별개지. 어쨌든, 날 건드린 놈이 잘못한 거지 내 잘못은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사고뭉치라는 건 웃기지도 않은……."

"용왕님."

"아니, 왜 말을 끊어? 이다음이 엄청 중요한데."

"지금 용왕님의 상태는 너무 좋지 않다고 계속 말하네요. 제가 봐도 물의 저주가 정말 심각합니다. 그 끝이 어떤지… 아시죠?"

"알아. 알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이걸 포기할 수 없었어."

"바닷속에 들어가신 건 정말 무모했습니다. 몇 번을 말해도 아깝지 않아요."

"알아."

하벨은 숙연함을 드러냈다.

그 위험성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

"이번에는 정말 무모했어. 무모했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아. 후회할 생각도 없어."

"막내님은 진짜 고집불통이에요."

"그건 너도 똑같아. 물의 저주가 날 삼키려 했을 때, 네가 산에 오르던 모습을 봤어."

"…그걸 봤어요?"

"뭐야, 계속 뭐라고 하더니 너도 해냈잖아?"

모두가 몰랐어야 할 사실이 하벨 입에서 나왔고, 그걸 칭찬받자 하벨 티에라는 정말로 들뜬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네! 물의 저주가 있는 이 몸으로 눈이 덮인 산을 오른 게 제가 했던 일 중에 가장 컸어요. 누가 뭐라고 해도 저한테는 자랑스러운 일이에요."

"그럼, 내가 자랑해줄게. 네가 얼마나 용감했는지."

덩달아 웃던 하벨의 모습에 하벨 티에라는 웃음기를 천천히 지워갔다.

"용왕님."

"왜?"

"제가 용왕님께 해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예요. 랜턴에 검은 불꽃이 붙는 일은 아마 없을 거예요. 이건 철저하게 제가 봤던 일을 토대로 만들어지거든요."

"이미 충분할 정도로 많은 도움이 됐어. 길을 잃지 않게 네가 끌어줬잖아. 훌륭한 길잡이였어."

하벨 티에라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용왕님께서는… 정말로 좋은 분이세요. 본인만 모르고 있을 정도로 너무 따스하신 분입니다."

"너 갑자기 왜 그래?"

하벨은 뭔가 불안하게 요동치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겠지.

그게 아니겠지.

마지막이라는 말은 떠올리는 것조차 싫을 정도로 끔찍한 말이었다.

"회귀 전에도, 회귀한 후에도 절 이렇게까지 인정해주고, 잘했다고 칭찬한 사람은 아버지를 제외하고 유일해요."

다시 눈을 떴을 때 하벨 티에라의 눈동자에 눈물이 요동치고 있었다.

"어떻게… 제가 듣고 싶은 말을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울지 않으려고 했다.

너무 뜬금없지 않은가.

하지만 '너도 해냈잖아'라는 말에 쭉 메말랐던 목이 축여지고, '훌륭한 길잡이'라는 말에 눈물이 멋대로 맺혀버렸다.

하벨이 한숨을 짧게 내쉬며 양손을 벌렸다.

"…그건, 싫어요."

하벨 티에라가 기겁했다.

"뭔가 저 자신한테 안겨 있는 것 같아서 기분 나빠요."

"이러면 진짜 상처받는데?"

"잘하고 있어요. 용왕님께서는 정말로 잘하고 계세요."

느닷없는 칭찬이었음에도 하벨이 피식 웃었다.

듣고 싶은 말을 잘 꺼내는 건 하벨 티에라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조금만 나가면 됩니다. 제 눈에 마지막이 보여요."

"그래. 이제 마지막이지. 계속 지켜봐."

"그래서 말씀드리려고 해요."

"뭘……?"

"인사를… 하려고요."

"웃기지 마. 누구 마음대로 인사를 해?"

"저 이전에 한계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사라지기 싫다고 그랬는데, 그게 생각보다 이른가 봐요."

바로 구겨지는 하벨의 표정을 보자 하벨 티에라는 눈물이 쏙 들어갔다.

오히려 즐겁게 웃으며 생각보다 더 편안하게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어쩌면 이번 만남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어서,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인사는 미리 해두는 편이 좋잖아요?"

"그냥… 있으면 안 돼? 쫓아내지 않을게. 내가 너 싫어했다고 그래?"

"절 이제 싫어하지 않는다고 말씀해주셨잖아요. 이제 와서 말을 바꾸면 이건 치사한 거죠."

"그러니까 왜……?"

"육체를 잃은 영혼은 순리에 따라 저기로 갈 수밖에 없어요."

하벨 티에라는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버텼는데, 이제 더는 힘드네요."

"나 때문……."

딱!

하벨 티에라가 하벨의 이마를 때렸다.

"그런 거 아닙니다, 막내님. 순리는 누구든 거스르지 못할 뿐이죠. 신도 무능한데, 저라고 별수 있겠어요."

하벨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하벨 티에라는 몇 발자국 다가와 그를 안았다.

"…기분 나쁘다면서?"

"한 번쯤은 참을 수 있어요. 한 번 참는 게 뭐, 대수겠어요?"

"너는 진짜 말을 예쁘게 하네."

"그렇죠? 제가 좀 합니다."

"그런데 난 이런 거 진짜 끔찍하게 싫은데."

하벨의 눈썹 끝이 아래로 내려갔다.

토닥토닥.

하벨 티에라는 하벨의 등을 두드렸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이죠. 이런 거 알잖아요? 용왕님도 한 번만 참아주세요."

"딱 한 번만이야."

하벨은 마지못해 손을 올려 하벨 티에라를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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