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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86화 (386/415)

386화. 심연으로(3)

* * *

하지만 저 불길하고, 불쾌한 힘이 자신에게 더는 오지 말라며 다가왔다.

스르르르.

문어의 발처럼 자신을 휘감기에 하벨은 힘을 발동했다.

마법이 덩달아 크게 흔들렸다.

이대로 가다가 마법이 해제될 걸 알지만, 하벨은 멈출 수가 없었다.

"아무도."

감히.

"내 몸을 스칠 수 없노라."

누구 앞에서 물로 자신을 공격하려는 건지.

모든 물은 자신의 발아래에 있어야만 했다. 지배자는 자신이었다.

명령과 함께 물이 길을 텄다.

"콜록, 콜록, 콜록!"

하벨의 몸이 서서히 내려가며 몇 번이나 격렬하게 기침했다.

옷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오염된 물로 푸른 기가 가슴팍까지 올라왔다는 게 느껴졌다.

"…으웨엑."

피를 토한 뒤, 하벨은 또 정화제를 찔렀다.

속도가 턱없이 느려졌지만, 하벨은 피를 흘리고, 또 흘리며 내려왔다.

발이 드디어 바닥에 닿았다.

"…하악. 하악."

하벨은 거친 숨을 내쉬며 주사기를 찌르러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뻗으나 만져지는 주사기는 단 하나였다.

'그렇게나 많았는데.'

하하.

하벨은 왠지 웃음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사용한 뒤에 터덜터덜 걸었다.

'지금쯤 에른스트한테 걸렸으려나.'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에른스트가 여기로 바로 올까.'

이 역시 생각했지만, 답으로 이어졌다.

'…모르겠다.'

몰랐다.

생각이 멋대로 이랬다가 저랬다 바뀌며 그저 앞으로 걸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반영구 정화제가 데구루루 굴렀다.

'아라야…….'

하벨은 짧게 웃음을 내뱉었다.

시야가 어두워진 건지, 주변이 까만 건지 구분을 할 수 없었고, 휘어지고 있는 건지, 흔들리는 건지 역시 알 수 없었다.

다시 흐릿한 빛을 내는 반영구 정화제를 줍고 그저 나아갔다.

―빨리.

갑자기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건 하벨 티에라의 목소리였다.

까맣던 세상이 갑자기 하얗게 변해갔다. 눈이 내려왔다.

'…너도 이랬던가.'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쳐나가며 고개를 들어 정상을 바라보았다.

정상까지 고작 몇 걸음 남지 않은 그 순간이 자신의 상황과 비슷했다.

―…어서!

조급하게 들려오는 하벨 티에라의 말에 자신까지 덩달아 급해졌다.

내리는 눈에 맞아 돌이 되어가듯 뻣뻣한 그 몸의 감각이 자신과 겹쳐졌다.

'너도 나만큼이나 간절했다니.'

한 걸음.

두 걸음.

자신의 걸음마저 하벨 티에라와 겹쳐지고 있었다.

눈앞에 정상이 보였다.

아래에 바다가 보였다. 지금처럼 검게 물든 바다가.

시선이 내려갔다.

다시 까만 바닷속이 눈에 드리웠다.

눈의 환상이 사라진 그곳에 어떤 껍질이 보였다.

눈에 익었다.

형체가 없었던 에른스트의 몸뚱어리와 같았다.

놈의 몸일까.

'…무슨 상관일까. 이렇게나 증오스러운 것을.'

하벨 티에라가 그랬듯, 자신 역시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가면을 벗었다.

"…하."

숨을 깊게 토하며 모든 걸 오염으로 물들인 그 힘의 원천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달라.

희망에 찬 목소리를 따라 하벨 역시 희망으로 차올랐다.

―이제는 다르다고!

'그렇게… 기뻤는가.'

하벨의 눈이 반쯤 감기며 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길었구나.'

정말 길었다.

여기까지 도달하는데 너무도 길어버렸다.

"미안… 하다."

하벨은 사과하며 하벨 티에라가 들고 왔던 병을 두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속에 아주 밝게 빛나는 게 있었다.

뚝.

하벨의 눈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건 자신이었다.

쪼개진 육체 속에 있던 영혼을 제외한 자신이었다.

"하……."

하벨은 손을 올렸다.

코와 입에 피 냄새와 피 맛이 진동하며 머릿속에 감각을 차단한 것처럼 고통이 더는 느껴지질 않았다.

'버티거라.'

하벨은 저주를 막는 마법을 바라보았다.

이미 깨져 금이 점점 가는 게 보였다.

―가장 위대하신 왕이시여.

'…웃기지도 않구나.'

하벨은 계속해서 들려오는 하벨 티에라의 말을 비웃으며 숨을 한 번 돌렸다.

―저 하벨 티에라가 이 미천한 몸을 당신께 바치나이다.

이미 푸르른 하벨의 눈동자에 빛까지 어렸다.

몽글몽글.

물이 새싹처럼 피어올랐다.

치이이이익.

오염을 녹이는 강대한 물이 하벨의 손과 함께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뻗어나간 물의 힘이 모든 걸 삼켜나갔다.

―…부디, 제게 깃드소서.

쩌어억.

마법에 간 금이 깊어졌지만, 하벨은 멈추질 않고, 물을 계속 만들어나갔다.

가장 밑에서 흐르는 아름다운 물의 흐름은 은하수를 떠올릴 만큼 반짝거렸다.

하벨이 다시 손을 올렸다.

―세상의 수호자이신 용들의 왕이시여…….

하벨 일대에 아주 넓게 펼쳐진 물이 한순간 모습을 바꿔나갔다.

마지막 심판자가 된 것처럼 물은 전부 모습을 바꿨다.

뚝뚝.

하벨의 코와 입에서 떨어진 피가 웅덩이 되었다.

하벨은 당장 쓰러질 것만 같은 몸을 붙잡으며 에른스트가 남긴 힘을 바라보았다.

수천 개의 날카로운 검이 하벨 뒤에 섰다.

꿈속에서 에른스트를 죽이고자 자신이 멈췄던 그 장면이 재현됐다.

―부디, 이 세상을, 제 가족들을 지켜주십시오. 세상이. 이 세상이… 멸망할 겁니다.

하벨 티에라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움직여 얼굴을 간질이는 그 감각마저 생생했다.

저 상황이 계속 멋대로 그려지면서 자신의 다리가 후들거려왔다.

'이것만.'

하지만 아득함이 하벨을 덮쳤다. 그의 눈이 감겨왔다.

―…용왕님.

하벨 티에라가 부르는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리자 땅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벨은 다급히 손을 짚어 피 웅덩이에 손을 짚었다.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내쉬며 겨우 정신을 붙잡았다.

푸른 기가 얼마나 퍼졌을까.

할 수 있을까.

―저 사실은 이름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름을 부르면 너무 놀라겠죠? 갑자기 펼쳐진 상황이 무서울 텐데, 제가 알고 있다는 사실마저 알면 얼마나 더 두려울까요.

하벨 티에라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저는요……. 용왕님 덕에 마지막으로 산에 올랐어요. 평생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냈어요. 불가능한 일을 해낸 거예요.

흐릿한 시야 안으로 다시 검은 바다가 보였다.

이 몸이 기억하고 있기에 하벨 티에라의 감정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기뻐하고.

슬퍼하고.

또 환희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예요. 저는 이 오염된 바다를 구할 수도 없고, 제 가족들마저 구할 수가 없어요. 만약에 이 기억까지 떠올린다면 제가 얼마나 뻔뻔한지 욕을 할지도 모르겠네요.

하벨은 부들거리며 일어나다가 다시 꼬꾸라졌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쩌어어억.

마법에 또 균열이 일어났다.

기껏 만들어뒀던 물의 검이 서서히 풀리는 게 느껴졌다.

―저는 용왕님을 몰라요. 하지만 류아가 그러더라고요. 용왕님은…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일을 가능한 일로 바꾸었다고요.

'누가? 내가……?'

하벨은 웃음이 났다.

조준점을 잡고 손만 까닥하면 되는데, 그걸 못해서 아등바등하는 자신이?

'…해야 하는데.'

눈이 감겨왔다.

어둠에 잡아먹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냥 믿을래요. 옆에서 많이 도와줄게요. 쓰러지면 빛을 내면서 힘내라고 말할게요. 저는 이제 랜턴이 될 테니까요.

하벨 티에라가 활짝 웃었다.

화르르르륵!

랜턴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아주 밝고, 밝은 빛이었다.

힘내요.

그 소리가 귀에 닿았다.

'힘내야지. 그래. 힘내야지.'

쿨럭!

하벨은 피를 또 토하며 온 힘을 쥐어짰다.

하지만 육체가 한계를 말했다.

갑자기 모든 게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안 돼.'

어둠이 자신을 잡아당기는 느낌과 함께 몸이 앞으로 무너졌다.

손에 쥐었던 반영구 정화제들이 떨어졌다.

물에 새겨놓았던 명령이, 자신이 만든 물이 사라지고 있었다.

보글보글.

그때, 물거품이 일어났다.

하벨의 시선이 잠깐 돌아갔다.

웅웅.

뭔가가 울렸다.

눈을 깜빡거리자 그 속에 하얀 무언가가 있었다.

'…저게 뭐지?'

다시 눈을 감고, 뜨자 소리가 들렸다.

[대장!]

'…대장?'

환각이라 생각이 들 무렵, 정령수가 밀고 들어왔다.

"허… 억!"

깊게 끌어 당겨오는 느낌과 함께 숨을 토했다.

마지막에 느껴지는 따스함처럼 너무도 반가웠다.

그렇게나 몸이 무거웠는데, 정령수가 몸에 돌자 손가락 끝부터 움직였다.

[이 몸이 안 늦었지? 그렇지이?]

아라가 울상을 지으며 물었다.

"아라… 야?"

[대장! 대장! 이 몸이야! 아라야!]

어떻게 아라가 이곳에 올 수 있을까. 하벨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땅이 움직여 하벨을 일으켰다.

[이 몸이, 흑, 서둘러 이안한테 힘을 거의 다 받고 왔어어! 대장을 구하려구! 대장을 여기 바닷속에 혼자 두지 않으려구!]

아라는 엉엉 울었다.

[이 몸은 정령왕이니까! 자연의 힘도 가득 보충받고 왔어!]

하벨이 너무 엉망이었다.

생명이 꺼져가는 게 느껴졌다.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아라는 너무 무서웠다.

[죽으면 안 돼에에! 제발, 죽지 마, 대자앙!]

아라가 하벨을 꼭 안았다.

"…안 죽어."

화르륵.

다시 하벨의 눈동자에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같이, 가자."

하벨은 아주 증오스럽게 저 힘을 바라보았다.

"같이… 가자, 아라야."

모든 걸 죽이고, 삼키며 자신의 힘으로 바꾸는 게 에른스트의 힘이었다.

[응응! 이 몸이랑 같이…….]

쨍그랑!

마법이 기어코 깨져버렸다.

이제껏 비교도 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지만, 아라의 물이 정령수와 같이 밀려들었다.

[이 몸이 막을 수 있어! 대장은 해! 저 나쁜 힘을 부서트리라구!]

아라는 필사의 의지를 다졌다.

저주는 자신의 물로 막을 수 있었다.

"이제는!"

제발 좀.

하벨은 피를 튀기며 소리쳤다.

"다시는!"

격렬했던 고통이 잦아드는 게 느껴졌다.

"나의 바다를 넘볼 수 없을 거다!"

손을 앞으로 뻗자 수천 개의 검이 에른스트의 힘으로 매섭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투투투투투!

빈 곳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전부 다 꽂혀버렸다.

하벨은 그대로 힘을 밀어 넣었다.

스르르.

검이 에른스트의 힘으로 빨려 들어갔다.

"절망해라! 빌어먹을… 에른스트!"

하벨은 에른스트의 힘으로 빨려 들어간 자신의 힘을 아주 작게 압축했다.

저 힘을 단번에 없앨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커져 버렸으니. 속부터 갉아먹고자 회전시켰다.

―…용왕님.

자신의 힘이 고작 두 번만 회전했음에도 바다의 소리가 들렸다.

―용왕님, 용왕님!

―우리, 용왕님!

바다가 반가움에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됐다.

이제 됐다.

하벨은 눈물을 막지 못했다.

주체할 수 없이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미안… 하다."

바다가 얼른 하벨을 감쌌다.

치이이익.

무언가가 녹는 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아팠지?"

바다가 얼마나 아팠는지 제 몸으로 겪었다.

"내가 너무 늦게 찾아왔지?"

―누가 그래요?

―용왕님은 단 한 번도 저희를 잊은 적이 없는데 누가 그래요?

―이렇게, 이렇게 엉망이 되었는데. 이렇게…….

바다가 물을 토하며 눈물을 쏟아냈다.

사랑스러운 용왕.

자신들의 모든 것인 용왕이 이렇게 찾아와주었는데 왜 기쁘지 않을까.

"내가……."

주르르륵.

피가 흘러내리는 게 달랐다.

줄이 끊어지듯 하벨의 몸이 뒤로 무너져내렸다.

[아, 아, 안 돼에!]

쿵쿵.

빠르게 뛰던 심장이 속도를 줄여나갔다.

―죽으면 안 돼요. 다시는… 다시는 용왕님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요!

―제발, 제발. 데리고 가줘요, 정령왕이시여.

―용왕님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어요! 우린 느껴져요!

바다가 아라에게 하벨을 내밀었다.

안도감일까.

하벨은 더는 의식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저 바다와 맞닿고 싶어서 손가락을 뻗었다.

―헛!

―놈이 와요! 빨리요!

바다의 재촉에 아라는 하벨의 옷자락을 잡고는 얼른 물의 길로 들어갔다.

바다가 고개를 돌려 에른스트의 힘을 쳐다보았다.

―이건 들키면 안 돼.

―절대로.

―저… 개자식. 반드시 죽여버릴 거야.

바다는 에른스트의 힘을 파먹고 있는 용왕의 힘을 감쌌다.

이제 저 오염을 얼마든지 저항할 수 있었기에 일부러 오염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바다는 침묵했다.

곧 물살이 흔들렸다.

바닷속에 검은 연기를 뿜으며 에른스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겉에 덮었던 모습을 잃어버린 것처럼 그저 형체만 갖춘 채 에른스트는 주변을 둘러보기 바빴다.

"…달라진 게 없는데?"

에른스트는 안도했다.

아래를 보니 자신의 힘이 여전히 있었다.

어딜 봐도 오염으로 가득 찬 바다는 그대로였다.

'내… 착각이라고?'

에른스트는 혼란에 휩싸였다.

바다는 자신이 왔음에도 여전히 가만히 있었다.

저 바다에 아직 의지가 있었기에 만약에 자신의 힘이 깨졌다면 금방 덤빌 텐데.

'정말 내 착각이라고?'

에른스트는 하나씩 확인해보았다.

오염도 살짝 변동이 있을 뿐 그대로였다.

바닷속에 던져둔 자신의 신체 일부와 연결된 부분도 정상이었다.

그리고 용왕에게 걸어둔 저주 역시.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

마치 바다가 자신을 놀리듯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 * *

"…나는 한 번 내뱉은 말은 지켜야 해. 그게… 아직 적용되고 있는 나의 제약이니까."

에른스트의 목소리와 함께 하벨은 다시 눈을 떴다.

'그 꿈을 다시 이어서 꾸는 것인가.'

하벨은 꼴 보기도 싫은 에른스트의 면상에 주먹을 갈겼으면 했다.

"어떻게?"

하지만 자신은 에른스트를 보며 물었다.

"어떻게 살리겠다는 거지?"

무척 간절했으니까.

그 간절함으로 에른스트가 꺼낼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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