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화. 심연으로(2)
* * *
'…걱정인데.'
다시 앞을 바라보긴 했으나, 하벨은 여전히 아라가 걱정스러웠다.
저 망토에 자연의 힘이 깃들었는지 물이 보였다.
그렇다면 저 망토의 효과가 얼마나 가는 건지, 얼마만큼 아라를 보호할 수 있는지, 그 모든 게 걱정스러웠지만, 하벨은 아라를 말릴 수가 없었다.
에른스트가 남긴 그 힘이 더 가까워졌고, 이미 오염된 물을 저항하고자 자신의 힘을 두른 것만으로도 힘의 소진이 엄청나 코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미리 아주 강한 진통제를 먹고, 인어족이 사는 곳에서 한 번 더 먹어도 몸속에서 있는 푸른 돌이 제멋대로 움직이는지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도,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 몇 번이고 세차게 자신을 찔러왔다.
아파서. 칼로 난도질당하는 느낌이 너무 아파서 아라가 없었다면 다 놓아버리지 않았을까.
"…아라야."
이미 입안이 바짝 말랐다.
[괜찮아, 대장. 이 몸이 대장을 아래로 데려가고 있어. 대장은 지금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앞만 바라봐.]
"아니. 이것만 줄게."
하벨은 뒤를 돌아보며 아라에게 물로 된 풍선을 건넸다.
아라가 잠깐 멈춰 풍선을 받았다.
[이게 뭐야?]
너무 예뻤다.
햇빛이 닿지 않아 어두운 이곳에서 반짝거리는 건 하벨과 자신의 망토가 유일했는데 저 풍선에도 빛이 났다.
"여기보다 더 아래로 내려가면 분명 내가 주변을 보지 못할 정도로 힘겨울지도 몰라. 그때, 이걸 써. 널 레놀드 왕국으로 데려다줄 거야."
아라가 물의 길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오염된 물이 옅은 곳이었다.
이렇게 강하면 사용할 수가 없다는 걸 몇 번이나 확인하지 않았는가.
[대장은……? 이 힘을 이 몸한테 주면 대장은 어떻게 돌아가?]
"돌아갈 힘은 남겨놓을 거야."
[이 몸이랑 같이 갈 수 있을 만큼?]
"글쎄."
애매한 대답에 아라는 묻고 싶었지만, 하벨의 목소리가 천천히 끊어지고 있다는 걸 느껴 더는 묻지 않고 아래로 하벨을 데려갔다.
계속.
쭈욱.
―조심해요. 여긴 진짜 위험하니까.
얼마나 내려갔을까. 반영구 정화제에서 나온 목소리에 아라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천천히 반영구 정화제가 녹고 있었다.
'…노, 녹, 녹고 있어!'
아라는 필사적으로 삼킨 말 대신 꼬리가 바짝 섰다.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아라는 속도를 멈추질 않았다.
물결에 휩쓸면 휩쓸수록, 아래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아라의 눈동자에 걱정이 가득했다.
'정화가 녹아내리고 있어. 이 몸이 잘못 본 게 아니야.'
반영구 정화제가 녹아내리다니.
이것이야말로 모든 오염을 정화할 가장 완벽한 존재가 아니었던가.
절망감이 아라에게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이, 이 몸이 괜찮은 건 망토 덕이야.'
아라는 풍선을 바라보았다.
하벨이 준 풍선.
꿀꺽.
아라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아니야. 이 몸은 버틸 수 있어.'
바닷속에 존재하는 생명체는 이미 오래전에 보이지 않았고, 오직 고요함만 남아버렸다.
그 고요함이 대체 얼마나 이어졌는지 모를 만큼 아주 깊게 내려왔다고 아라는 생각했다.
하벨도 이미 오래전부터 말을 하지 않고 그저 쉴 새 없이 제 몸에 정화제를 찔러넣었다.
그 손길마저 점점 느려지는 게 보였다.
이 공간에서 시간도, 무엇도 다 왜곡되는 것만 같았다.
'거의 다 왔으면…… 아앗! 자, 작아지지 마, 보석아! 힘을 내!'
아라는 점점 줄어드는 반영구 정화제를 보며 속이 상했다.
벌써 하벨의 엄지만큼 작아져 이대로 간다면 사라질 게 분명했다.
'이 몸의 정령수라면 물을 끌어올 수 있지 않…….'
고개를 들며 하벨의 시선이 마주하자 아라는 그대로 멈췄다.
순간, 아라는 심장이 멈출 만큼 놀랐다.
"…아라야."
하벨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이상하다는 느낌이 아라의 털을 만지작거리는 듯했다.
[대장……?]
아라는 하벨의 얼굴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 정도가 되어야 아라는 가면 너머에 흘러나오는 붉은 피를 보았다. 그만큼 주변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둠이 더 짙어졌다.
[대체 어, 언제부터 피를 토한 거야?]
"저걸 사용해……."
하벨이 아라의 이마를 건드렸다. 풍선을 건드리려고 했지만, 손을 뻗기가 어려웠다.
[싫어! 이 몸은 더 갈 수 있어!]
"아라, 네가 죽으면 큰일 나."
[대장이 죽어도 마찬가지야. 이 몸하고 같이 가! 응? 영혼을 하나만 더 얻고 오자.]
아라는 하벨의 상태가 어떤지 얼굴이 너무 보고 싶었다.
[이 몸이 몰랐어.]
아라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반영구 정화제마저 녹는 와중에 하벨의 몸이 지금 얼마나 엉망인지 알았어야 했는데.
[이 몸이… 알았어야 했는데.]
아라는 자신의 망토를 바라보았다.
[있잖아, 망토야. 이 몸이 아니라 대장한테 가주면…….]
"아라야."
하벨은 조금 강하게 아라를 불렀다.
아라가 놀라면서 흠칫거리자 하벨의 움직임마저 덩달아 멈췄다.
숨을 천천히 내쉰 뒤, 하벨은 아라의 앞발을 잡았다.
"고마… 워."
이제 조금만 남았다.
정말 조금만.
"어서 가."
[싫어. 이 몸은 아직 버틸 수 있어.]
하벨은 자신의 힘을 사용해 아라를 감쌌다.
[이러지 마, 대장!]
"아라야. 넌 여기까지야. 더는 버티지 못해. 내가 알아."
힘을 사용하기에, 하벨의 눈에 보였다.
이미 저 망토에 깃든 자연의 힘이 떨어졌다는 걸.
그 속에 물이 당연히 포함되어 있기에 왜 보이지 않을까.
"이 반영구 정화제가 너를 지키고 있었어."
하벨은 아라가 손에 쥔 반영구 정화제를 가리켰다.
하벨의 힘이 자신을 감싸자 반영구 정화제는 더는 녹지 않았다.
아라의 눈이 커지고 곧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말이었다.
정말로 녹지 않자 아라는 울먹였다.
[그럼 지금. 지금, 반영구 정화제를 만들자. 이 몸은 그럼 더 버틸 수 있잖아?]
"아라야."
하벨은 손을 뻗어 아라를 쓰다듬었다.
"여긴 자연의 힘이 없어. 다 죽어있어. 아라 네 몸을 보호하기 위한 양뿐이라는 걸 내가 모르겠어?"
[이 몸이 많이… 가져왔어야 했어!]
아라는 눈물이 핑 돌았다.
[이 몸은 바보야! 이 몸이 엄청 많이 가져왔으면 대장을 더 밑까지 데려올 수 있었어!]
"아니야, 아라야. 네가… 콜록!"
하벨은 피를 토했다.
힘을 둘러도 몸에 있는 푸른 돌이 오염에 반응해 계속, 계속 자신의 몸을 꿰뚫었다.
에른스트가 건 저주마저 점점 강해지는 게 느껴져 마법마저 흔들렸다.
"여기에, 하, 몇 개를 가져왔어도 결과는 똑같아. 이 끔찍한 힘이 자연의 힘을 먹고 있으니까."
하벨은 얼굴을 가득 구겼다.
내려오면서, 에른스트가 남긴 힘과 가까워지면서 내지르는 물의 소리를 통해 알게 됐다.
반영구 정화제를 수천 개 가져와도 이 오염이 그만큼 증식해 자연의 힘을 먹어치울 거라는 사실을.
[자연의 힘을… 먹어?]
아라는 눈물을 또르르 흘리며 물었다.
"그래. 자연은 이 오염을 저항했어. 계속 저항하고 있었어. 하지만 이건… 하악."
하벨은 갑자기 거칠어진 숨에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아라가 다급히 하벨에게 정령수를 넣었다.
청량한 힘이 쏟아지자 물의 저주가 잠깐 잠잠해졌다.
"바다가… 자연이, 이 오염을 이길 수 없었던 건, 내게 건 저주와 같아서야."
하벨은 아라가 기억하길 바랐다.
저기 위에 있는 이들이 알아야 하는 사실이니까.
"기억해, 아라야."
[…으응.]
아라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오염은… 힘을 먹고 자라나. 자연이든, 마나든 먹고 자라나는 아주… 끔찍한 힘이야. 상대가 저항하면 할수록 커지는 포식자의 힘을 타고났어."
하벨은 잠깐 피식 웃었다.
"내… 힘은 신의 힘이야. 나는 모든 물과 바다의… 지배자니까, 이 오염도 내 힘만은 먹을 수 없어."
이 세상에서 물이라는 걸 두고 본다면 그 누구도 자신의 힘을 넘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만이 저 오염을 감당할 수 있으며, 없앴을 수 있었다.
[왜 이 몸이 가진 힘은 먹히는 건데? 이 몸이 가진 힘의 근원은 대장이잖아? 정화제가 오염된 물을 없앨 수 있는데?]
아라는 억울했다.
왜 자신들은 오염된 물에 먹히는 힘인지.
"…너희가 가진 근본이 내 힘이라고 해도 너희가 가진 가장 강한 힘은 자연의 힘이야."
먹힐 수밖에 없는 힘이라고 하벨이 말하자 아라는 그를 안아주었다.
[왜!]
아라는 펑펑 울었다.
[왜에… 왜에, 대체 왜 모든 게 대장한테 다 떠밀려 오는 건데에에! 이 몸도 돕고 싶단 말이야아아……!]
하벨은 아라를 토닥거렸다.
신이 자신에게 물과 관련된 모든 권리를 주었기에 물에 닿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아 오염된 물에는 신의 은총이 효과가 없었다.
하지만 그 오염된 물을 바탕으로 변질이 된 힘인 오미너스에게는 먹혔겠지.
오염된 물이 오미너스가 되려면 정령이 필요했으니까.
하벨은 이제야 힘이 왜 이렇게 작용했는지 알았다.
"모두에게 전해줘."
[싫어어어! 이 몸은 싫어!]
아라는 하벨은 이 고요한 바닷속에 그를 내버려 두는 게 싫었다.
그게 가장 무서웠다.
[대장은 무서울 거야!]
아라의 눈물이 바로 아라를 둘러싼 물에게 먹혔다.
[저 바닷속이 너무 깜깜해서 대장이 외로울지도 몰라아!]
빛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저곳은 그야말로 어두운 밤보다 더 깊었다.
그 속에 어떻게 하벨을 혼자 둘까.
[대장은 외로운 걸 제일 싫어하는데에. 대장은 혼자가 되는 걸 제일 무서워하는데. 이 몸이 아는데에. 이 몸은 정령왕인데!]
"네가 정령왕이라서 여기까지 버틸 수 있는 거야. 울지마, 아라야. 응?"
어헝헝헝.
아라는 펑펑 울다가 눈을 크게 떴다.
훌쩍거리면서 아라는 하벨을 바라보았다.
이러면 하벨이 마법사의 탑에서 떨어질 때 아무것도 못 하고 바라만 봐야 했던 그때와 어떤 차이도 없었다.
'이 몸이… 정령왕이라서 여기까지 버틴 거라구?'
아라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달라야 했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자신이 하벨을 지킬 힘을 가지고 싶다고 그토록 바라왔지 않은가.
그 힘을 지금은 가지고 있었다.
[이 몸이랑 같이 반영구 정화제를 만들어줘!]
"아라야……."
[아니야. 이 몸은 더는 고집부리지 않을 거야. 지금도 대장의 힘이 흔들리니까.]
아라는 정령수를 넣었다.
정령수가 밀려오자 하벨은 안쓰러움을 담아 그 힘을 이용해 반영구 정화제를 만들었다.
아라에게 내밀자 아라는 반영구 정화제를 쥐더니 하벨의 주머니에 넣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녹아버린 반영구 정화제 역시 넣었다.
[대장이 가지고 있어. 꼭 가지고 있어야 해.]
"…내가?"
[응응! 대장한테 도움이 될 거야.]
아라가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더 반짝이는 눈으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이 몸이 대장을 도우러 올 거야.]
아라는 앞발을 올려 하벨의 가면을 만지작거렸다.
[꼭 올게. 약속해, 대장. 이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하벨 역시 손을 들어 아라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니까, 대장도… 죽으면 안 돼. 이 몸하고 약속해. 꼭 무사해야 해.]
아라가 활짝 웃었다. 휘어진 눈을 따라 눈물이 흘렀다.
"약속해."
하벨 역시 웃었다.
아라가 앞발로 꼭 쥐고 있던 풍선을 만지자 풍선에 있던 자신의 힘이 아라를 삼켰다.
보글보글.
물보라가 일어나며 조용하던 바닷속에 잠깐 소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모든 게 멈췄다.
귓가에 스며드는 건 그저 무언가가 흐르는 소리일 뿐, 하벨은 고요함과 함께 밀려드는 적막감 속에 가쁜 숨을 내쉬었다.
하.
내려가기 전에 하벨은 잠깐 주변을 바라보았다.
이제 아무도 없었다.
이 침묵이 하벨은 너무도 싫었다.
어쩐지 더 몸이 무거워졌다.
'…가자.'
하벨은 정화제가 든 주사기를 놓은 뒤, 주머니 속에 든 반영구 정화제를 만지작거리며 힘을 사용했다.
어떤 저항도 받지 않는 것처럼 하벨은 여하가 데려온 속도보다, 아라가 밀어줬던 속도보다 빠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것 자체는 무척 쉬웠다.
하지만 고통이 더 거세졌다.
욱신욱신욱신욱신.
마치 고통이 소리가 되어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콜록, 콜록."
하벨은 기침을 내뱉었다.
한 번 시작된 기침은 멈추질 않았고, 피가 섞여왔다.
또 정화제가 든 주사기를 사용했다.
흐린 눈으로 어딜 봐도 보이는 건 어둠뿐, 하벨은 그 어두움과 침묵이 무섭게 다가왔다.
벌써 목이 메왔다.
아라가 곁에 있었던 그 사실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내려왔을까.
또 얼마나 내려가야 할까.
내려가고 있는 게 맞을까.
그런 불안함이 턱밑까지 몰려와 하벨은 반영구 정화제를 계속 만지작거렸다.
'조용한 건… 무섭다.'
하벨은 온몸이 덜덜 떨려오는 걸 느꼈다.
죽은 후에, 하벨 티에라가 된 이후로 자신의 곁에 쭉 아라가 있었다.
혼자가 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혼자가.
"…콜록."
기침 소리가 아니었다면 저 생각에 먹혔을지도 모를 만큼 무서웠다.
이러다가 환상에 사로잡히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커 늘 멈추고 있던 정화 장치에 소리를 켰다.
삐이이이.
시끄러운 소리에 하벨은 숨을 깊게 내쉬었다.
'…나는 괜찮다.'
하벨은 눈을 감았다.
푸르르던 바다를 떠올리며 그저 아래로.
또 아래로 내려갔다.
몇 개의 정화제가 사용되었는지 모를 만큼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넣자, 남은 정화제가 몇 없었다.
하지만 하벨은 또 사용하며 코에서 흐르는 뜨거움을 받아들이고, 무겁게 짓누른 눈꺼풀에 눈을 감았다가 또 뜨기를 반복했다.
자신을 찌르는 이 불쾌한 감각이 아니라면 무엇이 무서울까.
하벨은 수압과 더불어 자신을 베어내는 이 감각에 익숙해질 무렵 다급히 감았던 눈을 떴다.
검고 짙은 바닷속에서 무언가가 뻗어 나와 있는 보였다.
지금까지도 힘들고 벅찼지만, 하벨은 저곳으로 간다면 자신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더 큰 통증을 맞이하리라 생각했다.
'가자.'
하지만 하벨은 망설이지 않았다.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오지 않았던가.
'돌아갈 수 없어.'
각오하고, 또 각오하며 들어갔지만, 하벨은 조금 전과 다른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배가 관통되는 기분이 온몸을 휩쓸었다.
"…우웨엑."
가면을 들어 핏덩어리를 쏟아냈다.
"…하악, 학."
하벨의 눈동자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숨이 막혔다.
고통 속에, 거대한 슬픔 속에, 자신에게 흘러오는 절망이 자신을 잡아먹어 갔다.
쿵쿵.
하지만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여기였다.
쿵쿵.
저 앞에 에른스트가 세계를 찌른 그 힘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