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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84화 (384/415)

384화. 심연으로

* * *

"한 가지만. 딱 한 가지만 묻겠소."

혼란스러운 맞으나, 여하는 당장 밀려오는 의문만큼은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었다.

"그래."

그걸 알기에 하벨 역시 기다려 주었다.

"저 바다 아래도 귀인의 힘을 사용해 이동하면 되는 게 아니오."

"저곳만은 물과 연결이 되질 않아. 연결이 되지 않으면 내가 갈 수가 없고."

인터넷망이 깔려있지 않으면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걸 말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건 현대에서 쓰이는 용어일 뿐, 이곳에는 쓸 수 없었다.

"…알겠소. 그럼 이걸 물든, 손에 쥐든 어서 내게 업히시오."

여하는 여전히 의문이 가득한 채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라가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거리며 여하의 손을 만졌다.

순간 여하가 흠칫 놀라며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하벨이 태연하게 말했다.

"아라야. 지금 궁금해서 네 손에 매달려 있어. 꼬리도 엄청 흔들고 있고."

여하는 주먹을 펼치려다 반대 손을 들어 대충 꼬리가 이 정도에 있겠구나 싶어 가만히 있었다.

부드러운 촉감이 왔다 갔다 하는 모양새에 여하의 입꼬리가 잠깐 올라갔다.

[이 몸은 너무 궁금해. 여하가 어서 손을 펼쳐줬으면 좋겠어!]

아라의 부탁이 여하에게 닿은 건지, 여하는 손을 펼쳤다.

[우와아아!]

아라는 눈동자 반짝였다.

"인어족이라고 태어날 때부터 오염된 물에 완벽히 적응하는 게 아니오. 어릴 때는 어느 정도 오염된 물에 닿지 않게 막으면서 천천히 적응시켜 나가오. 이건 그때 쓰는 것이오."

여하의 손에 있는 건 부적이었다.

[이건 류아한테 엄청 많이 달린 거야.]

"부적… 인데?"

하벨이 얼떨떨해하며 묻자 도리어 여하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아, 과거에. 그러니까… 음, 귀인이 죽기 전에 있었던 것이오?"

"맞아. 이건 주술이야. 이것도, 이렇게 전해질 줄이야."

하벨은 괜스레 웃음이 났다.

류아에게 주렁주렁 달린 건 보았지만, 새삼스레 더 반가웠다.

"어느 정도까지 도움이 될 것이오. 그 후에 귀인이 힘을 사용하는 게 어떻겠소?"

"고마워. 정말 좋지."

"그럼 업히시오."

여하가 한쪽 무릎을 꿇자 하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요새 정말 자주 업힌다 싶어."

"어쩌겠소. 귀인이 불나방 같은 성질을 타고 나지 않았소?"

[불…….]

하벨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아라는 자신의 입을 막았다. 불나방이라는 말을 하면 하벨이 간질거린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 몸은 지금 간질간질하고 싶지 않아.]

아라는 슬쩍 다가와 여하와 아라 사이에 있는 공간에 누웠다.

아라의 광대가 올라갔다.

"준비됐어."

하벨은 가면을 썼다.

[이 몸도 준비됐어. 출발!]

아라가 앞발을 뻗었다.

"꽉 잡으시오! 빠를 것이오."

여하가 앞으로 달리자 하벨의 몸이 뒤로 움직였다.

"…우와악!"

각오는 했지만, 하마터면 허리가 뒤로 꺾일 뻔했다.

그만큼 여하가 빨랐다.

하벨은 손에 쥔 부적만큼은 사수하며 자신이 남긴 힘을 스쳐 지나가듯 바다로 나왔다.

풍덩!

물거품이 일어났다.

거친 파도가 휩쓸며 일어난 소리 속에 구슬픔이 전해져왔다.

여긴 바닷속이었다. 단번에 오염된 물이 자신을 찔렀다.

욱신욱신.

부적의 힘을 둘렸음에도 이 욱신거림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아, 아파?]

아라가 하벨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조금?"

하벨은 헤레스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준, 그저 어느 곳이든 찌르기만 하면 되는, 정화제가 든 주사기를 벌써 사용했다.

"아프……."

"계속 가, 여하야."

여하는 헤엄을 치다 말고 멈칫거렸다. 하지만 이를 하벨이 말렸고, 여하는 주춤거렸던 것도 잠시 시원하게 손을 뻗었다.

'여긴 신기하게도 우리가 사는 곳까지 퍼져 있던 오염보다 훨씬 옅다.'

여하는 자신의 몸에 아무 이상이 없는 걸 제일 먼저 확인했다.

그렇다면 뭘 망설일까.

손을 한 번 뻗고, 발을 걷어찼다.

마치 물이라는 벽을 차서 도약한 것처럼 부드럽고, 길게 나아가며 순식간에 더 깊은 곳까지 도달했다.

더 깊게.

여하는 계속 헤엄쳤다.

더 밑으로.

바다색이 점점 짙어지고, 하벨에게 밀려드는 통증이 강해지자 누워 있던 아라가 꼬리를 붙잡으며 하벨을 보았다.

"…미안하오."

물거품이 이는 소리 속에 여하의 사과가 이어졌다.

"사과하지 마. 몸이 원래 이랬을 뿐이니까."

하벨의 말과 함께 랜턴이 흔들렸다.

손에 쥔 부적이 끝부터 시작해 천천히 타들어 갔다.

시간이 다 되어간다는 의미겠지.

"여하야."

"말하시오."

"네가 아프기 전에 멈춰."

"귀인이여."

여하는 대답 대신 하벨을 불렀다.

"나는 이곳을 버리고 떠났소. 아버지한테 들었겠지만, 내 형제들은 죽었소. 왕을 이을 자는 나뿐이오. 그럼에도 나는 왕이 되길 거부했소."

여하는 채 앞을 알 수 없을 만큼 짙은 바다를 거침없이 나아갔다.

저 바다가 마치 모든 게 두려워 도망친 예전 자신의 마음 같았다.

"무서웠소. 그 자리는 원래 내 자리가 아니었는데, 나밖에 남지 않으니 떠맡듯 다가온 자리라 더 그랬소."

"이해해. 그만큼 무서운 자리니까."

"처음에는 그랬소. 내 형제들을 잡아먹은 인간보다 그들의 세상보다 왕의 자리가 더 무서웠소."

여하는 잠깐 말을 삼켰다.

물을 헤치며 일어나는 소리가 그의 울음처럼 들려왔다.

"…세상을 돌며 알게 되었소. 진짜 무서운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 자신이었소."

현실을 외면한 자신은 어딜 가도 도망자였다.

인간 세상에서 누굴 만나도, 무얼 해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

언제나 그 갈증은 외로움 속에 날카롭게 간 손톱을 들이밀며 자신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도망자라며 매 순간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가.

"다시 돌아와 본 내 아버지는… 너무도 약하고, 늙어 있었소."

여하는 세월의 흐름을 느꼈다. 그만큼 자신이 오래 돌아다녔다는 걸 알았다.

"…고맙소."

"고맙다고?"

"더 늦기 전에 돌아올 수 있어서 다행이오. 더 엉망이 되기 전에 돌아와 다행이오."

여하는 비로소 자신의 귀에 맴돌던 '도망자'라는 소리가 사라졌음을 알았다.

"내가 인어족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오."

그토록 오래 지상을 헤맨 건 하벨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닐까.

모든 건 우연에서 시작했지만, 자신이 하벨을 만난 가장 큰 행운이었다.

"귀인을 만날 수 있어서 정말… 기쁘오."

여하는 이제 이 바다가, 눈앞에 다가오는 검은 바다가 무섭지 않았다.

"그러니 귀인이여."

바다를 내려가는 속도가 더 빨라지며 여하의 목소리에 기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부끄럽지만, 어인족을, 인어족을 대표해 용왕인 귀인을 승리로 이끌겠소."

아마 과거 어인족들은 이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여하의 마음속에 기쁨과 용기가 샘솟았다.

고작 헤엄을 치는 것뿐이지만, 인어족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행동이 아닌가.

"저 바닷속으로 말이오."

하벨은 웃고 있는 여하의 표정에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저토록 환한 웃음은 처음 봤다.

'괜찮다. 내가 멈추면 된다.'

하벨은 손아귀에서 사라져가는 부적을 바라보며 용왕의 힘을 끌어올렸다.

슬픔이 전해졌다.

찰랑.

물소리가 들려오며 하벨 주위로 새로운 물이 만들어졌다.

물의 압력과 오염을 견딜 만큼만 최소한으로 사용했다.

'이제 시작이다.'

하벨은 긴장했다.

아직 에른스트의 힘이 멀리서 느껴졌다. 대충 반 정도 남지 않을까.

"아직 아무것도 하지 마시오. 힘을 아끼시오."

여하의 목소리에 숨결이 섞여왔다.

아무리 인어족이라도 이 정도까지 왔으면 힘들 법했다.

굉장히 이른 시간 안에 깊은 곳까지 도달했지만, 하벨은 이제 끝을 보았다.

치이이익.

작지만, 무언가 녹는 소리가 들려오고 오염 농도가 점점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여하야."

하벨은 여하를 불렀다.

여하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바닷속을 헤쳐가는 것만으로도 겉껍질이 벗겨지고 있었다.

아직은 회복 속도가 빨라 금방 나았지만, 여하의 손과 다리가 무겁게 보였다.

"괜찮소. 나는 금방 낫소."

찰랑.

뒤에서 물소리가 들리자 여하가 목소리를 높였다.

"날 감싸지 마시오! 힘의 고갈만 빨라질 뿐이오!"

여하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 인어족이 사는 곳까지 들어가는 오염보다 더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조만한 한계가 찾아올지도 몰랐다.

겨우 여기서.

얼마나 남았는지 몰라도 아직 바닥까지 아득했다.

여하는 팔을 휘젓고, 다리를 흔들었다.

두 다리와 팔에 무거운 돌덩어리가 묶여 있는 것처럼 너무 무거웠다.

'빌어먹을.'

하벨은 인어족을 위해 더 어마어마하며 위험하고, 기적과도 같은 행동을 했는데.

인어면서 평생 해온 헤엄 하나 제대로 치질 못하다니.

헤엄이란 인어인 자신에게 있어서 숨을 쉬는 것처럼 너무도 당연한 행동이 아닌가.

'제발.'

여하는 더 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치이이익.

손끝부터 녹아내리다가 다시 회복되기를 반복했다.

피부에 닿는 물이 너무도 쓰라렸다.

물이 멋대로 피부든, 머리카락이든 녹였지만, 인어가 가진 회복력이 자신을 도왔다.

아팠다.

아팠음에도 여하는 자신에게 매달린 하벨을 의식하며 오직 밑으로 팔을 움직이고, 다리를 움직였다.

'물이여.'

여하의 눈빛이 흐려졌다.

'부디, 이분을 모시게 해다오.'

앞으로 뻗던 손이 너무도 느려졌다.

'부디…….'

물살이 자신을 잡아 당겨주길.

저 끝까지 하벨을 데려다주길.

눈앞에 까맣던 바다가 한순간 맑고 깨끗하게 변해갔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자신 역시 말로서 들어왔던 그 세계가 지금 눈앞에 펼쳐졌다.

'아름답다.'

여하는 바다를 향해 손을 뻗지만, 손끝이 움직이질 않았다.

누군가 자신을 쓰다듬는 것만 같았다.

부드럽게 일어나는 물보라가 눈에 보이자 여하는 다급히 눈을 떴다.

목을 잡던 손이 사라졌다.

뒤를 돌아보니 하벨이 없자 위를 쳐다보고 다시 아래를 바라보았다.

저 아래에 하벨이 보였다.

이상하게도 하벨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나풀거리는 것만 같았다.

"…귀, 귀인이여."

물이 자신을 위로 데려가고 있었다.

여하는 얼굴을 구겼다.

이런 결말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자신은 더 아래까지 내려가야만 했다.

―너 기절했어.

물이 말을 걸어왔다.

"이거 놔……."

―너 지금 몸이 만신창이야. 오염이 너무 짙어. 용왕님의 힘이 아니었으면 우리도 움직이질 못할 정도야.

"그러니까 이거 놔! 나는! 나는 저기로 내려가야 한다고!"

―손가락도 제대로 못 움직이면서. 허세 부리지 마.

여하는 분노를 터트렸지만, 하벨과 점점 멀어질 뿐이었다.

"여하야. 고마워."

하벨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은 것처럼 또렷하게 들려왔다.

"나도 널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너희 부친한테 들은 그 말은, 모든 걸 용서받는 기분이었거든. 널 만나지 못했다면 나 역시 평생 듣지 못했겠지."

물을 타고 하벨의 감정이 전해왔다.

깊은 고마움이 가슴을 타고 흐르자 여하는 순간 울컥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헤엄도 제대로 못 친 못난 인어가 아닌가.

"아니. 내가 보여줄게. 여하 네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마치 속마음을 읽힌 듯 들려오는 말이 눈시울을 건들 정도로 다정했다.

"그리고 여하 너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어. 모두한테 전해줘야지? 집중해, 여하야."

하벨은 여하를 데리고 위로 올라가는 물의 흐름을 바꿨다.

이동기를 사용했다.

분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에게 손을 뻗던 여하를 물이 삼켰다.

하벨은 싱긋 웃었다.

[…여하는 괜찮을까?]

아라는 위를 바라보았다.

아라의 주변에 어떤 물도 감싸지 않았지만, 아라는 멀쩡했다.

망토의 힘이었다.

"물론이지. 기절할 정도로까지 내려올 줄은 몰랐는데."

하벨은 정말로 감동했다.

물속에 깃든 오염의 농도가 심해 회복 속도가 녹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이 여하를 물로 감싸고 위로 보냈다.

"여하 덕에 힘을 많이 아꼈어. 벌써 여기까지 내려왔잖아?"

[이제 이 몸이 할 차례야. 맞지, 대장?]

아라가 앞발을 꽉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괜찮아?"

[응! 봐봐, 이 몸은 정말 괜찮잖아.]

아라가 빙그르르 돌며 하벨 뒤로 움직였다.

"정말 괜찮겠어? 여기는 오염이 너무 심해서."

하벨은 잠깐 말을 멈췄다.

아무리 힘을 써도 태생을 바꾸기가 어려운지 목구멍에 피 맛이 맴돌았다.

"오염이 심해서… 자연의 힘이 버티지 못할 텐데?"

이미 물부터 목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짠!]

아라가 꼬리에서 반영구 정화제를 꺼냈다.

"…그게 꼬리에 들어갔다고?"

[응응! 반영구 정화제는 뭐든 될 수 있어! 이 몸이 부탁했지!]

아라가 반영구 정화를 끌어안았다.

[가자, 보석아. 우리가 해야 해! 우리가 대장을 저 밑으로 데려다주자?]

아라는 눈을 꼬옥 감고 반영구 정화제에 이마를 가져댔다.

물속이 깊어진 만큼 압력이 너무도 높았다. 인어였던 여하마저 버티지 못할 정도로.

하지만 이곳을 이길 수 있는 물뿐이었다.

'이 몸은 정령왕이야.'

자연은 자신의 발아래에 있다는 걸 아라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분명히 할 수 있었다.

[간다아아!]

아라는 반영구 정화제에 담긴 자연의 힘을 이용해 물살을 거슬렀다.

물살이 움직이며 하벨을 아래로 끌었다.

[우오오옵!]

아라가 기뻐했다.

바닷속에서도 반영구 정화제 덕에 자신이 힘을 낼 수 있었다.

망토 덕분에 이 오염도 무섭지 않았다.

'…생각보다 짙다.'

내려가면 갈수록 오염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짙어지자 하벨은 자주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때마다 자신의 등을 밀며 배시시 웃는 아라가 보였다.

[이 몸이 아직 완전한 정령왕이 아니더라도 이 몸이 대장을 움직였어!]

아라는 저 아래를 가리켰다.

[이 몸이 대장을 저 아래로 데려다줄게!]

아라의 꼬리가 행복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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