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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81화 (381/415)

381화. 모든 것의 시작

* * *

미친 새끼.

하벨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방금 왕을 협박하고자 힘을 잠깐 끌어왔을 때, 자신은 보고 말았다.

바닷속에 흐르는, 단지 불길하다고 말하기에는 이른, 꿈속에서 에른스트를 마주했을 때 느꼈던 그 힘을.

"그걸 어떻게 아는 것이오?"

왕이 물었다.

태연한 표정이나, 하벨은 그 속에 드러난 놀라움을 읽었다.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 그렇지?"

하벨은 기가 찬 마음을 억누르며 물었다.

에른스트가 인어족이 올라오는 족족 다 죽이고 있었다

왜 그들을 죽였겠는가.

―그렇소. 나는 인어이기에 물의 축복을 받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바다로 들어가 인어족이 사는 곳까지 도달하지 못했소.

여하가 분명히 인어족이 사는 곳까지 도달하지 못했다고 했다.

갑자기 오염이 짙어졌고, 인어족마저 버티지 못할 만큼 짙은 오염에 살이 썩어갔다고 했다.

왜 갑자기 에른스트는 다급해졌겠는가.

"상황이 이렇게 변했다는 건 인어족 중 누군가가 진실을 알게 된 게 틀림없잖아?"

너 말이야.

하벨은 왕을 눈빛으로 가리켰다.

"다들, 물러가라."

왕은 저들을 물렀다.

"왜 그러는 겁니까?"

여하가 묻자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떠나란 말도, 남으란 말도.

마치 여하에게 선택을 맡기는 듯했다.

"여흥이 깨져버렸네."

하벨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사람들이 있어야 호응하기도 쉬운데.

왕은 모두가 물러나자 하벨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고귀한 자이시여, 무례를 용서하시오. 저는 누가 뭐래도 저들의 왕이오. 백성들이 있는 한, 머리를 함부로 조아릴 수가 없소."

"이해해."

하벨은 씩 웃었다.

"넌 왕이니까. 왕의 머리가 가벼우면 되겠어?"

"고귀한 자이시여."

왕의 시선이 여하에게 향했다.

"혹여 제 자식이 실례를 범한 게 있다면 부디, 용서해주시오."

"내 옆에서 잘해주고 있어. 걱정하지 마."

여하를 향한 강한 걱정이 있기에 하벨은 실실 웃었다.

여하를 등을 토닥여주던 왕은 무겁게 말을 꺼냈다.

"저는, 인간들 때문에… 자식을 잃었소. 그래서 처음에 당신을 인간이라 생각했기에 분노가 든 건 사실이오."

하벨도, 여하도 그 이야기에 덩달아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심경을 어떻게 알까.

"하지만 우리를 살려줄 수 있는 건 우습게도 인간들이오. 그래서 우린 시도했소. 계속 희망을 붙잡으며 저 위로 올라갔소."

"내가 너희를 구할 거야."

"……?"

왕은 갑자기 훅 들어온 말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구하… 다뇨?"

"그러려고 왔어. 말했잖아, 나는 너희의 왕이었다고. 과거에 하지 못했던 행동을 이제야 하는 게 우습긴 한데……."

하벨은 말을 하다가 잠깐 멈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 심정을 무어라 말하면 좋을까.

길고 긴 시간을 거슬러 올랐지만, 저들도 자신도 이름이 바뀌었지만, 저들은 살아 있었고 자신 역시 다시 현실을 살아가고 있었다.

기쁨일까.

안타까움일까.

하벨은 그 감정이 뭔지 헷갈렸다.

"저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왕은 여전히 하벨의 의도를 알아 차라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그냥 그렇게 생각해줘."

과거에 하지 못했기에 현실에서 대리만족한다는 그 사실을 하벨은 알릴 마음이 없었다.

그저 지금은 단순한 이유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저희는 이곳을 나갈 수가 없……."

"내가 나가게 해줄게."

하벨은 왕의 불안함을 잠재우며 정령이 가진 이동기의 원조인 자신의 힘을 사용하고자 했다.

자신이 가장 편할 시스템으로 바뀌기에 하벨은 현대에서 봤던 게임 시스템을 빌려 미니맵을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이미 모든 물이 연결되었기에 이곳과 티에라 가문을 잇는 과정은 불과 2초도 안 걸렸다.

"아마 나가면 티에라 가문일 테니까 안전해."

"실례가 안 된다면 티에라 가문이 어디입니까?"

"나의 소중한 곳."

하벨이 짧게 대답하며 웃었다.

그곳을 어떻게 더 표현할 수 있을까.

"이제 내가 어떻게 하려는지 알겠지? 너희를 먼저 다른 곳에 이동시키고 내 힘을 흡수할 거야. 이곳이 너희의 보금자리니까 나는 최선을 다해 지킬 셈이야."

아라는 하벨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자 뭔가 불안하게 보였다.

[있지, 대장. 지금 이 몸은 대장이 짓는 미소를 보고 좀 불안해졌어. 인어족들을 구해주고 영혼도 흡수하고 이제 돌아가는 거 맞지? 응?]

―아니. 절대 아니야.

―맞아. 저 표정 봐봐. 뭔가 또 할 셈이야.

물마저 소란스럽게 속닥거렸다. 덩달아 아라의 눈빛이 흔들렸다.

제발 아니길.

"끝이 아니야, 아라야. 나는 이제 바닷속으로 들어갈 생각이니까."

하벨이 던진 말에 아라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장!]

아라가 지르는 소리에 하벨은 이상하게도 웃음이 났다.

[지금 웃을 때가 아니야! 바닷속으로 들어가면 큰일 나!]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영혼이 하나 더 모인다면 저 바닷속을 헤쳐나갈 힘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라야. 나는 저기 바다 밑에 있는 힘을 어떻게든 박살 내고 싶어."

왕이 말해주지 않아도 하벨은 바닷속에 무엇이 있을지 예측됐다.

하벨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왕이 말문을 열었다.

"…저기에는."

"오염된 물이 있겠지."

"그건 당연한 거 아니오?"

여하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하벨에게 되물었다.

"그렇지 오염된 물이 있지. 하지만 내가 말하는 건 일반적인 오염이 아니야."

이 세상에서 사람이 쉽게 닿을 수 없는 곳이 어디겠는가.

마법이라는 힘이 존재하기에 하늘도 아니며, 땅도 아니었다.

그 두 곳은 얼마든지 닿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바다는 달랐다.

사람이 탐을 낼 만큼 재생의 능력을 가진 인어족마저 갈 수 없는 곳이었다.

거기에 뭐가 있는지, 인어족과 에른스트를 엮어서 생각해본다면 알 수 있었다.

쿵쿵.

하벨은 가슴이 뛰었다.

이건 설렘이 아니라 분노였다.

어쩌다가 자신은 이 세계에서 재앙이라 할 수 있는 두 가지의 해결법을 알아버렸다.

하나는 틈의 세계. 이건 유렌을 죽이면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염된 물.

하벨은 천천히 눈을 찌푸렸다. 왜 이렇게 숨이 막히나 싶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모든 오염의 근원, 그게 바다에 있어."

바다에.

모든 생명의 근원인 물속에.

모든 생명을 품어야 하는 물에.

하벨은 올라오는 분노에 참을 수가 없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

'에른스트.'

하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꾸욱 참았다. 자신의 분노에 지금 물이 요동치고 있었으니까.

자신이 가진 열쇠의 힘으로, 강제로 물과 물을 잇는 능력을 개방했지만,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저 바닷속은 물이 아예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니 내려가야만 했다.

바다를 구해주러.

"…지금, 뭐라고 했소?"

여하가 놀라며 물었다.

"바다였어."

하벨은 참담함을 억지로 삼켰다.

"바다, 가장 깊은 곳에 에른스트가 이 오염을 퍼트리는 힘을 심었어."

"그게… 말이 되는 소리오?"

여하는 입가를 핥았다.

말이 되지 않았다.

"내가. 내가 인어족이오. 우리가 인어족이오. 바다가 지금보다 더 오염되기 전까지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소. 바닷속에서 정말 그 힘이 있었다면……."

여하는 문득 올라오는 생각에 말문을 닫고 조용히 왕을 바라보았다.

바닷속에 무언가 이상한 게 있었으면 가장 먼저 알아챘을 사람이 바로 자신들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빨리 알아차릴 사람이 누구인가.

여하의 시선을 받은 왕이 천천히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

여하가 왕을 불렀다.

"나는 이 오염을 인간이 일으키는 거라고 배웠습니다. …아버지한테 말입니다."

"여하야."

"…거짓이었습니까?"

"나 역시 그렇게 알았다."

"그런데요?"

"보고… 말았단다."

왕은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눈 앞을 가리는 암담함에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하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무엇이든 왕을 포함한 어인족에게 충격일 테니까.

"바다가… 오염을 토하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끔찍했다.

그건 오염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까만 바다보다 더 짙은 검정을 뿜어냈다.

"우리의 바다가. 내가 관리해야 하는 바다가 인간들 때문에 죽어가는 게 아니라, 바다 때문에 인간들이 죽어간다니."

왕은 눈동자에 어렸던 증오심을 지워나갔다.

인간 때문에 자신의 자식이 죽어 여하 혼자 남았다.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왕은 소매를 걷어 팔에 생긴 깊은 흉터를 만졌다.

"실패했다."

"…그래서 덮으셨습니까?"

여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너의 형제를, 내 자식들을 삼켜간 인간보다 내가 관리해야 하는 바다가 더 많은 가족을 죽이고 있었으니. 이걸… 이걸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이 참담함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왕은 현실로부터 눈을 돌렸다.

그냥 감아버리고, 외면했다.

"괜찮아."

그런 왕을 하벨은 위로했다.

저들을 한 번 버렸던 자신이 꺼내기에는 턱없이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하벨은 왕을 다독였다.

"그건 네 탓이 아니야. 정말로 원망을 들어야 할 놈이 있는데 왜 네 탓을 하는 건데?"

"하지만 저는……."

"노력했는데도 실패했다며? 이걸 어떻게 탓하겠어?"

하벨이 씩 웃었다.

"그래서 내가 왔어. 이 모든 걸 되돌려야지. 바다는. 바다는…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도구가 아니잖아?"

"맞소. 바다는… 이곳은, 많은 생명을 품는 곳이오. 절대로 그런 끔찍한 존재가 될 수 없소."

주책맞게 울컥 올라온 감정에 왕은 노련함으로 삼켰다.

저 말이 뭐라고 가슴이 멋대로 요란하게 움직이는지.

자신이 왕임에도 저 존재에서 느껴지는 여러 가지가 '왕'을 떠올리게 했다. 그게 참 우습다 싶었다.

"자, 어서 다른 이들에게 알려줘. 시간이 없으니까."

하벨은 왕을 먼저 보냈다. 정말로 시간이 없었다.

"나는 귀인을 돕겠소."

여하가 꺼내는 말에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여하야. 너도 여기서 부친을 도와줘야지."

"지금, 혼자 가겠단 말이오?"

"혼자 가는 게 아니라, 애초에 나만 할 수 있는 일이야."

여하는 당연하게 들려오는 대답에 말을 꺼내지 못했다.

[…대장.]

이미 귀를 접고 어쩔 줄 모른다는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던 아라가 하벨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천천히 앞발을 올려 자신의 머리를 쥐었다.

너무 어려웠다.

무엇이 맞는지 모를 정도로 그냥 다 어려웠다.

[이 몸은… 도울래.]

하지만 아라는 결심했다.

"아라야. 바다는 위험해. 오염이 득실거려. 나도 솔직히 어떻게 될지 몰라. 그런 상황에서 널 데리고 가고 싶지 않아."

[이 몸은 이제 괜찮아!]

"아니야, 아라야."

[아니야, 대장. 이 몸은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야.]

아라가 고개를 가로젓고는 자신의 망토를 매만졌다.

[이 몸은 신한테서 힘을 받았어.]

"아직 그 힘이 뭔지 모르잖아. 무얼 지켜주는지 그것도 정확하지 않아."

[아니야. 이 몸은 알아. 망토를 매만지면서 계속 물어봤는걸?]

앞발을 꽉 쥐며 꺼낸 아라의 간절한 말에 하벨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망토의 힘을 알고 있다니.

[사실 이 몸은 대장을 놀라게 해주려고 가만히 있었는데, 지금은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이 몸은 대장 혼자 보낼 수 없어. 절대로.]

눈에 힘을 주며 아라는 자신의 힘 너머에 있는 바다를 가리켰다.

[이 몸의 망토는 공격도 막아주고, 물의 오염도 다 막아준대.]

―자연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노라. 긴 그리움을 따라 이어진 그들의 슬픔이 깊어진 만큼 이 망토가 그대를 향한 모든 위협을 막아주노라.

아라는 신이 꺼냈던 말을 떠올리며 더욱 활짝 웃었다.

[정말 모든 공격을 다 막아준다는 건지 이 몸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있지, 이 몸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뻤어.]

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었다.

하벨이 생각하기에 아마도 망토가 아라한테 한 말은 대부분이라는 말이 포함된 소리가 아닐까 싶었다.

[있지, 대장. 사람과 정령들이 만든 정화제는 자연의 힘이야. 정령은 애초에 혼자서 모든 걸 다 할 수 없게 만들어졌어. 그래서 사람이 필요해.]

'…정령은 가장 이질적인 존재니까.'

두 세계가 합쳐서 탄생한 존재이기에 불안정함을 지닌 건 당연했다.

[이 망토는 정화제 같은 거래.]

아라는 간절히, 정말 간절히 망토를 흔들었다.

[그러니까 이 몸도 같이 갈 수 있어. 이 몸이 대장을 도와주다가 안 된다고 생각하면 도중에 그만둘게. 무리하지 않을게. 정말이야, 대장. 이 몸이 약속할게. 그러니까 이 몸도 같이… 갈래.]

"아라야."

[…으응.]

아라가 고개를 떨구며 시무룩함을 드러냈다. 하벨의 눈빛만 봐도 안 된다고 말하는 게 느껴졌다.

"위험해, 아라야."

[이 몸도 알아. 아는데, 대장 혼자 보내는 건 싫어.]

"날 따라오지 않아도 아라 널 혼내는 일은 없어. 너도 그래, 여하야. 하지만 고마워."

너무도 환하게 웃는 모습에 여하는 괜히 성질이 났다.

"왜 카샬이 그리 커피를 들이켜는지 알겠소."

"카샬은 커피를 좋아하는데?"

"따라가겠소."

"안 돼."

단호한 저 말에 여하는 기가 찼다.

"귀인은 지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는 걸 알고 있소?"

"여하야. 네가 해줄 일이 있어."

"말 돌리지 마시오."

"말 돌리는 거 아니야. 아주 중요해. 내가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온다고 알리면 무조건 다들 화낼 거야. 그러니까 내가 바닷속으로 들어간 뒤에 네가 모두에게 말해줘."

여하가 대답하지 않아도 하벨은 말을 이어갔다.

"바닷속에 있는 걸 없앤다면 에른스트가 뭐든 눈치를 챌 수가 있어. 물론 아닐 가능성도 있지만, 지금은 이쪽이 맞다고 봐야겠지. 그러니까 너한테 부탁하는 거야."

[그럼 이 몸이 용용이를 데려올게!]

"아니. 이건 용용이가 와도 안 되는 거야. 여기가 에른스트의 본진에 가까우니 놈이 뭐든 했을 테고, 용용이가 오면 상황만 더 나빠질 뿐이야."

하벨은 혹시 일어날 가능성을 언급했다.

최악의 상황은 언제나 염두에 둬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레놀드 왕국에는 어떻게든 돌아올 거야. 반드시 그래야만 하고."

"뒤를 부탁한다는 말은 됐소. 그런 건 듣고 싶지 않소."

"나도 그럴 생각은 없는데? 그저 모두한테 다음을 대비하라고 전해줘. 무슨 말인지 알 거야."

하벨은 낄낄거렸다.

최악의 상황은 대비해야 하지만, 그렇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왜 그래야 하는가.

뒤를 부탁한다는 구차한 말은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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